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절해서 도망친 티르시를 기다리며 여관에 처박혀서 연구를 하다 보니까, 그녀가 깨어날 무렵에 편지가 1통 날아왔다.
명예 귀족 취임 대상에게 보내는 연통이다.
여기서 편지를 주고 받으며 누가 명예 귀족이 될지 몇 차례의 합의를 걸친 뒤에야, 간신히 이 나르메르-나일에서 선발하는 로마니아의 명예 귀족에 취임하는 것이었다.
“노블레스 노르드인가.”
분수를 연구하던 걸 베로니카에게 냉큰 빼앗긴 나는 현자 타임을 느끼며 그 편지를 읽었다. 무려 파라오의 친필이라 왕가의 신하로 보이는 남자가 직접 찾아올 정도였다.
─……또, 나 역시 그대의 용투에 감사하는 바요.
옷을 단정하게 입고 나가자 그는 당대 파라오의 친필을 1번 대독해 준 뒤에, 개인적으로도 나한테 감사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어안이 벙벙해 하느라 제대로 귀담아 듣지 못했던 편지를 정주행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글쎄, 세헤테피브라보다 표현이 장황하다니까?
“티르시. 아빠한테 엉덩이 맞은 어린애처럼 숨어 계시지 말고, 이리 와서 같이 얘기나 좀 해 보죠.”
“……숨어 있는 거 아니거든요? 저 별로 부끄럽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티르시는 내가 부르자마자 걸어왔다. 하지만 저 표정은 자기 의지로 걷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나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래 보이네요.”
“자, 자꾸 제 몸에 명령하지 말아요!”
“뭐 말만 해도 명령이래. 티르시야말로 제 뭔가 부탁해도 거절할 줄 아셔야죠. 이러다 언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크게 실수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몰라요! 노르드의 그 이상한 가설은 틀렸어요! 이건 노르드가 제 몸을 억지로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제가 그렇게 남자한테 간도 쓸개도 다 내주는 헤픈 여자일 리가 없다구요!”
“티르시야……”
“베로니카, 그만. 예, 그런 걸로 하죠.”
베로니카는 마치 고인물이 뉴비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못 믿는 것을 보는 듯 티르시를 동정했다. 자기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니 불쌍하긴 했다.
아무튼 그렇게 현실 부정으로 바쁜 티르시랑도 몇 시간 정도 상담하고서, 나는 파라오의 친필에 답장을 썼다.
다행히 이번엔 다나에게 뺏기기 전에 끝냈다.
“……진짜 이걸로 괜찮아?”
다나는 내가 쓴 편지를 밀봉하기 전에 훑고서는 진심이냐는 듯 물었다.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직 따로 상담하지는 못했지만, 어르신도 이게 낫다는 건 공감하실 거야. 공주님 부부랑도 보상에 대해서 합의했고.”
“흐응.”
“우리 눈나도 귀족 부인 만들어 줘야지. 장모님들도 ‘내 사위가 귀족인데! 으이!’ 하시면 사시는 데 불편한 일이 줄어들지 않겠어?”
“말은 잘 해요.”
웃음을 참은 다나는 자기 발퀴리에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려다가, 생각을 바꾼 듯 말했다.
“아, 오늘 라리루라의 남은 시합을 끝낼 날이지 참. 가는 김에 부쳐야지.”
“여보님들아. 나도 시합 보러 가고 싶은데.”
“포기하고 요양이나 하세요♡”
아픈 데도 없는데 뭐가 요양이야.
남이 꾀병을 만들어주는 생활은 또 처음이다. 내 좌절을 무시한 라리루라와 다나는 발퀴리에 스무 마리를 전원 호위로 데리고─당연히 인벤토리에다 넣은 상태로─ 대회를 나갔다.
그렇게 며칠 만에 다나는 알리씨크 쪽의 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왔고, 라리루라는 가뿐히 우승컵을 따 왔다.
“우승♡”
“존나 베이비 서브미션이네.”
초등학생 영어 에세이 대회에 헤밍웨이가 갔다 온 듯한 느낌.
내가 뿌린 인공 미스릴 우승컵을 아내가 회수해 오다니, 진짜 이게 맞나?
반칙으로 이겨낸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뭐.
***
아무튼 그런 절차를 모조리 밟고 나자, 이제야 나도 할 일이 생겼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합이 빡 들어간 아저씨와 청년이 우리가 묵는 여관의 손님 방으로 찾아왔다. 얼마나 넓은지 응접실까지 따로 있으니 편하긴 해.
《하하, 예. 편히 앉으십시오.》
나는 소파에 먼저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르메르-나일의 골렘 공방, 엘펙스.
이들은 내가 나르메르-나일에다 골렘이나 인공 희귀금속을 뿌리는 과정에서 협력할 현지의 공방이었다. 따지자면 후보 중 한 곳이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하청…… 인데, 기술력은 또 우리보다 높다.
그런데도 내가 압도적인 갑이 돼 버린 건 금속 야금(冶金) 기술도 있지만, 그 이전에 이들이 사업 자체를 말아먹을 만한 엄청난 타격을 받은 상태기 때문이다.
《우선…… 귀하의 공방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유감입니다.》
《저희는 정말 억울합니다! 아니, 저희랍시고 〈임모르탈리스〉가 초대 선수를 해치고 그 분의 가죽을 뒤집어 썼을지 알았겠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나는 다분히 공감한다는 표정을 취했다.
이 사람들은 흑마법사를 대회장에 불러버렸다는 혐의를 쓰고 있었다. 라리루라를 습격했던 그 코뤤투스 새끼 얘기 맞다.
하지만 습격에 가장 먼저 대처하고자 노력했고, 다른 참가자들을 설득해서 인질도 구해냈기에 그 용의선상에서 벗어나 정상참작을 받은 입장이다.
단지, 그 이미지 떡락이 장차 격변할 시장에서 얼마나 큰 족쇄가 될지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저희 공방이 엘펙스 공방의 실력을 믿고 협업체계를 구축하는 건 간단합니다만…… 귀하의 공방에서 겪고 계실 부차적인 문제까지 해결하긴 힘들 듯 한데요.》
내 말에 엘펙스 공방장 하모예드는 바짝 굳었다.
그야 이대로 가면 흑마법사랑 협력한 공방이란 낙인이 찍힐 걸?
‘아니, 낙인이 공방 간판에 찍히면 다행이지.’
밤에 술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데 보쌈 당해서 ‘이건 인두야. 피부를 지져’ 하고 코렁탕 풀 코스를 만끽하게 돼도 이상할 것 없겠군. 사적 복수라는 말이 남일로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임모르탈리스〉의 흑마법사를 불러들였다는 오점은 그 정도의 문제다.
그 새끼가 시체 위장술로 숨어들면 원로원 가문조차 사전에 예방하지는 못했다는 팩트도, 뿔 난 여론 앞에서는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방법이 없지는 않지요. 저도 깊이 고민해 본 방법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이 환해진 하모예드의 손에 계약서를 건네줬다.
그는 그 내용을 읽어내려가며 눈이 부릅뜨였다.
《무, 무급으로 하청…… 말씀이십니까?》
《아, 이해를 잘못 하셨군요. 협력 시 계약비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일부 지역에 공급할 골렘의 제작비, 운송비 등을 귀하의 공방에서 차출하시면 어떠냐는 겁니다.》
그야 그렇게 하면 벌어들인 돈을 전부 운용비에 꼴아박아야겠지.
결과만 놓고 보면 흑자를 내는 건 몹시 어렵고, 누구 말마따나 우리 듀나미스 공방이랑 금싸라기 계약을 따내도 망하지 않는 게 고작일 것이다.
하모예드는 헛기침을 연발했다.
《커험험……. 이래서는 저희가 그,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도 좀…….》
《하지만 저희와 함께 속죄에 힘 썼다는 여론을 얻게 될 겁니다. 돈보다 나라의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여론을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크흠…….》
《당연히 직원들의 월급 정도는 저희가 대신 내 드리죠. 협력 중에 빌린 돈이야…… 장차 성공한 뒤에 갚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초반 몇 달 정도만 빡시게 고생하고, 그 뒤로는 더 성장하면 되잖아?
제자리 걸음이 부담되는 건 경영자 측이지. 내가 뭐 니들 사업장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아, 알겠습니다! 크흑. 계약하지요, 계약!》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을 지키며 호구를 낚은 나는 편안하게 그들을 배웅했다.
자업자득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저들이 불쌍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로 돕고 돕게 됐잖아? 나도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 도우면서 받는 게 있어야지.
“이제 관리인만 구해서 맡기면 골렘 사업은 별 신경 안 써도 되겠군.”
그들을 떠나보낸 나는 흡족하게 내 방(침실)에 들어갔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아내들은 덤이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고백을 받고 정식으로 가족의 일원이 된 티르시가 눈을 뜬 뒤로는 그녀의 눈치를 보듯 아내들도 착정 시도를 줄이고 있다.
물론 그게 = 내 자유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라리루라는 날 놀리는 데 맛을 들였는지 발퀴리에를 시켜서 부채질까지 하게 만들었다. 존나 불편해서 끙끙대고 있자니 베로니카가 침대에 올라와 내게 안겼다.
티르시는 상병장들이 배를 긁으대며 TV를 보는 곳에 방치된 이등병처럼 무릎에 손을 올리고 바짝 굳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저, 저기……? 여러분의 사생활에 이렇게 밀접하게 접하는 건 처음이지만…… 굉장히 그, 노르드에게 헌신적이시네요?”
“이렇게 하면 노르가 어디 안 가구 얌전히 집에만 있어줄 거 같지 않아요?”
“……(솔깃).”
이런 시발, 티르시까지 이 남편포박진법에 오염돼 가고 있네. 조만간 티르시까지 합쳐서 5대 1로 행복한 돌림빵을 받게 될 각인데.
그래 쓰벌, 어차피 자유라고는 없어진 유부남의 삶이다.
어차피 반쯤 감금당한 거, 쾌락이라도 있는 게 낫지.
***
토요일 일요일이 그렇듯 행복한 휴식의 나날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단지 그 동안에도 마냥 쉬지는 못한 나와, 그런 나로부터 워커 홀릭 기질을 참초제근하려는 아내들 사이의 신경전 아닌 신경전이 있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천사로 변장한 서큐버스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곡차곡 일을 처리해 갔다.
조금씩 포위망을 벗어나는 나를 보며 아내들이 ‘역시 밤일로 기를 빨아 놔야……’ 같은 얘기를 한 듯도 한데, 나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계획이라서 냅두기로 했다.
【신분을 숨겼을 때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재회한 쿼터 드워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대단할 사람일 줄은 몰랐수다.】
【가면을 벗고 소개하는 건 처음이군요. 노르드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말고. 유명인이면서.】
조이드 투스타스는 여관의 휘황찬란함에 압도된 듯 뻐근해 하며 말했다.
아니, 그도 대상회의 아들이니만큼 방이 화려한 것 정도로는 아무렇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긴장한 듯한 뻣뻣한 동작은 나 때문일까.
【그러면, 왜 날 불렀는지나 묻고 싶수만. 굳이 숨기고 있던 신분까지 까발리면서 말이우.】
조이드는 목을 주무르면서 물었다.
어제는 나르메르 어고, 오늘은 또 게르마니아 어인가.
이게 세계적인 다국기업의 싸장의 삶일까. 나는 외교관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젖어 있다가, 그런 조이드의 질문에 퍼득 대답했다.
【마침 이 근처에 계신다고 하니, 잘 지내셨나 싶어서 말이죠. 그 뒤로 별 일 없으셨습니까?】
【뭐 별 일이나 있겠수? 헤어진 지 반 년도 안 됐는데. 고작 몇 달 간 일어날 변화라고 해 봤자 뻔하지. 사람이 그렇게 늘 사건에 머리를 박고 살 수는 없잖소.】
【……뭐, 그, 그렇죠?】
조이드와 헤어진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온갖 사건 사고를 겪은 나는 눈치껏 주둥일 봉합했다. 나는 댁이랑 빠빠이한 뒤로도 개고생의 연속이었는데.
뻘쭘함을 숨기고자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별 일이 없었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놈들이 조이드 씨를 습격해 오지는 않았다지만, 앞으로도 그렇다는 보증은 없죠.】
【그래서 나도 신변을 지키려고 돈 좀 벌어둘 생각으로 피라미드 탐사대에 꼽사리 좀 꼈었수다. 운 좋게 무슨 큰 사건인가에 휘말리진 않았지만.】
【불행 중 다행이었군요. 그런 의미에서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신변 보호를 대가로 저희와 협력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대뜸 본론을 꺼내자 그는 눈을 찌푸렸다.
【그건 또 급작스러운 얘기시구만. 왜 저번에는 그런 말 않고?】
【그때는 저도 놈들과 사생결단을 벌일 생각이 없었을 뿐더러, 조이드 씨를 보호해 드릴 마땅한 수단이 없었습니다. 여건이 좋지 않았죠.】
【나도 상인의 아들이니 툭 까놓고 말합시다. 댁하고 나하고는 남남 사이인데 아득바득 지켜줄 건 없었던 게 더 맞겠지.】
그렇긴 하다.
남남인 그를 내 아내들의 안전까지 걸고 지켜줄 건 없었다. 그에게 협력을 요청하면서 신분을 감췄던 것도 그 일환이었고.
내가 침묵하자 조이드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 오해 마쇼. 거기에 악감정은 없수다. 우리 형님의 죗값을 내 피로 받아내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꼴에 드워프의 피가 쬐까 흐른답시고, 나도 신의는 두껍거든.】
그는 내가 근처에서 입을 꾹 닫고 있는 프랑을 보며 씁쓸하게 웃고서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부탁해 줘서 고맙수다. 그렇지 않아도 헤어질 때 말 했었지? 나는 왜 형님이 저렇게 된 건지, 평생을 들여서라도 찾아 볼 생각이라고.】
【기억합니다. 군자금도 조금 드렸었죠.】
【흐흐. 그 돈이야 벌써 이것저것 하느라고 다 썼지. 이제 와서 보니 돈도 많은 양반이 쩨쩨하셨구만? 아니, 그때까진 나처럼 빈곤했었나?】
【그런 편이었죠. 이제는 돈만이 아니라 사람도 빌려드릴 수 있겠군요.】
【조건은?】
【증인이 돼 주시는 겁니다. 필요할 때 말이죠.】
【후한 조건이군. 그래, 까짓 거 적들이 마음만 먹으면 내 신변 쯤이야 못 찾을 리도 없지. 내가 손해볼 건 없는 제안이구만. 이 동네 상인들 머리 꼭대기에서 장사한다더니 진짜였어.】
그는 시원한 음료를 원샷 때리고 웃었다.
【고용주. 조건 하나만 더 붙여도 되겠수?】
【술이라면 배 터지게 마시게 해 드리죠. 대신, 업무 중에 취하시면 곤란합니다.】
【어허! 혼혈이어도 명색이 드워프인데 취하면 쓰나.】
프랑이 불편한 듯 눈을 피하는 게 조금 웃겼다.
서로 조건을 받아들이고 좋게좋게 끝난 셈인가. 내가 키득거리자 조이드는 따라 웃고서 내 복색을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만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어째 다들 복장이 굉장하시오? 나 한 명 만나자고 그렇게 쫙 빼 입었다는 건 말도 안 될 얘기고, 뭔 일이라도 있나?】
【예. 이 뒤에도 중요한 일정이 있습니다.】
일어나는 내 어깨에 갑옷을 벗고 승마복을 입은 발퀴리에가 망토를 걸쳐줬다. 귀족이나 입을 법한 예복은 몇 번인가 입어본 지금도 아직 불편했다.
나는 조이드에게 아랫층 방의 열쇠와 발퀴리에 몇 마리를 호위로 건네고서 픽 웃었다.
【오늘이거든요. 명예 귀족 취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