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을 뒹굴었는지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완패.”
침대에 드러누운 네페르티티가 손만 들어서 흰 깃발을 흔들었다. 아까 만든 그걸 어느새 주워온 것 같았다. 깜찍한 동작에 비해 오르내리는 등은 요염했다.
─툭. 백기를 흔들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졸려.”
“네페르티티. 그대로 자면 감기 듭니다.”
“샤워할 기운 없어…….”
“제가 씻겨드려요? 못 참고 또 해 버릴지도 모르기는 하지만요.”
“……노르드가 협박해.”
알아들었으면 얼른 씻으쇼. 해가 중천에 떴수다.
시계를 보니까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브런치라고 쳐도 늦을 시각. 아침부터 없어진 날 찾고 있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풀썩.”
비척거리며 일어난 네페르티티가 나한테 안겼다. 입으로 풀썩이라고 말하기 있음?
기운을 차릴 때까지 안아주고 있으려고 했더니 목덜미에 잘근잘근 씹히는 느낌이 났다. 네페르티티가 일어날 생각은 않고 낼 깨물고 있는 거였다.
“……뭐하세요?”
“마킹.”
내 목을 킁킁대며 등허리를 더듬거리던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목덜미에 내가 남긴 키스 마크가 선명했다. 내 입에서 향유의 맛이 감도는 느낌.
“당한 만큼 복수할래.”
“맘대로 하시지요.”
당신 입에서 복수라는 말이 나오면 농담으로는 안 들리지만 말입니다.
오늘은 종일 목깃이 긴 옷만 입어야겠군. 나는 그렇게 네페르티티의 어리광을 받아주다가 그녀의 방에 딸린 샤워실로 갔다.
저택의 방마다 샤워실이 딸려 있다니, 전대 휴스로이트 영주들의 성생활이 엿보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쬐까 좆 같은 거에요.
쏴아아아아─.
네페르티티와 교대하며 씻고, 대충 환복. 겉옷은 갈아입을 거니까 팔에 걸쳤다.
네페르티티도 옷을 입었다. 나는 그 복장이 쉴 때 입을 법한 옷이 아니라, 매일 입는 전투복인 걸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어디 나가시려구요?”
“밥 먹고 잘래.”
“그런데 왜 풀 무장이죠.”
“다른 옷이 없어.”
“……나중에 같이 사러 갑시다.”
내가 탄식하자 입을 꾹 닫는 네페르티티. 삐진 모양이다.
“자주 갈아 입어. 같은 옷이 여러 벌일 뿐.”
“그게 그거죠. 세상에, 돈도 많으신 분께서 단벌 숙녀셨네.”
“……처음 듣는 표현. 하지만 왠지 싫은 느낌.”
칭얼거리던 네페르티티는 날 붙잡고 밍기적댔다.
덕분에 예상보다 5분 정도 방을 나서는 게 늦어지고 말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남들이라고 안 그러겠냐만, 각 잡고 찾아보면 할 일은 늘 많다.
40대 흙수저 백수도 전자기기 2~3개면 1년을 아우르는 시간 낭비용 프로젝트를 구상 가능하지 않은가. 나라고 다를 건 없었다.
밥을 먹고, 오늘치 국제 회담의 결과를 간단한 쪽지로 듣고서 아내님들과도 설명회를 가졌다. 할 얘기가 많아지다 보니까 시간은 좀 걸렸지만.
“선배. 서커스단 분들이 너무 저택에 자주 찾아오시면 선배의 대외적인 이미지나 소문에 안 좋은 타격이 가지 않을까요? 절대로 제가 단장님이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구요.”
“얼스터 인 사제장도 자꾸 내 방에 찾아와. 이 집 보안이 개판인듯.”
“너희가 고른 장모님들이다. 포기해라.”
“뭐야 시발 고른 적 없어요.”
장모님들한테서 리버스 돌격을 감행한 다나와 라리루라를 포함해서 일가족 집결.
식사를 하면서 회담의 방향이나 아셰라드가 한 제안 등을 이야기했다. 아내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화목한 식사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강씨 가문에 신 영웅 네페르티티가 추가됩니다~ 하는 얘기도 평범하게 받아들어졌다.
“이제 저도 연애하기까지 걸린 시간 No.1에서 탈출이에요!”
“저도 뒤에서 2번째에서 벗어났어요♡!”
티르시랑 라리루라가 그리 말하면서 기뻐한 정도였다.
아니 뭐, 솔직히 그린 라이트가 된 뒤부터 걸린 시간으로 따지자면 네페르티티는 프랑 바로 다음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그리고 단순히 연애까지 걸린 시간만 따지자면 다나가 부동의 원탑.
3년하고도 반을 남녀끼리 술자리를 갖고도 전혀 야한 기류가 흐르지 않았다니, 존나 씹너드 랩실 노예들 같으니라고.
이걸 보면 대학원생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 수 있다. 하다 못해서 조선시대 노비들도 눈이 맞아서 결혼하고 그랬다는데.
그야말로 쥬지가 서지 않고 자궁이 큥큥대지 못할 정도의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게 대학원생이다 이거에요.
“그나저나 다들 이젠 가족이 늘어나도 반응들이 밋밋하구만요. 메이플 신캐를 본 초딩도 이것보단 놀라겠다.”
“니 새끼 명의로 된 논문보다 너한테 인생 저당잡힌 여자가 곱절로 많단다, 남편놈아. 이제 그만 니 본질이 어깨 위가 아니라 고간 사이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면 어떨까?”
“않이 쓰벌, 이제 석사 은장도 땄는데 말씀이 좀 심하시네.”
이젠 눈나랑 꼴랑 2단계밖에 차이 안 난다고. 이 석사 은장 브로치에 담긴 철학을 아시겠어요?
그러자 다나는 비밀 얘기가 있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야, 그거 들었냐? 밀프헤딘 백작이 남편을 잃은 학회장을 밤 일이랑 권력으로 회유해서 심사도 다 생략하고 진급했다더라.”
“이른 봄날의 기레기와도 같은 년이 찌라시를 뿌려대는군. 하지만 네가 아무리 진실을 호도해도 내 넘쳐흐르는 지성과 이 석사 브로치의 은빛은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뭐야. 석사 등급 언제 미스릴까지 늘어남?”
“이 못된 눈나가 자기는 박사 찍었다고 사다리 걷어차는 것 보게.”
석사 금장 위에 석사 플래티넘, 석사 미스릴이 신설되면 그날이 느그 남편 자살하는 날이야. 내 표정이 곱창나자 다나는 스프를 저으며 낄낄댔다.
“이 누나는 니가 엘리자베트 공주님이랑 만나러 간다 그러면 등골이 섬칫해요. 잘못해도 짝 있는 여자는 건들지 마라?”
“왕녀님한테 섹스큐즈미 거리다가 망나니 손에 쥬지 참수 당할 일 있음? 척척박사까지 두 걸음만 남겼으니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고.”
“그러게. 이젠 뒤지면 특진해서 박사 달겠다. 너 어제까진 유물 캐다 죽어도 묘비에 ‘아내 여섯인 석사(금장) 여기 묻히다’라고 새겨졌을걸.”
“아내만 6명이라면 죽어서도 정력남으로서 존경받는 척척석사로 역사에 남았을 것.”
“……척척섹서.”
“푸웁!”
네페르티티가 고기를 썰다가 중얼거린 개드립에 베로니카가 물을 뿜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니 다행이네. 척척섹서 남편은 기뻐요.
나는 세상 울적하게 수저를 휘적거리다가─웃음보가 터져버린 다나 때문에 존나 꼴받는다─ 키득거리던 프랑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면 프랑, 오늘 좀 바빠 보이던데 뭐 했었어?”
“유이링 황녀님한테 정원을 가꾸는 법을 배우고 있어. 황녀님두 황궁에 계실 때는 취미로 원예를 하셨대. 드워프의 피는 못 속이나 봐.”
“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귀족적인 취미긴 하지. 그런데 에이트리넨 양? 웨스턴 씨랑 어용상인한테 건넬 주문품 리스트에 씨앗이랑 묘목만 수십 개가 넘던데, 설명 좀 해 보시죠.”
“그래? 무슨 일인지 정말 하나두 모르겠다!”
“OK. 주문 취소해둠.”
“미안! 내가 주문했어! 그, 그래두 기껏 저렇게 넓은 부지가 있는데 너무 아깝길래…… 헤헤.”
프랑은 눈을 피하다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소일거리를 좋아하는 프랑이다. 종족 보정까지 받아가면서 정원에 몰두하면 자기 방보다 정원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은데.
“프랑 너, 자꾸 그랬다간 정원 못 가꾸게 한다? 흙을 만지거나 하면 나도 마법 적성이 늘어날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뭐든지 적당히라는 게 있잖아.”
“……에헤♡ 안 될까?”
“……큼.”
애교 부린다고 다 되는 건 아니거든. 내가 헛기침을 하자 라리루라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프랑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프랑은 고개를 모로 꼬다가 어색한 기침을 하고 잔망스럽게 웃었다.
“한 번만 봐 주세요, 노르 오빠~♡”
……노르 오빠?
나는 당황스러운 말에 입을 벌리고 멍해졌다.
그야 프랑이 나보다 어리니까 오빠라고 불러도 잘못된 건 아니긴 하다.
잘못된 건 아니긴 한데…… 씨바, 모르겠다. 걍 머리가 멍해지네.
그렇게 잠깐 넋이 나갔다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느샌가 내 손에 뻐끔 열린 지갑이 들려 있었다. 안에 넣어둔 은화도 몇 개 없어진 상태였다.
“라리루라. 혹시 〈꼭두극〉으로 나 조종했냐? 왜 내 사비랑 따로 챙겨둔 정령왕의 완드가 프랑 손에 들려 있는 것이지?”
“선배는…… 애교를 부리면…… 물주가…… 돼 준다……. 아, 죄송해요. 메모하느라 못 들었어요.”
메모하지 마. 빼앗아서 불태워버릴라.
쳐다보던 베로니카는 자기가 뿜은 물을 닦으며 납득했다.
“주인님을 집에 묶어두려면 육체관계보다는 저 방법이 더 효과적일 듯 하구나.”
“저랑 베로니카는 때려죽어도 못하겠지만요.”
“……할 수 있다만? 자신 넘친다만? 고양이 흉내 정도라면 해 본 적도 있다만?”
“──큽! 사, 상상하게 만들지 마세요! 저까지 물 뿜을 뻔 했잖아요!”
“내 잘못이더냐? 응? 내가 애교 좀 부려봤단 게 그리 잘못이더냐?”
“사람은 제각각 전문분야가 있는 거라구요. 저, 베로니카, 그리고 네페르티티 씨는 절대 애교 같은 거 못 부리는 타입이에요. 그렇죠?”
콜록거리면서 동의를 구하듯 질문하는 티르시.
네페르티티는 자기 행적을 돌아보면서 표정변화 없이 채소를 우물거렸다.
3초 정도 고민 후, 즉답.
“……응. 나는 애교 못 부려.”
“그것 보세요.”
눈썹 하나 꿈쩍 않는 거짓말에 티르시는 홀라당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같이 살다 보면 언젠가 깨닫게 되겠지 뭐. 나는 따로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선배. 그러면 오늘은 안 바쁘시죠?”
메모장을 챙긴 라리루라가 물어봤다. 바쁘냐고 물으면, 뭐 그렇지는 않다.
회담 쪽은 엘리자베트한테 일임했고 사절단에서 더 이상의 위협이 나올 가능성도 없다. 나온대도 발퀴리에-바이콘들의 근딜 원딜/물딜 마딜 공대를 뚫을 능력은 없을 거고.
“따로 바쁘진 않아. 왜?”
거기까지 생각한 내가 묻자, 라리루라는 헤실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면 저, 선배 고향에 가 보고 싶은데~♡”
“내 고향?”
설마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차원이동을 시켜달란 뜻은 아닐 것이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 나는 무슨 생각에서 한 부탁인지 눈치챘다.
“좋네. 마침 네페르티티한테 내 과거사 얘기도 해 줘야 하던 참이고.”
“?”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고 얼굴에 물음표를 띄워대는 네페르티티.
나는 픽 웃었다.
“셰이드의 꿈이라고 아세요?”
다나랑 라리루라밖에 본 적 없는 지구의 풍경.
그래도, 우리 아내님들한테라면 보여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