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왔나?’
슥─. 주변을 살펴보는 나.
눈이 마주친 후에 환상을 보기는 했지만, 돌아온 세상에 변화는 없었다.
내가 환상 속의 세상에서 여신의 손바닥에 올라가거나, 그녀와 대화를 나눈 사실 자체가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창세의 권능인가?’
설마, 아니겠지. 지상에 개입하기를 무엇보다 꺼려하는 사티스다.
아마 신탁의 일종이라고 보면 될 듯 했다. 다른 이들은 몇 초 지나지도 않은 것처럼 여전히 나를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보러 왔던 거야. 정말로 뭔가를 부탁해도 될 만한 상대인지. 내가 흘리는 말 한 마디까지 전부 단서로 삼아서.
“크흠, 흠. 관찰이라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얼버무리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의식해서 만든 미소였다.
하지만 사티스는 그딴 연기는 다 알아차린 듯이 한숨을 지었다.
─꼴사납게 단서를 흘리며 다닌 끝에 전부 까발려졌구나. 이래서야 누가 사냥의 신인지. 오딘도 썩 대단한 아이를 후계자로 삼았어…….
그렇게 중얼거린 사티스는 처음으로 감정 섞인 눈초리를 지었다.
─좋겠지. 이렇게 되었으니 전말을 전해주마. 네 그 생각머리가 애먼 곳으로 튀어서 작금의 성실한 아이들을 의심해도 곤란하니.
“뎃?”
나는 갑자기 뭔 소리인가 하는 마음에 눈을 끔뻑거렸는데, 사티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얘기를 우다다다 쏟아냈다.
─처음에는 내 눈을 흉내내는 짓거리가 몹시도 괘씸했다만, 차차 마음을 바꾸었다. 니플헤임은 계속해서 가혹해지고, 라와 다른 신들이 아이들에게 준비한 낙원은 유지할 수 없었다.
“예? 아, 예.”
─너도 발할라는 알겠지. 그 년을 모방하는 건 몹시 속이 곪아들어갔다만, 그렇다고 내 아이들을 저딴 지옥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어, 옙. 그렇습죠.”
─때문에 권능을 의무화시키고, 과업을 시도할 용사들을 제외하면 평생 잡지 못할 사냥감을 맹세하게 시켰다. 이렇게 하면 현세에 개입하지 않고 내 아이들만이라도 곁으로 데려올 수 있겠더군.
뭔가 쌓인 둑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사티스는 자기 과거사를 아는─알아채버린─ 나에게 아무런 거침도 없이 사정을 밝혔다.
─고로, 시초는 나의 아이들의 죄였던 사냥개의 권능도 작금에는 못난 여신을 믿어주는 아이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고리가 되었다. 따라서 이는 내 뜻이다. 이해하겠느냐?
“옙.”
─그렇다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오해며 의심 같은 것이 일으키는 자중지란을 보고 싶지 않구나.
아마 나더러 저런 짓을 한 사티스 교단은 뒤가 구린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지 말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진짜 자기 신도를 열심히 챙기는 여신님이시군.
─여신상에 남겨둔 마나도 끝이 가깝군. 더는 나 스스로 인세에 강림할 방법도 남지 않았으니, 좀 더 빠르게 가겠다.
사티스는 말을 다하고서 오프툼을 노려보았다.
─그대, 나의 사냥개 오프툼아.
《예! 부르셨나이까!》
─과업을 내리마. 네 혼은 이 자리에서 거두지 않겠다. 너는 이 세상에 더 미련을 가지도록 하라.
《……예?》
오프툼은 멍하니 되물었다가 말뜻을 알아차리며 경천동지하듯 놀랐다.
사티스는 눈을 부라렸다.
─불만인 모양이구나.
《아, 아뇨. 따로 불복하려는 것은……》
─내가 용사를 선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중간 가지】의 안녕(安寧)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럴진대 최근의 너희들은 무어냐? 여명에 미련도 없이, 모든 걸 초탈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아니더냐?
《그, 그건……》
마음 편하게 죽어서 신의 곁으로 가려던 그는 뭐 대꾸할 말도 못 찾은 듯 머뭇거렸다. 사티스는 좀 전에 말한 것처럼 빠르게 질문했다.
─과업은 통과의례일 뿐이다. 복수에 매진하는 것은 옳다 치겠으나, 인세에 미련을 두지 않고서 내 곁으로 온들 네가 세상을 위해 분골쇄신할 수 있겠느냐?
나는 그런 사티스의 물음에, 엘리자베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뭐든 간에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댔던가.
확실히, 지금 오프툼은 사티스 교단 버전 천국 같은 곳에 가도 호호할배처럼 지낼 것 같긴 하다. 과업을 완수한 여신의 용사랑은 거리가 멀다.
미련도 안 두고 떠난 지상의 안전에 열을 올리긴 어렵겠지.
자기가 믿는 신의 핀잔에 대꾸도 못하는 그에게 사티스는 선언했다.
─네 만족스러운 자살에 내 손을 빌리지 말라.
슈오르르르르……!
그렇게 말을 끝내자, 아마 신대나 그런 무렵에 여신상에 남겨두었을 마나가 뽑혀나왔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정도의 마나는 아니었다. 딱 지금처럼 강림해서 신탁을 전하거나 하는 게 전부일 듯한 마나였다.
사티스는 그걸로 오프툼의 손등에다 성흔 같은 걸 새겼다. 무슨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듯한 속도였다.
《수, 수렵신이시여?》
─내가 내린 과업의 징표다. 널 의심하려는 자들에게 보이거라.
그걸로 끝이었다. 오프툼의 장례식을 순식간에 미션 전달 이벤트로 바꿔버린 그녀는 다시 나한테 눈을 돌렸다. 나는 절로 몸을 움찔했다.
─그대, 이름은?
“오프툼 씨의 기억을 보셨으면 아시는 게…… 아, 노르드입니다. 원래 이름은 강북호구요.”
그냥 눈치껏 이름을 읊자 사티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만큼 알고 있다면 내가 본신의 힘으로 너의 바람을 이뤄주지 못 한다는 것도 알겠지. 수단을 준비해 왔으리라고 보았다. 건네라.
“그, 이거면 되겠습니까?”
나는 석판에서 빨간 액체가 든 병을 꺼냈다.
세헤테피브라에게 받았던 세크메트의 신혈이다. 사티스는 허리를 숙여서는 그 큰 손으로 병을 받아가지고 눈을 반개했다.
─……하토르가 미쳤을 때 흘린 피인가. 하지만 독기가 정화되어 있군. 이런 걸 어디서 얻었지?
“파라오가 하루만에 만들어 주었습니다.”
명예 귀족 취임식 전후로 부탁한 물건이었다.
그 웃기게 생긴 파라오에게 받은 뽀찌라고 할 수 있겠다.
─나라를 구해준 그대에게 그 정도 일도 못 해 주겠는가?
그렇게 말하면서 뚝딱뚝딱 정화해 준 것이었다.
‘역시 나일강 딸딸이남은 포부도 남 달라.’
존나 쿨한 대응에 나는 마음 속으로나마 그에게 꼴마초 1급 자격증을 하사해준 것이었다.
사티스는 알겠다는 듯 말했다.
─좋겠지. 이것만으로는 모자라겠지만, 저주라는 놈이 존재하는 방향과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나머지는 그대 스스로 하도록.
“예? 잠시만요. 직접 하라굽쇼?”
─그대라면 못할 것 없다.
단언한 사티스는 신혈을 추출하면서 화살촉으로 빚어냈다.
시뻘갱이 화살촉은 생긴 것에 안 어울리게 무척 성스러운 기운을 풍기며 내 손에 떨어져내렸다.
─그 화살촉이 내가 사냥하려는 저주의 위치를 가리킬 것이다. 저주를 이루는 권능의 근원은 네 눈으로 볼 수 있겠지. 화살을 꽂아넣고, 힘이 부족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라.
손에 쥔 화살은 가벼웠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이건 내가 베로니카에게 건네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닌가. 저절로 내 가슴엔 환희의 감정이 치솟았다.
“……감사합니다, 이방의 신이시여.”
그리고 그건 베로니카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꽤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감격인지 기쁨인지 모를 것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티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태도로 다나를 바라보았다.
─다음은 너다. 노르드의 다른 쪽 아내.
“다, 다른 쪽 아내? 저요?”
조금 몸 상태가 나아지는 듯 하던 다나는 깜짝 놀랐다. 그럴 만 하겠지. 여기서 가장 수렵신이란 이름과 관계가 없는 게 그녀니까.
─너를 부른 게 맞다. 이름은?
“저기, 어, 다나 베르베이아입니다…….”
─베르베이아? 허면 신관의 혈통이겠군. 에린의 드루이드로서 그쪽 녀석들에게 신내림을 받았나. 에린의 신들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생존자라도 있었나 보구나.
그 말이 누굴 가리키는지 알아차린 우리는 숨을 삼켰다.
이름을 잊혀진 여신의 얘기일 것이다. 다나는 그 신의 이름을 물으려는 듯 입술을 뗐다가, 만나본 우리도 모르는 걸 사티스가 알 리 없다는 결론을 내린 듯 다시 다물었다.
─아직 각성은 못 해낸 듯 한데, 신내림을 받은 이상에는 섬길 신을 정해야 신열(神熱)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섬기는 신에 따라서 네가 깨우칠 영성(靈性)도 달라지겠지.
사티스는 조각상의 몸으로 다시 걸어서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침 네 낭군이 반신 쯤 되는군. 차라리 노르드를 신으로 섬겨라. 아니면 너 자신이 신이 되는 것도 방법이다. 두 개 다 하는 것도 좋겠고.
“네? 네?!”
─신탁은 끝이다. 헌데 하토르의 신혈이 조금 남았나.
사티스는 나한테 받아간 핏빛 마나를 추출해서 내게로 날렸다.
나는 나쁠 건 없겠거니 하는 생각에 그 마나를 몸에 받아들였는데, 아랫배에서 묵직한 것이 펄펄 끓는 듯한 열기가 올라왔다.
머야 시발. 장티푸스 빔인 것?
─그대는 구신의 마나를 더 깨워라. 룬 마법을 두고 왜 인간의 마법을 파고 있지? 룬을 완전하게 다룰 수 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말한 사티스는 귀찮다는 듯 활을 겨누며 자신이 빙의하기 전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의 마지막 한 마디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정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내 영전(靈前)에 쳐들어와.
아마 1대 1로 전하는 전음이 아니라면 절대로 신도들 앞에서는 못할 말투였다. 활을 겨누는 사티스의 눈초리가 살짝 휘었다.
내가 아는 한, 그건 저 사냥의 여신이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그때는 우리, 시원하게 한 판 붙어 보자고.
…우뚝.
여신상은 그런 말만을 남기고 다시 조각상으로 돌아갔다.
신의 어전이라는 느낌을 잔뜩 풍겨대던 위압감, 카리스마 같은 것도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남겨진 건 어안이 벙벙한 좆간들과 마냥 기쁜 바이콘 1마리. 그리고 작별 인사가 빼곡하게 적힌 눈물 젖은 편지들과 꽃다발 뿐이었다.
《……허, 이거 참. 생각보다 수다가 많으시군.》
오프툼은 뒤통수를 긁다가 헛웃음을 짓고서 날 보며 말했다.
《이보게. 혹시 그때 그 술, 아직 남아 있나?》
《……가십시다. 저도 오늘은 좀 병나발이 불고 싶네요.》
하긴, 그렇겠지.
잔뜩 근엄하게 폼을 잡는 것보다는, 저게 훨씬 사냥의 여신답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