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14화 (713/1,009)

***

루시드 드림. 자각몽.

자기가 원하는대로 꿀 수 있는 꿈을 말하는데, 이 기술인지 초능력인지 미신인지 모를 꿈은 한때 ‘루시드 드림 꾸는 법’ 같은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올라오기도 했다.

원하기만 하면 할리우드의 여배우랑도 동침할 수 있는 능력 아닌가?

실제 체험담을 보면 그야말로 메타버스 부럽지 않은 능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각몽이 진짜 미신이 아닌 팩트였다면, 그리고 그게 VR 채트보다 나은 기술이라면 그게 왜 뉴스나 식자들의 입에서 회자되지 않겠는가?

존나 프리메이슨이 자각몽의 세계에서 히틀러의 재림을 시도 중이라서 00년대 좆망겜처럼 새로운 뉴비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일!

그런데 셰이드는…… 솔직히 왜 이 개쩌는 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마약 따위보다 강렬하고, 잘못 써먹으면 가상현실이 지나치게 발달한 SF식 디스토피아가 실현될 듯한 마법인데 말이다.

“목둔(木遁) 경제성장의 술!”

─짝! 진리를 엿보고 온 연금술사처럼 손바닥을 합치고 땅을 짚자, 눈앞의 초원에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현대적인 콘크리트 숲이 범람했다.

“……와아.”

다나랑 라리루라를 뺀 아내님들의 입이 자지가 들어가도 모를 만큼 커다래지는 게 인상적이었다. 내 얘기를 들은 그녀들도 그랬으니 네페르티티는 뭐 말할 것도 없다.

“나중에 내 고향에 갔을 때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도 곤란하잖아.”

나는 손을 털면서 펼쳐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풍경에 이전보다 리얼함이 늘었다. 저번엔 대학 주변 거리였다면, 여기는 내가 10년 넘게 살았던 친가 근처라서 더 그런 느낌도 든다.

“요시, 밥탐이군.”

“존나 점심인데 치맥 땡기네.”

“토요일에 출근한 니가 참아.”

NPC처럼 생동감이 약간 덜 하지만 시민들까지 돌아다니고 있다.

사람의 기억은 완전히 사리지지 않으면 뇌 어딘가에 남는 것일까? 영혼으로 사람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 이상하진 않다.

‘아니면 레티티아와 싸우다가 창세의 권능을 써 봤던 덕분이거나.’

1000년을 아우르는 반반 뼈많이 리치의 기억을읽어본 경험도 컸다.

‘시전자의 능력이 요구되지만, 셰이드도 그만한 기술이긴 하니까.’

나는 예전에 다나를 여기 데리고 왔을 때, 이런 권능에 가까운 꿈 속 세상이 단순한 자각몽 같은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예상은 맞았고, 이 드림랜드는 훨씬 더 위대한 초상능력의 편린이었다.

‘창세의 권능.’

이 세상을 빚어내고 하늘과 땅의 경계선을 그린 힘.

이세계의 인간계인 【중간가지】와 지구를 만든 에디터 툴이다.

극에 달한 기술이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극에 달한 마법도 프로그래밍이랑 구분되지 않는 셈이었다.

하지만 컴퓨터 파일을 만질 때는 관리자 권한이 필요하고, 이 창세의 권능에도 권한이 필요할 것이었다. 예를 들면 〈신좌〉와 같은 권한 말이다.

‘실제 전투에서는 효율이 나쁘지만 뭔가를 만들 때 이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지.’

똑같은 치트를 든 신들끼리의 전투에선 비효율적인 권능이고, 어떤 피조물을 얼마나 창조할 수 있을지는 적성에 따라서 갈리기는 하다.

똑같은 붓으로 누구는 모나리자를 그리는데 나는 논문을 쓰는 것처럼.

셰이드의 꿈은 그 마이너 카피였고 말이다.

드림랜드. 인간마다 가진 심상.

혼의 감응력을 눈 띄우는 작은 세상이라.

나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과 마법경험이 없으면 이만큼 현실미를 추가하기 힘들 것 같기는 한데, 그거야 남들이 겪을 문제지 내가 염려할 일은 아니었다.

이만큼 리얼한 세상이면 하루치 여흥으로는 충분할 것이었다.

“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 아무튼 눈이 어지럽구나!”

베로니카는 꼬리에 불똥이 튄 것처럼 뛰었다. 두 눈이 헤드라이트처럼 반짝였다.

“그대여, 그대여! 저 간판들은 뭐더냐? 왜 빛이 나지? 저 빙빙 회전하는 그림은 또 뭐고?! 저기 저 옷가지들은 무슨 생각으로 내놓았지? 도둑맞으면 어쩌려고?!”

“저건 노래방하고 미용실 간판이고, 내 고향엔 좀도둑이 적은 편이야.”

“노, 노르! 마차가 막 말도 없이 달려!”

“아아, 그건 「자동차」라는 것이다. 말 없이도 달리는 마차지.”

“안에 사람두 없는데?!”

“그건 제 상상력이 쪼끔 후달려서 그래요.”

킹반인 NPC들에게 할당한 리소스는 적다.

인간 대굴빡의 CPU에는 한계가 있단 말이야. 나 혼자 이 세상의 풍경을 전부 지탱하고 있으니 좀 감안해 주길 바란다.

‘이세계의 신들도 라그나로크 이후로는 숫자가 적어져서 이세계 유지에 급급했잖아.’

여신 사티스가 인간 세상에 개입하고 싶어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지켜만 봐야 했던 이유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저기 사람이 있구나.”

“저건 분식 포장마차에요. 주인 아줌마가 있는 건 아마 포장마차 = 분식 아줌마라는 내 빈곤한 상상력이…… 어, 드라마에서 보던 아줌마네.”

아무튼 대낮부터 억지로 잔 탓에 머리가 멍해져 있던 아내님들께서도 이 놀라운 풍경에는 흥분과 경악과 당황에 시달려야 했다.

“흐흐. 이 세상의 문물을 맛보고 이세계로 돌아가서 적응할 수 있을까 몰라.”

두 세계 모두 장단점은 있지만, 편의성 면에선 솔직히 이쪽이 압승인데.

“……야, 노르.”

─톡톡. 다나가 다가와서는 내 팔을 건드렸다.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묻자 고개를 돌리는 그녀.

“나 그때 그거 다시 볼 수 있어?”

“그때 그거? 영화?”

“그래, 그거.”

지시대명사만 갖고 대화하는 것도 그렇고, 나를 부르는 호칭이 남편놈이나 이 새끼가 아니라 노르였다. 이 누나가 오죽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 굴까 생각하니 존나 귀엽게 느껴졌다.

사실 시간도 많았는데, 그냥 틈틈이 데려올 걸 그랬나.

나는 괜히 미안함을 느끼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같은 걸 다시 보고 싶다면 그래도 되는데, 볼 게 하도 많아서 별로 권장하고 싶진 않네. 눈나가 봤던 것보다 더 취향에 맞는 게 많을지도 모르고.”

“그,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것도 뭐 괜찮네.”

기대한다, 기대해. 실실대던 나는 팔짱을 꼈다.

“일단 한 바퀴 돌자.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고.”

이만큼 다른 세상이니 컬쳐 쇼크는 1~2가지가 아닐 것이었다. 내가 따라다니면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것도 즐겁겠지. 일일 가이드 놀이다.

“나도 오랜만, 아니 처음이라서 이 놋데월드의 어트랙션은 잘 모르거든.”

모든 음식과 놀이기구가 무료인 일일여행. 그거 참 꿈과 사랑으로 가득하군.

앞으로는 노르디즈니랜드라고 부르자.

***

빵빵─!

도로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었다.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 걷거나, 가게를 들락날락 오가는 NPC들로 길거리는 몹시도 번잡했다. 발에 치이는 담배 꽁초가 그리운 만큼이나 낯설다.

훈련소를 나와서 스마트폰을 만졌을 때나, 입원 후에 키보드를 만질 때처럼 어딘지 어색한 감각. 드림랜드가 아니라면 당분간 느낄 가망도 없었던 어색함이었다.

그 어딘가 낯익으면서도 낯선 풍경을 나는 아내들과 함께 돌아다녔다.

“우리가 태어난 곳과 전혀 다른 세상……”

네페르티티는 내 설명을 듣고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눈은 내가 건네준 스마트폰─미아가 되지 않도록 아내들에게 하나씩 돌렸다─에 못 박혔다.

“어디, 믿어 주실래요?”

“……이런 것들을 보고도 못 믿을 만큼 의심이 깊지는 않은걸.”

네페르티티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웬 예능 방송이 틀어져 있었다.

“꿈속이어서 다행이야. 아니면 기절했을 거야.”

“네페르티티가 기절하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데요.”

“……오늘 침대에서 잠깐 기절했었는데.”

그 얘기는 지금 하지 마십시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꼴리게 굴래?

오딘의 후계자, 울프헤딘 운운하는 얘기는 희미하게 예감하고 있던 네페르티티였지만 이 현대의 풍경에는 입을 다물기 힘들었나 보다.

몇 시간 가까이 입이 부르트도록 그녀들의 호기심에 대답하며 걷고 또 걸었지만, 아내님들도 나도 지루하거나 피곤한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선배, 선배! 이거 어때요♡?”

‘왜 초밥 뷔페에 로니 콜먼이 있지’하고 건너편 가게를 쳐다보던 차에 라리루라가 말을 걸어왔다. 그 손톱에 촘촘하게 발린 매니큐어가 예쁘장했다.

“색이 예쁘네. 네 머리카락하고 어울려서 더.”

“네? 제 머리색은 이 모지쥬시네일즈 73 페인 핑크보다 두 톤은 더 밝은데요?”

“그런 걸 구분할 수 있는 남자는 마비노기 유저 뿐이야.”

딱히 고급스럽지는 않은 프랜차이즈 화장품 숍이었는데,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돈으로 사지 못할 게 없다고, 이세계의 화장품도 귀족이 쓰는 고급품이 되면 현대에 꿀릴 것 없다. 그래도 이세계에서 매니큐어는 별로 퍼지지 않은 화장품이다.

“이 매니큐어란 건 동방이나 나르메르-나일의 문화 아니었나요?”

“……교단의 사제들이 쓰는 건 봤어.”

“살짝 귀엽긴 하다.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이랑 달라서 끈적하지두 않구.”

실제로 베로니카나 네페르티티는 별로 관심이 안 동하는 표정이었다. 베로니카는 카운터 근처에서 해외 과자 코너를 기웃거리고 있고.

“……과자를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불러오지 않는다니. 내가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혹시 셰이드의 꿈은 천국이 아니었을까?”

“관점을 달리하면 산해진미를 아무리 먹어대도 계속 배가 고파지는 지옥인데.”

“그렇긴 하구나. 자제하마.”

양손 바구니 가득히 과자를 쑤셔넣고 말해봤자 설득력 0%인데.

“여기서 아무리 맛난 걸 먹어도 배가 고파지면 현실의 몸이 깨어날 걸.”

아니지. 평생 여기에 있다가 굶어죽는 것보다는 나은가.

나는 가는 곳마다 음식에 꾀여서 낙오되려 하는 베로니카를 들춰업고 가게를 나섰다. 화장품류는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아내들이 갖고 놀기엔 부적합했던 것이다.

따흑흑. 남편이 인싸가 아니어서 미아내.

“안녕히 가세요~.”

카운터의 NPC 점원이 비지니스적인 인삿말을 건넸다.

솔직히 약간 씁쓸한 느낌은 있다. NPC들이라곤 해도 실제 사람이랑 대화하는 수준은 못 되었다. 고향 생각이 더 나서 그리워지면 몰라도.

그래도 그것 자체가 좋은 경향이다.

싸움이 끝나면 이쯤 하고 이세계에 정착할까~ 하는 생각도 들던 무렵이다.

원래 목적을 다짐할 수 있는 건 나쁘지 않다.

우리 아내님들도 막연하게 ‘노르드의 고향에 가 보고 싶다’ 정도의 생각에서 벗어나 의욕에 불이 붙어 준다면 고마울 거고 말이다.

“으으. 여기도 가 보고 싶고, 또 여기도……”

내 어깨에 업혀서 어색하게 스마트폰을 만지는 베로니카. 거리뷰로 이 주변 가게들을 검색해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관광을 좋아하고 인간의 문명에 환장하는 우리 여신님은 지금 한창 꿈만 같은 이세계에 전이해온 기분일 것이었다.

근데 나도 이세계에 노예가 아니라 안전한 관광객으로 왔으면 저랬을 것 같긴 해.

“서점? 서점도 있느냐? 이 세상의 책을 파는?”

“서점?! 어디! 나도 좀 보여줘!”

다나는 도무지 스마트폰을 못 다루겠는지 베로니카한테 달라붙었다. 박사 주제에 기계치라니, 약간 웃기면서도 우리 눈나다운 느낌이다.

베로니카를 내려준 나는 가까운 아파트 단지를 올려다봤다.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잠깐 어디 들어가서 쉴까?”

“무슨 소리세요! 하루는 짧다구요!”

어느덧 관광에 몰입한 티르시가 빽 소리쳤다. 이 마법사님, 약삭 빠르게 가방에 음료수 병을 가득 채워놨군. 포션도 아닌데 챙겨가서 뭘 하려고.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는 고사하고 반나절밖에 안 되요! 정신적인 부분 말고는 피곤해지는 곳도 아닌데, 쉴 시간에 한 곳이라도 더 구경해야죠!”

“옳소, 옳소! 티르시 언니 말이 맞아요!”

“저희 친가에 가서 간식 먹으면서 드라마나 볼까 했는데요.”

사실 각 잡고 파면 지금 주머니에 넣어두신 그 핸드폰만 갖고도 1달은 놀 수 있을 텐데. 제대로 인터넷이 되진 않을 테니까 금방 질리긴 하겠지만.

“……친가? 노르드의?”

그렇게 되뇌인 티르시는 0.1초 정도 고민하다가 펄쩍 뛰었다.

“당장 가요, 얼른! 드라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찬성!”

이 아가씨들 흥분했네. 내 친가라는 말에 다른 아내들도 귓바퀴를 세웠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올랐다.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경계하면서 감옥 아니냐며 감금생활의 트라우마가 도진 베로니카가 좀 웃겼다.

삐, 삐, 삐─.

도어락을 풀고 현관문을 열었다.

익숙한 가정집 냄새였다. 칠이 벗겨졌다가 별로 눈에 안 띈다며 고치지 않은 벽면의 흠집이나, 문 옆의 신발장도 어제 봤던 것처럼 익숙했다.

“……음.”

다녀왔습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인삿말은 이런 꿈 속에서 입에 담을 것이 못 됐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나중에, 진짜로 이 집에 돌아왔을 때에나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신발을 벗고 현관 앞에서 우물쭈물거리는 아내들에게 말했다.

“들어가자. 우리 부모님은 없으니까 쫄지 말고.”

“시, 실례합니다아……”

그녀들은 어색하게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왔다.

이세계에서의 어떤 성공보다, 그녀들을 데리고 이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훨씬 내 다사다난하던 인생사가 실감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쓰벌, 호적 문제가 벌써 눈앞에 아른거리네.”

……이세계랑 지구를 오갈 수 있으면 굳이 이쪽 신분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구로 돌아간 뒤에는 6명의 아내님들을 어떻게 등본에 올릴지를 고민하며, 빨리도 김칫국을 마셔버리고 마는 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