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상에 손을 얹으면 돼.”
내가 수긍하자 네페르티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 조각상에 걸린 마법, 나 혼자서는 발동 못 시켰어.”
그녀가 도마뱀이 감싼 보옥에 손을 얹자 보옥의 안에 액체 같은 게 차올랐다. 홀로그램 같이 생긴 그것은 보옥의 절반을 채우고 멈췄다.
나는 예전에 명계에서 겪은 네페르티티의 이모저모를 떠올리고 말했다.
“이걸 해제하려면 영매 능력? 이라던 게 필요한 모양이네요.”
“응.”
─끄덕. 턱을 당기는 네페르티티.
아마 나한테 부탁하고 싶다는 게 이거였나 보다. 내가 룬 마법으로 영혼을 심문…… 아니, 교감하는 걸 지켜보던 것도 그래서였을까.
나야 울프헤딘 권능 빨로 영혼이랑 쌰바쌰바도 누워서 떡 먹기고.
나는 그녀의 손등에 내 손을 포갰다. 결심까지 했는데 머뭇거릴 것 없다.
찰랑….
그렇게 우리 손이 조각상을 덮자 보옥의 안에서 마나가 차올랐다.
내 것도, 네페르티티의 것도 아니다.
그래도 보옥을 채워가는 청록색의 마나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랑 네페르티티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나가 술식의 형태를 갖췄다.
오딘의 눈을 켰다.
이 술식, 목소리를 저장하는 마법이었다.
《아─ 아─. 내 목소리는 잘 들리나?》
조각상 전체가 흔들리며 남자의 목소리를 닮은 진동파를 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맞다. 에퀴녹스의 기억을 찾다가 네페르티티의 기억을 엿봤을 때.
그때 들었던, 네페르티티의 오빠의 목소리였다.
네페르티티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입술이 말을 자아내려는 것처럼 벌어졌다.
《들리나 보군. 조각상이 말하고 있는 거 맞다. 내가 부여해 둔 음성이지만.》
하지만 그녀의 말보다 조각상의 음성이 한 발 더 빨랐다.
《이 심념은 조각상의 힘으로 내 혼을 조금 옮겨담은 메시지다. 나는 이것을 내 동생에게 전해주고 싶지만, 사실 네가 나랑 전혀 접점이 없는 누군가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음성을 들은 네페르티티의 입술이 닫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원하지 않게 눈치채버렸다. 그녀는 혹시 오빠의 목소리가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네페르티티의 오빠는 평범한 사제였다.
바이콘 족의 선지자나 오딘처럼 영혼의 일부를 분신 삼아서 남겨둘 능력은 없었을 것이었다. 난 네페르티티의 안색을 살피며 음성에 귀 기울였다.
《어떤 이유였건 이 조각상이 네 손에 들어가서 내가 설정한 조건을 달성했다면, 그리 될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만 그렇다 해도 나는 한 아이의 오빠로서, 이 조각상의 기능을 내 대책없는 여동생에게 남기는 메시지로서 사용하겠다. 댁이 불만스러워 해 봤자 나는 못 듣겠지만.》
─크흠. 작게 헛기침 하는 소리가 음성에 섞여 들어갔다.
《네피, 나야. 네 오빠 카디르.》
《……응.》
네페르티티가 작게 대답했지만, 역시나 녹음된 음성인 듯 그녀의 오빠는 자기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엔 한껏 폼 잡고 말을 했었는데, 나중에 다시 들어보니까 영 아니더라고. 이번 걸로 대충 8번째 수정본이거든? 기운 빼고 평소처럼 말할 테니 니가 이해해.
일부러 이렇게 내 심념을 남겨둔 건, 혹시 너나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있을 땔 대비하고 싶어서야. 그러니까 혹시 내가 눈 뜨고 살아있는데 틀어버린 거라면 당장 꺼라? 나중에 꿀밤 맞기 싫으면.》
메시지는 꼭 매일 여동생과 투닥거리는 오빠가 퇴근 길에 남긴 음성사서함 같았다.
평범한 목소리와 평범한 말투.
네페르티티를 어린애로만 대하는 잔소리.
그래서 메시지는 감정과 함께 묻혀버린 그녀의 추억 속에서 빠져나온 듯 했다.
《그래도 너 혼자서는 듣고 싶어도 못 듣겠지. 우리 가문이 신관다운 능력을 타고 나긴 했지만, 영적인 감응력은 훈련으로 느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네가 몸을 쓰는 일이나 신성마법을 배울 때 약간 도움이 될 수도 있는데, 네 영매 능력은 나도 대충 알거든. 이 메시지는 최소 너랑 동급의 영매 능력자가 필요할 거다.》
카디르는 네페르티티가 이 메시지를 혼자 듣지 않기를 바랐단 뜻이었다.
《기대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한데, 우리 가문에 숨겨진 힘 같은 게 있는 건 아냐. 어디 음유시인들한테서 헛바람이 들어와선 말 고삐로 채찍 놀이를 하다가 약초 화분을 깨먹는 짓은 졸업했기 바라.》
《……지금 얘긴 잊어.》
네페르티티가 중얼거렸다. 나한테 한 말이었다.
나는 픽 웃고 끄덕거렸다.
《이야기로 돌아갈까. 대단한 힘 같은 건 없긴 해도 우리 가문에도 나름 사연이 있어. 따분한 내러티브지만 쪽팔린 소리에 앞서서 일부러 텀을 둘 생각으로 하는 얘기니까, 지루하면 얼른 끄기다?》
그렇게 말하고, 약 30초 정도의 정적.
조각상의 보옥이 빛나지 않았으면 고장이 났나 걱정했을 정도의 기다림! 카디르는 그만큼 길게도 텀을 뒀다가 떨떠름하게 이야기를 재개했다.
《……음. 우리 착한 네피가 이렇게나 말을 안 들을 정도면 내 신변에도 딱히 좋은 일은 없었을 듯 하네. 좋아. 그럼 조금 진지해져 볼까.
아즈테카라는 나라는 알아? 신대 이후에 발견된 곳인데, 고대문명 시절에 몇몇 나라가 접촉했다가 기겁하고 도망쳐 온 걸로도 유명한 곳이야.》
아즈테카라니?
굉장히 뜬금없는 서론에 고개를 모로 꼬아봐도 녹음된 메시지는 계속될 뿐이었다.
《혹시 내가 지금 네 곁을 떠났다면, 네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 의지하던 상대를 잃으면 많든 적든 당혹스럽고 서글퍼지곤 하니까.
신대 이후의 사람들도 그랬어. 적극적으로 세상 일을 도와주시던 신들께서 침묵하시니, 일개 대리통치자였던 인간들의 왕이 얼마나 놀랐겠어?》
나는 또 역사 강의 시간인가 생각했는데, 네페르티티의 오빠는 마초적인 남자였다. TMI는 되도록 짧게 하는 주의의 꼴마초였던 것이다.
《또 한참 시간이 지나고, 어느날 문득 이름도 남기지 못한 파라오가 생각했어. 신들께서 떠나신 뒤로 몇천 년 간 평화가 이어졌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도 방법을 찾아다녔어. 인류는 아직 신들로부터 졸업하지 못했고, 그때의 파라오는 우연히 아즈테카 인이 섬기는 우신이란 존재를 알았던 거지.》
아즈테카의 우신. 인신공양을 받는 식인종의 신.
신화에는 꼭 영웅이나 신들을 엿 먹이는 괴물이 나오지 않는가.
우신이란 그런 존재였다.
오딘이나 토르의 팔을 물고 으르르 컹컹 짖어도 뚝배기를 간수할 수 있는 괴물. 인간을 지배하지 않는 야만과 살육의 신 말이다.
인간이 신이 될 수가 있다면 몬스터라고 그렇게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악신도 신이다’. 파라오는 그렇게 믿었다고 해. 우리 나르메르-나일의 신들께서 선악을 오가는 존재이니만큼 그의 믿음은 강고했어. 아들에게 동행을 붙여서 아즈테카로 보낼 정도로.》
특히 더 이중적인 성격을 띄는 나르메르-나일의 신들이다.
자애로운 여신이 살육의 여신이 되서 피바다를 만들었다는 신화도 있고, 주신인 라도 훼까닥했을 때의 정체성이 따로 존재할 정도 아닌가.
게다가 나르메르-나일의 신들은─벽화에 그려진 그림들처럼─ 동물의 머리를 한 것으로 묘사되는 존재들 아닌가? 비유라고 쳐도 그런 면모가 있는 존재인 건 맞았다.
그 파라오는 아즈테카의 우신들도 그럴 거라고 봤던 모양.
‘착각이었겠지만.’
합리적인 사고관으로 반지성주의를 이해하려고 든 게 실수였다.
‘단순한 몬스터라면 아즈테카 사람들도 굴종할 지언정 신으로서 섬길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시대의 흐름── 그러니까 다른 귀족이나 백성들의 분노, 나라의 상황이 다른 결론을 허락하지 않은 걸까.
《그런 선택을 내린 이유가 뭐였든지, 파라오의 판단은 실수였어. 그의 아들과 탐험대는 거의 다 잡아먹혔대. 비슷한 생각으로 찾아갔던 다른 고대문명 국가의 탐험대처럼.
당연히 파라오는 모든 비난과 책임을 짊어졌지. 우신에게 거하게 물렸던 것으로 사막의 나라에도 진정한 신대의 끝이 찾아와버린 셈이야.》
뒷맛이 나쁜 결말에 불쾌해 하는 목소리가 면면부절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부터야 파라오들은 인간이자 반신인 존재로서, 신들을 대신해서 백성들의 마음의 지주가 되어주고자 했다는 잘 됐네 잘 됐어~ 하는 미담인데……》
어깨를 으쓱거리는 한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상상되는 것만 같았다.
《뭐, 꼭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조각상에 내 혼백을 새겨둔 건 아냐.
이 도마뱀 조각상은 그때 탐험대에 참가했었던 우리 선조님의 장물이래. 저주받은 물건이 아닌 건 천만다행인데, 진짜 문제는 그 전의 일이라더라.》
…콩콩! 조각상에 심념을 각인하던 카디르가 그 보옥을 두들긴 것 같았다.
《왕권이 신에서 나오던 시절에 신관이 얼마나 잘난 신분인지는 알려줬지? 우리 선조님들도 대충 그랬대. 물론 이 나라의 신관 가문 중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런데 하필이면 끈을 잡아도 모래지옥에 빠진 낙타의 고삐를 잡았던 거지. 이걸 모르고 있다가 훗날의 숙청 같은 거에 휘말리면 안 되니까, 부모로부터 자식한테 얘기해주는 비밀 얘기란 거야.》
《……아버지한테 들은 거구나.》
복잡한 심경으로 경청하던 네페르티티가 중얼거렸다. 카디르도 키득거렸다.
《사실 뭔 의미냐 싶기는 해. 이걸 알아서 너나 내 삶이 극적으로 바뀔 문제는 아니잖아? 나는 이 얘기를 듣고 ‘그래서 오전 4시에 출근하는 사람이 2시까지 날 붙잡고 떠드신 거야?’ 싶었어.》
어린 날에 졸려 죽겠는데 취한 아버지한테 붙잡혀서 계속 설교를 듣던 경험이 있었서일까. 나는 그만 카디르의 농담에 끌려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대충 무슨 애기인지는 이해가 갔다.
‘잡스럽게 말하면 가난한 전주 이씨 집안 같은 거군.’
옛날의 영광은 옛날의 영광이다.
내가 봤던 네페르티티는 약초를 끌어안고 어느 교단에서 일하는 오빠한테로 달려가던 평범한 아이였다. 현대를 사는 그들로서는 딱히 몰라도 되는 과거사인 것이다.
단지 신관 중에 파라오와 자손을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에─당시에는 신들의 대리인으로서 처지가 엇비슷했다니까─, 그 사실은 분명 알아둬야 할 얘기긴 했다.
고려-조선 교체 시기의 왕씨 몰살 같은 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고.
《선조는 이 조각상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웃기지나 말라지. 그럴 거면 처음부터 훔쳐오지나 말든가.
남겨준 것도 없으면서 지가 싼 똥을 자식들더러 치워달라는 치매 망령은 아마 선조 중에 누군가가 진작에 제령해버렸을 걸.》
성격이 엿보이는 궁시렁거림을 남기고 카디르는 한숨을 쉬었다.
《……딱 여기까지가 혹시 몰라서 남겨둔 우리 가문의 비사(祕史). 그리고 이 뒤로부터는 도대체 요 꼬맹이가 커서 어떻게 먹고 살지 걱정되는 내 푸념이야.》
《꼬맹이 아냐. 이제는 내가 오빠보다 더 나이 많아.》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걸 알면서도 네페르티티는 울컥한 것처럼 대꾸했다. 들렸을 리도 없는데 카디르는 꼭 그녀의 대답에 반응한 것처럼 킥킥댔다.
《그래도 이 얘기를 듣고 있다면 걱정 접어둬도 되겠네. 내가 너한테 조각상을 건네준 거면,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한 짓일 거거든.》
헛기침을 한 카디르는 자기 심계를 실토했다.
《우리만큼 영적 감응력이 높은 사람을 찾는 건 하늘에 별 따기지.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최소한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자립할 정도는 되야 해. 그럼 이 얘길 듣고 있는 넌 어디 가서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는 됐다는 소리겠네. 그치?》
네페르티티라면 100% 그렇게 할 거라는 예측.
실제로 빙 돌아가긴 했지만 적중한 예상이었다. 미스릴 클래스의 모험가인 그녀다. 내가 아니어도 사람을 구해서 조각상을 발동시킬 순 있었을 거다.
카디르도 설마 여동생이 흑마법사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달인급 전사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겠지만 말이다.
《또 그게 아니어도 피는 자식한테 이어지잖아. 잘난 남편이랑 만나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귀여운 자식들을 안은 채로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니?》
네페르티티는 저도 모르게 나를 쳐다봤다.
─웅웅! 브류나크도 진동을 일으켰다. 어허, 니 얘기 아냐. 코~ 하고 있어.
《오빠는 이쪽이면 좋겠네! 우리 꼬맹이 네피, 내 얘길 듣고 있는 지금도 남자랑 뽀뽀도 못 해 보고 몸만 쑥쑥 커버린 건 아니지? 그런 거면 오라버니 엄청 슬퍼요~.》
《……괜한 오지랖이야.》
《아~ 옆구리 시리게 혼자 성공해서 무책임한 오라버니의 헛소리나 듣고 있다니, 잠깐 상상했을 뿐인데 내 동생 너무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그래도 괜찮겠지? 우리 네피가 설마 그러겠어. 당연히 사랑하는 서방님이랑 아들딸 손을 꼭 잡고 조각상에 손을 얹은 거지? 그치?》
오라버니가 인성파탄자셔서 좋으시겠어요.
어떡게 사람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지? 나도 형 같은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세상에 이렇게 사람을 놀려먹는 걸 삶의 낙으로 삼는 사람이 다 있네.
그보다 형님 기준에서 지금 이 면면은 어찌 보시는지요. 여동생 분께서 그렇고 그런 경험은 커녕 뽀뽀도 못 해본 상태로 토끼 같은 딸이랑 곰 같은 애아빠만 생겼는데오.
《……이게.》
울화통이 치민 것처럼 조각상을 손에 쥐는 네페르티티.
설마 부숴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내가 걱정하고 있는데 조각상이 말했다.
《네피. 이상한 생각은 말고, 행복하게나 살아.》
《읏.》
깜짝 놀란 네페르티티는 점차 힘없이 조각상을 무릎에 얹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는 조각상의 심념을 최소 1년 주기로 다시 써.》
보옥 안에서 청록색의 마나가 반짝거렸다.
《내가 방금 막 이불을 덮어주고 온 너는 향초 만드는 법을 달달 외우던 어린 꼬맹이였어. 근데 지금의 너는 내가 놀려대도 꾹 참고, 여기까지 내 얘기를 듣고 있지.》
《……………….》
《너나 네 신변에 좋은 일은 없었나 보구나.》
1년 사이에 심념을 갱신하지 못한 채로 동생의 손에서 조각상이 켜졌다.
한참 전에 끄거나 화가 나서 자기를 한 대 치러 달려와도 이상하지 않은 내용인데, 계속 조각상을 붙들고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
절대로 어린 동생이 운 좋게 발동한 게 아니다.
카디르가 조각상에 심념을 새길 때마다 걱정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결론을 생각하길 달리 하면, 한때 이 조각상을 품에 가지고 다녔던 남자는 매년 자신이 죽은 뒤에 남길 말을 고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기밖에 피붙이가 없는 여동생을 위한 조언을.
네페르티티가 어릴 시절의 행복이 영원하리라고 믿던, 그 철없던 나날의 중간에도, 몇 년이고 계속.
《나는 진작 골로 갔거나, 네 힘으로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태겠네.》
놀라운 추리력을 뽐낸 카디르는 심념에 절절한 한숨을 섞어넣었다.
《그럼 한 번만 더 얘기할 테니까, 유언이라고 치고 명심해서 들어.》
《……오빠. 나는.》
《내 존재가 네 삶을 좌우할 정도라면, 그 지분만큼 네 행복으로 상환해 줘. 내 부재가 네 삶에 아무 영향도 없었다면, 너를 놀려먹기나 하던 오빠 같은 건 그대로 잊어버려도 돼.》
보옥의 빛이 흐릿해졌다. 네페르티티의 오빠가 남긴 말이 끝나가는 것이었다.
《사랑을 해라, 네피. 그건 복수나 자포자기보다 더 어렵고, 그만큼 값진 일이야.》
카디르는 말했다.
10년이 지났건 20년이 지났건, 어딘가 맹하고 어설프고, 그래서 더 귀여운 여동생의 생각 쯤은 전부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너라면 해낼 거라고 믿는다. 이상, 유언 끝.》
─뚝. 보옥의 빛이 사라졌다.
조각상이 다시 평범한 조각으로 돌아간 것이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
조각상을 뒤따라서 돌처럼 굳었던 네페르티티는 실에 당겨진 것처럼 고개를 젖혔다.
《그래도, 조금 더 듣고 싶었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물기가 반짝거렸다. 난 무심코 그녀를 끌어안았다. 네페르티티는 조각상을 놓고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
《──아, 맞다. 오라버니로부터 팁 하나.》
─치직! 보옥의 빛이 도로 켜졌다.
오딘의 눈이 아니었으면 진짜 어디서 지켜보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먼저 반했으면 진 거야. 때로는 항복할 줄도 알아야 사랑받는다. 이상!》
─뚝! 다시 빛이 끊어지는 보옥.
나랑 네페르티티는 무표정하게 그 조각상을 몇 분이나 더 쳐다보다가, 정말로 끝났다는 걸 알고 나서야 눈에서 힘을 뺐다.
“……오빠 분, 굉장히 개성적인 분이셨군요.”
“응. 노르드랑 닮았어.”
“대경실색할 만큼 의외인데요.”
내가 경악하자 네페르티티는 쿡쿡 웃다가 나를 보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연애는 먼저 반한 쪽이 지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는 편이죠? 그렇지만 어느 한 쪽인가가 반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으니 별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응, 그렇구나. 알았어.”
네페르티티는 아주 잘 알겠다는 듯, 이 세상의 미래를 좌우하는 실험을 앞에 둔 연구가처럼 신중하고 단호하게 턱을 당겼다.
그리고 작은 막대에 향유를 짤 때 쓰는 깨끗한 흰 천을 묶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미니멈한 깃발.
백기였다.
“졌습니다.”
─흔들흔들. 나를 빤히 보며 막대를 흔드는 우리 사차원 아가씨.
정말이지 그녀다운, 참신한 고백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