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데이트 중에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주시면 안 되요~?”
“존나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라리루라는 잼민이 강북호와 내 본체를 저울에 놓으면 후자로 마음이 기울었는지 그리 부탁했다. 나야 기쁠 따름이었으니 바로 승낙했고 말이다.
아파트를 나와서 걸어다닌 우리는 역과 가까운 상점가로 나왔다.
별로 대단할 건 없는 상점가다.
좀 커다란 지하철 역답게 백화점이 세워진 빌딩이랑 그 주변에 상점가로 복작복작하다. 가게들도 주택가 근처 상점가보단 데이트 코스 느낌.
그렇게 아까 전에 돌아다닌 거리를 다시 한 번 둘러보는 우리였는데, 나는 문득 웃고 있는 라리루라한테서 위화감을 깨닫고 말했다.
“별로 재미 없어?”
“네? 어, 그게……”
화들짝 놀라는 라리루라. 플라스틱이 낯설기에 들고 있던 딸기 음료에 힘이 들어간 걸까. 음료의 내용물이 넘쳐서 손에 쏟아졌다.
“으엑…… 끈적거려요…….”
“흐흐. 가만 있어 봐.”
라리루라가 질색하자 나는 원상복귀시켰다. 드루이드 슈프림의 리얼 돌(Real-Stone) 매직을 펼쳐내자 음료는 새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뭔가 모자라?”
“그게…… 사실, 왠지 몰입이 안 되서요~…….”
몰입?
라리루라는 머리카락을 꼬며 중얼거렸다. 뭔가 불만스러운 걸까.
“아, 선배가 나쁘다거나 한 건 아닌데요~.”
쿠왁─! 말로 형언하기 힘든지 갑갑해하는 라리루라. 그러다가 대충 생각난대로 말하기로 했는지 기세를 몰아서 우다다다 말을 쏟아낸다.
“이런 건 제 3자의 반응도 중요하다구요! 다른 사람들한테 선배를 자랑하고 싶은데, 저 사람들이 다 환상 같은 거라고 생각하니까 흥이 안 나요!”
“아하. 다 같이 다닐 때가 더 즐거워 보이더니 그런 거였어?”
직원들이 먼저 말을 걸지도 않고, 대화가 성립한다고 쳐도 결국 환상이니까.
존나게 리얼한 환상이라도 현자타임의 가능성은 곳곳에 숨어 있는 셈.
“그래요! 역시 꿈은 꿈! 현실이 아니면 2%…… 아니, 200% 모자란 느낌이에요!”
“나중에 현실에서도 시간을 낼까?”
내가 기분을 공감하며 말하자 라리루라의 눈이 동글동글해졌다.
“……그래도 돼요?”
“그럼.”
애초에 권유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우리 아내들은 같이 뭔가 하자고 제안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나랑 여러가지를 하고 싶어하는데도 말이다.
내가 평소에 이리저리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또 반대로 생각하자면 나도 꼴마초를 자칭하는 주제에 아내들에게 이것저것 하자고 권유한 적이 없네. 역시 내 잘못이 맞다.
비지니스 상대랑 쌰바쌰바하는 만큼 아내들이랑 돌아다니는 것도 중요한데.
“역시 선배♡! 제 마음을 알아주신다니까♡!”
아무튼 라리루라가 좋아하니 됐나.
너무 기뻐해서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우리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므로 못난 남편이 평소부터 잘 했으면 이렇게 기뻐하진 않았을 것이니까.
“좋아요, 그럼 오늘은 데이트가 아니라 선배네 세상 사전연습인 셈 쳐요!”
“사전연습?”
“손 잡고 는실난실 돌아다니는 것도 즐겁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걸 전부 생략하도록 해요! 1분 1초라도 더 선배네 세상을 겪어보고 싶거든요!”
“옷을 사 봤자 현실엔 못 들고 가는데?”
“저랑 선배 마음에 든 옷을 찾으면 원래 세상에서도 만들어 입으면 그만이잖아요? 예를 들면…… 저를 밤에 침소로 불러주실 때라거나?”
……그건 존나 혹하는데?
라리루라는 요망하게 혀를 빼물었다. 내가 라리루라를 잘 아는 만큼 그녀도 나를 잘 안다. 현대풍 복장의 바리에이션을 늘리는 건 분명 끌리긴 했다.
“자! 얼른요, 얼른!”
내 팔을 잡아끌며 웃는 라리루라.
그리 밀착하자 보드라운 가슴과 체온이 느껴져서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다나가 미디어 매체를 선호한다면 라리루라는 제 몸으로 부딪히며 겪는 걸 더 좋아하는 건가. 아내들마다 성향 차이가 나와서 좀 재밌다.
“일단 옷가게부터 가요! 저희 세상의 평상복을 입고 다니자니 부끄러워서!”
“아까는 환상 같아서 몰입이 안 된다더니?”
“몰입하기가 힘든 거지, 눈치가 안 보인다는 건 아니라구요~. 눈이 마주치는데 어떻게 무시해요? 이런 건 여심의 문제에요!”
“그럭군요.”
솔직히 그다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가끔 알고도 모른 척, 모르고도 아는 척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대충 납득하고 그녀를 이끌었다.
“먹는 것보단 문화 체험이에요!”
라리루라의 그런 의견에 맞춰서 옷 가게 하나를 골라잡고 내려갔다. 집 근처라서 애용하던 곳인데, 아마 내 기억 속에 남은 옷들도 많을 것이었다.
라리루라는 지하를 모던하게 개조한 옷 가게를 두리번댔다.
“와아! 이국적인 분위기! 엄청 세련된 가게네요!”
“이세계적인 분위기지.”
“그러게요! 꼭 다른 세상 같아요!”
“흥미로운 관점이야.”
여기가 세련됐다기보단 외국 관광지는 느낌부터 색달라서 더 멋져 보이는 현상이겠지. ─폴짝! 내가 지켜보고 있자 라리루라는 NPC들이 돌아다니는 가게에 뛰어들었다.
“흠흠. 여기는 점원이 없네요~? 저의 라리루라 센서는 점원 복장을 입지 않은 카운터 석의 수염 아저씨가 사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점원은 계산만 해 주는 곳이라서 그래.”
내가 여성복 가게에 갈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화장품 가게야 폼 클렌징이나 피부 관리용품 사러 갔었지, 여자 옷은 백화점 아니면 옷 가게에서밖에 못 봤다.
“그런가요? 그렇네요. 그렇군요! 이 패션 잡지? 라는 것도 재밌을 것……”
말하다가 말고 잡지를 펼쳐보이는 라리루라.
카운터 앞의 잡지들은 전부 내용물이 백지였다. 라리루라는 뾰로통하니 입맛을 다셨다. 존나 시발 표지만 있는 잡지라니? 싫은 만도 했다.
“선배, 이쪽엔 관심 없으셨어요?”
“표지만 슬쩍 본 정도라서.”
“재밌어 보였는데~……”
팔랑, 팔랑~. 잡지들을 펼치고 다시 꼽기를 반복하는 라리루라.
현실이라면 사장이 ‘이 년 좀 보게’하고 카드 리더기를 들고 튀어나와서 결제하도록 만들었겠지만, 턱수염을 기른 사장은 노트북만 만지기 바빴다.
“아! 백지가 아닌 것도 있어요!”
라리루라가 외쳤다. 뭐지? 한복이 그려진 표지?
‘……교양 과목 과제로 조사한 자료인가?’
그게 왜 저기 꽂혀 있지?
그렇게 신기해 하고 있는데 라리루라가 갑자기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으와, 흐아와? 이, 이게, 이게 무슨…… 저저, 전통복장의 재해석……?”
“……워매 쓰벌.”
나는 그때가 되서야 눈치챘다.
내가 기억하는 강한 씹새 느그 육군.
그 현대판 강제징용의 현장이 가진 참담한 폐쇄성은 사춘기 좆물이 덜 빠진 건장한 20대의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좆도 할 짓이 없어서 평생을 라노벨만 읽었다는 씹덕 후임이 박경리 선생님의 걸작 소설 토지 시리즈를 완독하게 만들었던, 지상에 강림한 정신과 시간의 방!
그곳에서 탑급으로 섹스한 성인 잡지들은 불의 의지처럼 짬순에서 짬순으로 내려오는 보배였다. 종류와 발행사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중대 화장실 각 사로에서 군번줄이 짤랑거리게 만들었던 성인 화보집들!
라리루라가 들고 있는 ‘패션 잡지’란 바로 그것이었다.
“……조, 조상님들의 꼴잘알 포인트? 선배, 꼴잘알이 무슨 뜻이에요?”
애1미 씨발. 강북호 대갈통 이 새끼, 잡지 배치도를 왜 이따구로 짠 거야?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무렵의 나는 백탁의 흔적이 남았을까 무서운 잡지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가끔 새로 밀수입한 잡지라면 그 청결성을 믿고 읽어보곤 했다.
갓 에넬의 대표작인 맥심을 시작으로 여러가지 성인 잡지가 있어서, 라리루라가 읽은 것은 아마 전통복 특집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복을 교미용 코스프레 복장으로 개조하는 건 지긋하신 분들의 크나큰 반발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저 책은 금서목록을 불태우는 바티칸 성기사단의 광기처럼 제대로 질타를 맞았고, 발행사는 그대로 폐간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는 비극적인 결말이었던가.
─팟!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라리루라의 손에서 잡지를 소멸시켰다.
“아앗! 왜, 왜 가져가세요?!”
“저런 거 보지 마. 외국인 아내가 우리 나라의 전통복장을 저런 용도로 먼저 접하게 뒀다간 내가 부모님한테 몽둥이로 처맞을라.”
“화, 확실히 엄청 자극적이긴 했지만요! 그래도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서적이 아닐까요?! 따라서 저는 성교육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호소해 봅니다!”
“응. 기각.”
라리루라는 귓볼까지 빨개져서 횡설수설했다.
그야 카메라와 뽀샵의 도움을 받은 현대사회의 딸감은 이세계와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니까. 저 잡지를 가지고 돌아가면 유물 취급을 받을 것이다.
내가 단호하게 굴자 라리루라는 기운이 빠진 듯 칭얼댔다.
“히잉…… 옷 엄청 예뻤는데…….”
“……후. 이거라도 읽어 봐.”
과제 때문에 조사했던 도서관의 잡지를 1권 불러냈다. 라리루라는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며 그 내용을 탐독했다.
“예쁘다…….”
야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자극이 덜해서 오히려 좋았던 건지, 그녀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장에 눈이 못박혔다. 현대적으로 리파인한 한복의 페이지였다.
“……선배. 혹시 이 옷은 없어요?”
“미안한데 디자인까지는 나도 몰라. ……아니지, 그렇지도 않나?”
인터넷 짤방으로 「조상님의 지혜.gif」라느니, 「한복의 복잡한 구조.jpg」 같은 건 본 적 있다. 하지만 그걸 재현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알겠어요.”
라리루라는 혼자 골똘히 생각하다가 잡지를 내 손에 쥐어줬다.
“여기요! 재밌었어요! 전통복이라는 건 어디든 나름의 매력이 있네요!”
“만족했다면 나야 기쁘지.”
“후흥. 아직 만족하려면 멀었죠! 자, 옷도 보러 가요!”
라리루라는 여자 옷이 있는 코너로 달려갔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부터 마초에게 지루함을 선사하는 대기시간이 시작됐음을 이해했다. 여자들의 쇼핑이란 자고로 그런 법 아닌가.
남자가 온라인 게임에서 딜딸을 위해 DPS 표를 계산하는 것의 약 3배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그에 어울려주는 남자에겐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다.
“여기 안에 들어가서 입어보면 돼.”
“네에~♡!”
그렇지만 나는 달인급 전사. 스나이퍼가 만고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라리루라가 옷을 고르길 기다렸다가 그녀를 시착실로 안내할 수 있었다.
쪼르르─. 옷이며 신발 따위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는 라리루라.
하지만 이제 첫 페이즈가 끝났을 뿐이다.
뭐가 더 예쁘냐~ 같은 질문은 안 해서 그나마 다행일까.
─팍!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한숨을 쉬고 있자, 커텐이 걷혀지면서 라리루라가 얼굴을 내밀었다. 한숨을 쉰 걸 들킨 줄 알고 존나 식겁했다.
“……에헤. 선배?”
천만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는지, 라리루라는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저, 고르긴 골랐는데 이쪽 세상 옷들은 어떻게 입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모르겠다고?”
─끄덕. 고개를 끄덕거린 라리루라는 커텐을 좀 더 걷었다.
위아래의 색을 맞춘 속옷이 커텐에 맞닿으면서 은밀하게 드러났다. 라리루라는 입고온 옷을 벗은 채로 나를 불렀던 것이다.
그녀는 하얀 크롭티를 가슴에 얹고 키득거렸다.
“선배도 들어와서 알려주시면 안 돼요?”
“……모르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생각보다는 지루하지 않은 쇼핑이 될 것 같다.
나는 씨익 웃고 시착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