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토나슈일루카틀의 심장 액기스에요.”
드워프들이 가져다 준 자래를 활용한 티르시는 닷새만에 독기를 빼낸 액기스를 완성시켰다. 전부 추출한 건 아니지만 약 40% 가량은 뽑았다던가.
응축한 액기스는 거의 1.5L 페트병 같았다.
“남은 60%는 차차 추출하기로 했어요. 전부 다 뽑아내도 저희가 다 못 마셔서.”
“양이 많나요?”
“많은 것도 많은 거지만, 한 번에 다 마시는 건 몸에 나빠요.”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되니까. 어서 마시자꾸나.”
베로니카가 가장 먼저 그 빨간 액기스를 와인에 탔다. 그냥 먹기엔 맛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베로니카를 따라서 와인을 따르던 프랑이 말했다.
“노르는 정말 괜찮아?”
“그래. 내 건 됐어.”
저번의 그 이상한 예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마실 용기가 안 났다.
‘……다른 아내들이야 문제 없겠지만.’
나는 여러모로 그녀들과는 다르니까.
“잘 먹겠습니다.”
“……윽. 써.”
인상을 마구 찌푸린 다나를 시작으로 그녀들은 어렵사리 액기스를 해치웠다.
“술이랑 같이 마셔도 괜찮은 거야?”
“알코올 따위에 흐려질 물건이 아니잖느냐. 딱 좋다. 몸에 열기가 돌아야…… 흡수한 성분을 몸 안에 돌리고 마나로 바꿀 수 있지.”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하는 아내님들.
나도 집중에 방해되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내 눈앞이 검어지기가 무섭게, 아무 것도 없는 검은 배경에 하얀 불꽃의 태양이 불타올랐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곱절은 커졌다.
여황제를 죽이고 얻은 마나를 완전히 체화해낸 지금, 그녀들에게 짭 드래곤 하트를 양보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저게 내가 가진 구신의 마나, 룬의 마나지.’
룬의 마나는 구신의 마나의 하위 개념이다. 내 소모성 마나량도, 【게르튀르】와 룬 마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구신의 마나도 파격적인 상승량을 보인다.
‘처음 미스릴 클래스가 됐을 때의 3배 가량.’
브류나크의 강화에도 많이 썼는데, 그러고도 이 정도인가.
“거기 있지? 나와.”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눈을 떴다.
무슨 개소리냐고 물어봐도 그렇게밖에 할 말이 없는데, 내가 말하자 불꽃의 태양은 한 덩어리로 뭉치면서 불사조처럼 날개를 펄럭거렸다.
“까악─!”
─퍼드덕. 검은 세상에 착지하는 흰 까마귀.
이 녀석도 상당히 커졌다. 우신 토벌전 중간에 불러냈을 때는 내 어깨에 올라갈 정도였는데, 이 세상에서는 거의 작은 오두막만 했다.
“저번엔 도와줘서 고마웠다, 교수 슬레이어.”
이름을 불러도 놈은 고개를 모로 꼴 뿐이었다.
나는 키아라의 말을 떠올리며 그 녀석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마나량을 늘리고, 내가 가진 것을 체화한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 위한 방법이다.
마나량은 충분히 늘렸다. 부족하다면 더 늘려댈 방법도 많았다. 적당히 구신의 마나를 가진 몬스터라도 찾아내서 잡아대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나는 흰 까마귀를 보며 물었다.
“라그나로크 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우신이란 놈들은 어디서 왔고, 뭐하는 것들이지?
무슈흐렐리틀은 나한테서 무엇을 본 거고?
“까악?”
그 질문에도 머리를 갸웃거릴 뿐인 녀석.
오딘이 남긴 분신, 그녀의 안배는 여기 없다. 내 안에, 교수 슬레이어라는 환상의 존재에 날 지킬 무언가를 심어둔 뒤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됐어, 새꺄. 모르면 모르는대로 상관없어.”
키잉─! 오딘의 눈이 게걸스럽게 마나를 삼켰다.
천리안이 발동한다. 홍채의 마나를 채우고 셰이드의 주술을 발동시켰다.
“오랜만의 출발 비디오 여행이군.”
몇 개의 룬 스톤을 집어든 내가 뇌까렸다.
“역사공부 시간이다. 후딱 끝내자.”
TMI는 생략하고. 나는 웃으며 까마귀의 날개에 감싸였다.
***
고고학자 롤랑시스는 신음하고 있었다.
〈시발…… 또 벌레 물렸어!!〉
이 대륙은 어떻게 된 벌레들이 해충퇴치 마법을 뚫고 들어오지? 독이라도 있었으면 잠든 채로 픽 죽었다는 말 아닌가. 그는 울상을 짓고 투덜댔다.
〈롤랑시스 박사. 진행도는 어떻게 돼 가죠?〉
그러고 있자 아셰라드 신시아가 그를 불러냈다.
이 아먄의 대륙은 끔찍하지만, 여기서 아무 수확 없이 돌아간 뒤의 미래가 더 끔찍하다. 로마니아 왕실의 암살자나 집행관들과 만나고 싶지는 않은 그였다.
〈예. 주변 조사는 거의 끝났고, 유적지대 안의 공동만 남았습니다.〉
〈수확은요?〉
〈마나가 깃든 유물을 몇 개 찾았습니다. 단지 말씀하신 해도는……〉
〈못 찾았군요.〉
말을 줄였지만 알아듣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아셰라드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별 수 없이 들어가 봐야겠네요. 저 유적을.〉
〈진심이십니까? 위험할 거에요?〉
롤랑시스는 질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도 고고학자다. 명백이 학자인데 유적이라는 장소가 던전과 같은 말이라는 걸 모를까. 저 안에 어떤 괴물이나 함정이 도사릴지 누가 아는가.
유적지 탐사란 핏빛과 황금빛의 갈림길이었다.
죽으면서 황금을 찾아 나아가거나.
무모한 도전자를 기다리거나.
〈걱정 마세요. 백작께서 오셨으니.〉
〈아, 그럼 문제없겠죠.〉
직전의 고민이 거짓말처럼 롤랑시스는 표정을 싹 바꾸었다.
모험가를 고용하는 게 탐사의 기본이기는 해도, 미스릴 클래스의 모험가는 돈으로 구용할 수 없는 이들. 하지만 그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찾아가자 울프헤딘 백작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탐사 준비 중이셨습니까?〉
〈예. 카카오닙스 차인데 드셔보싈?〉
도저히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예의 상 묻자 노르드는 긍정했다.
하긴, 아셰라드나 롤랑리스가 아는 전문가와는 수준이 다른 이들 아닌가. 분위기도 사뭇 다를 수 있겠지. 그래도 장비의 질은 몹시 믿음직했다.
〈그 갑옷, 우신의 가죽으로 만든 물건인가요?〉
롤랑시스는 호기심에 물었다.
전투에는 참여조차 안 한 그였지만─사실 같이 싸운들 도움도 안 됐을 것이다─, 그런만큼 몸을 지켜주는 장비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예. 염색하는 데 고생 좀 했죠. 저 말고 여왕 폐하가 보내주신 드워프 분들이.〉
기존의 거인 가죽 장비에서 갑옷을 일신한 노르드는 옷을 두들겼다.
재료는 비늘과 가죽이었지만 세계 최고봉의 장인들은 재료의 형태에 구애되지 않았다. 마법까지 총 동원한 장비는 전부 매직 아이템으로 완성되었다.
미스릴 갑옷보다 질긴 상등품. 국왕이라도 갖지 못할 희소한 갑옷이었다.
대가는 무슈흐렐리틀의 가죽 일부.
어차피 딱히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시체였기에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일부는 챙겨두고, 나머지는 조지 왕자를 거쳐가며 브리타니아 왕가에 헌상할 예정이었다.
돈과 국내에서의 권한 등으로 치환되겠지. 노르드는 커피에 못내 집착한 끝에 만든 맛 없는 차를 대충 해치우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슬슬 시작할까요. 학자 분들을 물려주시죠.〉
〈네?〉
〈유적을 열면 주변은 전쟁터가 될 겁니다.〉
─툭툭.
무릎을 털면서 일어나는 노르드. 그의 아내들도 무기를 쥐었다.
〈내부에 이계의 몬스터들을 부르는 술식이 차 있더군요. 마법진은 분석해 봤지만 정문을 비틀어 열면 해체하기 전에 몬스터들이 나올 겁니다.〉
〈그걸 어떻게……?〉
그들은 제 2차 유적 탐사가 시작되고 나서 유적 근처에 가지도 않았잖은가? 베이스캠프에 앉아서 눈을 한쪽 감고 가볍게 배를 채웠을 뿐인데.
이제 와서 그의 능력을 의심할 생각은 없었지만 부지불식간에 믿긴 힘들었다.
〈예전에 브리타니아의 모 지방에서 땅에 잠긴 탑을 탐색해 봤습니다.〉
노르드는 생각해뒀던 변명을 늘어놓았다.
천리를 내다 보며 마법을 분석하는 눈을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 유적과 내부 구조가 비슷하더군요. 시기적으로 자주 애용됐던 고대의 마법 기술이겠죠. 빈 기지의 방범을 소환생물에게 맡기는 겁니다.〉
노르드는 거기서 건진 보물지도를 떠올렸다.
‘거의 다 꽝이었지. 그땐 그렇게 기뻐했었는데.’
기밀이라 거의 다나 혼자서 복구해야 했던데다, 어떻게 복원해서 알아낸 유적지들도 이미 털린지 한참 지난 경우도 많았다.
보물 지도가 이미 누군가가 쓸어간 유적을 가리키는 것.
모험가들에겐 일상다반사인 일이었다.
‘아직 복원 못 한 곳도 있고, 더 찾아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노르드는 캠프 도구를 〈아공간〉에 쓸어담았다.
‘지저의 탑과 시기나 방범 방식이 비슷해. 안에 건질 만한 게 있으면 좋겠네.’
이세계의 구조는 세계수에 맺힌 세계들과, 거기 속하지 않은 이계로 이뤄진다.
한때 지저의 탑과 연결됐던 이계는 후자였고, 저 명계 등은 전자였다.
전부 신화 속의 내용일 뿐이므로, 넓게 알려진 아스가르드 등등이 어떻게 됐는지는 노르드도 몰랐지만 말이다. 라그나로크로 소멸했을 수도 있다.
〈잠깐 물러나 계십시오. 금방 끝낼 테니.〉
〈네. 조심하시길.〉
─휘릭. 브류나크를 돌린 그는 설명을 받아들인 듯한 학자들을 물렸다.
그의 눈짓에 라리루라는 꼭두각시를 띄웠다.
“부탁해, 링링이 5호~♡”
카각, 카각…! 쬐끄만 꼭두각시는 안고 있던 못 모양의 유물을 발동시켰다.
혈투의 결계. 빠른 발동과 폭넓은 활용도, 적은 마나소모라는 장점을 대가로 사용자에게 발동 중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저주받은 매직 아이템이다.
─끼릭끼릭.
물론 그런 부작용은 꼭두각시에겐 아무 단점도 되지 않았다.
식인종 제국 아즈테카의 보물로서 걸맞는 물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연다.”
노르드는 브류나크로 십문자를 새겼다.
슈카각! 쿠웅….
마법진이 발동하는 기척. 빛이 들이치지 못하는 유적 안에 무수한 안구가 번들거렸다.
─푸확!
두껍던 문이 오러에 찢겨나가자, 마나에 반응한 함정은 바로 몬스터를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