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83화 (583/1,009)

담즙을 털어 넣는 듯한 쓰디쓴 술잔을 나누고, 나는 오프툼을 배웅했다.

감성에 젖는 것도 좋지만, 그가 바라지도 않는 우울함을 혼자 질질 끄는 것도 추한 짓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이 찾아오기 전에도 그랬듯, 햇빛 잘 드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자고 있나요? 티르시.”

티르시는 눈을 감고서 색─ 색─ 거리는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쓴웃음을 지은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서 손목에 채운 밴드를 갈아주었다.

포션을 채운 유리병과 연결된 밴드는 이세계판 링겔 같은 것이다.

자고만 있어서는 영양 보충도 안 되니까. 체력 회복 포션의 일종이다.

‘열은…… 없고.’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평범한 온도에 안심했다.

길다트와 오드리가 오기 전에도 한 번 깨어났나 확인하기는 했는데, 아직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고작 몇 시간에서 반나절 사이에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중병인 것도 아니고, 상태에 진척도 있다.

자기 전에 갈아입고 개어뒀던 장비들은 아침에 오자 사라졌다. 〈강림〉이 제대로 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녀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미인이라고 잠이 많은 게 용서될 거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인데요.”

편안하게 잠든 티르시의 뺨에 키스를 해 주고, 그 손에 들린 옥새에서 마나를 추출했다.

옥새의 용량에도 한계가 있으니 이걸 발퀴리에들에게 돌리든가 해서 빠른 마나 소모를 유도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르마 슈나스’의 마나 회복속도가 소모량을 웃돌지도 모른다.

후유증으로 앓아누워서 며칠을 잠들어 있던 내 경험 상, 이런 건 결국 시간 문제다. 기다리는 입장이 돼 보니까 걱정하는 마음도 알겠지만 말이다.

─찰칵.

그래서 문을 닫고 물리적/마법적 보안에 심혈을 기울이는 나를, 방 밖 복도에서 뻔히 바라보는 아내들에게도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역시 역지사지라는 게 효과적이긴 해.’

맨날 몸 작살내가며 기절한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던 그녀들이다.

기어이 인내심이 바닥나서 완전한 사육 노루편을 찍고 싶어질 법도 했다. 나도 티르시 같은 경우가 3~4번 반복되면 집착남 모드에 각성할 것 같다.

나는 보안을 철저히 하고서 말했다.

“늦어도 모레 전에는 깨어날 거야. 마나가 바닥나는대로 눈을 뜬다면.”

“다행이네요, 안심했어요!”

라리루라는 마음이 놓인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법사 길드에 가입했기에 티르시와의 개인적인 접점은 나랑 베로니카만큼 많은 라리루라다. 내심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겠지.

위독하지는 않으니까 결국 기다림의 문제지만.

“그런데 선배? 공주님한테서 사람이 왔어요.”

“리을리? 기다리게 했나.”

“아냐, 베임 씨가 대신 응대해 주시구 있어.”

프랑이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가이드로 와 준 사람인데 왜 집사 같은 일까지 하고 있는진 모르겠네. 혹시 그런 것도 사업가의 가이드가 가져야 할 소양인가.

“귀족이 되신 후엔 손님 대응에는 직접 나서지 않는 게 나을 때도 많습니다. 미리 연습도 하실 겸, 간단한 연락 정도는 저를 거치시는 게 좋을 것 같더군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장본인을 불러갖고 물어보자, 가이드 베임은 그렇게 말했다.

“주제 넘는 짓이었다면 죄송했습니다. 상대방이 밑의 사람과 대화하길 바랐기에, 사모님들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제가 나갔습니다.”

“아뇨.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거 도움이 됐다니 안심이군요.”

그는 사회인답게 웃고서 농담거리를 던졌다.

“또, 아직 이르겠지만 귀족 등극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어디 가서 ‘제가 그 노르드 남작님의 무용담에 한 발 꼈습죠’ 하고 자랑해도 되겠습니까?”

귀족 등극이 뭐 출세의 상징 같은 건가.

청탁이나 안 받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대충 개천에서 레드 드래곤이 난 느낌이겠지.’

저 달동네에서 공부한 청년이 구청장이 되쓰요! 그리고 내가 그 친구랑 으이? 밥도 먹고, 여행도 하고, 다 해써! 뭐 그런거겠지.

나는 대충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부끄럽습니다만, 베임 씨에게 득이 된다면야 그 정도는 상관 없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기쁜 말씀을 해 주시는군요! 제 은인께 무례한 부탁일 듯 해서 걱정됐는데, 고향 사람들에게 평생 술 얻어먹기 곤란한 일은 없겠습니다.”

베임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도 흑마법사에게 피해를 본 사람이었던가.

자세한 사정은 듣지도 묻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지랄 맞은 흑마법사의 대표이자 아이콘인 〈임모르탈리스〉가 좆망했다는 얘기는 퍼지기 시작한 듯 했다.

고향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전해주고 싶었던 건가. 욕심을 부리나 하고 오해했던 3초 전의 내가 한심하군. 쓰벌, 이래서 사업을 하면 안 돼. 사람이 의심만 늘잖어.

“이런. 이거 제 얘기만 길어졌군요. 에르제 님의 동료 분께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베임은 각을 잡고 얘기했다. 프로페셔널한 태세전환 뭐냐고. 원치 않게 귀족 회화술에 뼈가 굵어진 공무원 어법 마스터 강북호조차 흠칫하게 만들다니.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멀리 부를 생각은 없고, 마침 이 고급 여관의 중간층에 수준 높은 음식점이 있더군요.”

그는 그렇게 요약해주고 전언을 고대로 읊었다. 뭔가 해석이 잘못되거나 하지 않도록 말을 통째로 전해주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씌바, 앞으로는 이런 전달 방식에도 익숙해져야 하나?

생각해 보면 발퀴리에들을 얻은 게 다행이다. 뭐 상의할 때마다 말 전달 게임도 아니고 이런 짓을 거쳐야 한다니.

돈 많고 가오 잡는 새끼들의 허세 토킹법을 이해할 수가 없는 나다. 부담 없이 대화 가능한 슈퍼 로보트 여전사들의 존재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감도 안 잡히는군. 새삼 오딘님 충성충성이다.

“알겠습니다. 시간에 맞춰서 나가겠다는 대답을 전해주십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은혜를 입힌 그에게 좀 부탁을 했다.

베임은 기쁘게 부탁을 받아줬고, 나는 아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사실 프랑하고 라리루라는 호위처럼 껌딱지와 혼연일체가 되어서 나를 쫓아다니고 있었기에, 이제 잠들려는 다나랑 베로니카에게 간 셈이었다.

“흠냐……. 저녁이면 다 같이 가지 뭐……. 아직 점심도 안 됐잖아…….”

많이 졸린지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말하는 다나. 나는 픽 웃고 말했다.

“아침 정도는 먹고 자. 야식도 안 먹었다면서.”

“봐서…… 하아아암…….”

“그리고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는 건 비매너다? 눈나도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다시 말하지만 이세계에서 일부다처는 유능함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손님보다 많은 아내를 데려가는 건 ‘난 너보다 잘났음’이라는 무언의 과시가 될 수 있다. 엘리자베트는 길다트랑 둘이서 온다고 하고.

귀족 사회는 이런 거에도 민감하다. 대학 시절에 배운 상식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런 것이, 신입사원이 비싼 차를 타도 수근대는 게 사람의 심리 아닌가. 근데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신분사회의 브라만-크샤트리아 계급들이 저런 걸 좋게 볼 리가 없지.

그런데 또 연회에 초대받을 때는 사람을 되도록 많이 데려가는 게 매너랜다.

영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만, 군대에서 그랬듯 까라는대로 까면 그만이다.

‘오홍홍 우리 이등병이 긴팔에 반바지 입고 생활관에서 피자를 처먹고 있네요’ 같은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고. 그런 소문은 유독 오래 가더란 말이지.

할 거라곤 노가리 까기밖에 없는 밀폐사회에서 소문이란 게 얼마나 좆 같고 위험한지는 군필자의 PTSD가 아는 거에요.

심지어 당사자만이 아니라 애먼 사람들까지 같이 까인다. 우리 아내들이 나 때문에 욕을 먹을 수가 있단 얘기다. 듣고 있니, 동기야?

“우리도 저녁 쯤에 이 아래 레스토랑에 식사나 하러 가자꾸나.”

그러자 베로니카는 침대에 누워서 하품을 하며 말했다.

“설마 식사하러 온 걸로 트집을 잡진 않겠지.”

“좋은 생각인걸. 우리 남편놈이 들어간 독실의 옆방을 잡자고.”

머리 좋은 아내들을 가지면 이렇게 힘들다. 싀바.

이 아줌마들 밑에서 태어날 내 자식들에게 몇 년 앞서 묵념. 치맛바람에 휘둘리다 못해서 마마보이, 마마걸이 되면 어떡한대냐, 내 아들딸들.

“그러면 아침이 올 때까지 놀고 있죠~♡!”

고개를 젓던 나는 라리루라에게 등 떠밀려서 빈 침대에 눕혀졌다.

다행히 덮치려는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내 곁에 같이 누워서 꽁냥거리는 수준이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 때까지 한가로울 예정이다.

근데 나도 연구하거나 할 일이 밀렸는데…….

“선배, 선배. 사막은 더운 나라인데 용광로에서 쇳물을 쓰는 금속 공예가 발달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여기 여관 장식도 엄청 예뻐요!”

“글게. 더위에 익숙해져서 내성이라도 생겼나.”

“치. 선배는 별로 신기해 하지를 않으시네요~? 선배가 살던 세상에서는 이런 게 흔했나요? 그러고 보면 저, 선배 고향 얘기는 별로 못 들었는데~.”

그래도 옆에서 재잘대는 라리루라 덕분에 지루하지는 않았다.

원래 인싸력이 장난 아닌 카피바라 걸이지만, 각 잡고 토크를 하니까 혼비백산이다. 프로의 회화술 오졌다. 퍽을 회화에 올인한 모드 떡칠 미소녀 도바킨 같은 녀석일세.

“네에? 정말요?”

“피, 거짓말이죠? 저는 안 속는다구요~?”

찰진 리액션까지 이어지자 영화의 한정된 런닝 타임 안에서 계획을 설명해야 하는 악역처럼 나불거리게 되는 나였다.

그렇게 룸 서비스가 배달됐고, 라리루라는 발퀴리에게 배달을 맡겼다.

갑옷을 벗은 발퀴리에는─나는 저 갑옷이 탈착식이라는 점에 놀랐다─ 침실로 트레이를 가져왔고, 프랑이 〈백토인형〉의 응용으로 침대에 딱 맞는 탁자를 만들었다.

누굴 따라하는지 마나로 물건을 만든 것이다.

“아니, 병원 침대 테이블이냐고.”

“노르 편하라고 만들었어!”

이 녀석들, 진심으로 날 사육할 생각이군.

내 조잡한 언리미티드 야수회귀 워크스랑 비교 자체가 실례인 고퀄리티 물질 제작이었다. 현실판 마인크래프트인가. 별 게 다 되네.

“하지만 몸도 멀쩡한데 침대에서 밥을 먹는다니, 한국인의 갬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나태함의 극치로군.”

“한쪽 팔이 없고 요양해야 하는 선배라면 전혀 문제 없지 않아요?”

“의수 있고 숟가락 들 힘도 있으니까 그냥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그보다 룰루랄라야. 넌 또 뭐 하니?”

“들어가는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어야 이치에 맞다고 생각해서요!”

그게 탁자 밑에 들어가서 남편 바지를 빤스 채 벗길 이유가 되니……?

영양을 공급한 만큼 짜낼 생각이냐고. 나란 놈은 어느새 푸아그라를 위한 오리가 돼 버린 것인가. 은퇴한 종마도 밥 먹을 때 DNA 추출은 안 하겠다.

세상에 시발, 식사 중에 펠라를 받는다니?

혹자에게는 로망일지도 모르겠지만, ‘밥’이라는 단어를 신성시하는 쌀밥과 김치의 나라 한국인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흐윽, 흑……. 선배, 라리루라가 싫어지셨나요?”

“아!! 누가 밥 먹을 때 쥬지 빨아줬음 좋겠다!!”

“아핫♡! 그거라면 제가 또 적임이죠!”

이런 시발, 100% 연기인 걸 알았는데도 무시할 수가 없닷……!!

“이런 모순을 견디면서 하는 게 기둥서방이야……?”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구나. 나는 프랑이 내 포크까지 들어서 떠먹혀 주려는 걸 막느라고 꽤 진땀을 뺐다.

‘이거 진짜로 세상에 소문 나면 내 평판 나락행 아니냐……?’

포크를 집으면서 쯉쯉 거리는 소리에 식은땀을 흘리는 나.

시종은 전부 여자 메이드(피규어)에, 밥은 매끼 침대에 누워서 처먹으면서, 식사 중에는 넷 있는 아내들 중 한 명에게 펠라까지 시킨다고?

이게 정녕 옳게 된 귀족이 맞나? 19금 양판소에서 초반에 주인공한테 정의구현 당하는 배불뚝이 남작(잡으면 미약이랑 노예 출신 히로인 드랍함) 같은데?

공포에 등을 떠밀린 나는 씹는 둥 마는 둥 하며 달인의 위장만 믿고 아침밥을 해치웠다. 브런치라 빠르게 우겨넣을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커험험! 밥도 다 먹었으니까, 이제 이빨을 닦아야겠네.”

나는 바짓춤을 추스르며 중얼거렸다.

니가 언제 그렇게 나한테 성실하게 굴었느냐며 충치가 생기다 만 어금니가 눈을 게슴츠레 뜨는 듯 했지만, 아무튼 꼭 필요한 일이다.

“양치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라리루라가 주문을 외우며 내 혀에 손가락을 슥 넣었다.

“〈정화(Clean)〉♡”

내가 애용하는 매지컬 소독 마법이다.

인체에도 해롭지 않고, 성능도 확실하며 효과도 빠르다. 이 마법이 사실 현대 마법 체계에서 제일 대단한 놈 아닐까? 맞는 것 같은디?

라리루라는 수줍게 웃었다.

“에헷, 선배한테 써 드리려고 배웠어요♡”

이 녀석들, 정녕 나를 영영 침대에서 생활하게 만들 셈인가.

새근새근 꿀잠을 자는 다나와 베로니카를 보며, 침대에 눕혀진 나는 달인의 기초대사량이 뱃살을 만들어주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다.

***

마냥 처먹고 놀기만 할 수는 없었기에, 분수를 연구하거나 할 일을 하고 있자 금방 저녁이 됐다. 공주님 부부를 만날 시간이 됐다는 얘기다.

그러는 중에도 베임이 모에화를 당한 전서구가 되어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개고생을 한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귀족의 집사랑 메이드가 돈을 많이 버는 게 다 이유가 있구나~ 하고 납득한 하루였다. 이거 진짜 발퀴리에들을 쓰는 게 더 인도적인 일이겠는데.

“너랑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참 다행이지 않아?”

몇 차례 대화를 나누다가 요리가 나열됐을 때, 엘리자베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오늘은 플래티넘 모험가 에르제로 변신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몇 차례의 대화’란 온갖 일들에 대한 설명이다.

〈편찬대대〉의 관련 지식이 대부분이었는데, 내 사정이 얽히는 일은 되도록 제외했다. 엘리자베트 역시 그 정도는 이해하는 편이었기에 설명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 설명이 가능했던 건, 지금 있는 독실이 내밀한 대화가 가능할 만큼 엄중하게 차폐된 곳이어서였다.

프랑이랑 몇십 분 먼저 와서 기다리면서 오딘의 눈으로 훑어봤는데, 워낙 철저해서 감탄이 다 나오더라. 비싼 곳은 이유가 있더구나 싶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하게 끄덕였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만한 자리에 불러 주셔서 영광──”

“아, 제발 그런 거 하지 마. 우리가 그런 딱딱한 사이였어? 이제 볼 장 다 봤다고 남남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아니지? 그치? 나 울지도 몰라?”

몸을 쥐어짜서 고위 정령을 소환하느라 안팎으로 몸이 곱창났다던 엘리자베트는 붕대를 감은 팔을 저어대면서 질색팔색을 했다.

나는 조금 곤란해졌지만, 옆에서 묵묵하게 술을 걸치는 길다트는 익숙해 보였다. 익숙하면 도와 이 씨팔럼아.

“또 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음, 서민이라면 당연히 이 존귀한 왕녀께 극존칭을 써야지’ 하고 생각하면 그게 미친년이지. 폐위 당해도 싸겠어.”

“콜록, 콜록! 어흠, 그렇다고 해도……”

“좋아요, 양해했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저 역시 아바마마를 대할 때처럼 몸과 마음을 다한 최대의 존칭과 예우를──”

뭐야 시발 살려줘요. 나는 헛기침을 연발하다가 말투를 바꿨다.

“그쯤 하고! 이만 본론으로 들아갑시다, 예?”

“그 정도면 괜찮네. 누가 존경심이 없다고 뭐라 그러면 나랑 친구 먹었는데 꼽냐고 되물던가.”

엘리자베트는 이 정도로 만족한 듯 말했다.

“사실 너도 짐작은 했겠지만, 우리가 피라미드 공략에 나선 건 명예 귀족 작위 때문이였어.”

─우물우물.

공주님답지 않게 고기부터 입에 욱여넣은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띄웠다.

“내가 은밀하게 후원하는, 신뢰할 만한 부호를 로마니아의 귀족으로 만들 계획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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