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08화 (707/1,009)

***

“그럼 남은 일만 후딱 끝내놓고 올게요.”

네페르티티에게 그리 대답하고 잠깐 텀을 뒀다.

보통 저런 상황에서 일하러 가는 게 존나 눈치 없는 짓인 건 맞다.

그래도 아직은 대외의 위협이 남아 있다. 그걸 방치해둘 수만은 없잖은가? 여색에 빠져서 실수를 저질렀다간 아내님들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염치도 없고.

집무실로 달려간 나는 발퀴리에와 웨스턴, 왕실기사단에서 파견 나온 비서와 얘길 주고 받았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업무 처리 완료.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나 칭찬해.

“경께선 업무 속도가 무척 빠르시군요. 아니면 혹시 바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원래 칼퇴근을 좋아해서.”

아침 업무를 처리하고 네페르티티의 방에 돌격.

원래는 훈련 좀 하고 나서 아내님들한테도 회담 결과를 설명해주러 가려고 했는데, 설명 좀 늦어진다고 뭐 큰일이야 나겠는가.

“왔구나.”

“넵.”

네페르티티의 방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미니멀리스트의 집이나 호텔 체크아웃 직전에 웬 ‘남자를 유혹하는 10가지 방법~경험이 부족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같은 자지계발서를 참고해서 분위기를 조성한 곳 같다.

가구도 최소한. 개인 물품은 거의 없음.

그런데 묘하게 향유나 향초만 많다.

나는 그중에서 양초 같이 생긴 걸 집어들었다.

“나르메르-나일에서 맡아봤던 향기네요. 취미신가요?”

“……응. 약초를 갈아넣었어.”

대답의 텀이 좀 길군.

딱히 취미는 아닌 모양.

이건 그 뭐시냐, 딱 그거다. 난생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집에 초대한 모쏠남이 방을 후딱 정리하고 올리브영에서 비싼 아로마를 쓸어담아온 그거.

‘그래도 자작 치고는 퀄리티가 높은데?’

─킁킁.

나는 그 향을 과학실 실험하듯 손을 휘적거려서 맡았다. 종교적인 색채가 느껴지는 향기지만 싫은 건 아니다. 면세점에서 볼 법한 고오급진 향수나 풍길 법한 향기였다.

“좋네요.”

“……조금 가져갈래?”

“그래도 되요? 아, 기왕이면 만드는 법도 알려주실래요? 좀 관심이 가서.”

암만 그래도 우리 사차원 아가씨가 열심히 만든 걸 아내들이랑 분위기 조성하는데 쓸 순 없으니, 받은 건 내 방에서 개인적으로 쓰는 정도일까.

그래도 내가 아로마를 만들 수 있게 되면 네페르티티나 아내들한테도 선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념일 선물로는 약간 별로여도 간단한 선물로는 좋을 것 같다.

눈치 안 보면서 선물하려면 전원한테 돌리는 게 제일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내 부탁에 네페르티티의 귀가 쫑긋 선 것 같았다.

“……알았어. 알려줄게.”

“지금요?”

“너는 바쁘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날 때 하겠다는 건가.

내가 향초나 향유 제작에 관심을 가져주면 평소에도 더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뻔히 보이는 듯 하다. 연애 초심자다운 잔꾀였다.

─드륵.

무릎을 짚은 네페르티티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짱박아둔 온갖 약재, 물컵, 생활도구 같은 게 언뜻 보였다. 역시 허겁지겁 치워둔 모양.

멈칫한 네페르티티는 내 눈치를 보더니 당황한 건지 작은 등으로 서랍을 감추려는 듯 꼼지락댔다. 뭐지 이 사람, 귀여워 죽겠네.

서랍을 정신없이 뒤적거리던 네페르티티는 빨리 이 수치스러운 내용물─자기가 날 부르기 전에 방 정리에 고심했다는 흔적─을 감추고 싶었는지 다른쪽 서랍을 열었다.

그쪽 서랍은 대충 던져놓은 속옷들로 가득했다.

따로 개지도 않고 던져놨다는 점에서 생활감이 천장을 뚫으셨다.

“……………….”

…쾅! 네페르티티는 달인의 속도로 속옷 서랍을 닫았다.

서랍을 잘못 열었음을 인지하고 닫기까지 약 0.2초. 초일류 전사다운 반응속도였지만, 운 없게도 나 역시 초일류의 마초 워리어. 원치 않게 다 보이고 말았따.

속옷은 전부 신품인가. 지위가 지위인만큼 돈이 많은 그녀다. 한 번 갈아입고서 버리고 그때마다 새로 사는 걸지도 모르지.

나는 엘리트 대갈통과 전사의 직감이 예고하는 바를 경시하지 않았다.

─질끈. 2수 앞을 읽고 눈을 감는 나.

─홱!! 번개처럼 돌아보는 네페르티티.

“……봤어?”

“넹?”

웃음을 참지 않고 눈을 감았던 내가 되물었다. 마치 ‘저어는 아로마 향초 냄새를 만끽하며 웃고 있었는데용?’하는 리액션. 네페르티티는 침묵했다.

“……아무 것도 아냐.”

집에 친구를 불러본 적도 없는 건지, 하여튼 ‘내 방에 올래?’라는 권유가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지금 막 깨달아버린 듯한 그녀였다.

아무튼 그렇게 준비물을 챙긴 뒤엔 상상도 못한 아로마 제작 타임이다.

약간 가정실습시간 같군.

“향유도 향초도, 약초를 가는 것부터 시작해.”

“넵.”

“오늘은 향초보다는 향유가 좋아. 빨리 다니까 또 보러 오…… 또 만들러 와.”

“넵넵.”

절구 같은 곳에 씨앗과 약초를 넣고 갈았다. 내 힘이 강하고 도구가 튼튼해서 거의 압착기에 넣은 듯 갈리는 약재들. 노르드-! 너무 강하다아앗-!

네페르티티는 내 핸드 메이드 녹즙을 보고 끄덕거렸다.

“응. 실패.”

“않이 왜죠.”

성공 각 아니었나? 거의 마른 오징어에서 즙을 짜내듯 갈아놨는데.

“이렇게 되면 향유랑 섞여.”

“넹? 원래 섞는 거 아녜요?”

티르시랑 포션 만들듯이 한 게 나빴나? 태양의 나라 나르메르-나일의 여전사랑 로마니아의 얼음 마법사는 기술에서부터 상성이 별론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네페르티티. 표현을 고르는 것 같았다.

“너무 섞여도 안 돼. 기름에는 약재의 향만…… 엄밀히는 약재는 아니지만……”

“네?”

“……끈적거리면 기름이 쉬어서….”

말이 빨라지고 길어지는 만큼 소리가 작아지는 네페르티티.

종국에는 입을 다물고 눈썹이 축 내려앉았다.

“……흐흫.”

뭐지 이 기분은.

‘네? 뭐라고요? 안 들려요 하고 말해보고 싶다.’

그럼 분명 쭈구리가 되서 고개를 푹 숙이고 발가락만 꼬물꼬물거리겠지?

그렇게 이도저도 못할 때 저 매끄러운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싸악 훑으면 깜짝 놀라서 허리를 팍 세우다가 앞으로 넘어질지도 모른다.

너무너무 해 보고 싶었지만, 아싸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참았다.

말 없는 여자애가 학교 발표 중에 다른 여자애들한테 목소리가 작다는 소리를 들었다가 울먹이며 내려왔던 게 생각났거든.

이게 다 프랑 때문이다. 프랑을 시작으로 우리 아내님들이 하도 괴롭힘당하는 걸 좋아해서 나도 졸지에 전천후 학대파가 되어가고 있다고.

아니, 그치만 웃는 얼굴은 봤으니 다음엔 우는 얼굴도 봐야 할 차례 아닌가?

네페르티티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울먹이면서 ‘미워’라고 말 하면 존나 귀여울 텐데. 이 아싸는 좋은 아싸다.

“……왜 안 되는지 보여줄게.”

아싸 경력 10년의 ‘찐’ 네선생께서는 솔선수범하시어 시범에 들어가셨다. ─샥샥! 내가 제작한 녹즙을 작은 오일 병에 넣고 흔드는 그녀.

흔들거리는 가슴이 관람 포인트였다.

15초 짜리 영상으로 만들어서 무한반복재생 켜 두고 싶다.

“자.”

네페르티티는 셰이크를 끝낸 오일 병을 열었다. 그리고는 내 손등에 살살 발라준다. 이 집 서비스 좋네. 자주 다녀야지.

하지만 올리브 오일처럼 향기가 강했던 기름은 녹즙이랑 뒤섞여서 퀴퀴한 색이 돼 있었다. 내가 약초를 갈아버린 탓이었다.

“어때?”

“좀 그렇네요.”

똑같은 향유를 발랐을 텐데, 그녀랑 내 피부가 전혀 달랐다. 네페르티티는 유광처리를 한 것처럼 반짝거리는데 나는 그린 스킨이 돼 버렸다.

“록타르 오가르.”

이대로 튀기면 신호등 치킨도 쌉가능이겠군.

“왜 안 되는지 알겠네요. 이걸 몸에 바르는 건 좀.”

“……고블린으로 변장할 때 유용.”

“풉, 크흐흐.”

기습적인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딱 보급 위장 키트 색깔이긴 해.

“재밌었어?”

네페르티티는 내가 웃은 게 기뻤는지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개그가 성공하자 세상 기뻐하는 모습도 한없이 아싸 느낌이지만, 좋아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다 용서가 되는 그녀였다.

오늘밤에 네페르티티가 이불을 덮고 이 회심의 개그가 성공한 걸 떠올리며 혼자 흐뭇해 하는 게 쉽게 상상이 가서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신나서 다음에도 계속 개그를 시도하다가 살짝 삐끗해서 분위기가 싸해지면 그날은 방에서 혼자 베개에 얼굴을 박고 한껏 침울해 하지 않을까.

남들은 사춘기에 겪는 인간관계의 기쁨과 실수.

네페르티티는 그 성장통을 뒤늦게 겪고 있는 것이었다.

실시간으로 흑역사와 행복한 추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게 보여서 약간 흐뭇하기도 하다. 하는 김에 일기를 쓰는 걸 권해보는 건 어떨까?

한 2~3년 뒤에 그 일기장이나 오늘 일을 정독해주면 성수에 맞은 악마처럼 울면서 그만해달라고 매달릴 것 같은데. 존나 끌리는 제안이자너?

“으헤헤헿.”

실실대면서 새로 약재를 갈았다. 네페르티티가 결과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괜찮았는지 오일 병에 붓고 흔들어주는 그녀.

“이제 하룻밤 재워두면 완성.”

“그럼 네페르티티 방에 둘까요? 또 놀러오게.”

…끄덕끄덕! 바로 수긍하는 그녀였다.

나는 그녀가 병에 붙인 종이에 ‘노르드 거’라고 쓰는 걸 보며 또 작게 낄낄댔다.

“그나저나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약학에 박식하시네요.”

영혼에 대해서도 빠삭하던 그녀다. 치유 사제가 많은 하토르 교단에서 배운 걸까? 세크메트 모험가 길드는 그쪽 교단의 자회사니까 그럴 만도 한데.

하지만 네페르티티는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좋아했었어.”

“아……”

나는 뭐라 대답하기 힘들어졌다. 네페르티티는 기껏 즐거워졌던 분위기가 자기 대답에 급속냉각된 걸 깨달은 듯 빠르게 이어말했다.

“나라면 괜찮아. 예전에는 일부러라도 떠올리려 하지 않았지만…… 너랑 만나고 나서부터는 한 번 해 보고 싶어졌어. 좋은 일.”

“그렇다면 저도 기쁘지만요. 오빠 분이 이런 걸 좋아하셨나 보죠?”

“응. 여자들한테 자주 선물했어. 좋은 향기는 그 사람이 자기를 자주 떠올리게 해 준대. 직접 만든 향유는 다른 곳에선 못 구하니까, 또 만날 기회도 생기고.”

많아진 말수가 그녀의 누그러진 마음을 넌지시 암시해주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얘기, 댁이 왜 갑자기 아로마 제작에 몰두하는지 자백한 거나 다름없는데.

눈치 못 챈 편이 재밌으니까 그냥 냅둘까.

“흐흠, 과연. 여자들한테 선물로…… 여자‘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구만~ 하던 나는 멈칫하면서 되물었다. 웨 복수형이지?

“응. 여자들.”

네페르티티는 아무 내색도 않고─오히려 고개를 모로 꼬기까지 하며─ 말했다.

“여러 명. 한 번에 5~6개를 만드는 것도 봤어.”

“……오빠 분께서 부인이 많으셨나 보죠?”

“미혼. 그래도 같이 다니던 언니는 주기적으로 늘었어.”

“……저번에 저를 보고 있으면 오빠 분이 생각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

‘그게 왜?’라는 뉘앙스로 고개 갸우뚱하지 마.

그때 했던 말이 갑자기 욕으로 들리잖아.

팩트에 기반한 감상인 게 더 질이 나쁘다. 반박할 근거가 없는레후.

그리고 당신 오래비 사제 아니었냐고. 나르메르-나일에선 성직자가 출산율 퍼센테이지에 기여해도 돼? 과연 여사제들이 예배 중에 알몸으로 제로투 추는 동네는 다르다.

존나 총각 시절에 가 봤어야 했는데.

니미 쓰벌 노예 생활만 아니었어도.

“……어떤 분이셨지 좀 궁금하네요.”

나랑 네페르티티의 오빠 사이에서 의외의 접점 아닌 접점을 발견해버린 나는 싱숭생숭한 기분을 하고 손등의 오일을 닦아냈다.

나랑 사고방식이 닮은 양반이니 살아 계셨으면 찐친을 맺을 수도 있었을 텐데.

네페르티티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신경이 쓰이면, 같이 볼래?”

“예? ……아.”

무슨 말인가 했던 나는 금방 눈치챘다.

네페르티티의 오빠가 줬다는 조각상이다. 아틀란티스를 제압하기 전날에도 얘기했었잖은가. 일이 끝나면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애초에 오늘 용건이 그게 아닌가 싶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화제가 향유 얘기로 넘어가길래 내 착각이던가, 네페르티티한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로 괜찮다면.”

사실상 유일한 피붙이의 유언장이다.

같이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 중임에 날 골라준 것만큼 기쁜 일은 달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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