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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왕님이 부르신다고요?”
다음날, 푹 잠들고 일어난 우리를 찾아온 엘프 올라프를 보며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예. 그, 노르드 님의 용건 때문이라십니다.”
그는 본인도 조금 당황스러운 듯 대답했다.
‘내 용건이라.’
그렇다면 창에 관한 일밖에 없겠지.
모니카가 요정왕에게 상담이나 보고를 한 걸까? 혹시 그 식물을 키우는 힘을 빌리는 과정에서 그의 흥미를 자극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바로 가죠. 일행도 같이 가면 될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딱히 찔리는 일도 없었기에 나는 흔쾌히 수락하기로 했다.
요정왕이라는 칭호는 거창한 만큼 부담된다는 게 본심이기는 한데, 왕족 등등을 만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쫄린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서 와. 엘프의 친구들.
아름다운 정경을 즐기며 궁전에 찾아가자, 실리 코트의 요정왕은 그 국민들만큼이나 가볍게 우릴 맞이했다. 왕좌에 앉은 것도 아니고 그냥 정원에 앉아서 방실거리는 정도다.
차를 마시고 있는 모니카랑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의 나무가 눈에 띈다.
“……우린 좀 떨어져 있을게?”
다나는 나한테 작게 속삭이고 정원을 구경한단 명목으로 물러났다.
하긴, 초대받은 입장이라고는 해도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으니까. 요정왕은 눈짓으로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사인을 주고 내게 손짓했다.
─너희 말을 몰라서 마법으로 말을 걸어 봤어. 잘 들려?
“예. 저희는 저희대로 말하면 될까요?”
─응. 내 귀에도 해석되서 들리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그는 모니카보다도 한층 체구가 작은 요정이었다.
요정왕 옆에서 눈인사를 하는 식물학자가 마우스 정도인데 비해서, 요정왕은 사마귀랑 맞다이를 뜨면 못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다.
거의 손가락 2~3개 정도의 크기일까? 그야말로 ‘요정’이라는 느낌이 드는 생김새였다.
─엘프의 친구들이면 내 친구이기도 하지. 편히 있도록 해.
하지만 자연스럽게 앉은 자세에서도 흘러나오는 요정왕의 위압감은, 저 헬렐레한 요정들로 국방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단숨에 날려버릴 정도였다.
‘숲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군.’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승산을 점치는 건 전사의 본능이나 다름 없는 거였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고 앉았다. 요정왕의 찻 주전자가 혼자 차를 따라주었다.
─인류의 탄생설화에 대해 알아?
소년 같은 외모의 요정왕이 물었다.
나는 이 놈의 이세계는 요정도 차를 내놓네 하는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부족하게나마 공부하긴 했습니다만, 인간 사회에서 전해지는 것과 요정왕님의 지식이 어느만큼 일치할지는 확실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어렵게 하네. 알았어. 그럼 내 지식대로 얘기할게.
가볍게 웃고서 손가락을 8자로 흔드는 그.
─최초의 인간 한 쌍은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진 존재였어. 암소 아우둠라가 죽고, 거기서 태어난 몇 위의 신들. 지금은 각국의 주신이라 불리는 이들 중의 작품 중에서도 처음이었대.
요정왕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서 묘목 같은 게 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요정왕의 정원에 나무가 한 그루 자라났다.
─그들 중 셋은 강에 떠밀려온 물푸레나무 토막으로 인간을 조각했지. 누구는 인간에게 언어라는 힘을 주고, 또 누구는 지혜를 주고, 마지막 하나가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었어.
“게르마니아, 아니. 아스가르드의 오딘과 그 의형제들인가요?”
─모니카의 말마따나 굉장한 식견을 가졌구나? 그래, 인간의 아이 중에도 신대를 기억하는 이가 한두 명 쯤은 있어야 순리에 맞지.
요정왕은 감탄한 듯 박수를 치고 순진무구하게 끄덕거렸다.
─혹시 이름도 아니?
“……천공신 오딘. 총혜신 헤니르=빌리. 만언신 로두르. 이렇게 셋 맞습니까?”
내 선임과, 나한테 파파고 능력을 준 신.
그리고 엘프 히틀러로 구성된 오딘 3형제다.
3형제라기엔 1명이 여자긴 한데, 어차피 독수리 오형제도 홍일점이 있는데 형제라고 하니까 대충 맞겠지. 난 이과라서 그런 거 몰? 루는 걸?
─짝짝짝! 요정왕은 신통방통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응응! 바로 맞췄어! 그들은 물푸레나무로 이 【중간 가지】의 첫 지성체를 만들고, 그 뒤로는 흙을 빚어내서 보통의 인간을 만들었다고 해.
고릿적의 신화를 읊던 요정왕은 불쑥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그러니까, 그들만은 못해도 식물에서 태어난 지성체라는 건 꽤 평범한 일이지. 당장 나처럼 좀 이상하게 태어나는 요정은 나무에서 열매 맺히듯 태어나기도 하고.
“제 창도 그렇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가 쌓고 내가 빚어낸, 네 창의 자아. 창의 정령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내가 빠르게 알아듣고 호응해주자 요정왕은 척 하면 척이라는 듯 까르륵댔다.
─창의 정령체는 일시적인 존재지만, 네가 쌓은 시간과 마나의 의인화이자 화신이야. 너의 창에서 태어나는 이상 결국 네 분신이나 다름없지.
“벌써 완성된 것처럼 들립니다만……”
요정왕은 싱긋 웃었다. 쓰벌, 진짜 벌써 끝났어?
하긴 지금 테이블 옆에 갑자기 자라난 물푸레나무만 봐도 그렇긴 하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속도로 창의 자아를 키워냈다면 하룻밤으로 충분했겠지.
요정왕은 악단을 지휘하듯 손가락을 저었다.
─그 정령은 네 영혼에 받아들인다면 금방 사라지겠지만, 그건 소멸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너와 하나가 된 상태로 영혼의 일부가 되는 거지.
“어떻게든 ‘설득’해서 돌아오게 하면 되는군요?”
─맞아. 다시 말하지만 그 애는 네 분신이야. 네 안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니,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친해져 보렴.
요정왕은 그렇게 말하며 나무를 가리켰다.
쓰벌, 안 그래도 왠지 익숙하다 싶었는데. 역시 이게 내 창이 변한 모습이라는 말인가?
“잠시 정원을 소란스럽게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일어서서 물었다. 요정왕은 싱긋 웃으면서 암묵의 허가를 내려줬고, 모니카만 이 끝내주게 잘 정리된 정원이 곱창날까 두려운 듯 눈을 떨었다.
“후우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창이 변한 나무 앞에 서서 자세를 취했다.
“쮸인님에게 반항하다니, 너 이 새끼 건방져.”
자신의 무기를 굴복시키는 수행이라니, 역시 내 창은 참백도였던 모양이다.
이번 시험을 통과하면 만해를 쓸 수 있게 되는 걸까? 나는 기대감과 조금의 걱정, 그리고 그따위 잡념을 싸그리 덮어버리는 비대한 자신감을 갖고 성호를 그었다.
“내가 하이그라운드에 서겠다.”
……와바랏!
내가 투지를 뿜어내며 주먹을 움켜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투펑─!
나무가 폭발사산하며 그 안에서 잼민이급 요정 사이즈……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 꼬맹이 쯤 되는 체격의 여자아이가 튀어나왔다.
‘나무 몬스터처럼 덤비는 게 아니었네.’
설마 안에서 내용물이 나올 줄이야. 이게 나의 애병(愛兵)이 모에화된 모습인가…!
옷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상복 같은 걸로 걸친 꼬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
눈을 뜨자마자 나랑 눈이 마주치는 꼬맹이.
그 녀석은 무슨 돌멩이라도 본 것처럼 쥐뿔 만큼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놀람을 수습한 나는 그런 무표정과는 별개로, 놈의 모습 자체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씹, 꼬맹이잖아.’
혹시 나는 이제부터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저런 잼민이를 두들겨 패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멀찍이서 지켜보는 아내들 앞에서?
‘……요요 사악한 씨팔럼! 감히 수작부터 부려?’
나를 자식한테 가정폭력이나 휘두르는 남편으로 만들 셈인가!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는 치밀한 계책! 이빨을 꽉 깨문 나는 분노에 덜덜 떨었다.
이토록 비열하며 적의 약점을 당당히 파고드는 사고방식이라니?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런다는 말인가! 내가 하는 걸 보고 배웠다면 도저히 저렇게 잘못 자랄 수가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이게 전부 흑마법사 새끼들의 마나를 처먹어서 그런 것이다. 근묵자흑이라고 원래는 착한 아이였는데 못된 물이 든 게 분명했다.
“비겁한 놈! 내 무기라면 너도 키 2미터 30센티짜리 레슬러의 모습으로 덤벼라!”
내가 좋게 기껏 타일렀건만 내 창의 정령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눈을 끔뻑거렸다. 니미랄! 가정교육을 살인술로 배운 새끼답군……!
“저건……? 창을 고치러 온 게 아니었느냐?”
“……씁, 뭐야. 쫌 귀엽잖아. 아니, 근데 남편놈이랑 좀 닮지 않았냐?”
멀리서 지켜보던 아내들은 영문을 모르는 채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멍하니 뻗대고 서 있던 잼민이는 그녀들의 속삭임에 반응했다.
“……엄마?”
“뭐?”
바로 앞에 있던 나는 그 중얼대는 소리를 듣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이 씹새…!! 이제는 우리 아내님들을 아군으로 삼을 생각인가?!
이대로 두면 나는 절대로 이 새낄 해치울 수가 없었다! 다나랑 베로니카가 얘를 끌어안고 눈물을 그렁거리기라도 했다간 전부 끝장이다!
“엄마!”
“야! 너 이──”
내가 끝을 모르는 사악함에 치를 떨며 방심하고 말았을 때, 꼬맹이는 미아보호소에서 엄마랑 만난 잼민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달려갔다.
나는 처음에는 그걸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새끼를 부르고자 목청을 키운 순간,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씨발?’
생각해 보니까 이 새끼, 아직 이름도 없네?
“엄마, 보고 시퍼써!”
녀석은 스스럼없이 멍한 표정을 짓는 미녀에게 달려가 안겨서는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낯선 아이에게 엄마라 불린 여인은──
네페르티티는, 드물게도 표정에서마저 티가 날 만큼 당혹하며 물었다.
“……엄마? 내가?”
어머니? 네페르티티가?
내 생각과 네페르티티의 말은 기적처럼 일치해버리고 말았고, 그 분위기를 눈치챈 여자애는 누가 애 아니랄까 봐 바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엄마, 아니야?”
“아, 어…… 으, 으응. 아니야. 엄마 맞아.”
당황한 네페르티티는 머뭇거리면서도 일단 우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사랑스럽게 활짝 웃었다.
물론, 그 꼴을 지켜보는 나까지 흐뭇하다는 건 결단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삐걱, 삐걱…….
다나와 베로니카는 고장난 고물 인형처럼 나랑 네페르티티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이 굴던 그녀들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그 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떨리는 게 내 눈의 착각은 아니겠지.
““……누구?””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닐 것이었다.
나를 닮은 그 귀여운 동양계 아이는── 눈동자 색을 포함해, 네페르티티와도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으니까 말이다.
“……우선, 진정하고 들어. 전부 오해야. 알지? 그치? 오빠 믿지?”
나는 벨로시랩터 우리에 던져진 맨손의 학자가 된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양손 손바닥을 펼쳤다. 와! 등골이 좀비 드래곤이랑 싸울 때보다 더 오싹오싹해!
다나와 베로니카는 눈을 찢어져라 뜨고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네페르티티에게 안긴 여자애는 홱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엄마, 나 배고파…….”
아이답게 솔직하고 거침없는 요구였다.
그래서였을까. 한평생 육아를 해 본 적 없었을 네페르티티는, 그 막중한 책임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주저하며 자기 가슴을 덮었다.
“……미안해, 아직 안 나와….”
그야 안 나오겠지.
그보다 왜 모유가 안 나온다는 얘길 하면서 날 쳐다보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