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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
다나는 방패처럼 잘라낸 실드 마법을 휘둘러서 엘프들의 암기를 쳐냈다.
“칫.”
깔끔한 패링이었지만 공격을 막은 그녀의 얼굴에 기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릴 적에 아빠에게 호신술을 조금 배웠고, 그 덕분에 제대로 싸울 줄 모르던 시절의 노르드나 별 볼 일 없는 도적에게는 밀릴 일이 없던 그녀다.
하지만 지금 다나를 노리는 적은 수십,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살인기술을 체득한 살수들.
방금 전에 공격을 막은 것조차 요령── 아니, 기적에 가까웠다. 진짜 방패였다면 근력이 부족한 탓에 막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나 님! 오른쪽입니다!!”
실드 마법에 금이 쩍쩍 가는 걸 확인한 그녀는 마흐잔의 필사적인 외침에 급히 반응했다.
【우측! 옆에 있는 놈들부터 막아!】
적을 틀어막던 발퀴리에가 빛의 무구를 던지며 견제를 가했다.
달려들던 엘프는 그 정확한 공격에 복부가 꿰뚫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움직이는 발은 머뭇거림이 없었고, 때문에 베로니카는 이를 악물고 한 음절의 룬을 영창했다.
“ᛊ(Sowulo)!!”
간결하고 빠른 열선을 발사하는 룬 마법!
동시에 3개 솟아난 만다라가 위와 양옆에서 그 엘프 살수의 다리를 불태워버렸다.
위력은 충분했기에 엘프 살수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는데, 멀쩡한 손으로 암기를 던졌다. 두꺼운 검을 뽑은 마흐잔은 그걸 쳐내기도 급급했다.
스사사사삭─!
그리고 다른 엘프들은 다나의 지시를 듣자마자 진형을 바꿨다.
1대 1로 상대가 되지 않는 발퀴리에들과 정면 승부를 피하는 것이었다. 다나는 무심코 혀를 차려다가, 약한 모습을 보여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참았다.
‘저 자식들, 룬 어로 지시하는 내용을 알아들어.’
룬을 새긴 부적을 쓰는 엘프다. 당연한 일이긴 했는데, 그런 만큼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말로 한 순간 저 자식들에게 작전을 알려주는 격이지.’
다나의 발퀴리에는 적의 수뇌의 손에 모두 잃고 말았다.
결국 베로니카의 것을 포함해서 〈아공간〉 마법 안에 대기 중이던 발퀴리에들을 급하게 부른 다나였지만, 그들의 지배권은 어디까지나 할양 상태.
심념으로 직접 뜻을 전할 수 없고, 말로 지시를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자식들은 그걸 눈치챘고.’
목숨을 초개처럼 쓰는 전법으로 장기전을 노릴 생각일까.
암기가 요사스럽게 번들거리는 걸 보면, 독.
한 번이라도 맞으면 전력이 급감한다.
해독 마법? 사령탑인 다나가 그런 것에 집중할 시간은 없다. 거기다가 그녀가 암기에 맞았다가는 전선의 붕괴가 초 읽기에 들어가고 말 것이었다.
숫자의 차이는 강함과는 별개였으니 말이다.
‘우리보다 적이 4~5배는 많고. 존나 빡돌게.’
저만한 숫자가 대체 어디 숨어 있었는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땅 밑에 박혀서 매미처럼 꿀잠이라도 처 잤나? 일어나서 찾는 게 교미할 암컷이 아니라 새 나라인 걸 보면 섹무새보다 악질인데.
‘미친 헤사모 새끼들.’
다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장한 마나를 퍼다 쓰는 발퀴리에는 미스릴급 전사이며, 마법사다.
숫자 차이가 4배도 더 된다고는 하지만 공세에 나선다면 바로 결착을 낼 수 있었다.
단지, 그 동안 다나와 일행은 몸을 지킬 방법이 없다.
‘1명 1명이 나랑 비슷하거나 더 강한 놈이 수십 명이나 되니까, 별 수 없는 일이지만……’
생각나는 전법은 이미 모두 구사해 봤다.
하지만 엘프들은 목숨을 내버리며 발퀴리에를 유인하려들거나, 수가 줄어들어서 생겨난 공백으로 귀신같이 암기와 마법을 던져왔다.
어떤 전술을 선택해도 희생자는 날 것이었다.
‘……베로니카가 큰 마법을 쓸 수만 있었다면.’
그럼 승리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시간을 벌어서 도망치든 일소(一掃)하든 방법은 있었다.
하지만 적도 그걸 알아차려서 가장 먼저 키타이 엘븐-틀니 딱딱맨이 손수 베로니카의 마법을 흐트려트린 거였겠지.
공간 계열 마법은 수준이 높은 만큼 운용도 까다롭다.
운용 중에 마나가 사라진 베로니카는 지금 인체에서 말하는 ‘쥐가 난’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큰 마법을 사용하는 건 물론, 움직이기도 버겁다.
당장 역사서를 해석하다가 쥐가 나서 노르드가 보는 앞에서 눈물 콧물을 빼 봤던 다나였기에 저 몸으로 분전하는 베로니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마흐잔은 저들 1명과 비슷하거나 조금 밑.
진작 기절해서 저 어드메에 쓰러진 샤오라이는 처음부터 논외.
‘결국 내가 더 힘낼 수밖에 없겠네.’
다나는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픽 웃었다.
딱히 절체절명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유쾌하단 게 본심이다.
“그야, 우리마저 안 왔으면 그 천하의 모질이는 혼자서 이 난관을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온몸을 비틀어 쌌을 거 아냐.”
트위스트의 달인 꽈백 강선생은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 살아남긴 했겠지만, 이번엔 좆방망이라도 깎뚝썰기 당해서 테이크아웃 해 올지 누가 아는가.
‘개 같은 남편 새끼.’
못난 그이를 마음에도 없는 욕으로 혼자 쏘아붙여주고서, 다나는 실드 마법을 해제했다.
【발퀴리에, 전부 방어 태세로 들어가.】
룬 어로 선언하며 그녀는 허공에 글자를 적었다.
정신이 나가버린 건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룬이나 현대 마법과도 다른, 전혀 색다른 획들을 그려냈다.
픽트의 모사 마법이었다.
─우리 픽트 인은 술식을 문신으로 그려서 몸에 새긴다. 그럼으로써 주문이나 무예의 단련 없이도 기적에 준하는 주술을 일으키는 것이야.
아직 엄격하던 시절, 다나의 어머니는 그리 말하면서 그녀를 가르쳤다.
하지만 다나는 그 기반을 다지던 도중에 가출을 감행했다.
때문에 육체에 새겨진 문신은 없고, 그 육체에 어설프게 각인된 건 모든 주술의 기초가 돼 주는 [치유], [방어]의 모사 마법 뿐.
어머니가 집필한 책을 읽으면서도 거기에 적힌 마법을 몸에 새기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노르드가 문신을 싫어할까 무서웠…… 아니, 그냥 취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게 뭐가 어쨌다고.’
당장 다나 대신 사제장으로 선별됐던 씹새끼도 픽트의 마법과 현대 마법을 조합하려 했다.
그렇다면 그녀라고 하지 못할 게 무엇인가?
─사각, 사각, 사각!
그녀는 종이의 펜을 내달리는 연구자처럼 흘려 쓰는 필기체처럼 그림을 모사했다. 그려지는 마법진을 본 베로니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픽트의 모사 마법의 문신을 마법진으로 삼아? 대체 어느 틈에 그런 걸……”
“배운 걸 응용할 줄 알아야 제대로 된 학자지.”
이래봬도 평생 몸 쓰는 일보다 먹물 묻히고 연구원들 부리는 일을 더 오래 해 온 사람이다.
고대인들의 대갈 빵꾸난 행적을 보면서 가설을 세우다가 남편과 쌍으로 발작을 일으키던 랩실 시절에 비하면, 이깟 것 쯤 발상의 전환이라고 불러줄 수준도 못 된다.
‘붓대 놀리는 거야 수천 번도 더 하던 일이고.’
글자가 좀 복잡한 문신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눈 깜짝할 새에 완성되어가는 마법진을 본 엘프들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그걸 좌시하지 않았다.
두 팔을 휘두르며 다나는 알아듣지도 못할 룬 단어며 독 묻힌 암기가 쏟아졌다. 발퀴리에들은 그 공격을 창과 방패로 완벽하게 방어했다.
단지 엘프들도 그건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로 한 견제였다.
그들은 벌써 저 기사들이 명령에만 따르는 단락적인 존재라는 걸 눈치챈 뒤였다.
방어에만 몰두하는 발퀴리에의 틈새를 몇 명의 특공대가 파고들었다.
─서걱!!
발퀴리에들의 창칼은 그들보다 빠르고 강력했다. 자비심 없는 공격 앞에서 살아남아 방진을 돌파한 엘프는 1명 뿐이었고, 그런 그도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마법진을 그리는 다나에게 생애 최후의 일격을 가할 정도의 시간은 있었다.
엘프는 뽑아든 흙 마법의 단검을 그녀의 가녀린 목에 내질렀다.
─챙!!
목숨과 맞바꾼 공격이 성사된 그 최후의 순간, 엘프의 손아귀에 전해진 느낌은 생살을 파고드는 감촉이 아니라 금속끼리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불티는 튀지 않았다. 다나의 손을 덮은 건 빛의 마나로 만든 건틀렛이었기 때문이다.
【뭘 놀라? 발퀴리에들한테 배운 건데.】
공격을 막은 다나는 마지막 획을 그으며 말했다.
한참도 전부터 발퀴리에들한테 마나의 운용법을 배우던 다나였다.
그리고 빛의 마나는 검도, 창도, 방패도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건틀렛을 못 만들 건 또 무엇인가? 모 개새끼는 마나로 각좆을 만들어서 술에 취해 잠든 아내한테 쑤시고 놀더만.
─푹푹푹! 손에서 힘이 빠지는 엘프의 등에 발퀴리에들의 창이 사정없이 꽂혔다.
그리고 그때, 다나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승리의 축복.]
주문을 외운 순간, 발퀴리에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마치 상의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사를 훤히 아는 숙련된 기사단과 같은 움직임!
공격을 막는 동작이 일치했다. 개인의 숙련도는 높아도 협력하지 못하던 발퀴리에들이 한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엘프들보다 우월하던 신체능력은 한층 빛을 발하며, 조금 전까지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멈칫!
그걸 깨달은 엘프들이 공격을 멈췄다. 무시할 수 없는 변화에 그들의 무뚝뚝한 눈빛에도 당혹감이 서렸다.
다나는 두 손을 느긋하게 내렸다.
【상성이 좋네. 출처가 비슷해서 그런가.】
다나가 펼친 [승리의 축복]은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신체강화 마법이었다.
수많은 픽트 인의 마법에서도 가장 다나에게 잘 맞던 마법!
그 이유도 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것도 야수회귀에서 파생된 마법이겠지.’
옛 고대 에린 인들은 부작용을 알기 전까진 야수회귀의 주술을 애용했다.
당연히 다른 강화 마법도 가장 효과적인 야수회귀의 주술을 개량한 마법이었을 것이다.
일부러 더 약한 마법을 활용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게 수천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부작용이나 발동조건이 완화되어서 픽트 인의 모사 마법으로 구전되었던 걸까.
충분히 있을 법한 역사의 귀결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나랑도 상성이 딱 맞을 수밖에.’
아마 현대에서 이 마법을 가장 잘 써먹고 있을 작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이었으니까.
‘……부부는 닮는다던가. 뭐, 듣기 거북한 말은 아니네.’
숨기지 못한 기쁨을 미소로 띄우는 다나였다.
몸을 섞고 통정(通情)을 한 남녀의 마나는 닮게 된다.
솔직히 아내들 중에서는 자신이 제일 노르드랑 쿵짝이 맞는다며 은근한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던 그녀였기에, 이 결과는 적지 않게 기뻤다.
같은 먹물쟁이 고고학자인, 드루이드 부부.
성격도 닮고, 직업도 닮고, 하물며 몸의 상성과 마나의 상성까지 최고로 잘 맞는다니?
이렇게 보자면 약간 그…… 하늘이 정해준 상대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로맨틱하지 않은가.
‘뭐래.’
다나는 상황도 잊고 떠오르고 만 실없는 생각에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싸움에 집중하자. 다행히 마나 소비는 적다. 이 [승리의 축복] 마법은 축복 대상의 마나를 빌려서 쓰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전투력과 팀 워크가 향상된 발퀴리에들도 있는 마당이다. 승리는 확실하다. 아, 너무 편하다. 이 상황에서 지면 유서 첫 줄을 고민하는 게 낫지.
이제는 얼마나 깔끔하게 이겨낼지의 문제였다.
다나는 엘프들을 둘러보고 비웃음을 띄웠다.
【왜들 그렇게 멍을 때려? 강의 중에 조는 학부생도 아니고.】
엘프들은 정신을 차리고서 살기등등해졌다.
아무렴 어떠랴. 그렇게나 강의가 듣고 싶은 거라면야 그녀의 전문 분야로 간단한 강의를 해 주자. 다나는 마나를 순환시켰다.
【내 조상님은 거슬러 올라가면 좋은 밥 처먹고 쌈박질만 하던 전쟁광들이거든. 그리고 그 야만족 전사들의 승리를 기원하고 축복을 내려주는 게 나 같은 [사제(Druid)]의 일이고.】
천공신을 모방하는 마법을 쓰던 에린의 전사들.
천공신이 직접 창조한 신대의 신령(神靈) 병사들.
전혀 다른 듯 한 그들은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한 곳으로 연결됐다.
태어나고 자라난 세계가 다른 다나와 노르드가, 그녀의 뿌리가 되는 픽트 인의 고향에서 결혼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관심 없지? 실은 나도 그래. 니들 사정에는 별 관심 없어. 솔직히 타타르니아 요리에도 굼벵이가 들어가나 하는 게 더 신경 쓰일 정도야.】
남편의 팔팔한 생명력을 왼손 약지의 반지에서 느끼며 다나는 담백하게 말했다.
【얼른 붙고 끝내자고.】
그녀의 입가가 반달처럼 휘었다.
이름 없는 여신이 키워준 영성(靈性)이 깨어나는 듯 했다.
【우리 서방님이 좀 걱정이 많아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