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문제였을까. 엘프 기사들은 안광을 희번뜩 뜨며 내가 있는 곳에 화살을 쐈다. 시위를 당기고, 활을 겨누며 쏘아내는 흐름이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애미!’
게다가 화살에는 마법까지 섞여 있었다. 그것도 최소 고위 마법 수준의, 골드 클래스의 몬스터도 원콤으로 뒤질 위력의 엄청난 화살이다. 저딴 걸 선쿨도 없이 쏜다고?
─투퍽! 점프해서 피하자 화살은 나무를 관통했다. 다행히 위협사격이었다. 다짜고짜 죽이려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나에게 열댓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화살을 겨누자, 아무리 나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엘프 기사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이 장난이 아니었던 탓이다.
‘옘병, 5층에 비해서 적의 강함이 너무 다르지 않냐?’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솟아나는 몇 가지의 궁금증도 다 접어두고 팔찌로 변신시킨 창에 손가락을 걸자, 기사들에게 지켜지던 남색 머리카락의 엘프가 손을 들었다.
〈다들 멈추세요! 경계는 하시되, 공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예, 델피리아님! 공격 중지!〉
예르나를 닮은 엘프의 말에, 기사들은 일단 활을 내렸다.
시위에 화살을 매긴 건 그대로였지만, 일단 싸우고 싶지는 않다는 뜻의 제스쳐였다. 숨어 있던 나도 잘못은 있었기에 할 말은 없다.
그래 시발, 할 말은 없는데……
‘……존나 보면 볼 수록 예르나 그 자체네?’
나는 소름이 돋는 기분에 인상을 썼다.
‘아니, 예르나는 무슨 예르나야.’
가면을 벗으며 억지로라도 생각을 달리 했다. 다행히 전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었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다르고, 느껴지는 기품도 다르다.
예르나도 본성을 숨기던 시절에는 품위가 있었지만, 저기 서 있는 엘프는 그 년이랑도 격을 달리 했다. 그야말로 고귀한 출신이라는 느낌의 옷과 행동거지였다.
《……이방의 전사님. 급작스러운 공격, 실례했습니다. 제 기사들이 날이 서 있어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긴 귀의 엘프는 치마를 살짝 들면서 인사했다.
로마니아의 예법인데, 말을 거는 언어는 나르메르 어였다. 일행과 나누던 언어는 고대 로마니아 어였는데 말이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혹시 모르니까 맞장뜨기 전까지는 존댓말을 써 주자.
《아닙니다. 숨어서 훔쳐보던 제게도 과실이 있겠죠. 헌데 외람되는 말씀이오나, 여기가 어디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세헤테피브라 님의 사신(使臣)이 아니신가요?》
델피리아라고 불린 엘프는 되려 곤혹스러운 듯 물었다.
나도 골치가 아팠다. 이야기의 흐름이 좆도 보이질 않네.
《제가 말입니까? 왜 저를 세헤…… 파라오의 사신이라고 여기셨는지요?》
《어깨에 얹고 계신 나비는 세헤테피브라 님의 작품이 아닌가요? 저희 알프헤임으로 오는 도중, 공간의 결계에 헤매이지 않도록 함께 주조한 매직 아이템일 텐데요…….》
그녀는 어느샌가 내 품에서 빠져나와서 파닥거리는 나침반 나비를 가리켰다. 이 나비가 그런 거였나?
《그 나비는 세헤테피브라 님의 허락 없이는 남을 따르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께서는 그녀의 답장을 가지고 찾아오신 전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요?》
세헤테피브라의 답장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전개에 내가 그냥 여기서 튀는 게 편하고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호르르르─!
귀에 낯익은 효과음을 내며 에메랄드 비석이 떠올랐다.
《◇ 목표: 강적을 피해가며 숲에서 ‘태양의 십자’를 찾아, 제 6계층의 안개를 제거하라.》
《◆ 보상: 제 6계층에서 획득할 수 있는 모든 것. ???, 휴식 지점의 확보.》
에메랄드 비석이 목표를 고지했다.
그리고 빛이 뭉치면서 파피루스 편지지가 나타났다. 신분 증명서가 될 세헤테피브라의 서명이었다.
나는 슬쩍 엘프들의 눈치를 보고 편지를 읽었다.
〈친애하는 나의 벗, 델피리아 아우레이아 리오스알프에게.
장활한 사막과 바다의 건너에 있을 나의 벗, 엘프의 여왕 되는 귀인(貴人)이여! 그대와 알프헤임의 민초들이 겪고 있을 고초는 편지로부터도 충분히 전해졌다! 요 즈음의 나는……
……그리하여 그대의 비탄 어린 마음을 나 역시 아는 바, 호루스의 화신인 본 파라오는 숙고의 끝에 결의했노라!
내가 신임하는 인물에게, 태양신의 신력을 품은 우리 나르메르-나일의 보배를 건넸다! 태양의 권능이 엘프의 숲을 비추는 날, 알프헤임을 둘러싼 안개는 머지 않아 사라지리라!
그러면 언젠가 또 그 녹음이 우거진 이상향에서 재회하자, 나의 유일무이한 친우야!〉
내가 그 중2병 편지를 중간중간 날려가며 읽는 동안, 나를 지켜보는 엘프들은 아무런 리액션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 이상행동과, 갑자기 하늘에서 솟은 비석이나 편지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는 엘프들의 모습에 굳은 확신을 얻었다.
‘저 엘프들은 진짜가 아니야. 세헤테피브라의 피조물이다.’
니플헤임의 영혼이 아닌, 내가 해치웠던 괴물들과 동일한 피조물!
저들은 이 피라미드가 창조한, 백일몽과 같은 등장인물인 것이다.
엘프들은 일종의 NPC 같은 존재였으며, 이 과정은 시련의 일부였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나요? 몸이라도 아프신가요?》
델피리아는 내가 별안간 입을 다물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화하던 상대가 뜬금없이 아가리를 쌉쳤는데, 불쾌해 하기는 커녕 상대의 몸 상태를 염려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쓰벌, 그치만 예르나 년이랑 똑같은 와꾸로 그러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PTSD 증세가 절로 솟아나니까.
《아닙니다. 고된 여행길이었다 보니, 조금 지쳐서 머리가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나도 모르게 으아악 아니야를 외치며 저 예르나 와꾸에다 창을 쑤셔박을 뻔 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충동적인 살의를 완벽하게 수습해내는 나였다.
《여기, 파라오의 친서입니다.》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이리로.》
대놓고 훔쳐읽은 친서를 대놓고 건넸는데도, 엘프 기사는 뭐라 묻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받았다. 최소한 친서가 있으면 왜 처음부터 안 건넸느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말이다.
델피리아는 편지를 읽고 화색이 되었다.
《그녀의 친필이 맞군요! 제 일방적인 부탁을 들어주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델피리아 님? 그러면 오늘의 원정은……》
《당연히 전면 취소에요!》
《그거 천만다행이군요. 【리오스알프(Ljósálfr)】께서 자칫 다치시기라도 했다간, 제가 후일 발할라에서 천공신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이러쿵 저러쿵 얘기를 나눈 그들은, 기사를 대동하고 목책 밖으로 나가려던 일정을 캔슬한 듯 했다.
그렇게 내 PTSD를 쉼없이 자극하는 불편한 골짜기 같은 낯짝에 꽃 피는 것 같은 미소를 띄우고, 예르나를 빼닮은 엘프는 나에게 손짓했다.
《어서 오세요, 사신님! 엘프족의 왕국 알프헤임에!》
***
엘프들을 믿고서 알프헤임이라는 곳에 따라들어가는 데는 상당한 결심이 필요했다.
이유? 말할 것도 없다. 내 안에서 엘프의 이미지는 통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아마 길을 걷다가 웬 엘프가 이마에 ‘하루 종일 배신 안 함’이라는 머리띠를 이마에 묶고 다녀도, ‘아! 본능을 억누를 줄 아는 훌륭한 엘프구나!’ 하고 말 것이었다.
선하게 태어나는 것보다는 사악한 본성을 위대한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 파써낙스, 역시 당신이 옳았어.
하지만 나는 결국 의심을 접지 않은 채로 그들과 함께 이 엘프 왕국이란 곳에 입성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이유는 많았다. 이게 세헤페티브라가 설게한 시련의 일종이라면,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게 현실적인 관점에서의 문제라면, 내 자존심에 따른 문제도 있었다.
몇 달 전, 나는 호르샤와의 싸움에서 배웠다. 교수 중에도 선한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종족이나 직책이 그 인물의 성향을 판가름 짓는가?
엘프로 태어난 족속은 모두 한결같이 쓰레기이며, 교수 된 인물은 모두 대학원생에게서 논문을 갈취하는 악한인가?
아니! 그것은 논리의 비약이었다!
엘프=좆프와 교수=씹탱년이라는 계산식은 한없이 사실에 가까웠지만, 언제나 들어맞는 공식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여긴다면── 아니지. 속으로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이나 언변으로까지 옮긴다면, 그건 인종차별자와 좆도 다르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는 정의는 악이다.
그 아인슈타인조차도 자신의 가설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지부조화로 우주상수를 만들지 않았나. 엘프의 악함을 의심하듯, 그들의 선함 역시 의심하는 것이 꼴마초의 의무였다.
흑백논리 프레임? 그런 건 ‘흑인이 울면 흑흑’에 버금가는 차별적인 사고관에 불과하다.
아니, 솔직히 나도 겪은 게 있어서 그런 차별적인 생각이 뇌에 박혀 있던 시절도 있긴 했다.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사악한 대학원생’과 ‘선한 교수’의 존재를 받아들인 Z-전사.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사고를 포기하지 못했다면, 나는 오러를 깨우치지 못했겠지. 한시기의 방황은 내가 달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애초에, 호툴루실 같은 다른 엘프들을 상대로도 일찌감치 ‘일단 지켜보자’는 스탠스를 유지해 왔던 나다. 새삼 혐오만 앞설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경계는 필요해도, 덮어놓고 혐오하는 건 꼴마초가 해서는 안 되는 일!
저들이 평범한 교수로 판별되기 전까지는 내면세계의 교수 슬레이어는 잠 자게 두자.
것보다 씨부랄, 설마 시련 내용이랑 정 반대인 통수를 설계하지는 않았겠지.
믿는다, 중 2병 파라오.
《사신님, 휴식을 취할 장소를 마련해 드릴게요. 여행길이 피곤하셨을 테니 우선 며칠 정도는 쉬어 주세요.》
델피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기사 몇 명을 붙여줬다.
어지간히 델피리아를 신뢰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경계하던 그들도 나한테 선빵을 갈긴 걸 진심으로 사과하며 내가 묻는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 주었다.
《예르나 그라시에…… 요?》
금발에 벽안, 길쭉한 귀와 하얀 피부. 엘프의 국룰과 같은 얼굴의 기사는 내가 묻는 말에 조금 인상을 썼다.
나는 말을 고르며 대답했다.
《예. 제가 아는 엘프의 이름인데, 혹시 아시는 바는 없으십니까?》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무엇보다 알브헤임 식의 이름은 아닐 듯 하군요.》
《어째서죠?》
《……‘예르나’는 존귀하신 리오스알프 님들께나 어울리는 이름이니까요.》
리오스알프? 내가 고개를 모로 꼬자 그녀는 바로 설명했다.
《【리오스알프】란 신족의 피를 이은 엘프를 말한답니다. 인간족 여러분의 언어로는 ‘하이 엘프’였나요? 왕족…… 이란 개념과 유사한, 반신에 가까운 존귀한 혈족을 가리킨답니다.》
《아,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인상을 썼다.
‘예르나 년도 지가 하이 엘프라 그랬었지.’
그리고 그 년의 기억을 조사했을 때, 예르나는 헤니르에게 자기 이름을 밝혔었다.
─다친 곳은…… 없는가 보구나. 이름이 어떻게 되지?
─……예르나. 예르나 리오스알프에요.
그리고 예르나를 빼닮은 저 엘프 여왕의 이름은, 델피니아 뭐시기 리오스알프.
퍼즐이 점차 맞춰지고 있었다.
《‘그라시에’는 엘프에겐 흔한 이름입니다. 반면에 ‘예르나’ 라는 이름은 정상적인 엘프들은 감히 송구스러워서라도 자기 자식의 이름으로 붙일 일이 없죠.》
엘프 기사가 말했다. 나는 대충 대답했다.
《모순된 이름이라는 거군요.》
《예. 외세에서 만난 엘프의 이름이라면 십중팔구 가명일 겁니다. 저희는 혈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니만큼, 어느 한쪽── ‘그라시에’ 쪽이 본명이겠죠.》
……아니, 그걸 따지자면 그라시에 쪽이 가명이겠지.
나는 예르나 리오스알프의 기억을 떠올렸다.
불타는 숲에서 헤니르에게 구원받았던 꼬마 예르나. 불에 휘감싸인 숲에서 하이 엘프의 유일한 생존자를 품에 안으며 인간의 멸족을 결의하던 총혜신 헤니르.
그때 본 숲은 이 알프헤임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프들의 고향을 둘러봤지만, 남색 불꽃으로 불타던 숲과 이 아름다운 왕국 사이에서 공통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번성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엘프 왕국이라길래 좀 더 간소한 곳을 상상했는데.’
알프헤임은 크기야말로 작아도, 장엄한 성채 같던 외벽을 보고 상상한대로의 문명 국가였다.
점토를 굳힌 건물은 탄탄하게 생긴 건 물론이고 미적 감각으로도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도로도 정비된 듯이 깔끔했다. 길가의 빗물은 마법 식물이 빨아들이는 건지, 도로변에 핀 꽃을 한가로이 가꾸는 엘프들마저 볼 수 있었다.
특히 커다란 나무가 태양의 빛을 투과해서 왕국의 사방에 빛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감탄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크리스마스 밤의 21세기 거리 같은 느낌이 대낮인데도 느껴졌다.
아마 한가한 음유시인이 여기에 와 봤다면 빛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자작곡을 한 곡 뽑아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애미 씨발, 유니콘도 돌아다니네.’
나는 알프헤임의 인구 구성을 보고 말을 잃었다.
유니콘 이 씹새들은 바이콘들이 고향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 동안, 엘프 왕국에서 개꿀이라도 빨고 있었다는 말인가?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네.
혀를 차던 나는 조금 더 질문을 퍼부었다. 보통이라면 왜 그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며 되려 물어볼 법한 물음인데도 엘프들은 쥐뿔도 의심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타타르니아? 동방의 국가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외세의 국가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아, 그렇지만 정예 기사인 저희들이 모를 정도라면 다른 엘프들도 모를 겁니다. 혹시 나라의 이름을 착각하신 것은 아닙니까?》
《엘프 왕국 밖에 사는 엘프라……. 거의 드물죠. 솔직히 그, 인간족을 꺼리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까요. 근 300년 쯤 되서야 간신히 로마니아나 나르메르-나일과 교류를 텄고요.》
엘프 기사들의 대답이 제깍제깍 나왔기에, 나는 도착하기 전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알프헤임이 왕국 치고는 작아도 도시 치고는 넓었던 덕분도 있었다.
‘이 6계층은…… 〈편찬대대〉가 멸망시키기 이전의 엘프 왕국을 재현한 곳이군.’
고대문명 시조의 파라오, 세헤테피브라.
마찬가지로 고대 엘프 왕국의 여왕, 델피니아.
이 2명의 여왕들이 서로 접점이 있다 해도 시대적 모순은 없었다.
분명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세헤테피브라가 기억하는 엘프 왕국이 아닐까.
마침 교류도 있었다고 하니, 그녀가 기억하는 알프헤임을 ‘토트의 시련’에 활용한 거겠지.
엘프 왕국을 둘러싼 안개를 걷는 시련에 말이다.
‘……여왕이 하필이면 예르나를 닮은 건, 단순한 우연인가?’
지랄. 좆이나 우연이겠다.
나는 자신의 생각에 바로 면박을 주었다.
우연일 가능성은 0%였다. 엘프의 수명과 지나치게 똑같은 얼굴은 또 어떤가.
‘아마 예르나의 어머니나, 뭐 그런 거겠지.’
내가 봤던 기억이 맞다면, 예르나가 불타는 숲에서 헤매던 무렵에 델피니아는 〈편찬대대〉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다시 말하면, 〈편찬대대〉의 습격이 있을 때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거겠고.’
우연인가. 혹은 그도 아니면 운명인가.
세헤테피브라가 재현한 과거가, 하필이면 나랑도 이렇게나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니.
나는 정말 깊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놀랄 일이기는 했는데, 뭐 전혀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다.
만약 베로니카가 바이콘이 아니라 그리폰 신족의 후예거나 했다면, 나는 6층이 아니라 5층의 커다란 삼림에서 ‘아아닛?! 여기는?!’ 하며 놀랐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옛 에린을 재현한 장소였어도 나는 놀라지 않았을까?
역사에 빠삭한 고고학자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후우.”
하지만 어느 한 점만은 단순한 ‘놀람’으로 끝내기 힘들다.
나는 에메랄드 비석에 떠올랐던 글을 노트에 적으며, 참지 못한 한숨을 또 뱉어냈다.
《◇ 목표: 강적을 피해가며 숲에서 ‘태양의 십자’를 찾아, 제 6계층의 안개를 제거하라.》
제 6계층의 안개가 뭐인지에 대해서는 엘프들한테 물으면 된다 치자.
태양의 십자라는 것도 숲에 있다고 하니, 찾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흑마법사들도 찾아서 죽여야 하는 만큼 루틴에 한 줄 추가되었다고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단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강적을 피해가며’ 라는 노골적인 글귀다.
높은 확률로 알프헤임의 마지막 여왕일 듯한 델피니아.
〈편찬대대〉에 의해 멸망한 알프헤임.
도전자가 쓰러트리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한다는 강적.
여기서 아무 예감도 느끼지 못할 만큼, 내 머리는 꽃밭이 아니었다.
‘보스 레이드의 예감이 드는레후…….’
내가 한숨을 짓자 NPC 엘프 기사(♂)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 알프하임에 인간족의 방문이 이렇게 잦은 건 수십 년 만이군요.》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인데, 수십 년 전을 말하며 꼭 옛날 일을 추억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만 쓴웃음을 짓던 나는 그의 다음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침 며칠쯤 전에도, 자기가 왕의 부마(駙馬: 사위)라던 병자가 감옥에 갇힌 참입니다.》
《……넹?》
《뭐라더라? 브리타이어? 브라타니아? 들어본 적도 없는, 이상한 나라의 여왕이 될 사람의 부군이라더군요. 하하, 거짓말을 할 거라면 조금 더 치밀하게 할 것이지.》
나는 두 눈을 끔뻑였다.
브리타니아. 차기 여왕…… 남편?
《……즈기요, 기사님? 잠깐 부탁 좀 드리고 싶은데요.》
《예, 뭐든지 하명하십시오. 사신님께서는 리오스알프 님의 손님 아니십니까.》
엘프답지 않게 가슴을 치며 웃는 기사. 존나 믿음직스러운 대답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 역시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은 것은 말이다.
나는 실실 쪼개며 물었다.
《그 병ㅅ…… 이 아니라, 병자라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미스릴 클래스의 전사 겸 공주의 남편을 부려먹고, 목숨의 빚까지 달아놓는다?
아, 공대원 파밍은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