계단을 둘러싼 돌 무더기!
나는 문명의 흔적 같은 것을 한 발짝 뒤에서 살폈다. 대학 시절에 이런 유적 같은 걸 잘못 건드렸다가 끝내 힘으로 문을 부숴버렸던 경험이 있어서였다.
퍼즐 게임처럼 일단 마구 건드려 보다가 좆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침착하게 살피고 행동하자.
‘여기에 깃털을 넣는 건가?’
돌을 피해가며 문에 그리폰의 깃털을 갖다대 보았다. 일단 에메랄드 비석이 제시한 목표 기준을 달성했을 텐데, 허름한 문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겨 있는 건 아니다. 열려 있지만, 건너편은 맨바닥이다.
‘이 문은 힘으로 부수면 안 된다는 얘긴가.’
억지로 부수려면 부술 수도 있겠지만 다음 계층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문에 새겨진 깃털의 소용돌이가 힌트겠지. 나는 한동안 그 문이나 주변 돌멩이들과 씨름을 했는데,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나침반 나비도 여기서는 묵묵무답이었다.
“씨발.”
원래 이런 유적은 몇 달 단위로 시간을 들여가며 신중하게 파는 건데.
궁색한 변명을 주워섬겨도 문제의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당분간 씨름하던 나는 원래 돌의 배치를 노트에 스케치하고, 돌 무더기를 옮겼다.
‘문에 그려진 그림 말고는 힌트도 없고, 이게 맞겠지 뭐.’
남동북서 순으로 1-2-3-4개의 깃털이 흩날리는 그림!
엉성한 그림이었기에 한 눈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림 속의 깃털은 다 합쳐서 10개였다. 나는 숫자와 방향에 맞춰 돌을 쌓고, 그 틈새에 깃털을 끼워봤다.
─쿠르르르.
아마 순서와 숫자만 맞으면 어떻게든 돌에 깃털을 포개기만 해도 됐던 걸까? 허름한 문의 내부에 왜곡된 공간이 생겼다. 에메랄드 비석이 나타나며 성공을 고한 건 덤이다.
“어예~!”
나는 안도 반 기쁨 반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현세 쪽은 〈임모르탈리스〉의 위협도 적을 것이며─남은 정규 멤버 중에서 가장 위험한 새끼는 여기에 있을 테니까─, 아내들의 안전도 확인되지 않았는가.
느긋하게 굴지는 못해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는 것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겠지.
워프 게이트 같은 공간에 발을 대디디며 에메랄드 비석의 글을 읽었다.
《신수(神獸) ‘안즈’족의 왕은 수메르니아의 지배자가 되고자 그들의 주신에게서 예언의 신판을 훔쳤다.
그러나 그곳에 기재된 예정된 파멸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자신의 동족과 함께 날개의 절반을 뜯어내며 신에게 반기를 들었다. 어떠한 괴물이 신이 되고자 할 때, 신들의 신하였던 그들은 마물을 자처했으리라.
허나 미래에 ‘그리폰’이라고 불리게 된 괴물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들이 해석하지 못했던 신판의 일부에는, 신에게 패하고 영광을 잃는 신수의 미래 역시 기록되어 있음을…….》
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설명을 눈으로 훑고 이해했다.
‘그리폰도 바이콘이나 유니콘처럼 한때는 신족이었나 보군.’
대표자였던 놈이 라그나로크를 알고 반역했다가 예끼 이 놈 하고 뚝배기가 깨져서 영원히 새대가리 자손만 낳게 된 게, 지금의 그리폰이라는 뜻일까?
‘게르마니아의 애시르 신들처럼 원래 힘을 되찾을 수 있게 배려해 주지도 않았을 테고, 그대로 몬스터가 돼 버렸나.’
팩트 체크가 불가능한 부분이었지만 굳이 의심할 이유까진 없었다.
‘이 역사의 진위보다 중요한 건, 왜 세헤테피브라가 이런 걸 보여주느냐인데…….’
중2병 꼬맹이답게 겉멋이 들어서일까?
맞는 것도 같았지만, 단순히 그런 걸로 치자니 퍼즐에서도 은근히 염세적인 기질이 보여서 기분이 찝찝했다.
저승의 문을 여는 방식도 맹독을 그릇에 가득 채우는 것 아니었던가.
맹독과 술그릇.
왕좌의 주인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의 아이콘이었다.
─화악!
세헤테피브라에 대해 고찰하면서 워프 게이트에 뛰어들자, 다음 계층도 숲이었다.
하지만 이전 계층과는 무척 모색이 다르다. 5계층은 무슨 백악기 시대의 거대한 나무 투성이였다면, 여기는 훨씬 사람 사는 시대 같은 느낌의 숲이었다. 산 속인 것 같기도 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숲 전체에 농밀한 안개였다. 나는 바로 소매에 코와 입을 묻었다.
‘독 안개?’
이게 평범한 유적의 침입자 대책이었다면 무지성의 독가스 살포 따위도 말이 되겠지만,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여차할 땐 해독 포션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나는 신중하게 지나온 게이트를 다시 건드렸다. 워프 게이트는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돌아갈 수는 있을 듯 하다.
─팔랑.
그때, 반응이 없던 나비가 다시 날아올랐다.
나침반 나비는 등에 달린 바늘에서 빛가루를 흩뿌렸다.
이 자욱한 안개까지 고려하면 이번 계층의 컨셉도 대충 알 듯한 느낌이다.
‘그런 거라면 방법이 있지.’
룬 스톤에 ᚲ(Kenaz)의 룬을 역방향으로 새겼다.
재료는 석판에서 꺼낸 마법 시약이다. 완성한 룬 스톤을 땅 밑에 묻었다.
‘이걸 GPS처럼 쓰자.’
내가 문 근처에 와야만 반응하겠지만, 일단 위치의 파악이 가능한 것만이라도 어디인가. 나는 땅을 덮어서 감추고, 매직 아이템 나비를 앞장 세워가며 걸었다.
그리고 고작 3걸음 쯤 걸었을 때 위화감을 찾아냈다.
나는 분명 달인의 감각을 발휘해서 일직선으로 걸었는데, 룬 스톤의 반응은 오른쪽 남남서에 있었다. 내 위치가 왼쪽 대각선으로 삐뚜름하게 이동했다는 증거였다.
앞뒤를 확인한 내가 중얼거렸다.
“……길을 헤매게 하는 산인가?”
애미. 존나 시작부터 미아가 돼 버린 거에요.
아마 이 피라미드 속 세계의 특성을 활용해서 공간을 꼬아버렸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감각이고 뭐고 믿을 게 못 된다. 걸을 때마다 〈공간 이동〉 마법에 걸리는 거랑 똑같은데 방향 감각이 뭔 소용인가? 패턴이라도 있을랑가 모르겠네.
‘믿을 건 나비 뿐이군.’
물론 대략적인 방향을 알려주고, 지나온 길을 표시해 주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 제대로 해 줘도 맵핑 기능으로는 충분하다. 시발, 얘마저 없으면 어쩔 뻔 했어?
‘나비 나침반 나비게이션이라니. 세상에, 무슨 아재 개그도 아니고.’
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나비에게 마나의 실을 연결했다.
라리루라처럼 직접 조작하진 못하겠는데, 그래도 나비마저 잃어버리는 일은 막아야 하니까.
그나저나 여긴 어디일까. 나는 근처의 나무를 꺾고 자세히 살펴봤다.
내가 식물학자인 건 아니지만, 이세계는 지리의 차이에다 마나의 차이까지 자연 환경의 변수가 많다. 그렇기에 어느 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도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로마니아에서 자생하는 나무 같은데.’
나무 밑둥이에 자라는 버섯까지 확인해 보자 확실해졌다.
허옇고 돼지 들창코처럼 생긴 첼레일 버섯. 독성은 약해도 염언한 환각 버섯이다.
이것도 분명 로마니아에서만 자란다고 들었다. 미묘하게 생김새가 다르긴 했지만, 그건 아마 세헤테피브라가 본 로마니아의 풍경이란 고대 문명 시절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내가 사는 현대 이세계에서도 마비 포션 등에 쓰기 때문에 잘 안다.
로마니아의 유적 탐사를 하던 랩실 노예 시절에도 식량을 캐러 갔을 때, 못 먹는 버섯이긴 하지만 나름 돈이 되는 물건이니까 챙겨두라는 설명을 들었던가.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군.’
대학 시절의 기억은 다나와의 추억이지만, 싫은 얼굴까지 엮여서 떠오르고 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버섯을 대충 던져버렸다.
─터벅, 터벅.
오감을 예리하게 세우며 걸었다. 평소에 프랑에게 감지를 맡기고 살아서인지 기감을 유지하는 건 존나 빡셌고, 자연스럽게 단순노동 중에 딴 생각을 하듯 머리에 잡념이 떠올랐다.
‘어떤 계층에 떨어질지는 랜덤이랬지. 그렇다면 이 6계층은 일종의 분수령이다.’
이번 계층은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 디자인인 것이다.
이게 무슨 운빨좆망겜도 아니고, 시작 계층이 완전 랜덤이라면 하층에서 스타트를 한 사람이 너무 유리하잖은가. 그런 운빨 요소를 방치하면 시련을 치르는 의미가 없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어딘가에서 위층으로 올라가게 만들 필요가 있다.
생각해 보자. 이건 한시바삐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경쟁이 아닌가.
그런 서바이벌 레이스에서 도전자가 위로 올라가야만 하는 필요성은 무엇인가.
아니, 설계자인 세헤테피브라가 생각했을 ‘개연성’은 무엇이었는가.
‘뻔할 뻔 자지. 식량이나 물자밖에 더 있나.’
자원의 배치는 던전 설계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21세기의 쓰레기 같은 똥겜도 종종 겪어봤던 나다. 배고픔 게이지나 식량 시스템을 추가해 놓고 정작 그 중요한 식량을 보급하지 않는 게임들은 얼마나 좆 같았던가!
‘그런 의미에선 이 계층 쯤에 식량이 있어야 앞뒤가 맞지. 쉽게 얻지 못하게 길을 헤매게 만든 것도 좋은 증거고, 먹지 못할 독버섯이긴 해도 식용 식물도 보였잖아?’
도전자의 스타트 지점이 어디건, 결국은 여기서 좆뺑이를 치도록 셋팅한 거다.
자기를 수수께끼와 퍼즐의 귀재라고 소개할 정도인데 설마 그 정도 계산도 못 했을까.
‘……그렇다면 바로 다음층인 7계층은 더 빡세겠군.’
결론적으로 그렇게 된다.
4계층의 사막처럼 물자 없이는 탐사하기도 힘든, 개 같은 환경의 스테이지라고 보면 되겠지.
그렇게 해서 도저히 공략을 못한 도전자가 위쪽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6계층의 물자에 대해서 힌트 같은 걸 넣어뒀다면 금상첨화겠지. ‘이걸 어깨 깨 시발련아’ 하고 빡쳤을 무렵엔 저도 모르게 위층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 나비도 경쟁의 형평성을 위한 물건인가.’
나는 나침반 나비 나비게이션을 손가락에 앉게 시켰다.
상층에서 시작한 사람들이 적절한 조사력과 인어를 해치울 힘이 있으면 얻게 되는 아이템이다. 랜덤 스타트의 밸런스를 유지하려는 배치라고 치면 말이 된다.
밑에서 시작한 놈들은 위로 올라오게 하고, 위에서 시작한 놈들은 빠르게 밑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한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시련과 보상은 도전자의 질을 선별하는 커트라인일까.
‘……그렇게 보면 세헤테피브라의 성격도 알 것 같군.’
이 왕릉의 정체성은 수수께끼이자 퀴즈였다.
그것도 무슨 골든벨처럼 상식 퀴즈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수천 년 뒤의 시대에서 나타난 도전자들이라도 깰 수 있도록 설계한 유적이다. 지식이나 기술력 자랑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게임처럼 도전자의 클리어를 염두한 배치.
세헤테피브라는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까지 와 줬으면 하는 것이다.
‘……도둑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집 주인이라.’
나는 아갈머리를 싸 물고 그 꼬맹이 파라오의 기분을 상상해 보았다.
내 추측대로라면 피라미드라는 건 부활의 제단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왜냐고? 내가 아는 한, 뒤진 파라오가 부활했다는 기록은 없거든.
‘과거에 죽은 파라오는 모두 현세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해보자 신하나 노예를 생매장하는 순장 문화도 이해가 갔다.
사후에 얼마나 이어질지도 모를 한빙지옥에서의 고독! 그 영원한 시간이 얼마나 두렵겠는가. 지옥까지도 따라와서 자신을 섬겨줄 사람들이 있길 바라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보다 인권이 더 바닥을 기던 시대였으니까, 생매장을 명령할 때의 거부감도 적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헤테피브라는 생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혹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손으로 신하들의 영혼을 소멸시켰거나.
‘그렇다면 혹시, 세헤테피브라가 원하는 건……’
─쿠르르릉!! 낯선 소리가 귀에 이명을 남겼다.
엘리트 대갈통을 굴리던 나는 자신이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눈치까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일단 바로 은신에 들어갔다. 목에 걸고 있던 가면을 쓰고 나비를 회수했다.
투명화 마법까지 쓰려다 익숙하지 않아서 포기했다. 자칫 마나만 흘러나가서 위치를 들킬지도 몰랐다.
소리를 낸 건 마나가 깃든 나무로 세운 목책이었다. 목책 앞에 붙은 문이 열리고 있다.
공간이 마구잡이로 왜곡된 곳이었기에, 내가 의식하지 못한 한 걸음만에 완전히 다른 장소가 나타나 버렸던 걸까. 아무튼 간에 상당한 방책이다.
이세계에서는 저 목책이 돌이나 강철로 만든 벽보다 훨씬 튼튼한 성벽이다. 정면에서 부수려면 내 기술 중에서도 오러, 절대천공영역 같은 고화력 기술이 아니면 안 되겠지.
─저벅, 저벅.
열려 있는 성문에서부터 사람들이 걸어나왔다. 가죽 갑옷, 그리고 활이나 검 등을 장비한 전사들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귀퉁이와 선남선녀의 외모는 무척 떨어져서 지켜보는 내 눈에도 확 띄었다. 스무 명은 될 듯한 엘프가 저 성벽 안에서 원정을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허?”
그렇지만 내가 숨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입을 쩍하니 벌리고 말았던 건, 그 중심에서 호위를 받고 있는 왕족 같은 인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엘프보다 반 뼘은 긴 귀와, 남색의 머리카락. 지친 듯 내려깐 눈이 1년 쯤 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내 등골에 소름을 돋게 했다. 대학 시절을 반추할 때보다 더한 불쾌함이었다.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지만,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도 아닐 것이었다.
“……예르나?”
그 고아한 와꾸의 엘프는, 과거에 내 지도교수였던 예르나 그라시에와 판박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