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88화 (588/1,009)

알리씨크에서 운하를 타고 반나절.

나르메르-나일 왕가의 배를 타고 알리씨크에서 수도인 사이카르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우리 가족이 아침 댓바람부터 귀찮게 갑갑한 옷을 입어야 했던 이유다.

‘이동이 편한 건 좋은데, 파라오의 배에 털털한 복장으로 타는 것도 좀 그렇지.’

아무튼, 내려서 몇 시간 뒤면 공식 석상이니까.

“엄청 화려하네요! 과연 나르메르-나일의 수도!”

멀미가 날 듯한 쾌속편에서 내린 라리루라가 큰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드레스 차림인 그녀의 시선은 라스베거스와 이집트의 풍경을 뒤섞은 듯한 사이카르에 못 박혔다. 나랑 다른 아내들도 별로 다를 건 없었다.

배트맨이라도 나올 듯한 스포트라이트가 3~4개 씩 하늘에 겨눠지고, 해가 저물 무렵인데도 되려 이제 일과의 시작이라는 듯 불이 켜지며 사람들이 오고 갔다.

알리씨크도 번창한 곳이었지만, 거긴 물류 빨로 뻠삥한 예술도시다.

반면에 사이카르는 모터보트처럼 빠른 대형선박까지 달리는 운해를 도시 한가운데에 낀, 강대국 나르메르-나일의 살아있는 유적인 것이었다.

나는 이게 여행의 참맛인가~ 같은 생각을 하며 물었다.

“순회공연 중에 와 본 적 없어?”

“단장님이 ‘나르메르-나일은 더우니까’ 라셔서! 사람은 어쨌든 동물들이 힘들다더라구요. 덕분에 저도 선배가 사준 온도조절 팔찌가 아니면 진작에 기절했을 걸요?”

“하긴, 너는 저번에 갔던 섬에서도 더위에 죽으려고 했었지.”

다나가 그럴 만 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티르시도 힘들어 보이는데, 혹시 로마니아 사람들은 더위에 약한가.

근성이 부족하군. 에어컨 없인 여름을 못 지내는 K-피플 강북호와 좋은 승부가 되겠어.

《마부는 함께 오신 듯 한데, 마차 예약은 하셨습니까?》

파라오의 선박을 관리하는 사람이 말했다.

배의 값어치를 생각하면 이 사람도 최소 귀족은 될 텐데, 파라오의 손님이라서 그런지 태도가 꽤 공손했다. 나도 전직 유교맨으로서 정중한 자세로 응대했다.

《아니오. 마차는 대여할 생각이고, 말은 저희가 준비할 것입니다.》

《말을 준비한다니요?》

바닷바람 냄새가 풍길 듯한 남자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렇겠지. 발퀴리에가 승마복을 입고 마부처럼 대기 중이긴 한데, 배에 말을 태워 온 것도 아닌 우리가 무슨 놈의 말을 구한다는 말인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나는 프랑을 불렀다.

“프랑.”

“아, 응!”

그녀는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는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지금, 허벅지의 가터벨트에서 뽑지 않았나? 우리 프랑의 직업이 도적이라지만 호신용이라기엔 살짝 살벌한데. 파티 중에는 빼 놓게 해야겠다.

“얍!”

귀여운 기합을 지르며 던진 나이프가 〈백토인형(Doll of White Clay)〉이 되었다.

점토이며 사철이고, 바위이며 금속인 골렘.

천변만변으로 변화하는 골렘은 금속 로보트처럼 보이는 말로 변신했다. 로봇 만화 같은 곳에서 볼 법한, 간지 넘치는 말이었다.

《이 녀석들을 타고 갈 겁니다.》

《그, 그렇군요. 소문이 무성한 마나 부여 기술입니까?》

《그런 셈이죠.》

발퀴리에한테 마부를 맡기는 건 좋은데, 이 녀석들은 학습형 A.I.다.

다시 말하자면, 배우지 않은 건 못 한다.

탄생 시점에서 가진 기술은 2개다. 룬 마법과 【게르튀르】.

그밖의 것들은 배워나가지 않으면 못 한다던가.

자기가 말을 탈 줄은 아는데 마부로서 마차를 끌 줄은 모르더라.

결국 프랑이 만든 말 모양 골렘을 타고 가기로 했다. 보통 말이랑은 다르니까 홍보 효과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우리를 태운 마차가 잘 깔린 마차 전용 도로를 타고 달렸다.

혈통 좋은 명마랑은 또 다른, 빛을 반사해대는 로봇 말이다.

승마복을 빼 입고 마부석에서 얼굴 마담처럼 고삐를 쥔 발퀴리에의 늠름한 미모까지 더해지니까 거리의 이목이 모이는 걸 달인의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허어. 처음 보는 말이랑 마부인데. 어디 외국 귀족 나리인가?

─에이. 그래봤자 마차는 빌린 건데요, 스승님.

─이그, 멍청한 녀석아. 마차랑 말을 옮기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나 아냐? 게다가 저건 마차 대여소에서 돈만 준다고 빌려주지 않는 최상등급 마법 마차야!

─아 씨, 언제는 귀족의 수준은 말이랑 마부만 봐도 알 수 있다매요! 때릴 것까진 없잖아요!

말이랑 마부가 귀족의 수준을 보여준다니. 마치 지구에서 자동차를 뭐 타느냐로 수입을 가늠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픽 웃었다.

“골렘 말이라. 유행을 타면 많이 팔리겠네.”

물론 나는 머리 붙잡고 고생할 생각 없다.

다른 사람 시켜야지. 엘펙스 공방 같은 곳.

원래 진짜 큰 돈을 주무르는 건 사람을 부리는 사람이라지 않은가? 노동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건 별로 내 고향 지구만 그런 건 아니다.

에어컨을 튼 것처럼 시원한 마차를 타고 왕성에 도착했다.

살다살다 내 인생경험이 레벨 업을 한 끝에 왕 앞에까지 왔구나.

신이랑도 만나본 주제에, 그리고 파라오도 이미 만나본 주제에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싶은 생각은 스스로도 들지만 말이다.

다행히 경험이 쌓인 덕에 긴장감은 덜 했다.

취임식 회장에서, 파라오를 기다리는 동안 하는 일도 평소와 다름 없다.

나한테 달려와서 말을 거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우리 아내들은 그 흐름에서 적당히 빠져나가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알리씨크의 영주 대리가 찾아와서 영주 자리를 맡았다던가 하는 얘기를 했다.

알리씨크 영주는 제 인생의 마지막을 예술활동에 매진하고 있댄다. 시다나브의 초상화라도 그리려나.

아스트레완 연맹이라는 곳의 귀족들도 찾아와서 담소를 나눴다.

아스트레완 뭐시기가 무슨 연맹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차마 묻지는 못했다. 당연히 알지? 하는 눈빛이더라고. 그게 뭔데 씹덕아. 큰 손이니까 봐 준다.

아무튼 그런 머리가 빠개질 듯한 과정도 산전수전을 겪은 지금은 단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이 자신의 성장을 실감하는 건, 예전에 어려웠던 일을 쉽게 해내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다.

하긴. 달인의 사고속도와 신체 조율을 쓴 포커 페이스까지 가지고 이 정도의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쓰나. 사교활동도 적응하면 눈치싸움 같은 거더라고.

그리고, 그렇게 침착하게 기다리다 보면 시간의 흐름은 결말을 품에 안고서 우리에게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파라오 셰드멘호테프의 입장이십니다!!!》

귀족들이 마시던 술을 시종들의 트레이에 올려두었다. 우리 아내들도 오종종 모였다. 그러게 이런 자리가 어색하면 내 감시 따위 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니까.

단지 한 사람, 티르시만은 내 곁으로 오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 시끄럽기만 한 취임식의 도입부에서 스스로의 추억에 근거한 감흥이라도 건진 것처럼, 단지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편히 있으라.》

당대의 파라오는 남자였다. 갈색 피부 위에서 보여지는 단단한 근골은 그가 정무로 바쁜 와중에도 많은 시간을 단련에 매진했다는 증거다.

세헤테피브라를 생각하면 파라오에게 생전의 육신이란 사후에 벗어던질 껍질에 불과할 텐데, 그에게서는 자신의 허물을 허물로 두지 않는 진중한 눈빛이 보였다.

검소한 옷도 그렇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게 전해지는 남자였다.

물론 그 이상은 나한테 남자를 관찰하는 취미가 없기에 관뒀다.

솔직히 말하면 얼굴에 감은 웃긴 장식이랑 황금 턱수염 장식 때문에 웃음을 참기 힘들어서 그랬다. 존나 그냥 벽화에서 튀어나온 새끼처럼 생겼다고.

이 새끼, 진심인가? 웃통을 까고 화려한 바지에 목도리 도마뱀 같은 장식을 와꾸에 두른 게 위엄의 상징이야? 세헤테피브라도 그렇고 파라오는 어디 좀 이상한 게 국룰인가?

여기서 웃으면 최소 불경죄로 투옥이겠는데.

《태양의 빛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그늘 아래에 그림자를 만들지.》

권좌에 앉은 그의 입이 열렸다.

《나의 왕국도 같다. 태양신께서 점지해 주신 이 터전에서 나는 축복받은 야트라우 강과 자랑스런 신민들을 얻었지만, 동시에 몇 개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장황한 서론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잠깐 방심한 순간, 파라오는 나를 쳐다봤다. 쓰벌, 깜짝아. 왜. 뭐요.

《태양은 정해진 경로를 나는 존재다. 아무리 더 빛나고자 애쓴들, 그늘에 숨는 데 익숙한 쥐들을 박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파라오의 얘기에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왕권신수설── 아니, 진짜로 신에게 그 왕권을 받은 존재라지만, 파라오가 자기 능력으로 못 하는 일이 있었다고 공언해버린 것 아닌가.

이런 시발. 말하자면 대통령이 ‘뽑아줘서 고맙긴 한데 부동산은 못 잡겠음’ 하고 인터뷰에서 말해 버린 것과 같은 상황 아닌가.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다들 쉬쉬하며 공인하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말하는 거랑은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 그늘을 걷어준 영웅이라면, 비록 태양은 되지 못할 지언정 인세에 내린 횃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심지어 그게 남을 띄워주기 위한 빌드업이라면?

─니가 〈임모르탈리스〉를 조져놨다매? 새끼, 잘 했어!

그런 말을 최대한 빙빙 돌리고 가능한 올려쳐서 만든 칭찬 멘트라면?

─홱!

─홰액!

귀족들의 시선이 시발? 하는 느낌으로 내 안면 주변으로 모이길래, 나는 무려 마나까지 써서 라리루라에게 배운 신체 조율을 안면근육에 전개했다.

무표정은 건방져 보이니까 안 되겠고,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겨서 은은한 미소를 띄우도록 하자. 마치 아침 드라마에서 죽기 직전에 유언을 남기는 표독스러운 할매처럼!

시발, 파라오 와꾸 때문에 배 아파 뒤지겠는데 일부러 희미한 미소만 지으려니까 진짜 뒤질 맛이었다.

역시 명계의 지배자 호루스의 화신이시다. 나를 순식간에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군. 이게 그 토트의 시련이지? 통과하면 뭐라도 주냐?

《내가 이 자리를 단순히 우리의 벗, 로마니아에 보낼 인재를 선별하는 자리로 여기지 않는 것은 오직 그 때문이다.》

파라오 뭐시기 어쩌구 씨는 왕의 상징이라는 찐 태양의 십자를 내걸며 말했다. 다시 보니까 눈에 눈화장인지 마스카라까지 했다.

시발, 그래. 저것도 전통인지 뭔지겠지. 타국의 문화를 존중할 줄 알아야 옳게 된 꼴마초다. 나는 파라오에게 이목이 쏠린 순간 몰래 심호흡을 했다.

《그리하여, 나 파라오 셰드멘호테프는 이 자리에서 선포하겠노라. 태양신께 물려받은 땅에서 큰 그늘을 걷어내고, 신민의 평화를 선물한 노르드여. 그대에게 나라를 대표하여 감사한다.》

…짝짝짝짝짝!!

파라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의 무수한 갈채가 쏟아졌다. 나는 영화 수상식에서나 봤던 태도로 가볍게 인사했다. 연습대로다.

하지만 귀족들의 박수 소리엔 의문이 섞여 있다.

그럴 만 했다. 나는 저 파라오에게 서면으로 한 발 앞서 모종의 선물을 받고 이 흐름을 알고 있었지만, 소식을 모를 그들로서는 당황스럽겠지.

─여기는 노르드의 명예 귀족 취임 자리가 아니었나?

─파라오의 찬사는 귀족위를 준 후에 나오는 게 평소의 절차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의도치 않게 통수를 치게 된 모양새라서 살짝 미안할 지경이네.

오늘 이 자리는 명예 귀족 취임식이 맞다.

‘근데…… 내 취임식이라고는 한 적 없었지?’

나는 이번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편지 너머로는 상상도 못 했던 파라오의 우스꽝스러운 얼굴보다 더 웃음을 참기 힘든 일이 있었으니까.

《이어서 선포한다. 오랜 맹약에 의거하여, 신성제국의 귀족이 될 자는 이 앞으로 오라.》

파라오는 그렇게 말하고, 왕권의 상징인 태양의 왕홀을 내렸다.

저벅, 저벅….

왕의 부름에 응해, 당사자가 단상을 올랐다.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헤─ 벌렸다.

왕의 권좌에서 살짝 아래. 왕에게 직접 찬탄과 포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어 보였다.

내 벼락치기 연습이랑은 비교도 되지 않는 품위 넘치는 예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가끔씩 덤벙대기도 하고 연애에도 서투르며, 반한 남자를 향한 사랑을 주체 못하는 귀여운 면모도 있지만.

진짜 고귀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여인이니까.

《그대, 아르마슈나스의 영애. 티르시.》

파라오는 왕권의 상징을 그녀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그대 자신의 활약상과, 영웅 노르드의 강력한 요망에 따라…… 그대의 어깨에 고향 로마니아의 존귀한 책무를 짊어질 자격을 내리겠노라.》

《비할 데 없는 영광입니다.》

파라오는 진중하게 수긍하고서, 신하들더러 들으라는 듯 외쳤다.

《나의 선조, 세헤테피브라의 피라미드를 흑마법사의 손에서 구해내고! 왕가의 악적 〈임모르탈리스〉를 척결하는 데 혼신을 바친 그녀에게! 한때 잃었던 가문의 명예를 되찾을 권한을 내린다!》

스윽….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그의 시선이 넋을 빼앗긴 귀족들에게 꽂혔다.

《불복하는 자는 있는가.》

《어, 없사옵니다!!!》

《파라오의 영단에 축복 있으라!!》

《아르마슈나스의 영애에 축복 있으라!!》

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내가 칭찬받았을 때보다 곱절은 큰 갈채였다. 나와 아내들은 웃음을 지으며 그 박수 세례에 한 손 보탰다.

그리고 티르시는, 모든 갈채와 눈부신 왕성의 빛무리가 그저 배경 장식이라도 된다는 듯, 왕좌를 등지고 내게 미소 지었다.

살짝 눈물이 고여 있는 게, 어딘지 모르게 그녀답지 않아서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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