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27화 (626/1,009)

“우리 왔다, 새끼들아.”

며칠 후, 우리는 숲에 머무르고 있는 마흐잔과 친구들을 찾아갔다.

“아! 오셨습니까!”

보초를 서던 놈을 따라갔더니 마흐잔은 아침을 먹고 있었던 듯 허겁지겁 자리를 정리했다. 보초병 새끼가 안색이 안 좋아지는 걸 보면 중간 보고절차라도 까먹은 모양.

‘근데 이 새끼들 존나 잘 지냈던 것 같은데?’

숲에 차려진 야영지는 그새 생활감이 가득했다.

매들은 벌레를 먹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더니 뭘 보냐는 듯 부리를 쩍 벌렸고, 말들도 엘프들이 따 온 과일을 처먹으며 희희낙락 즐기고 있다.

차려진 냄비에 간소한 침대까지 만들어 둔 건 좀 놀라웠다. 엘프들의 표정도 엄격 근엄하던 기색이 좀 빠지고 유순해진 것 같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호툴루실도 그러더니만, 진짜 종족 자체가 이런 환경에서 힐링이라도 받나?’

식물 테라피인가? 나는 픽 웃고 여행객으로 위장하기 위한 가방을 다시 걸쳐 멨다.

“서두르지 말고 해. 체하는 게 더 귀찮다.”

“아닙니다. 마침 다 먹은 참입니다.”

지들이 그렇다는데 굳이 기다릴 것도 없다. 난 그 자리에 대충 주저앉았다.

“조건부터 합의할까. 내 편지는 어떻게 됐지?”

“전령을 보냈습니다. 룬 마법으로 말을 지치지 않고 달리게 했을 테니,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을 테지요. 특별한 방법도 있고요.”

“특별한 방법?”

“예. 그 방법도 포함해서 이동하는 과정을 설명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부산물의 값부터 합의하고.”

나는 세계수의 새순을 보여주었다. 마흐잔은 그 이파리에 감동이라도 받은 듯 어깨를 떨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로 공감은 안 가는 갬성이다.

“필요한 분량이나 값어치는 너희들이 더 잘 알 테고, 우리 조건은 기본적으로 3개야.”

“말씀하십시오.”

“동방에 있는 요정의 나라와 우리를 중개시켜줄 것. 너희가 말한 탐지도구를 가능한 사용하게 해 줄 것. 그밖의 보수는 너희가 제시할 수 있는 걸 보고 확인하지.”

돈으로 받는 건 아까우니까, 이 놈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들 중에 고르면 되겠지.

마흐잔은 심사숙고를 하다가 어렵사리 질문했다.

“탐지기는 어디에 사용하시고자 합니까?”

“그건 개인 사정이군. 너 말고 또 설득해야 할 양반들한테 말하는 게 서로 귀찮은 것도 덜 하고 편할 것 같은데, 너도 동의하지?”

아니면 니가 사정을 듣고 우리 대신 너희 틀딱 꼰대들을 설득할래?

다시 장고하던 마흐잔은 아침밥 냄새가 완전히 가실 즘 되서야 복잡한 얼굴로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다른 조건은 어려울 것 없겠군요. 그런데 북방의 요정왕국에 볼 일이 있으시다면, 저 요정왕 님과의 접견을 보수로 바라시는 겁니까?”

요정왕이란 게 뭐 하는 요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거기까지 갈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창 문제 좀 봐 달라는 것 때문에 왕 씩이나 보겠어?

“그런 거창한 일이 아니라, 감정해 줬으면 하는 목재가 있을 뿐이야. 그것도 다음에 얘기하지. 이 자리에서 급하게 정할 이유는 없겠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개요는 들었으니 충분할 듯 싶군요.”

마흐잔은 부하─혹은 동료─들이 가져온 지도를 펼쳤다.

동방의 상세한 지도는 처음이다. 다나도 약간은 흥미가 솟는지 눈을 굴렸는데, 지도의 절반 쯤은 진련(眞蓮)이라고 돼 있었다.

“가는 길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바이츠니아 국경지대를 통해서 입국한 후, 중간에 유목민족연합지대로 빠져나갈 것입니다.”

우둘투둘한 전사의 손가락은 지도를 횡단하면서 작은 땅덩어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이 중간지대에, 타타르니아의 선조들이 만드신 절세의 마법진이 있습니다. 서방국가에선 〈공간이동〉이라고 부르는 『전이술』 술법(術法)입니다.”

마흐잔은 그렇게 말하고 이제 놀라라는 듯 잠깐 텀을 뒀다.

하지만 그의 살짝 기대하는─자부심을 드러낸─ 표정은 곧 엉망이 되었다. 얘기를 듣던 우리들이 딱히 감흥 없이 심드렁했기 때문이다.

“그게 다냐?”

“예? 아, 아니…… 『전이술』, 〈공간이동〉…… 입니다만……”

“그 마법진은 우리들도 쓸 수 있는 것이냐?”

“……아닙, 니다…. 엘프족만……”

“그럼 무의미.”

“………………그렇긴 합니다.”

베로니카와 네페르티티가 한 마디씩 던지자 마흐잔은 눈에 띄게 기력을 잃었다.

나랑 내 아내들은 물론이고, 네페르티티도 세헤테피브라의 피라미드를 겪었는데 이런 걸로 놀랄 리가 없었다. 내가 지도를 가리켰다.

“네가 먼저 보낸 친구들은 그걸 타고 가겠군. 이 얘길 우리한테 해도 되나? 기밀 아냐?”

“……예. 바이츠니아나 유목민족연합도 알 만큼 아는 사실입니다. 정확한 사용법은 현지의 술법사들만 압니다. 보통은 위치조차 모르고요.”

“네 친구들이 이동거리를 스킵할 거라면 우리도 서둘러도 되겠는걸.”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를 보았다.

지도 상의 타타르니아는 작은 나라였다.

존나 혹시 사전지식이 없었다면 유목민족연합의 부족 중 하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난 양식 있는 엘리트이므로 말로 하진 않았겠지만.

그렇지 않은가? 만약 코 큰 백인이 와서 ‘You 코리안, 나라 땅도 작은데 중국 소수민족 같은 거 아뉩니까~?’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눈이 돌아갈 것이었다.

“가는 방법은 알았다. 질문 몇 개만 하지.”

“……예. 제가 아는 거라면 대답하겠습니다.”

“왜 바이츠니아를 건너지? 황야를 넘으면 너희 고향으로 가는 코스는 여러 개 있어 보이는데. 이 유목민족연합의 영토로 돌아가도 되잖아?”

“위험합니다. 민족 ‘연합’이므로 일부 과격파는 약탈을 생업으로 삼으며, 증거를 인멸하고 입을 싹 닦기도 하죠. 귀빈을 모시기는 부적절합니다.”

“바이츠니아는? 너희 적대국이라며.”

“차라리 국경지대만 통과하면 되니 낫습니다. 이 나라는 너무 넓고, 때문에 현 황제가 완전히 지배 하에 두지 못한 군벌이 많기 때문이죠.”

나는 말귀를 바로 알아들었다.

“뇌물을 주고 정당하게 입국하겠다?”

“대단하시군요. 바로 맞추셨습니다. 협력자들과 부패 군벌을 통한다면 신분증이 손에 들어옵니다. 일단 거기만 넘고 나면 일사천리죠.”

마흐잔은 실소를 지으며 신분증으로 보이는 걸 흔들었다.

으음, 무협 냄새 나는 목패로군. 여기서 한자를 보는 게 얼마만이래.

지도를 눈으로 계측하던 다나가 말했다.

“이동 내내 위험한 민족연합의 서부지대보다는 국경만 넘으면 안전해지는 바이츠니아가 안전하다? 좋은 의견이네. 우리 피부색 문제만 아니면.”

직업이 직업이라 나만큼 외국 경험이 많은 우리 눈나의 지적이었다.

마땅한 의문이었기에, 그만큼 마흐잔도 지당한 이유로 대답했다.

“차별받긴 하지만 바이츠니아에도 저희 동족과 혼혈은 있습니다. 또 유목민족연합 건너 북방민족 중에는 하얀 피부도 종종 보이죠. 눈에 띄긴 해도 트집 잡힐 일은 적습니다.”

“……그 북방민족이란 애들, 혹시 손에서 냉동빔 같은 거 쏘냐?”

“예?”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래. 이만큼 넓은 땅이면 북쪽에도 혹한지대가 있을 법 하지.

지구의 동아시아에도 백인 소수민족이나 러시아 같은 선례는 있다. 물론 인종의 차이도 클 테지만 현지인들은 뭉뚱그려서 백인으로 보고 넘기겠지.

우리 아내들이나 네페르티티가 가도 어색하게만 보진 않는다, 이건가.

“저희도 귀를 숨길 방법이 있습니다. 이곳으로 올 때도, 바이츠니아에서 산개했다가 국경지대를 넘어서 다시 합류했죠.”

─화륵. 마흐잔의 손에서 노란 부적이 타올랐다.

룬을 새긴 부적을 태운 그는 부적의 재를 자기 목에 건 주머니 목걸이에 털어넣고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귀가 조금씩 줄어들며 그냥 인간 수준으로 변했다.

‘변신 마법인가.’

나도 애용하는 ᛒ(Berkanan)의 룬이다.

하긴, 변신의 매개체는 목걸이가 제일이지.

“……후. 이런 마법입니다. 물론 귓볼의 길이를 줄이는 게 전부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보통은 못 알아보겠군. 그리고 북방계 유목민족의 신분을 받으면 의심받을 계기라도 있지 않는 한 체포당할 일은 없겠고.”

“예. 그렇게 해서 중간 지점에서 합류하고 북상합니다.”

마흐잔은 소매로 입을 슥 훔치고 말했다.

그의 말로는, 유목민족연합은 바이츠니아 인과 교류가 많은 부족도 있기에 수색이 덜 하다는 모양이었다. 입국은 어쨌든 출국을 막지는 않는댄다.

그러니까, ‘귀향하는 길인데오?’ 하고 주장하면 바이츠니아에서 빠져나가는 건 쉽다.

“거기서부턴 타타르니아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군.”

“맞습니다. 대략 3주일에서 1달 정도의 시간이 걸리죠.”

눈을 찌푸린 나는 마흐잔의 계산에 고개를 젓고 부정했다.

“아니, 그러면 너무 늦지.”

“예?”

“왕복에 2달씩 쓰는 건 본의가 아냐. 북벌군이 어쩌고 하는 얘기도 있고, 자칫하면 전란에 휘말릴 수도 있어. 네 예정대로 가면 위험하단 얘기다.”

“그, 바이츠니아의 북벌군은 들리는 것만큼 큰 문제는 아닙니다. 기탄없이 말씀드리면 거의 연례행사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이 방법보다 빠른 길은 없습니다. ”

북쪽 나라에, 전쟁 도발이 연례행사라.

어쩐지 느낌이 매우 익숙한데? 그래 시발, 이게 동양의 매콤한 맛이지.

북쪽이랑 친해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니, 갑자기 내 본명이 안타깝게 느껴지네.

“빠른 길이 없기는 왜 없어. 여기서부터 니다벨리르까지 걸리는 게 며칠인데? 이동거리를 줄일 수 있으면 1주일이면 충분하지.”

나는 지도를 가리켰다.

바이츠니아 산 지도라서 서방국가의 묘사는 밑장 빼다가 손모가지 날아간 한석봉처럼 개판이었는데, 그래도 못 알아볼 정돈 아니었다.

“브리타니아에서 동방까지 가려면, 고르갈리아-로마니아-게르마니아-니다벨리르를 거쳐야 하지. 이것만 해도 내 경험 상 최소 2주야.”

엘프들한테도 말을 빠르게 하는 기술이 있기는 한 듯 했다.

하지만 그걸 써도 1주일 정도로 줄일 수는 없지 않을까.

‘거기다가 지금까지 말한 이동방법을 더한다?’

또 며칠이나 걸릴련는지.

그렇게나 오래 걸리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이 거리를 줄여서, 바로 니다벨리르 국경지대 너머로 넘어갈 방법이 있어.”

“그, 그게 대체?”

“네가 말했잖아. 〈공간이동〉이지.”

스윽─.

나는 스킵 티켓…… 이 아니라, 종잇조각을 2장 꺼냈다.

“이건 우리가 예전에 얻은 〈공간이동〉의 매직 아이템이다. 니다벨리르의 어느 오지, 버려진 유적 안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물건이지.”

“그, 그런 물건이!!”

당연히 구라다.

이 부적이 적당히 빛을 뿜어내는 동안, 우리의 베로니카가 마법을 사용할 예정이다.

도착할 공간은 베로니카가 예전에 가 본 유적.

룬 스톤을 주우러 다닐 때 찾아낸, 사람 손이 안 닿은 유적지랜다.

─그때는 아직 다른 이들과 마주치면 바이콘이 돼 버리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자연히 탐색하던 곳도 인기척이 없는 곳에 한정됐지.

그러다가 운 나쁘게 납치당해서 우리를 만나게 된 게 그녀의 과거사다.

뭐, 그건 어쨌건.

“이걸 써서 바로 니다벨리르로 이동할 거야. 그 다음엔 대륙의 황야를 건너서 네 예정대로 움직일 생각이다. 단, 이동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저를 데려가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현지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산개해야 했고, 그때 여러분들의 곁에는 제가 남아서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던가.”

본인이 자처하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나.

나는 〈수사의 랜턴(Friar's Lantern)〉 마법을 부여한 티켓을 챙겨넣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국경까지는 와이번을 탈 거야.”

“와이번? 어떤 생물입니까?”

“하늘을 나는 도마뱀. 운송용으로 한 마리 빌린 다음에 황야에서 복귀시킬려고. 머리 좋은 놈들이니까 알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물론 이것도 베로니카가 다시 축사로 돌려보낼 예정이다.

아무리 똑똑한 와이번이라지만 대륙 횡단은 좀 빡셀 테고, 중간에 사냥당할 수도 있다.

혹시나 탈주라도 했다간 내가 물어줘야 한다고. 농담 안 하고 금화가 깨질 걸?

“음, 그럼 제가 타고 온 말은……”

“친구들한테 맡겨. 우리끼리 먼저 가서 와이번을 타고 황야를 건너고, 국경지대에서 내린다. 이러면 대충 편도로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겠지?”

“예. 타타르니아까지 가는 길에는 현지의 동족들에게 말을 빌리면 됩니다.”

눈치를 보니까 스파이, 아니 협력자라도 있는 듯 했다.

하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상의 끝났군. 와이번을 빌려올 테니 기다려.”

나는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아내들을 데리고서 와이번 축사에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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