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41화 (640/1,009)

‘요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뭐가 있을까.

만약 남의 집 애를 훔쳐가서 ‘느그 새끼 잘 먹었수다 꺼억-’ 하거나 지들 애새끼로 낼름 바꿔쳐서 ‘뻐꾸기’해 버리는 씹새끼들을 먼저 떠올린다면, 그 사람은 분명 민간전승에 빠삭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짝 장르는 지나가다가 검은 고양이랑 마주치기만 해도 일가족 참변 및 대환장 몰살루트 ON이 돼 버리지 않은가.

동화작가들이 애새끼 동심 반드시 죽인다맨으로 각성해서 집필하고 망라한 잔혹동화들!

그런 장르는 특성 상 너무 요정혐오적인 프레임으로 가득하단 말이지.

반대로 엘프한테 인간의 이미지를 물어봤더니 ‘인간… 노예시장… 엘프 성노예… 자연학대범… 편찬대대… 명령을 내려주십시오’하고 헤니르한테 쪼르르 달려가면 얼마나 얼탱이가 없겠는가?

모든 인간이 엘프를 환전 아이템이나 대충 한두 마리 사서 여친 삼고 싸움도 시키는 만능형 노예 엔터테이너로 취급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엘프를 성노예로 샀다고? 자네 제정신인가?

그래서 되도록 부정적인 이미지를 빼고 보자면, 내 안에서 요정이란 어린애다.

팅커벨이라고 하면 일단 나방이 먼저 떠오르는 건 건강한 대한육군 출신으로 어쩔 수 없지만, 내 이미지 속에서 요정은 재잘재잘 시끄러운 쬐끄만 녀석들인 것이었다.

〈인간! 인간! 너 이름이 뭐야? 단 거 좋아해? 이 열매 먹어볼래?〉

〈얘들아! 얘들아! 얘는 머리털이 무슨 카락코 둥지 같애! 걔네들도 보라색 독 풀로 둥지를 만들잖아! 그런데 얘 머리는 그거랑 비슷한데 독성은 없나 봐!〉

〈이 인간은 밖이 안 춥나 봐! 이게 그거지? 그 사막나라 옷!〉

〈엘프다! 나 얘 알아! 얘 이름이 뭐였더라? 올, 올, 올……〉

〈올라프?〉

〈그거다!〉

놀랍게도 이 요정 새끼들은 내 이미지를 충실하게도 지켜주었다.

엘프들이 매일 아침 면도칼로 지 정수리를 밀고 천마신공을 단련하며, 바이콘의 대변자는 아다에 유니콘은 흑마법을 써대는 이 이세계에서 말이다.

‘이세계 옐로 사이어인은 너희들에게 실망했다.’

요정답지 않게 추운 데 살길래, 당연히 너희도 보드카 한 잔씩 때리면서 머리 밀고 쪼그려 앉아 있을 줄로만 알았거늘.

이런 데에서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다니! 예끼 이놈들! 정수리에서 오로라를 반사하는 우리 헤이아치 유목 엘프 올라프 씨를 본받지 못할까!

〈요정 분들이…… 많이 친절하시네요.〉

〈자,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다나가 정수리에 앉은 요정들에게 시달리며 텅 빈 눈으로 말하자, 엘프 올라프 씨는 허둥대면서 요정들을 설득하고 조용하게 만들었다.

〈합죽이가 됩시다! 합!〉

〈〈합!〉〉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해지는 요정들.

요정나라 유치원생 여러분. 여러분이 아가리를 쌉치는데 약 11분이 걸렸습니다.

단지, 요정들은 입은 다물어도 어디 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지, 아니면 그냥 불행인지, 오랜만의 손님들에게 흥미진진한 요정들을 물리칠 적당한 핑계는 머지 않아 자연발생했다.

〈흐엑.〉

─발라당. 눈이 풀리며 기절하는 우리 여신님.

이제는 익숙한 아다 알레르기 증세였다.

아무렴, 시발. 저런 정신연령 7세 미만인 듯한 요정들이 전부 집에서는 섹스 한 판 찐하게 뜨는 후다들이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충격이긴 했겠다.

〈저희 아내가 여행길에 지친 듯 하네요. 우선 쉴 곳부터 찾죠.〉

그렇게 엘프들과 떨어져서 우리 일행끼리만 쉴 수 있는 공간을 받았다.

요정왕국 실리 코트에도 바깥에서 오는 손님이 없는 건 아니어서, 우리도 쉴 수 있는 곳은 금방 구했다. 온천이 서양식 벽으로 둘러쌓인 숙소다.

‘서양식 온천이라. 이건 좀 색다르군.’

온천 하면 일본이 가장 먼저 생각나지만, 지구 문명에서도 온천을 써먹은 나라는 적지 않았었지. 당장 조선도 그랬던 걸로 기억하고.

“요정이 한 마리…… 요정이 두 마리…….”

아무튼 그렇게 기절한 베로니카는 악몽을 꾸듯 얼굴을 찌푸리며 끙끙 앓았다. 다나는 물에 적신 수건을 그녀의 머리에 올려주며 말했다.

“얘는 당분간 이러겠네.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할 일 하고 와.”

“고마워. 마침 올 뭐시기 씨가 식물에도 빠삭한 사람…… 아니지, 요정을 찾았대.”

바이콘의 처녀 알레르기 반응은 목숨이 위험한 증세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일단 걱정되는 마음에 베로니카가 좋아하는 사과를 깎아두고 일어섰다.

“네페르티티도 이번 여행길에 고생 많으셨어요. 여기 목욕탕이 피로 해소에 좋다니까 다녀오셔도 되고요.”

“……요정들 보러 갈래.”

“그러세요.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엘프 안내인 분이랑 다녀오시깁니다?”

“응.”

요정들에게 시달리며 머리카락이며 옷이 엉망이 됐는데도, 네페르티티는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혹시 어린애를 좋아하나?’

오히려 약간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네. 역시 착각인가. 무표정 그대로야.

사실 여부는 어쨌든, 저렇게 무감정한 분위기의 초일류 전사에게 살갑게 앵겨붙는 순진한 아이는 흔하지 않겠지. 본인이 좋다면 막을 이유도 없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엘프를 따라갔다.

『따로 입국심사는 받지 않아도 됩니까?』

『음…… 보시는 바와 같이, 그런 절차가 따로 없는 왕국입니다.』

그거 어썸하네. 내가 이세계에 왔을 때 여기에 떨어졌으면 노예가 될 일은 없었겠어.

물론 그 경우에는 설원 어드매를 헤매다가 노르웨이산 냉동 노르드가 됐겠지만.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들어올 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바깥 날씨도 험하고요.』

『천연의 성벽이군요.』

『그런 셈이죠.』

대충 잡담을 나누면서 넓은 정원에 도착했다.

‘무슨 박물관 식물 공원 같네.’

민가 같은 곳이면 도저히 못 들어갈 게 뻔하니 뱀으로 변신해야 하나~ 하며 고민하던 차였기에, 이 만남의 장소는 나쁘지 않았다.

〈안녕~.〉

느긋한 인사를 하면서 날아온 것은 언밸런스한 생김새의 요정이었다.

‘작네?’

다른 요정들은 그래도 어린애 정도는 됐는데, 이 요정은 이상하게 작았다.

거의 게이밍 마우스 1개 정도의 크기!

헤픈 웃음에 자다 깬 듯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나는 그 꾸밈없는 자연태에 동류라는 직감을 느꼈다.

그녀는 학자의 길을 걷는 요정인 것이었다.

〈모니카 미리암이야~. 재밌는 얘기가 들리길래 초대해 봤어~. 와 줘서 고~ 마~ 워~.〉

그 요정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미리암, 미리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별로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그냥 데자뷰인가? 됐다. 안 떠오르는 걸 보면 별 거 아니겠지.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르드입니다.〉

〈차를 내 올게~?〉

그녀가 손짓하자 찻잔이 날아와서 음료를 잔에 따랐다. 요정이 아닌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한 다기(茶器)인지 그녀의 몸에 비해서 상당히 컸다.

〈마법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내가 말했다. 다기가 저절로 움직이는 주전자와 잔은 모니카의 마법에 의한 것이었다.

모니카는 자기 몸만 한 찻잔을 끌어안으며 방실거렸다.

〈요정은 나이를 먹을 수록 몸이 쪼그라들어~. 그리고 그만큼 마나가 늘어나지~.〉

그건 또 신비한 생물이군.

다른 생물이랑 마주치면 말로 변해버리는 전직 신족들에 비할 바겠느냐만.

〈아, 그렇군요. 그럼 커다란 아이들은……?〉

〈어린애야~. 장난꾸러기들이지~? 우리 어른은 걔네보다 몸이 작아서 마법을 쓰지 않으면 도무지 못 말리겠어~. 정말 힘들다니까~.〉

〈저희 고향엔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죠. 어린애들이 말썽을 부리는 거나, 그걸 어른들이 잘 타일러야 한다는 건 어느 종족이든 같군요.〉

〈우후후. 그럴지도~.〉

본론에 앞서서 잡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이걸 뭐라더라? 아이스 브레이킹? 해군 대장이 기술로 쓸 것 같은 이름이군.

─호로록. 자기 몸만 한 찻잔을 띄워서 홀짝댄 모니카가 말했다.

〈맞다~. 나한테 창대를 보여주고 싶다며~?〉

〈예. 이겁니다.〉

팔찌를 창으로 바꿔서 보여주었다. 모니카는 그 창대를 이번에도 마법으로 띄웠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살피던 그녀는 점차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혹시 엘프들이 옛 세계수의 가지를 너한테 선물하기라도 했니?〉

목소리에서 노곤한 기색이 싹 빠졌다.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고로 학자들이 ‘인생 씨발 존나 좆같애’ 상태에서 자기가 가진 지성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건, 그건 학위나 랩실 내 권력에 문제가 발생했거나 연구 거리가 생겼을 때 뿐이니까.

〈알프헤임 중앙의 그 나무 말씀입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동네 철물점에서 재료로 사다가 박은 나무에요.〉

〈흐응…… 너, 인간 세상에선 무슨 일을 해?〉

〈고고학자인데요.〉

〈역시. 처음에는 전사 같다고 생각했는데, 몸을 쓰는 학자는 대부분 고고학자더라.〉

창대를 테이블에 올린 모니카가 몸을 기울였다.

〈식물에도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니?〉

〈어디서 들어본 것 같네요.〉

〈잘 됐네. 아마도 네 창엔 엄청난 마나가 뚫고 지나가면서 생명력이 움텄을 거야. 내가 보기엔 이 창이랑 네가…… 음……〉

〈일체화하고 있다고요?〉

내가 표현을 골라주자 모니카는 끄덕거렸다.

〈벌써 누구한테 어느 정도 들었구나? 그래. 딱 그런 상태야. 네 마나를 받아들인 탓일까? 자아라기에는 모자라지만 어떤 의식이 싹텄을 거야.〉

〈예. 안 그래도 저번에 어떤 꿈을 꿨는데……〉

그렇게 설명을 들은 나는 꿈에서 나왔던 하얗고 검은 까마귀들의 얘기를 해 주었다.

〈꿈에서……?〉

모니카는 신중하게 듣고 고민하다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알 것 같아. 혹시 너, 네 창에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몬스터들의 마나를 먹인 적 있니?〉

〈세는 게 힘들 정도로 많은데요.〉

〈역시. 그럼 원인은 아마 그거일 거야.〉

─쪼르르. 갑자기 날아간 그녀는 정원에 놓여진 책장에서 책을 꺼내왔다. 사람을 위한 책인지 그 작은 몸에는 무식하게 커다랬다.

〈너도 동방인이면, 음…… 『심마(心魔)』라는 게 뭔지 알아?〉

〈대충은요.〉

무협지에서 주인공의 마음 속에 피어나는 온갖 정신적 역경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당사자의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충동이나, 뭐 그런 것들.

〈설마 그 검은 까마귀가 그거라구요?〉

〈비슷하지만 다르지. 너와 네 창은 설명하자면 하나이자 둘인 상태야. 하지만 네 마나를 무기가 멋대로 뺏어 쓸 수 없듯, 너도 이 무기에 흡수된 마나나 힘을 완전히 통제하진 못하지?〉

〈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멋대로 굴기 시작한 건 이 놈이 마나를 흡수한 양이 늘어난 뒤였다. 또, 자체적으로 가진 항마력 기능을 ON/OFF 하지는 못하기도 하고.

〈끙~ 차.〉

모니카는 힘겹게 책장을 넘겼다. 도와줄까 하는 마음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는데, 입장이 반대면 분명 도움받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할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아마 네 창은 너한테 어떤 불만이 있을 거야. 꿈에 나오는 건 항의이자 말대꾸 같은 거지.〉

창이…… 말대꾸?

내가 물음표를 띄워대자, 모니카도 고개를 모로 꼬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하얀 까마귀는 널 따랐다며? 그건 그 아이가 완전히 너의 힘이라는 뜻이야.〉

그렇겠지.

하얀 까마귀는 내가 쌓은 구신의 마나이자, 내 안에 잠든 룬 문자의 힘이다. 그건 완전히 내 통제 아래에 있는 내 마나였다.

〈그런데 검은 쪽, 그러니까 제 창은 그렇지가 않다?〉

〈아냐, 아냐. 통제하지 못할 뿐, 적은 아니지. 그렇지만 친구 사이에도 싸움은 하잖아?〉

〈투덜대고 있다는 거군요.〉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자기가 얻은 마나를 통해서 네 꿈에 나와서 항의를 하고 있는 거지. 그치만 이 창은 그 불만을 절대 말로는 전달 못 해.〉

〈왜요?〉

〈왜기는?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아니 쓰벌, 나이를 먹으면 쪼그라드는 고무고무 요정은 말이 되고요?

나는 목까지 치민 말을 적당히 삼켰다. 이세계 버전의 상식에는 트집 잡지 않는다. 그게 올바른 지구인의 이세계 적응법이었다.

〈그러면요?〉

〈그 불만이란 걸 알려줘야 해결이 되겠지.〉

─텁. 책을 읽으며 자기 생각이 맞는지 확인한 그녀가 표지를 덮었다.

〈아마 해결하지 않고 계속 다뤄도 문제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전사라면 자기 무기를 신뢰하기가 힘든 건 중요한 문제겠지?〉

〈예. 제가 믿는 만큼 이 녀석도 절 믿어줬으면 한다는 게 본심이긴 합니다.〉

칼밥 먹는 인간한테 무기는 연장이 아니라 생명줄이다.

고층빌딩 창문 청소부가 허리에 찬 끈과 같다. 이걸 무시하는 건 수능치러 가는 날 아침에 미역국을 먹이는 것보다 몹쓸 짓이란 말이지.

〈그럼, 이 녀석이랑 화해할 방법은 있습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좀 힘들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를 물끄러미 보는 모니카.

나는 눈치껏 알아듣고 팔짱을 꼈다.

〈……그래, 의뢰비는 뭐죠?〉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어~?〉

아니 쓰벌, 살다 보니 이걸 역으로 당해보네.

무심코 쓴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딱히 곤란하진 않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상체를 기울였다.

〈얼마면 되죠?〉

〈어?〉

〈얼마면 되냐고요.〉

내가 당당한 태도로 되려 공수표를 내놓자, 모니카의 두 눈이 당황한 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씨발, 거 학자가 연구비가 궁핍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이 강 물주님은 다~ 이해를 해요. 알간?

나는 내 차를 홀짝이며 정성과 시간을 잔뜩 들인 식물원을 여유로이 일별했다.

오빠 돈 많다. 친구는 더 많고.

아마 모니카 쪽이 나이는 더 많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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