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뭐 저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습죠.”
나는 엘리자베트의 폭로 아닌 폭로에 무덤덤한 대답을 했다.
사실 그렇게 쳐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은 있지만, 피라미드의 보물이 아니라면 왕족이 노릴 만한 게 달리 없지 않은가. 당연한 귀결이었다.
“말하자면 의심 받을 일 없는 첩자인 셈입니까?”
“정확해. 브리타니아 인도 아니고, 우리 나라랑 인연도 없는 돈 많은 부호니까. 그리고 권력과 돈, 이 2개가 뒷받침되면 가능한 일이 많아지잖아?”
“저도 요즘 들어서 실감하고는 있습니다.”
“응. 하지만 완전히 의심받지 않는다는 건 조금 힘들어. 그렇지만 견제하기 힘들 정도의 세력이 될 때까지 시간을 벌 정도면 충분하다고 봤거든.”
입을 우물거리며 말하는 것 치고는 고기를 써는 나이프 솜씨는 또 품위가 있다. 나는 따라하려다 포기하고 그냥 편하게 썰어서 프랑에게 건넸다.
“타국에 첩자를 보내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일단 명예 귀족이라는 제도를 노리면 심부까지 파고드는 것도 가능해. 첩자 1명이 세력을 갖고 정보수입이 가능하면 이상적이지.”
말하자면 남의 나라에 FBI를 세워버리는 거다.
말처럼 간단하지 않은 일일 텐데, 엘리자베트는 남의 집의 정원에 모래성을 짓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하고서 첨언했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원로원 상원의원이랑 굵은 파이프를 가진, 돈 많고 실력과 두뇌까지 뛰어난 사람이면 최고겠지.”
“……그건.”
프랑의 눈이 살짝 험악해졌다. 평소엔 가족이나 귀족을 상대할 때는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거의 보여주지 않는, 정말로 정색하는 표정이다.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그런 일은 제 능력 밖일 듯 하군요.”
테이블로 가려진 밑에서 프랑의 허벅지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우리 프랑이 평소답지 않게 비지니스의 상담에 끼어들 만큼 민감한 화제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거절하면 그만인 일에 굳이 날 세울 것도 없다.
“응.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
엘리자베트도 대답을 예상했던 걸까. 그녀는 별 생각 없이── 아니, 오히려 미안하다는 눈치까지 보이며 머리를 숙였다.
“위정자는 필요에 따라 양심을 버려야 하지만, 이런 나라도 사람의 마음은 있다? 은인한테 저런 부탁을 할 정도로 수치심 없지는 않아.”
“그렇다면 왜 그런 말씀은?”
“네게 그럴 의지가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나한테?
내가 스파이 마스터 캡틴 브리타니아로 취직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아내들의 착정에 헬렐레 하고 있던 엘리트 대갈통을 일깨웠다.
“……〈편찬대대〉 말씀이십니까?”
“그래. 니다벨리르에도 나르메르-나일에도, 심지어는 우리 나라에도 숨어 있었다며?”
“명예 귀족이 되서 정보를 모을 수 있다고 하면, 로마니아에 숨은 놈들을 찾기 쉬울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사악. 나는 작은 채소 열매를 나이프로 쪼갰다.
“그래서, 제가 원한다면 계획의 방향성을 틀어서 ‘왕가를 위한 첩자’를, ‘첩자를 위한 왕가’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내리셨나요?”
“로마니아는 위험한 상대니까. 적을 탐사하려는 뛰어난 능력자에게 왕가의 힘을 쏟아부을 가치가 있을 만큼 말이야.”
─휘리릭. 엘리자베트는 소스를 닦은 나이프를 손에서 회전시켰다.
“조직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비밀까지 많이 가진 집단이면 말할 것도 없고. 나는 〈편찬대대〉라는 놈들이 필요한 순간에만 땅에서 솟는 존재라 생각하지 못하겠더라.”
“……어딘가엔 본진이랄 게 있을 것이다? 그게 로마니아라고 보십니까?”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강림〉 마법. 신좌를 빼앗는〈인신〉. 이것들이 관계가 없을까? 나는 이 가능성에 걸 만 하다고 봐.”
그녀의 손아귀에서 회전하던 나이프가 예리하게 우뚝 섰다.
“막판의 막판에서 판단을 가르는 건 그때그때의 직감이야. 모든 정보가 모이길 기다렸다간 늦거든. 가능성과 심증과 직감. 그것만 있어도 도전해야 할 때가 있어.”
그게 지금이라는 건가. 나는 물을 머금었다.
차기 여왕이 레티티아를 보고, 피부로 위험성을 실감한 거잖은가.
저런 게 자기 나라에서 ‘호와와 시골 출신 여신관인 거시야요’ 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면 소름이 다 돋겠지.
“강요할 생각은 없어. 단지, 혹시 네가 진심으로 로마니아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다면 그 뜻에 응하겠다는 거야. 네게 줄 보상과는 별도로.”
엘리자베트는 혀를 빼물고서 한 입 먹고는 손도 안 되던 채소 요리를 한쪽에 밀었다. 아마 그녀의 입맛에는 안 맞았겠지. 먹기 싫은 음식인가 보다.
그리고 대신 고기 요리를 즐겁게 썰어댔다.
“의지는 무척 중요해. 처음부터 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결국 본인의 의지잖아? 편식을 고치듯 억지로 해 봤자지.”
“의지라……. 거창한 이야기 같습니다?”
“조금 소탈하게 말할까? 의욕, 꿈, 욕망, 이기심, 뭐든 좋아. 힘든 일일 수록 그래. 하기 싫더라도 할 이유가 있어야 하지. 본인의 의지가 강하다면 남이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할 테니까.”
“제게 그럴 이유가 있다고 보셨다고요?”
“길다트가 보기에, 너는 〈편찬대대〉와 인연이 꽤 깊어 보였댔거든. 강요할 입장도 아니고, 만약 필요하다면 협력할 생각이었지.”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말하자면 저번 일의 보상과는 별도의, 모험가 노르드에게 건네는 첩자 의뢰라는 거군요. 거절당해도 상관없는.”
“아하하! 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되겠네!”
나는 픽 웃고 느긋하게 썬 음식을 입에 넣었다.
나르메르-나일의 여관이지만, 음식은 호불호가 적은 로마니아의 요리다.
오래된 전통과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고급진 음식들은 의식주에서 식(食)을 중시할 수 있던 로마니아의 역사적 패권을 암시했다.
고대 문명 황금시대의 기술의 대부분 전쟁으로 소실된 현대 이세계다. 나라가 휘청이긴 했어도 큰 문제 없이 역사를 이어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보통 첩자보다 훨씬 고급 인력이군요. 특파공작원이라 해도 되겠어요.”
“으음, 거창하게 할 생각은 없어. 의심받지 않는 자금줄이라거나,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면 돕지 않느니만 못하거든. 의심스럽잖아? 아무래도.”
─달그락.
나는 프랑이 낸 식기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서 또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받아들일까 봐 불안해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끼어들기도 뭣하다. 프랑이 보기에도, 이 제안은 받아들일 메리트가 있기는 했다. 위험도는 높지만 평소 나는 리스크보단 리턴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성격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만, 삼가 거절하겠습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프랑이 놀라는 눈을 하는 걸 느끼면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씀드린 점은 십분 이해했습니다만, 제게 그 의지랄 게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군요. 게다가 전 연기력도 부족하고, 예의범절도 어설프잖습니까?”
연기를 할 때마다 전부 정체를 들켜왔던 나다.
그런 경험 상, 난 스파이 짓을 하면 어느 순간 로마니아 귀족들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올 하일 브리타니아’ 거리는 캡틴 스컬이 돼 버릴 것이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싫은 의뢰를 거절하는 건 모험가의 권리인걸.”
엘리자베트는 선선히 물러나고서 싱긋 웃었다.
“그럼 이만 보수 이야기로 넘어갈까! 사실 너도 나도 고리타분한 스파이 얘기보다는 이걸 더 기대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여윽시 엘리자베트 공주님이십니다. 천민 놈의 생각 따윈 훤히 꿰고 계시군요. 크헤헤헤헤!”
느와르 영화 도입부 같은 분위기가 일변하자 내 옆에서 식기를 놓친 프랑이 놀란 듯 딸꾹질을 시작했다. 윽, 시발 귀여워. 오늘밤에도 논스톱 레슬링 예약이다.
“지금은 공수표만 남발하게 되겠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모험가에게 계약 준수는 기본 중의 기본! 아바마마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가능한 한 보답해 준다고 약속할게!”
─팍! 엘리자베트는 기세등등하게 팔을 펼쳤다.
하필 뻗은 쪽이 길다트 쪽이라서 그가 맞을 뻔 했는데, 그는 대충 한 팔로 막고는 별 관심 없다는 듯 후추를 뿌렸다. 이 새끼도 가만 보면 강적이야.
나는 프랑의 식기를 마법으로 소독하며 말했다.
“원만하게만 해 주십셔. 레볼루숑의 선두주자가 되긴 싫읍니다.”
“앗! 너, 우리 나라가 왕권이 쫌 후달린다고 별 기대 안 하고 있지?!”
내가 대답하자 엘리자베트는 충격을 받았다는 듯 펄쩍 뛰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귀족이 싫다니까.
“얘 태연한 것 봐! 우리도 엄청 고민 중인데! 너처럼 명예욕 없고 가질 거 다 가진 애한테 줄 만한 보상을 고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퍽, 퍽! 그녀는 갑갑한 듯 가슴을 두들겼다.
유부녀가 그러지 좀 마. 눈 둘 곳이 없잖아. 난 잠깐 프랑 가슴이나 훔쳐봐야지.
“아니면 뭐, 네가 다른 귀족들처럼 근위기사단 단장이나 왕실 직속 수호대에 넣어준다고 좋아할 성격도 아니고!”
“그건 쵸큼 포상이 아니라 목줄 같은디요.”
시바, 한화 종신계약(해지 불가능)이나 월급 1.5배 전문하사 같은 거자너. 에비, 끔찍한 거.
아무리 선조들께서도 용의 꼬리보단 뱀의 머리가 낫다 하셨다지만, 저 자리는 지렁이 대가리잖아? 지렁이끼리 대가리랑 꼬리를 구분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다고.
“좋아. 아예 이렇게 하자.”
엘리자베트는 검지를 세우면서 식탁에 몸을 기울였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솔직해도 돼. 목숨도 맡긴 사이인데 선 좀 살짝 넘어도 용서해 줄게. 아,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반하면 안 된다?”
“공주님은 여왕 되고 나서는 농담 마십쇼. 듣는 신하들이 웃을 포인트를 못 찾아서 실수했다가 다 처형당할 것 같거든요.”
나는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욕이 나올 뻔 한 걸 참아낸 자신을 칭찬했다. 강북호 이 새끼, 성장 좀 한 것 같은데. 쪼끔 자랑스럽군.
하, 나 강북호는 매 순간 강해지고 있다고.
우리는 그렇게 귀찮은 이야기를 날리고 모험가 파티의 뒷풀이 자리처럼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늦기 전에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