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가 강인해지면 그만큼 잃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자다 일어났을 때가 그렇다. 아침의 달콤한 권태로움이나 늦잠의 행복을 느끼지 못할 만큼, 내 육체는 일반적인 피로와 많이 멀어졌다.
물론 이 몸으로도 좆빠지게 구르면 그런 피로를 느끼는 건 가능한데, 예전의 척척학사 때처럼 잠에 취해서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있지는 못하게 됐다.
좋은 일이라고 하면 좋은 일이지만, 자다 깨면 마치 졸리지도 않은데 억지로 낮잠 시간을 가지게 된 유치원생이 된 것 같을 때도 있다.
“……으음.”
단지, 오늘은 아니었다. 보통 때보다 훨씬 진한 꿈이었기 때문인지 눈을 떴을 때도 머리에 안개가 낀 듯, 오랜만의 숙취 같은 것을 느꼈다.
꿈에서 뭔가 당했나? 하는 생각에 거울─이랑 오딘의 눈─으로 체크.
따로 문제는 없었다. 그냥 잠을 너무 깊이 자다 깬 반동인가 보다.
“아으…… 노르드…… 거기는 안 되요…….”
옆자리에는 어젯밤의 피로로 넉다운된 티르시가 내 팔을 잡고 있었다.
슬쩍 팔을 빼낸 나는 수마의 유혹을 떨쳐내고서 후딱 기상했다.
‘네페르티티보다 내가 먼저 일어났겠지?’
방에 찾아갔는데 그새 사라졌기라도 했다간 곤란했다. 안 그래도 그 시그룬드인가 하는 새끼가 잘 풀린다 싶을 때 초를 쳐 버려서 흐지부지 됐으니 말이다.
앞서 말했듯, 혹시라도 그녀가 무모하게 복수를 시도한다면 그 꼴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여러 번이나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이이기도 하다.
이건 내 교수 슬레이어로서의 의무인 것이었다.
─콩콩.
“네피…… 네페르티티. 일어나셨나요?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까치집을 튼 머리를 매만지면서 그녀에게 내준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른 다시 닫았다.
“갓뎀 쒯.”
침대에 웅크린 채로 쿨쿨 잠든 네페르티티가 알몸이었던 탓이다.
이불마저 걷어찼기에 순간적으로 뽀얀 언덕이 보였다. 위쪽 언덕이었는지 아랫쪽 언덕이었는지는 따로 말하지 않는 걸로 하겠다.
‘……왜 남의 집에서 옷을 벗고 자?’
잘 때는 훌러덩 벗고 자야 만족하는 사람인가?
나는 조금 당황했다가, 결국 빌려준 방이라고는 해도 여성의 침실에 제대로 허락도 안 받고 들어간 내 잘못이라고 인정을 했다.
─후으으…….
그렇게 내가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자, 방 안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페르티티가 일어난 듯 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뒤로 물러섰다.
발퀴리에 4마리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작게 쏘아붙여주자 발퀴리에는 눈으로 답했다. 아침 기지개를 오래도 펴고 있는 사타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시발, 맞네. 나 이러고 네페르티티 방에 들어갔구나.
나는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손을 저었다.
【쉿쉿, 저리 가. 니들 그거 시선 강간이야.】
【제 2등급 명령권자입니다. 현재 수행 중인 제 1등급 명령권자의 명령을 취소하실 수 없습니다.】
아니 시발 아내님들이 붙여놓은 감시였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약간 불편하지만 지금 이 꼴을 아내들 본인한테 들킨 것보단 나았다.
어쩔 수 없나. 나는 신체 조율을 사용해서 몸의 불수의근을 제외한 혈류를 최대한 조절했다. 굳이 말로 하자면 심호흡을 깊게 해서 흥분을 가라앉힌 것이었다.
그렇게 하자 발기는 금방 풀렸다.
발퀴리에들은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대기했고, 나는 달인의 오감에 네페르티티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려서 거리를 조금 더 뒀다.
─달칵.
밖으로 나온 네페르티티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모습이었다.
아마 그녀에게는 그게 ‘졸리다’는 최대한의 표시겠지. 꽤 희미한 표정이었지만 그런 표정변화마저 드문 그녀였기에 상당히 인상이 깊었다.
“……으?”
그녀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고서는 잠깐 멈칫했다.
“일어나셨군요.”
팔짱을 풀며 잘 잤냐고 인사치레를 하려다가, 그 파란만장한 꿈을 꾼 걸 뻔히 아는 사이인데 그런 말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는 생각에 멈췄다.
─터벅.
결국 머리가 인삿말을 생각하는 동안 몸은 원래 지시받은대로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네페르티티는 흠칫 놀라면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나려는 기색을 보였기에 나도 발을 멈췄다.
무서우리만치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네페르티티?”
“……왜?”
어색함을 파타하고자 이름을 부르며 접근.
─샤샤샥.
네페르티티는 1보 전진하는 나에 대하여 3보를 후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뭐지 시발.
나르메르-나일 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인가.
“……나, 갈게. 어제는 고마웠어.”
내가 병신 같은 생각에 사고력을 빼앗긴 순간, 네페르티티는 뭐라고 더 말하지도 않고 등을 돌려버렸다.
“잠시만요!”
그건 1초라도 여기 있기 힘들다는 듯한 움직임이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달려서 꿈에서도 그랬듯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현실이기에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한 작은 어깨는 내 손아귀에 여유가 남을 만큼 가녀렸다. 네페르티티는 불에 데인 듯 펄쩍 뛰었다.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당황한 듯 했다.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손바닥이 터질 듯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전했다.
네페르티티는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냐.”
“예?”
“떠나려는 게 아냐.”
그렇게 말한 네페르티티는 조금 당황한 것처럼 뭔가를 꺼냈다.
하지만 네페르티티는 그녀답지 않게 손을 떨고 있었고, 그만 그 물건을 떨어트릴 뻔 했다. 동시에 낚아채려던 나와 그녀는 숨이 섞일 거리에서 눈이 맞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은 찰나였다.
─쿵!
네페르티티는 놀란 듯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고선 내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뒤로 데구르르르─ 구르며 번개처럼 일어났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훈련된 움직임이었다.
“그거, 맡기고 갈게.”
나려타곤을 펼치며 일어선 그녀는 앞머리 모양 같은 걸 신경쓰는 소녀처럼 머리카락을 계속 매만지면서 말했다. 딱딱 전해지는 선명한 목소리는 다 어따 팔아먹었는지 개미 기어가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당황하면서, 건네받은 것을 내밀었다.
“이 조각상을요? 소중한 것 아닌가요?”
내가 떨어지기 전에 캐치한 건 보옥을 감싼 도마뱀의 조각상이었다.
꿈에서 본, 네페르티티의 오빠의 유품이다. 아마 그녀가 나한테 하려는 부탁도 이거랑 관계가 있을 것이고 말이다.
“응. 내 목숨만큼…… 어쩌면 목숨보다 소중한 보물.”
짧은 치마를 잡아내리며 네페르티티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약속이야. 다시 온다는 약속.”
“위험한 짓을 하러 가는 건 아니구요?”
“안 해. 네가, 하지 말랬으니까.”
듣는 사람이 다 낯뜨거워지는 멘트였다. 네페르티티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제는 머리칼에 얼굴이 숨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러났다.
“몰라…… 모르겠어. 그치만, 그냥……”
횡설수설하던 네페르티티는 처음 발표하러 나온 어린애처럼 손으로 팔이며 목 뒤 같은 곳을 긁고 바동거리다가, 끝내 할 말을 정한 듯 말했다.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
“뎃?”
“갈게. 또 봐.”
네페르티티는 그렇게만 말하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버렸다.
─덜컹! 문은 그 기세에 거칠게 닫혔고, 문밖의 네페르티티는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줄 몰랐던 듯 버벅거리며 기척을 내다가 끝내는 달려가버렸다.
“내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
나는 중얼거리면서 조각상을 내려다 보았다.
‘맞다. 꿈속에서 물어봤었지.’
나를 보면 자기 오빠가 생각난다길래 싫으냐고 물었었는데, 지금 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인가.
확실히 그녀의 오빠와 내 생김새가 조금 비슷하기는 했다. 하지만, 좋다 싫다고 아니고 내 얼굴을 보면 기분이 이상하다니?
어쩐지 거하게 욕을 처먹은 기분이었다.
“아.”
그렇게 멍하니 있던 나는 계속 쳐다보고 있었을 발퀴리에들을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엔 4마리의 살인 천재 시녀들 말고도 미모의 유부녀가 한 사람.
라리루라는 배신당한 표정으로 나를 삿대질했다.
“아─! 선배가 또 새 여자를 꼬시고 있어─!”
“이런 제기랄.”
저렇게 말하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마를 탁 치고서, 우다다 하고 달려와선 내 손을 잘근잘근 깨무는 라리루라의 진심 반 장난 반의 질투를 받아줘야만 했던 것이다.
***
“과거의 기억일 텐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내들이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한 차례 설명을 거치자, 잠이 덜 달아난 듯 목을 두드리던 다나가 중얼거렸다.
“그게 말이 되나? 책 속의 등장인물이 ‘어젯밤 술 3병 마시고 골아떨어졌던 누구누구야’ 하고 내 행적을 읊는 거나 다름 없잖아?”
“가능하긴 하죠? 논리적으로 보자면.”
라리루라가 대답했다. 마법에 깊은 조예가 없을 그녀지만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그녀는 포크로 과일을 푹 찌르며 말했다.
“미래예지라는 게 있잖아요. 소설 속 등장인물이랑은 달리, 그 시그 뭐시기라는 나쁜 인간은 일단 현실에 존재하는 과거의 인물이죠?”
“그렇지.”
“그러면 가능하겠네요. 그때 그 날, 언덕 위에서 미래를 예지한 거에요.”
─휙! 라리루라는 포크로 나를 겨눴다.
“언젠가 선배가, 에퀴녹스의 기억을 통해서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을 볼 거라고요. 그 다음엔 그냥 허공에다가 대고 예지한대로 말하면 되죠.”
“……20년도 뒤의 미래를 읽었다? 그것도 인간 1명의 세세한 행적까지?”
티르시는 입을 가리며 그게 마법학적으로 대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역설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을 꺼낸 라리루라부터가 반신반의하는 느낌이었으니까.
다들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그게 대체 얼마나 초월적인 능력인지.
“뭐, 그렇긴 한데…… 그것도 이상하긴 거기서 거기 아냐?”
머리를 긁은 다나는 라리루라의 의견에 반론을 내놓았다.
“만약 그런 능력이 있으면 왜 그 새끼는 자기네 조직이 펑펑 터져나가는 걸 못 막는데? 혹시 미래라는 게 그렇게 제 맘대로 볼 수는 없는 건가?”
“그 또한 있을 법은 하다만, 필시 더 근본적인 문제겠구나.”
“근본적인 문제라니?”
다나는 의아한 듯 되물었지만, 나는 베로니카가 하려는 말에 짐작이 갔다.
몇 달밖에 안 된 일이었으니, 눈치를 못 챈다면 그게 더 웃기겠다.
“인간에 의한 운명의 어그러짐이다.”
베로니카는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