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르나 년은 내 손에 뒤졌다.』
나는 쥐 죽은 듯 말라붙은 초원에서 무기를 든 채 뇌까렸다.
바람이 솔솔 부는 게 기분 째지는걸? 혓바닥이 쌩쌩 굴러가는구만.
『나였으면 복수 따위에 휘둘릴 게 아니라, 애먼 병신한테 홀라당 넘어간 공주님을 어르고 달랬을걸. 그게 나잇살 처먹은 놈이 할 일이지. 수행 따위가 아니라.』
『……………….』
『근데 니가 간수도 안 하고 방치한 덕에 너희 여왕님이 남긴 딸내미는 개쓰레기 도착증 살인마로 살다가 픽 뒤져버렸네?』
델피니아와 그 딸인 예르나는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닮은 건 외모밖에 없었지.
『그래,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그 여왕이 어쩌고 하는 것도 꽤 웃기더군. 너희들은 리오스알프를 여왕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텐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는 본색을 감추던 예르나 년을 좋게 보고 있었다. 믿고 있다가 통수를 맞고 논문을 빼앗겨버렸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세헤테피브라가 기억하는 델피니아는 그 무렵의, 나랑 다나를 속이던 시절의 예르나 년과 말투나 몸짓이 적지 않게 닮았었다.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이긴 한데, 예르나한테도 그런 미래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세헤테피브라를 믿은 델피니아처럼 사람을 믿고 자상하게 웃을 줄 아는, 그런 선량한 엘프로 자라나는 마블 코믹스급 평행세계 같은 미래가 말이다.
말 그대로 예르나 얼터.
상상하니까 좀 토가 나올 것 같긴 하다만.
『숲을 버리고서 황야로 도망친 끝에 썩은 물이 들었군. 아니, 시들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황야의 허수아비처럼 선 노인에게 역겨운 것을 보듯 일갈했다.
저 엘프가 저토록 단련해도 마스터 클래스가 될 수 없었던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선조께서 말씀하시길,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다.
사람은 살면서 무언가를 쌓아가고, 그걸 남기는 생물이다.
그리고 그렇게 드높이 쌓인 산봉우리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아져서 세상을 내려보는 자를 마스터 클래스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무언가를 만들고, 쌓고, 후세에 남기는 과정!
그게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일생을 통해 일군 업적을 논문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삶을 탐구하는 학자이니까.
물론 자기 혼자만 행복하게 살다 가는 사람도 잘못된 건 아니다. 거 씨발, 아무튼 남한테 엿 먹이지 않고 재량껏 잘 살다가 가면 되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아슈카트에겐 그런 게 없었다.
『네 삶은 텅 비었다. 이 황야처럼.』
그래서 강하다.
어떤 힘이든 고갈시키고 부정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스스로는 무언가를 일굴 수조차 없다.
『천 년이나 걸려서 도달한 게,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황야를 떠돌며 손에 피를 묻히는 삶인가. 노력의 방향성이 틀리다 못해 가엾을 지경이군.』
구갈명경이란 그런 경지였다.
가진 걸 모두 버리고 황야를 만들지 않고, 불타버린 알프헤임의 기억을 화전(火田)으로 무언가를 일궈내고자 했다면, 저 노땅 엘프는 마스터 클래스가 됐을지도 몰랐다.
‘이미 늦었겠지만.’
새로운 마음가짐을 먹는다고 지난 삶이 변하면 그게 꼰대냐? 포용력 넓은 노인장이시지.
『……몸 속에 흐르는 피와 죽음의 위험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이 있었다.』
아가리를 싸물고 있던 그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왕녀의 삶은 그랬을 뿐이야. 나 역시 그렇고.』
『쌉저능아 새끼. 세상에 남기는 것 하나 없이 뒤지게 생긴 판국에 정신승리 하냐?』
『남기는 것…… 후세에게 말이냐? 너희 인간들처럼?』
낮게 웅얼대는 아슈카트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 태도는 화를 삭히는 게 아니라, 이미 마음 속에서 어떠한 감정을 일궈내기에도 늦은 것이었다.
『기록을 만들고 역사를 새긴다. 그게 단명하는 너희 인간들이 무리 지으며 생존하는 방식이로다. 그것은 지혜를 남기는 가장 질 나쁜 방법이거늘.』
『신박한 의견이군.』
그럼 씹새야, 뺑끼 치는 법 가르치듯 알음알음 전해주리?
그러다가 지식을 아는 놈이 퇴사하거나 꽥 돌연사하면 전승 끊기는 거야. 나는 그렇게 인상을 팍 찡그리며 틀딱의 반지성주의를 혐오했지만, 그는 꿋꿋했다.
『지혜라 함은 구전으로 남겨야 하는 것이야. 지필묵과 종이 조각에 적은 글은 보는 작자의 해석 나름으로 바뀐다. 기록을 불태우고 글을 바꿔쓰면 과거마저 입맛대로 고쳐쓸 수 있어…….』
마른 목소리는 뚝뚝 끊기며 음울하게 울렸다.
『역사를 쓰고, 편찬하는 것에는 집필자의 뜻이 들어간다. 그러니 〈편찬대대〉 같은 놈들이 생겨나는 게야……. 서적 몇 권 건드린 것으로, 너희들은 이미 고대의 과오를 잊었지 않으냐.』
좆대로 지껄이는 아슈카트!
그는 멘탈이 나간 전과 13범 노인이 성경에 매달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지랄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공격을 가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만언신 로두르가 어째서 룬 마법에 제약을 건 것인지, 너희들이 대전쟁이라 칭하는 황금시대의 종말이 무엇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지금을 사는 이들은 다 잊었지.』
광인처럼 내뱉는 아슈카트의 말! 그게 내 귀에 파고들며 망설임을 낳았다.
‘이 새끼……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뭔가 이상했다.
이세계의 비사(秘史)를 파헤쳐온 고고학 석사의 직감이 뒤지게 경종을 울렸다.
번역 노예 시절, 불현듯 떠오른 가설이 진실을 꿰뚫었을 때나 느낄 수 있던 직감이었다.
『역사를 잊고 잘못을 되풀이한다. 엘프도, 드워프도, 유니콘도 바이콘도 다. 역사를 고쳐 쓰려는 〈인신〉의 손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야……』
평소 내 앞에서 비밀이나 잊혀진 역사를 떠들던 놈들이랑은 어딘지 모르게 느낌이 달랐다.
그들이 말한 비밀은 결국 ‘로스쿨에 붙은 옆집 장남이 사실 불륜으로 낳은 얘였다더라’ 라는 소문과도 같았다.
흥미를 돋구기는 하는데, 그런 썰은 사실상 내 인생이랑 큰 관계가 없는 얘기 아닌가.
그런데 이 놈의 방언은 뭔가 다르다……!
훨씬 더 핵심적인 느낌!
내 이세계 라이프의 근간과 미래를 찌르는 듯한, 역사를 직접 지켜본 새끼가 알고 가르친 지식과도 같은 실감이 그 음울한 중얼거림에 녹아 있었다!
나는 그걸 느끼자마자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좀, 엄마 없는 새끼야. 니 혼자 알아들을 말만 하지 말고, 정 그렇게 빡치면 뭐 때문에 그러는지 얘기를 해 봐! 가오만 잡지 말고 씨발!!』
대체 왜 이세계 씹새들은 자기 지식을 알려주는 걸 그렇게 아쉬워 하는 거야?
까짓 거 좀 ‘아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서 그런 거야’ 하고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뭐 덧나나? 애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스무 고개로 받아서 그런 거냐?
내가 성깔을 내자 아슈카트가 무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야 없지. 만에 하나라도 천혜신군께서 재림하시지 못하는 날에는, 너희도 과거의 죗값을 치르고 멸망해야지 않은고?』
『병신이 지랄 팝핀을 춰 싸네. 됐어, 좆만아. 말하기 싫으면 관둬.』
아내들 걱정을 안 하겠다고 한 참이긴 한데, 이 치매 노인의 중언부언에 어울려줄 시간은 없다. 저 새낄 회쳐버리고 기억을 엿보던가 하면 되겠지.
기억을 읽는 데 실패하면? 알 게 뭐야 시팔.
『그리 하자꾸나. 모든 일의 끝이 가깝다.』
아슈카트는 끌끌거리며 낮게 웃다가, 뜬금없이 존나 빠른 속도로 자기 혈도를 짚기 시작했다. 그 위치며 동작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
그 대머리 엘프가 사용했던 탈모 버프다!
『이 개새끼가 지만 버프를 걸고 자빠졌어!!』
시전자를 한층 강하게 만드는 기술이 저 틀딱을 얼마나 더 강하게 만들어줄지 모르는 노릇! 나는 네페르티티에게 외쳤다.
“우리끼리만 떠들어서 미안해요! 저 새끼 저거 빨리 처죽여야 합니다!”
“알았어.”
원래 말수가 적고 남 얘기를 듣고만 있는 편이어서일까? 네페르티티는 아무렇지 않게 채찍을 짧게 흔들었다. 발도술처럼 뻗은 채찍이 노인의 와꾸를 후려갈겼다. 거의 치명타였다. 통했나?
『그으으윽!』
얼굴을 처맞아서 피부가 찢어진 아슈카트는 그 채찍을 이빨로 물고 버텼다.
씹창! 존나 지랄났다!
“너 이 새끼!! 틀딱 주제에 왜 그렇게 건치야!!”
냉정하게 채찍을 당겨버리는 네페르티티였는데, 아슈카트는 그러는 중에도 기어이 자기 몸의 버프 혈도를 모조리 짚었다.
『크헝헝헝!!!』
채찍을 뱉은 틀딱 엘프는 나이에 안 맞는 미친 포효를 토해냈다. 그의 근육이 생생하게 부풀면서 털 모자가 벗겨졌다.
이 틀딱…… 원래부터 대머리였다!
기다란 건 수염 뿐인가! 마나를 주먹 모양으로 바꿔서 날아오는 아슈카트를 낚아챘다.
『갓 핸드!』
『소용없다!』
파스스스…! 빠르게 말라붙는 마나!
구갈명경은 유지되고 있나. 씨발, 아깐 주구장창 내려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반칙 기술이다. 나는 몇 걸음을 물러나며 버프 마법을 걸었다.
『갈!!!』
그러자 아슈카트는 다짜고짜 손바닥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시발! 베로니카한테 썼던 기술인가?!’
마나가 느껴지지 않으니 동작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직감적으로 버프에 넣으려던 마나를 전부 풀고 후퇴했다. 자칫 마나가 흐트러질 뻔 했다.
『나의 삶을 황야라고 하였나, 젊은 인간이여!』
바짝 마른 듯 하던 몸이 뻘개진 아슈카트!
시뻘겋게 변한 피부색을 빼면 엘프의 모습 그대로였는데, 그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게 내가 일궈낸 황야다! 장차 우리의 신께서 녹음을 피워내기 위한 토양! 신앙에 투신한 왕녀도! 나도! 그걸 위한 종자로서 살고자 결의했노라!!』
『종자는 씨발아!! 지랄 말고 곱게 뒤져!!』
나는 석사탈주의 보법으로 와리가리를 했다. 저 근육이 물근육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사태의 급변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염병!’
겨울철 손등처럼 내 마나 코팅이 쩍쩍 갈라졌다.
아까 전까지는 일단 몸에 닿지만 않으면 마법이 유지되기는 했는데, 이제는 거리를 둬 봐도 마나가 조금씩 말라붙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러다 신체능력 차이가 2배는 벌어지겠어.’
존나 위험하다.
구갈명경의 허용량 이상으로 내 마법을 퍼부어 볼까? 만약 그랬다가 마나량이나 기술의 마나 가성비에서 발려버리면?
지체할 시간은 없다. 마나가 말라붙는 스피드가 점점 빨라진다.
이러다가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야수회귀 자체가 아예 풀려버릴 수도 있었다.
『마땅한 결말이라면 죽음이라도 두려울까! 내 목숨과 네 목숨, 함께 재로 만들어 보자꾸나!』
감히 오늘내일 하는 노땅이 지 목숨값을 나처럼 파릇파릇한 젊은이와 동급으로 치다니? 나는 무척 빡이 돌았는데,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쿠과과과과! 쿠과과과과과과과─!!
대지진, 아니 산사태 같은 떡주먹의 연쇄!
급급하게 막는 창에서 마그마를 뿜는 황야와도 같은 심상이 터져 나오는 듯 하다!
이 새끼…… 상하관계 상 불꽃보다 강한 마그마 블로우를 쓰고 있는 것인가? 알프헤임이 불태워진 날을 떠올리며 갈고 닦은 권법답군.
‘공격을 가한다면 왼쪽 눈이다.’
공격을 막으며 적의 약점을 찾았다.
아까 버프 중에 채찍에 맞아서 터진 왼쪽 얼굴! 낫지 않아서 눈깔이 포도알 터트린 듯 흘러내리는 이상, 그나마 빈틈을 노리려거든 왼쪽이다.
─샥!
피하면서 네페르티티와 눈이 맞았다.
나랑 같이 노땅의 치매 펀치를 가드하던 그녀는 하얗던 두 팔에 피멍이 든 상태였는데, 그러고도 표정을 차분하게 한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처음 본 노땅의 심상도 전해지는데, 같이 싸우는 우리가 이심전심이 안 되겠는가?
나는 그 눈동자에서 심념보다 빠른 의견 교환을 마치고 숄더 태클을 걸었다. 네페르티티가 아슈카트의 사각으로 이동했다.
─콰앙!!
아슈카트도 뇌수까지 마른 건 아니었다.
하나만 남은 눈깔은 사각을 견제하며 나를 압박했다. 우리가 자기 사각을 노릴 거라는 걸 예상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눈치를 깠건 말건 할 수밖에 없다.
사박…. 네페르티티가 마나를 땅에 침투시켰다.
그녀의 발끝은 모델처럼 사뿐하게 섰으나, 거기 밟힌 대지는 운석에 맞은 듯 산산조각 나며 높게 튀어올랐다. 네페르티티는 발레리나처럼 한 바퀴 몸을 회전했다.
휘릭─ 퍼버버벙!
마나에 떠오른 바위는 박살나며 조각이 났다.
네페르티티는 마나가 말라붙건 말건 채찍을 머리 위에서 돌렸다. 고착된 그녀의 마나가 공전하며 모래 폭풍처럼 돌 조각을 휘말았다.
거대한 뱀이 사막의 폭풍을 휘감고 똬리를 뜨는 것을 방불케 하는 바람!
『끄우우우웃!!』
저대로 가속한 돌 조각이 날아오면 마나를 말라붙게 하는 구갈명경으로도 막을 수 없다. 당연히 거기에 생각이 미친 아슈카트가 손을 뻗었다.
『이쪽을 봐라.』
멍청한 새끼. 나는 대가릴 돌린 아슈카트의 턱 밑으로 창을 쑤셔박았다.
『크악!』
아슈카트는 신체능력 빨로 그걸 피했다. 하지만 망설임없이 창을 돌린 나는 구신의 마나를 몸에다 넓히며 퍼트렸다. 낭비없는 무학이 손에 깃든다.
발퀴리에와 단련하며 더욱 갈고 닦은 기술이 내 창으로 펼쳐졌다.
─푸슛!!
아슈카트의 가슴에 찌르기를 내질렀다. 창에는 아무런 마나도 깃들지 않은 걸 눈치챈 아슈카트는 물리력으로 막아내고자 창을 붙잡았다.
나는 그걸 노리고 있었다. 이 새끼는 계속해서 무기를 붙잡으려는 태도를 보였지 않은가. 우리쯤 되는 달인이 그걸 읽지 못할 리가 없다.
‘방금 알았다. 써야만 할 기술을.’
창대를 붙잡으려 할 때, 나는 손목을 뒤틀며 내 창을 180도 이상 비틀었다.
핑─!!!
맹렬한 스핀은 거기에 닿는 공기와 손을 엉키게 만든 끝에, 완전히 꼬아버렸다. 아슈카트의 팔은 공장기계에 말려들어간 것처럼 비틀렸다.
『크우우윽!! 이 노옴──!!』
팔꿈치 관절이 찢어지며 뼈가 튀어나온 그가 내 머리를 박치기로 부수려 들었다. 나는 사뿐하게 그 발버둥을 피하며 물러났다.
《나는 나 자신의 힘과 형태로써(m xpS.im xprw.i), 요새의 끝에 다다른다(in.ni r Drw xpSwt).》
─쫘악! 네페르티티는 성전을 암송하듯 읊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회전하던 돌 조각은 채찍에 맞은 말처럼 뿜어져 유성군처럼 아슈카트를 관통했다.
『크어어어억!!!』
방어해야 할 팔이 부러진 아슈카트는 몸에 바람 구멍이 나면서도 고함을 치며 내게 무릎을 찍으려 들었다. 피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날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쾅─!! 큰 상처를 입고 초조해진 아슈카트는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바위 유성군을 뚫고, 얻어맞아서 반쯤 무너진 그 머리를 일그러트리면서 말이다.
무참하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분명히 어떤 강렬한 집념이었다.
불타서 재만 남은 황야.
그게 저 늙은 엘프의 삶을 단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황야더러 자연이 쇠퇴했다고 말하는 건 생물의 오만이다.
자연은 그저 자연이었다. 독이 차오른 늪도, 풀 한 쪽 피지 않는 황야도, 울창한 숲처럼 자연의 또다른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더러 뭐가 더 좋은지 나누는 건 생물이 제 좋을대로 잡은 기준이다.
수만 년 전의 황야도 오늘날에는 숲일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마나 코팅이 고갈되며 내가 품은 마나는 【게르튀르】를 발현시키는 구신의 마나와, 그 내부에서 움츠리며 발아할 때를 기다리는 룬 문자만 남게 되었다.
아슈카트에 비하면 내면세계의 심상을 채울 게 많은 나다.
내심 그걸 시간 낭비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수렵신 샤티스의 말마따나 룬 마법이나 무술에 집중해서 투자했으면 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도 오늘 이 싸움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보라. 한 가지 신념에만 집착한 수행자의 말로를.
‘외곬수로 한 길만 걸으려다간 아슈카트처럼 잘못된 곳으로 향하게 될지도 모르지.’
잡다하게 배운 게 많았던 만큼 멀리도 돌아왔다.
하지만 그게 바로 지름길이었다. 전사의 성장은 등산이 아니라 축적이니까.
산에 꽃이 있으면 샘도 있어야 하고, 동물이며 흙, 나무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산을 오르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마음 속에 풍경을 꾸려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사의 강함이란 자신의 산을 일궈내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내 삶에 낭비는 있었을 지언정, 무의미한 시간은 없었던 셈이다.
길을 헤맨 시간도 산의 정상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니까.
──여행의 종착지야말로, 또다른 여행의 시작.
세계수에 매달려서 우주를 굽어보던 오딘은 그 진리를 깨닫고, 그걸 한 글자의 룬에 담았다.
【ᚱ(Raidō).】
참된 뜻을 품고, 룬이 발현한다.
마나를 고갈시키는 구갈명경의 힘도 룬의 발현을 더럽히지 못했다.
야수회귀의 코팅이 꺼진 내 몸은 순간적으로 그 공간에서 사라졌다.
『이게 무슨……』
달려들던 아슈카트는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진 날 찾으려는 듯 눈을 부라렸다. 나는 반투명하게 변한 세상에서 뭉개진 오감으로 그걸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가 발을 멈춰버린 찰나지간의 한 순간.
나는 공간을 도약하며 차원의 틈에서부터 빠져나왔다.
─서걱.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표층차원을 가르며 나타난 한 자루의 창이 늙은 엘프의 가슴을 헤집고 빠져나왔다. 【게르튀르】 공격기 제 1품새였다.
나는 창을 휘두른 채로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단거리 공간이동 회피기인가. 쓸 만하군.”
─푸확!
늙은 엘프의 가슴이 새빨간 피를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