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85화 (585/1,009)

***

“해서, 뭐 그런 얘기를 하다 왔습죠.”

아내들의 손에 방으로 이송당한─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양팔을 잡혀서 끌려갔다─ 나는 그런 말로 공주님 부부와 나눈 이야기를 끝냈다.

프랑을 제외한 아내님들은 침대며 의자, 소파에 뒹굴거리며 파자마 차림으로 내 얘기를 들었다. 이 분위기는 수련회 밤 같은 느낌이다.

단, 그 비유라면 내가 여자들 방에 혼자 숨어든 미친 놈이 되겠지만.

“흠. 그 첩자 제안을 거절한 건 다행이구나.”

“그러게요! 만약 냉큼 받아들였으면…… 엣흠.”

“‘엣흠’은 또 뭔데 시발. 나한테 뭔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이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로마니아에서는 회복하기 힘든 부상을 입은 장군들에겐 황실에서 퇴직을 허락해 준대요!”

남편의 입대를 앞둔 임산부가 자기 남자의 십자 인대를 만지작거리는 듯한 눈빛이다. 엘릭서 양산체계도 아직 완성 안 됐는데 제정신인 것?

“아무튼 잘 됐네. 그도 그럴 게, 솔직히 나는 좀 의문이거든.”

누워서 다리만 까딱거리던 다나의 말이었다. 난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의문이라니? 뭐가.”

“니가 날 혼자 두고 떠났을 때, 술자리에서 한 말 기억 나냐?”

아니, 또 뭘 혼자 두고 떠났다고 그러냐. 남편놈 양심 찔러 뒤질 것 같네. 내가 살짝 인상을 쓰자 다나는 장난이 성공한 아이처럼 픽 웃었다.

“네가 현장직 고고학자가 되려는 이유랑, 목표 얘기. 기억 나지?”

“그래.”

“그럼 어디 세 보자고.”

다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짐들을 쌓아둔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인공 미스릴이 몇 덩이 쌓여 있었다.

“──연구에 필요한 자금.”

그렇게 말한 다나는 다음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고대문명의 유물을 연구할 수 있는 박사급 학위.”

다음에 가리킨 것은 짐 위편에 있는 아르마알스 가문의 목패다.

“──귀족들의 개입을 막을 후원자와, 아내들.”

손가락을 빙 돌려서 침실에 있는 우리를 가리킨 다나는, 이걸로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딱 소리가 날 듯한 몸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위험으로부터 몸을 지킬 힘.”

“……………….”

“어때, 다 모였지?”

내가 입을 닫고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는 어련하겠느냐는 듯 웃었다.

“성실한 점이 네 매력이기는 하지만, 가끔씩은 지나온 길을 돌아보지 그래? 이제 네가 처음 이루려고 했던 목표는 전부 이룬 거 아냐?”

“……확실히, 내가 남 부럽지 않게 열심히 살긴 했네.”

다나의 말은 확실히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치만 전부 다 끝난 건 아니지.”

〈편찬대대〉라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그 새끼들이 룬 스톤의 연구를 하는 자들을 몰래 처리한 흔적이 있는 이상, 마음을 놓고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는 없었다.

언제 놈들이 랩실에 엔트리 해 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연구를 하겠냐. 예르나도 내 논문을 쌔빈 뒤에 바로 족적을 감췄잖은가.

“뻔하네. 〈편찬대대〉를 해치워야지 안심하고 일 할 수 있단 얘기지?”

그런데 그런 생각조차 우리 눈나에게는 훤히 다 보인 모양이었다. 하긴 우리 가족 중에서는 나랑 가장 오래 보고 지낸 사이니까.

내 침대로 다가온 다나는 자길 바라보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왜 그걸 네가 해야 하는데?”

“뭐?”

“역사의 뒤에 숨은 살인집단? 신의 힘을 빼앗은 인간들? 전부 좆 까라 그래. 그딴 건 네가 아니라 나라의 잘난 인간들이 대처할 일이지.”

다나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은 마치 빨려들어갈 듯 해서, 내 입이 열리지 않게 만드는 모종의 마력이 있었다.

“이번 일로 브리타니아의 차기 여왕님도 놈들의 존재와 위험성을 몸소 느꼈고, 너도 가주 할배한테 놈들에 대해서 설득할 만한 결과를 냈잖아.”

차마 고개를 가로로 저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내가 마나 부여 기술을 유통하기 시작했으니까 가주 어르신도 나를 예전처럼 일방적인 후원자 A 정도로 취급할 수는 없게 됐다.

엘릭서의 로얄티까지 더하면 또 어떤가.

사업 파트너로서 대우를 요구할 만한 패가 손에 들어온다.

거창한 걸 부탁할 것도 아니고, 〈편찬대대〉의 위협에 경종을 울리기엔 충분한 위치였다. 원로원 상원의원인 어르신이라면 로마니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겠지.

“내 의문이란 건 그거야. 상대가 먼저 얽혀 왔으니까, 불똥이 화재로 번지기 전에 떨쳐내긴 해야 하겠지. 그런데 왜 그걸 네가 해야만 하는 일처럼 여기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프랑이 말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노르가 꿈을 이루길 바랐지만, 그러기 위해서 다치고 위험해지길 바란 건 아냐.”

“선배의 꿈이 이뤄지는 건 좋지만요. 그런 놈들이랑 피 튀기게 싸우지 않아도 되잖아요? 방법이 달리 없다면 모를까. 이제는 그런 것도 아닌데.”

“……음.”

“충분히 싸웠고, 충분히 노력했다. 이제는 잠시 쉴 때도 되었지.”

내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베로니카는 자신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것처럼 마무리 지었다.

“그대가 흘린 땀과 피가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시기가 왔다. 주인님이 바라는 건 세상의 평화나 안전 따위가 아니잖은가.”

베로니카의 손이 내 손을 덮었다.

나는 왜 그녀들이 정말 온갖 수단을 다 해서 날 얌전히 있게 만들려고 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들 말마따나, 나란 놈은 오늘날까지 충분히 달려왔던 것이다.

모험가가 되서, 내게 부족한 걸 채워줄 아내들과 만나고, 지구로 돌아가는 기술을 연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의 권력이며 재산, 인맥을 손에 넣었다.

“이제는 노르도, 노르가 지켜낸 행복을 즐겨두 된다고 생각해.”

프랑은 그녀의 결혼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노르한텐 아직 하고 싶은 일도, 하고자 결심한 일도 남았겠지만…… 열심히 노력한 노르에게는, 그만큼 보답이 있었으면 하니까.”

아내들은 제각각의 시선에 마음을 담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바쁘게 걸어오길 반 년 하고 조금.

어느새 벌써, 나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기본 준비를 끝마쳤던 것이다.

***

이른 새벽에, 뭐 이렇다 할 계기도 없이 잠에서 깼다.

아쉽게도 아내들과 뒹굴며 잠들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내일을 기약하면서 일찍 잠든 탓이다. 달인의 육체는 많은 수면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친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젯밤에도 힐링 아닌 힐링에 힘 입어서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쉬었잖은가. 일찍 깨어나 버린 건 필연이었다.

나를 2교대로 감시…… 가 아니고 지켜보던 아내들도 저런 분위기에서 내가 사고를 치러 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오늘밤은 함께 잠들었다.

당연히 나도 그럴 생각이다. 여기서 탈출하거나 하면 아내들을 볼 면목도 없고, 사실 굳이 도망칠 이유도 없는 게 사실이다.

과하다 싶은 친절도 이유를 알고 나면 거절하지 못할 애정이다.

“……행복인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그 말을 곱씹었다.

조금 더 노력해서── 그것도 아내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앉아서 돈만 굴리는 방식으로 노력해서, 영지를 얻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작게나마 영지를 얻고, 발퀴리에를 배치하고, 그 안에서 온갖 수단으로 치안의 유지를 굳건히 하면 좆밥 시절 강북호가 바라던 환경 그 자체다.

사랑스러운 아내들이 있고, 충분한 돈이 있고, 내 연구를 도와줄 만한 사람들도 잔뜩 있다. 부족할 걸 세는 게 더 빠르겠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 아내들에게 성실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온갖 일을 해내며 거창하기 짝이 없는 이세계의 옛 역사와 신들의 신화를 알아오던 시간이었잖은가.

거기에서 나라는 개인이 탱자탱자 놀며 하려던 일만 냉큼 하고, 아내들이랑 뒹굴면서 느긋하게 날 기다릴 부모님들께 갈 방법을 찾는다니?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있으면, 그 시간에 조금 더 나은 환경이며 힘을 기르려고 노력해 왔었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그랬지.”

오딘은 내게 자기 후계자로서 뭔가 원대한 일을 하라고 한 적은 없다.

〈편찬대대〉?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뭐하러 내 몸과 시간과 아내들의 걱정을 전부 희생해가면서 적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더 스마트한 방법도 있을 텐데.

‘의지라니, 그 공주님도 우연찮게 그럴싸한 말을 해 줬네.’

엘리자베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굳이 악으로 깡으로 〈편찬대대〉를 적대할 만한 의지가 없다.

그나마 놈들과 싸울 원동력이었던 프랑의 복수조차도 그녀 자신이 크게 연연하는 것 같지가 않다. 그녀의 지난 추억은 묘지 앞에서 울고, 결혼식을 올린 날에 정리된 듯 했으니까.

“레티티아나 에퀴녹스의 기억에서 단서를 찾고, 조이드를 증인으로 세워가며 어르신을 설득해서, 엘리자베트를 은연 중에 도우면……”

나는 소파에 누워서 손가락을 꼽았다.

“그걸로 〈편찬대대〉의 대책은 대충 끝.”

우연히 마주친다면 모를까, 나 혼자 이를 악물고 찾아내서 족칠 것도 없다.

〈인신〉이 수십 다스 씩 굴러다니는 것만 아니라면 〈편찬대대〉가 여러 나라의 국력을 상대로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지 않은가. 당장 나한테만 박살난 게 몇 명인데.

헤니르와 아이들 쪽도 그렇다.

인류 멸망이란 목표는 거창하짐나, 이세계의 안전을 지키는 게 어디 우리 가족의 숙명이던가?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온갖 사람들과 다 같이 대처하면 된다.

오딘의 후계자라고 해 봤자, 나는 그저 평범한 척척석사다.

가진 게 많기는 해도, 운명이랄 것에 속박된 듯 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천장을 향해 든 손가락을 계속 꼽았다.

“여신 사티스에게 부탁해서 바이콘의 저주를 다 풀고, 그렇게 도와준 바이콘들에게 부탁해서 공간이동의 연구를 함께 진행하고, 다나에게 고고학계에서 관련 자료를 모아달라고 하면……”

아내들과 알콩달콩 살다가, 지구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혹시 남들한테만 맡겼다가 안 되면, 그때 가서 도와주면 장땡이다.

‘……행복을 즐길 권리라니, 웃기는 말이긴 해.’

그런 건 누구한테나 있을 테니 말이다.

나한테도, 그리고 나 때문에 마음 고생만 하던 아내들한테도.

하긴, 남을 위해서 뭔가 해야만 하는 할당량이 있다고 쳐도, 나만큼 그걸 채웠다고 자처 가능할 새끼는 얼마 없을 것이었다.

“……푸우우우.”

사막의 햇살은 온도와 습도가 조정된 고급 여관 안에서는 산뜻하기만 하다. 나는 소파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몸이 편하니까 별 생각이 다 든다.

가볍게 운동이나 하고, 그 다음에 밥을 먹고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

성실한 나머지 서두르고 있다는 투의 조언까지 받아놓고, 고민마저 서두르고 있다니? 웃긴 노릇 아닌가. 나는 팔찌를 찾아서 창으로 바꿨다.

일렁…….

“아 시발, 맞다.”

우리 미미창 사춘기였지.

나는 창이 흘리는 거뭇한 마나에 혀를 내둘렀다.

“새끼, 시꺼멓게 태닝한 것 보게. 나쁜 놈들이랑 어울려서 그래.”

창을 집어넣고, 맨몸으로 단련할까 하다가 문득 티르시 생각이 났다. 오늘이나 내일 정도면 눈을 뜰 만 했으며, 또 링겔도 갈아줘야 하잖은가.

나는 그렇게 티르시가 잠든 방의 문을 열었고.

“읍! 읍……!!”

침대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버둥거리던 우리 마법사님이, 나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걸 목격할 수가 있었다.

“……아니, 티르시. 거기서 머해요?”

“……푸하앗! 치, 침대에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움직일 수가 없다고?

의문스러워 하던 내 능지 높은 엘리트 대갈통은 그 이유를 눈 깜짝할 사이에 도출해냈다.

“……아. 티르시, 일어서도 되요.”

“네? 아뇨 그게, 한참도 전부터 그려려고 하고 있는데 움직여지지가…… 어라?”

어느샌가 깨어나 있던 티르시는 몸을 일으키며 당황했다. 마치 자기 몸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리액션 덕분에 눈치챘다.

엊그젯밤, 나는 분명 〈강림〉 상태의 그녀에게 ‘자고 계세요’라고 말했다.

티르시의 조종권을 가진 내가, ‘자고 있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나는 반신반의 하며 티르시에게 말했다.

“……티르시, 손.”

─톡.

티르시는 내 손 위에 두 손을 공손하게 올렸다.

“……헤?”

“오우, 쓋.”

마법이 풀리다 말았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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