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99화 (599/1,009)

인간에 의한, 운명의 어그러짐.

바이콘의 정원섬에서 선지자의 분신 같은 존재와 만났을 때, 그 고대의 바이콘 신족 예언자도 그런 얘기를 했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간이란 ‘혼돈의 총아’. 운명을 거역하는 힘을 가진 종족이다. 막대한 힘을 가졌지만,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들과는 다르지.”

신과는 다르다.

턱을 쓰다듬던 나는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기는한데, 더욱 명심해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라리루라는 그런 내 어깨에 오뚝이처럼 몸을 부딪혀대며 말했다.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서 예지 자체가 빗나가는 일이 있다는 건가요~?”

“빗나간다? 아니, ‘바뀌는’ 것에 가까울 테지.”

과일 접시를 당긴 베로니카는 포크를 들었다.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자. 이 과일은 프랑이 좀 전에 깎아온 거였지?”

“응. 노르가 주문했던 거야.”

나는 끄덕거렸다. 베로니카는 과일을 좋아하니 말이다.

이 사막의 과일은 당도가 높더라. 베로니카는 그 마음이 기분 좋았던 듯 살짝 웃고서 말했다.

“예지란 것도 결국은 궁극의 예측, 혹은 예상에 가깝다. 오늘 아침에 룸 서비스로 과일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걸 프랑이 깎아올 거란 예상도 가능하지.”

“그건 그래.”

과일을 깎거나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리는 거에 은근 보람 같은 걸 느끼는 성격이지 않은가, 우리 프랑 마망은. 이제는 나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만약 우리들 중 누군가가 ‘껍질을 전부 깎아달라’고 부탁했다면?”

─사각. 베로니카의 포크가 껍질이 장식된 과일에서 껍질을 긁어냈다.

프랑은 자기 성격을 생각해 보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으음……? 아마 부탁받은대로 깎았겠지? 오늘 건 껍질에 영양이 더 많대서 남겨둔 거야.”

“좋다. 그러면 다른 가정을 해 보지. 룸 서비스 담당 직원이 주인님의 주문을 듣고서, 고의로 이 과일을 엎어서 뭉개버리거나 했다면 또 어땠을까?”

“아니 시발, 직원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런 짓을 혀.”

“우리 주인님의 문란한 생활에 수컷으로서 질투한 것이지.”

시발, 굳이 그런 생생한 예시를 곁들일 필요가 있냐고.

나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는데, 설명하는 폼이 진지해서 끼어들질 못하겠다. 티르시만 얼굴을 붉힌 걸 보면, 우리 아내들도 상당히 성적으로 개방적이 됐구나~ 싶을 뿐이다. 감개가 무량하군.

라리루라는 학생처럼 거수하며 활짝 웃었다.

“정답! 과일을 못 먹은 만큼 더 빨리 선배랑 꽁냥꽁냥 할 수 있다!”

“의외의 답변이지만, 그것도 오늘 아침 이 과일 몇 알이 우리 테이블에 올라오기 전까지 있을 수 있던 미래의 하나겠지.”

베로니카는 포크로 벗겨낸 껍질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이렇듯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면 미래의 모습은 변동된다. 그렇기에, 예지 능력으로 미래를 본다면 그때마다 ‘바뀐 미래’가 보일 터.”

“그러면 미래를 보는 의미가…… 응?”

고개를 갸웃거리던 프랑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구나. 행동에 따른 결과를 보는 게 가능한 거니까, 사용하기 나름으로는 바뀌지 않는 미래를 보는 것보다 편할 수도 있겠다.”

“실험 등을 실제로 시행하기 전에 결과를 볼 수 있는 셈이니까요. 어지간하면 실패하지도 않게 되겠죠. 원하는 결과를 내기도 쉬울 거고요.”

프랑이 내린 결론을 티르시가 받았다. 이야기가 훅훅 진행되서 좋구만.

다나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뭐야? 〈편찬대대〉의 행동은 그 놈 예지능력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 뭔가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을 먼저 묻어버리는 것도 그래서인가?”

“십중팔구는.”

성능 좋은 예측 시뮬레이터 같은 것 아닌가.

말하자면 가차 시뮬레이터에서 5성 SSR 같은 게 뜰 때까지 기다려보는 사고방식…… 아니지, 기상 예보 같은 게 더 비슷할까.

예지로 본 미래가 변화한다고 쳐도, 그건 머릴 써서 세운 계획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완벽한 예지도 완벽한 계획도 없다.

그러면 차라리 예지 쪽이 믿음직스럽긴 하겠지. 다나는 포크를 펜처럼 손에서 돌리며 경멸스럽게 중얼거렸다.

“대단한 선무당 납셨군. 룬 스톤을 연구하려는 학자들을 죽이거나, 유니콘들을 먼저 쓸어버렸던 것도 장차 자기들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그랬다?”

“그 결론은 틀리지 않은 듯 하다만, 적지 않게 의문은 남는군.”

과일을 좋아하는 베로니카는 순식간에 한 접시 분량을 해치우고서 손가락을 핥았다. 우리 여신님은 참 먹을 걸 사주는 보람이 있다니까.

“뛰어난 예지능력이 있을 놈들이, 왜 우리들의 행보를 예지하지 못하지?”

“……읽기 힘들어서 아닐까요?”

우리의 사정을 들은지 얼마 되지 않은 티르시는 확신은 없다는 것처럼 주저하며 말했다.

“노르드의 미래를 예지하는 게 쉽지 않은 거면 앞뒤가 맞아요. 그럴 만한 이유도 여럿 있고……”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은 어떻고요?”

“우리 남편놈이 〈편찬대대〉에게 이긴다는 거? 그건 당연히 구라겠지.”

다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가 나를 보고 급히 정정했다.

“아! 그럴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새끼가 그런 미래를 보지는 않았을 거란 얘기다? 진짜로 지들이 개털리는 미래를 봤다고 쳐도, 그걸 왜 쪼개면서 너한테 말하겠어.”

“나도 아니까 당황할 것 없어요, 이 눈나야.”

그걸 말하자면 지가 예지능력이 있다고 밝히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뭐든 간에 원인을 알면 대처도 가능하다. 자기 힘을 자랑스럽게 밝힐 만큼 허술한 빡대가리로는 안 보였던 만큼, 불길한 느낌은 늘어났을 뿐이다.

“뭐, 아무렴 어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저 불길해 하기만 하진 않았다. 어깨를 으쓱이고 아내들에게 픽 웃어줘도 될 만큼 재력, 권력, 그리고 일신의 무력이 쌓였으니까.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지. 처맞기 전까지는.”

예지 능력이고 뭐고 알 게 뭔가.

수십 년 뒤의 미래를 알아? 그 미래를 입맛대로 바꿔?

‘하고 싶으면 꼴리는대로 해 보라지.’

알아도 막지 못할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예를 들자면, 내 앞에 놓인 이 정력감퇴제 쥬스 같은 거 말이다. 씨발 자리에 앉자마자 놓이더라. 장어와 아스파라거스로 차린 저녁상도 얘보다는 덜 호러스럽겠지.

“그 새끼가 뭘 꾸미고 있던 간에 우리들이 때려잡고 천벌을 내려주면 그만이지. 우리가 고민하며 끙끙대고 있으면 그거야말로 놈들이 바라는 바일 걸.”

머리는 굴리되, 그게 고민이나 황제들이나 걸릴 법한 의심병으로 발전되면 안 됐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 가족의 행복이다.

모든 노력은 행복을 얻으려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닌 것이다. 나는 복수와 아내들의 말, 그리고 나 자신의 각오에서 그걸 배웠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다나는 씩 웃으면서도 살짝 살기를 흘렸다.

“니 또 반쯤 뒤져가면서 지랄하거나 하진 마라? 이젠 너 뒤지면 과부만 다섯이야, 다섯. 진짜 니가 뒤지면 못해도 나 하나는 따라 죽을 테니까 늘상 명심하라고, 알간?”

“이 마누라가 남편의 어깨에 마음의 짐을 얹네. 랩실하고 침대 아닌 곳에서는 내조해줄 생각 좆도 없죠? 현대 남녀평등 사회의 귀감이죠?”

“네가 선택한 가장의 무게란다. 악으로 깡으로 견디렴.”

“호에……? 이게…… 내가 꿈꾸던 결혼생활……?”

“그 와꾸로 호에는 시발아. 아침 먹기도 전에 속 게워내겠네.”

낄낄대며 웃는 나랑 다나에 이끌려서 우리 가족 전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웃음벨 타임이 끝나자, 티르시가 헛기침을 했다.

“으흠……. 그래서, 알고 계시리라곤 생각하지만 다시 한 번 소개 드릴게요.”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티르시는 정중한 예법을 다하며 허리를 숙였다.

“티르시 아르마슈나스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오늘을 기해 정식으로 노르드의 아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오오. 그래…….”

“잘 부탁…… 부탁하는 게 맞나? 아무튼 잘 부탁하마.”

“저희는 늘 어물쩍 넘어가면서 들어왔으니까, 좀 새삼스럽네요…….”

정식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기 전부터 동거하던 그녀들은 그런 티르시의 정중한 인사가 조금 당황한 듯 했다.

하긴, 우리가 지금까지 좀 술에 물 타듯 물에 술 타듯 하긴 했지.

“조금 표현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서 오세요. 저희 앞으로도 잘 지내요!”

─짝짝짝짝!

하지만 프랑이 싱긋 웃으면서 환영하듯 박수를 치자, 우리 가족들도 어색하게나마 열심히 갈채로 티르시를 환영하게 되었다.

다나는 멋쩍게 웃는 그녀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여러모로 다사다난한 가정사의 집안이지만, 뭐 익숙해지면 지낼 만 해요. 아, 맞다. 앞으로는 말 놔도 될까요? 티르시 씨도 편하신 대로 하시구요.”

“네, 상관없어요. 그리고 간략히 들은 내용만도 이미 버겁긴 해요…….”

바이콘, 신족, 오딘의 후계자, 이세계, 지구 같은 얘기를 한꺼번에 주입당한 티르시는 골치가 아픈 것처럼 머리를 저었다.

왠지 미안하네. 1년 정도 걸려서 쌓은 대장정을 1시간으로 요약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러면 환영 파티라도 해 버릴까요♡! 어차피 다들 오늘은 한가하시죠?”

라리루라는 기운 넘치게 일어나선 V자로 만든 손가락을 눈에 가져갔다.

“선배랑 티르시 언니의 귀족 취임 축하까지 다 더해서, 성대하게 놀아보자구요! 아, 저희들끼리만 놀면 조금 지루하려나요☆? 차라리 파티장을 크게 빌려서─!”

“달아오르는 중에 미안하지만, 파티를 할 거면 이틀 정도만 미루자.”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라리루라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어깨를 떨어트렸다.

“네~? 왜요~? 어차피 저희랑 쑤껑쑤껑 퓻퓨~ 하는 것 말고는 당장 하는 일도 없으시면서…….”

“돌려 말하려고 노력한 게 반대로 더 천박하게 들리는 어휘네.”

섹스촌이에요 섹스촌! 을 외치는 라리루라에게 딱밤을 날려줬다.

“취임 축하를 겸하는 파티라면 며칠만 참았다가 아르마알스 가문에 부탁하자. 어르신이라면 분명 아는 사람만 불러도 성대하게 해 주실 거야.”

“흐음?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았느냐?”

“남았지. 어떤 의미로는 제일 중요한 일이.”

나는 베로니카를 쳐다보았다. 포크를 물고 있던 그녀는 왜 쳐다보냐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그 맹한 표정이 웃겨서 나는 슬쩍 웃고 말았다.

“너희 일족의 저주를 풀러 가자, 베로니카.”

“……뭐?”

─땡그랑! 접시에 떨어진 포크가 청명한 소리를 퍼트렸다.

놀라긴. 여신끼리 삼자대면이나 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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