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78화 (677/1,009)

“제 학위 때문에 오셨다구요?”

하이로메인과 플랑궁클라 서커스단의 여러분이 항구에 입항한 배에서 내렸을 때.

나는 다른 걸 제쳐두고 그것부터 묻고 말았다. 입에 담고 나서야 아직 인사도 안 했는데, 하면서 아차 싶더라고.

킹치만 어쩔 수 없는걸! 학위 진급이라고!

똥색 석사 브로치가 은색이 될 기회란 말이야!

“네. 그 이슈가 있어서, 마침 강연을 마무리하고 다시 에린의 문화를 연구하러 돌아오는 차에 제가 학회의 대표로 나왔습니다. 일단은 그, 구면이니까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너무 예의 차리지는 마시구요.”

귀족이 돼 버린 나를 어려워하는 듯한 하이로메인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뒤늦게나마 오랜만에 만난 이들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했다.

“아무튼 이렇게 뵐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알렉산드라 씨도 잘 오셨어요.”

“환영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알렉산드라 씨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같이 인사하는 단원들도 그렇고, 유명한 서커스단인 만큼 귀족을 응대하는 게 익숙한 모양. 하긴 로마니아에서도 러브콜을 많이 받던 곳이지.

“정말이에요! 다들 어쩐 일로 브리타니아까지? 아, 아니, 기쁘긴 하지만요!”

아직도 얼떨떨한 듯 횡설수설하는 라리루라였다.

나는 살짝 몸을 비켜섰다. 편하게 말씀 나누란 뜻의 권유였다. 알렉산드라 씨는 고마워하며 고개를 숙이고서 라리루라에게 인사했다.

“마침 고르갈리아에 머물고 있던 차에 울프헤딘 백작님의 소식을 듣고 이렇게 발길을 옮겼습니다. 하이로메인 교수님과는 오가는 길에 알게 되었죠. 설명이 되었을까요? 프리실라 백작 부인.”

“백작 부…?! 자, 잠깐! 장난치시지 마시구요!”

─펄쩍! 뜨거운 물을 끼얹은 듯 놀란 라리루라.

알렉산드라 씨는 능글맞게 웃었다.

“왜 그러시죠? 서커스단이 백작 부인께 존칭을 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뭔가요?! 손절인가요?! 라리루라는 손절을 당해버렸나요?! 저 울거에요! 울면서 선배한테 여러분들을 종신고용해 달라고 조를 거에요!”

“우후후. 그건 곤란하죠. 좋아요. 겸양은 관두는 걸로.”

손을 내젓는 알렉산드라 씨.

─우르르! 그러자 단원들과 동물들이 달려와서 우리 후배님을 둘러쌌다.

〈라리루라! 몇 달만이네!〉

〈네, 네! 여러분도요! 그런데 브리타니아 쪽은 저번에 돌지 않았어요? 앗! 그러고 보면 슬슬 순회공연이 끝날 시즌이긴 한데……〉

〈맞아. 휴가차 쉬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왔지.〉

다시 친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플랑궁쿨라 서커스단과 라리루라.

나는 몰래 안심했다. 내심 걱정하던 문제는 원활하게 해결된 모양.

‘정확하게 말하면 해결을 한 거겠지.’

알렉산드라 씨가 노련하게 얘기를 그쪽으로 넘겨버린 것이다. 문제가 되기 전에 말이다. 나는 그걸 눈치채고 하이로메인과 대화하다 그녀를 불렀다.

“두 분은 오는 길에 만나셨다구요?”

“그렇습니다. 로마니아에서 브라티니아로 오는 길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연히 울프헤딘 백작님 얘기를 나누는 걸 듣고 통성명을 했죠.”

“신이 보우하신 모양입니다.”

신성제국 로마니아 출신이기 때문일까. 웃으며 하이로메인의 설명을 한 술 거드는 알렉산드라 씨였다. 나는 약간 붕 떠버린 베로니카를 가리켰다.

“저는 또 청첩장을 받고 와 주신 줄 알았죠.”

“청첩장……? 혹시 결혼하시나요?”

“옙. 약간 부끄럽습니다만.”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거 장모님한테 ‘셋째 아내랑 결혼하려구요! 아, 님 딸은 아니고’라는 얘기를 꺼낸 셈 아닌가? 갑자기 심장이 덜컥하는데.

다행히 알렉산드라 씨는 표리없는 미소로 작게 박수를 쳤다.

“축하드립니다. 울프헤딘 백작님께선 예전부터 대단한 분이셨으니, 귀족이 된 지금은 사모님들이 여럿 있으셔도 이상하진 않죠.”

“예전처럼 편하게 노르드 씨라고 불러주실래요? 플랑궁쿨라 서커스단 여러분은 라리루라의 친가나 다름없습니다. 너무 그러시면 제가 그녀한테 크게 혼날 겁니다.”

내 안의 언데드-유교 드래곤이 이 상황을 존나 불편해 하고 있거든.

가슴으로 낳은 의붓딸을 건드리고 다른 여자들이랑도 결혼한 문어발 사위가 장모님한테 존댓말을 듣는다니? 쓰벌, 나 살짝 정신 나갈 것 같애.

아직도 부분부분 이세계 물이 덜 든 모양이다.

“맞아요! 선배는 브리타니아 공주님의 부군께도 말을 놓는우으으웁!!”

“대충 그런 상황이니 이해 바랍니다. 신분보다 중요한 것도 있는 법이죠.”

단원들과 얘기하다 괜한 소리를 하며 끼어드는 후배님은 셧 더 마우스다.

“후후후. 하하하! 저희 서커스단 출신의 단원이 백작님을 혼내게 만들 수는 없죠. 저도 예전처럼 노르드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남들 앞에서만 조금 주의하면 될까요?”

“물론이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알렉산드라 씨는 내 맘을 알아주셨다. 와, 십년은 늙은 기분이야.

‘휴, 그래. 귀족이고 뭐고 이게 맞지.’

저기 저 세상 귀여운 후배님을 잘 키워준 분이 아닌가.

이 분한테까지 신분을 앞세워서 뻐드럭댈 거면 나중에 우리 엄마아빠한테도 ‘어허! 백작님이라고 부르거라!’라고 할 거냐? 뭐든 중도가 중요하다고.

귀족이 평민들이랑 친하게 지낸다고 벌받는 건 아니니까.

“한곳에 머무르지 않다 보니 청첩장을 받기가 꽤 힘든 몸인데, 운이 좋았네요.”

그때 알렉산드라 씨가 북쪽 해안가를 가리켰다.

“저게 소문이 자자한 떠다니는 섬인가요?”

“소문이 자자하다구요? 설마 고르갈리아에?”

“네. 노르드 씨의 소문도 풍문으로 들리더군요. 그래서 휴가 차 잠시 들러볼까 하는 얘기가 됐죠. 기왕 온 거 노르드 씨의 결혼식에 한 자리 내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래야죠.”

거절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바로 수락하는 나였다.

‘근데 아틀란티스의 소문이 멀리도 퍼졌군.’

아마 아틀란티스의 운행을 본 배가 그만큼 많았는가 보다.

소문이 퍼지는 도중에 ‘그거 브리타니아의 어느 백작의 섬이라던데?’하면서 진실이 빠르게 전해진 게 아닐까. 지레짐작이지만 대충 맞을 것 같다.

바닷사람은 미신을 쉽게 믿고, 또 의외로 입이 가벼우니까.

소유권 분쟁이 더 귀찮아질지도 모르겠군.

“……푸하!”

그러고 있자 라리루라가 입을 틀어막는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면요, 여러분! 저랑 같이 베로니카 언니의 결혼식에서 공연 안 하실래요?”

“공연?”

“네♡! 꼭두각시보다는 역시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의 공연이 백 배 천 배 낫잖아요! 서커스 말고 춤사위 같은 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라리루라의 제안에 단원들은 아이 컨택을 하고 말했다.

〈공연하자는 얘기지? 우리야 괜찮은데……〉

〈공연비는 라리루라가 챙겨드릴게요☆! 저 돈 많이 벌었어요!〉

〈아니, 그거 말고. 너도 공연에 끼려고?〉

〈네? 뭔가요? 왕따인가요? 네년 같은 배신자는 두 번 다시 우리랑 공연할 자격이 없다는 무언의 암시에요? 그렇군요. 잘 알았어요. 울면 되나요?〉

와, 말 많은 것 봐. 완전 물 만난 물고기구만.

첫 만남 때가 생각난 내가 슬며시 웃고 있는데, 알렉산드라 씨가 질문했다.

〈혹시 라리루라. 너 아직도 공연 연습해?〉

〈아핫♡! 당연하신 말씀! 아까 배 위에서 ‘예전 에이스’라시는 얘길 듣고 자존심에 얼마나 스크래치가 난 줄 아세요?〉

가슴과 허리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는 라리루라였다.

〈현역 때와 비교해도 전혀 녹슬지 않은, 아니! 한층 성장한 솜씨를 보여드릴게요☆! 마침 새롭게 배운 크라운 크라운 님의 공연기술도 있다구요~?〉

저긴 저기대로 굴러가게 두면 되겠구만.

나는 라리루라를 맡겨놓고 등을 돌렸다. 아무튼 베로니카랑 네페르티티도 기다리고 있다. 일단은 얘기를 마무리 짓고 텀을 둘 때 아니겠는가.

그러자 하이로메인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학계에서 나온 서류입니다. 설명은 안에 동봉되어 있습니다만, 아마 내용은 아시는 바와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대답하면서 서류를 냉큼 챙겼다.

아직 확정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웃음이 절로 나오네. 으헤헤, 진급. 진급이다! 마이 프레셔스!

물론 내 칭호 라인업에 비해서 고고학 석박이라는 게 그렇게 의미가 있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 조금이라도 굴러본 사람은 안다.

사람은 남을 부를 때 ‘박사님’이라고는 불러도, 결코 ‘석사님’이라고는 불러주지 않는다는 걸……!

그렇기에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부랄친구한테 게임에서 개좆발려놓고 ‘응 내가 월급은 더 많음~’이라며 야부릴 터는 게 뒤지도록 추하고 병신 같은 짓인 것처럼 말이다.

상상해 보길 바란다. 이번 결혼식 날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훤하지 않은가?

듀나미스 공방의 공방장. 마나부여기술의 복원자.

외국인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브리타니아의 백작.

미스릴 클래스의 달인이자 마법사.

그런 칭호를 붙여주면서 띄워주다가 이력서의 맨 마지막에 적힌 ‘석사 동장’을 보며 어색하게 생략하거나, 애매하게 얼버무려야 하는 사회자의 모습이!

다른 업적이 뛰어나기에 더 안 되는 것이다.

샘숭전자에 취직하려는 능력자는 이력서에 굳이 JLPT N5를 적지 않는다.

업무랑 상관없거나 다른 업적과 비교해서 빛이 바라는 자격증. 그런 것들은 면접을 볼 때 자칫 안 쓰니만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대학원생 시절의 비틀린 사생아인 석사 학위를 말소한다?

‘개소리죠.’

씨발, 내가 왜 그 개고생을 했는데?

석사로 관둘 바엔─여유가 되면─ 이왕 시작한 거 박사까지 찍는 게 맞다. 이건 연극영화과 석사 하동훈 씨도 인정한 부분.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심없이 이 건을 가져와 준 하이로메인과 악수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교수가 사악하지는 않다.

호르샤와 싸우며 깨우치고, 오러의 습득으로도 이어졌던 진리였다.

논문을 빼앗겨 비틀린 대학원생이 된 오우거의 왕이 있었듯, 타인에게 자기 책과 논문을 내주는 교수도 있는 것이었다.

내 지도교수셨던 카르미네 대학 언어학과의 브람마톤 교수님이 좋은 예시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귀족이랍시고 대우받고 싶진 않으니, 장차 교수님과도 좋은 인연이 계속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 저 같은 것에게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마십셔. 하이로메인 교수님은 고고학계의 고명한 학자 아니십니까. 박사급 인사들은 후원해 주시는 귀족 분들이랑 막역한 지기인 분들도 많잖아요?”

“가, 감사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다가가도 하이로메인 교수는 여전히 좀 어색해 보였다.

쓰벌, 이거 내가 귀족이어서 그런 게 아닌 모양인데? 나는 말없이 눈을 굴렸다. 그러자 딴청이나 피워대던 뿔 달린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앨리스?”

야. 니가 범인이지? 유니콘 앨리스는 움찔했다.

“넵! 노르드 님! 부르셨나요!”

“그래. 너는 울프헤딘 백작이 아니라 노르드 님이라고 부르는구나? ‘네 기준’에서는 인간 사회의 귀족 신분보다는 그쪽이 더 고귀한 모양이지?”

“그, 그그, 그렇지는 않은, 않은데요?”

앨리스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이 새끼, 울프헤딘이니 구도자 운운하는 얘기를 싹 다 까벌렸구만?’

유니콘의 저주와 해주 얘기를 하면서 좋아하는 쮸인님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버린 모양이다.

베로니카도 그러더니만, 혹시 슬레이프니르의 DNA에는 충성심이 새겨져 있나? 존나 바이콘도 유니콘도 주인 바라기인데.

그 유니콘 흑마법사도 충성심은 굉장했었고.

‘아니, 사실 하이로메인이 우리 사정을 알더라도 별로 상관없지.’

당사자인 앨리스가 친밀한 상대에게 얘기하는 건 그녀의 권리다.

그걸 뭐라고 할 거면 나도 베로니카랑 내 얘길 아내들한테 하면 안 됐지.

‘그러긴 커녕, 오히려 잘 됐어.’

내가 설명할 고생을 덜어줘서 좋기만 하네.

나는 사람 좋게 웃으며 하이로메인에게 말했다.

“볼 일은 다 끝나셨으니, 교수님도 다시 에린의 역사를 연구하러 가시겠군요. 물론 얼스터 분들과 연을 트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렇긴 하죠.”

내 걱정이 팩트여서였을까. 하이로메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모사 마법(Pingere)을 배운 군락에서는 긴 시간 연구를 해 왔어서 더는 얻을 기록이 없어요. 새로운 연구나 교차검증을 위해서라도 새 군락을 찾아야겠죠.”

“고생이 많으십니다.”

얼스터 인들은 원래가 외부인을 배척한다. 나도 몇 번 겪어보지 않았는가.

기록을 남기지 않는 문화 때문에 연구를 하려면 지식을 전승받는 이들에게 직접 들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랑 얼굴을 트는 것부터가 대장정이지.

‘하지만 만약 누가 주선을 서 준다면 어떨까?’

내가 다나의 남편으로서 얼굴 프리패스를 뚫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월척의 예감을 느끼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하이로메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에, 그걸 본 것은 덜덜 떠는 앨리스 뿐이었다.

“그런데, 교수님. 때마침 제가 그쪽에 인연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네?”

“에린의 방계 후예인 픽트 인의 사제장님께서, 어떤 사건 이후로 규율을 타파하고 픽트의 역사와 마법을 책으로 남기고자 하고 계십니다.”

“픽트? 혹시 모사 마법의 원류(原流)인?!”

내가 꺼낸 소식에 하이로메인의 눈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미끼를 물었군.

왜 애미없는 쓰레기 교수들이 논문을 훔치는가.

새 논문을 쓰기가 귀찮아서?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논문을 쓸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악한 교수들은 대학원생이나 랩실 노예들이 공들여서 쓴 새로운 관점을 쌔비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새끼들은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이지.

그럼, 만약 누가 공짜로 논문거리를 선물하면?

“그 픽트의 사, 사제장님께서, 대대로 구전하던 역사와 마법을…… 책으로?!”

자연스럽게 이런 반응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네. 하지만 집필에는 꽤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모양라서요. 저희와도 깊은 연을 맺으신 분이셔서 가능하다면 꼭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살며시 운을 띄우며 슬프다는 말했다.

그리고 말하는 김에 몇 번인가 했던 얘기를 또 반복하겠다.

“교수님의 교육능력이 입증된다면, 제가 그분과의 중개를 맡을 수 있겠군요.”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학자는 밥을 먹다가도 논문거리가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는 생물이야.

‘바이콘들에게 상식을 교육해줄 일타 강사님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군.’

인맥으로 인맥 낚기.

이게 사람을 낚는 어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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