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깃털, 차원의 틈새를 여는 물건이구나.”
일을 마치고 건강하게 깨어난 라리루라가 티베리우스 남매를 어르신 가문에 보내주는 동안, 내가 보여준 깃털을 두고 베로니카가 말했다.
“어떤 용도인데?”
“설명하기는 어렵구나. 논리와는 다르다. 감각의 문제다. 무척 낯익은 힘이야.”
깃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베로니카.
신의 권능이 깃든 물건인데 베로니카가 낯익게 느낀다고?
“존나 뭐지? 역시 구신의 신물인가?”
“그럴 확률이 높구나. 정확한 건 분석할 필요가 있다만……”
“맡길게. 네 일족들이랑 찬찬히 조사해 줘.”
나도 나대로 할 일이 많으니까.
내가 룬 스톤을 꺼내들자 인피면구를 구경하던 프랑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노르. 같이 갈래?”
“아냐. 혼자 보는 게 몰입도 면에서 편하니까.”
셰이드의 꿈에 들어가서 별도 행동을 취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글쎄. 굳이?
“으응. 알겠어.”
프랑은 그렇게 말하고 웃옷의 단추를 풀었다.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는 프랑. 베로니카도 혼자 헛기침을 하고 살짝 치맛자락을 들췄다. 사랑스런 아내님들은 예전보다는 덜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셰이드, 약식으로 할까?”
“1080p 풀버전 빠따죠!”
음.
언제 생각해도 진지해지기 힘든 의식이야.
***
셀루스티아 남작의 기억은 방화벽이 없었다.
“여기…… 맞겠지?”
“뺘뺘.”
셰이드의 꿈의 초원. 브류나크를 데리고 거닐던 나는 늪지처럼 생겨난 작은 물 웅덩이를 살펴보며 질색을 했다. 무슨 액체 아스팔트 고인 물 같네.
‘예르나 때는 불타는 숲이더니……’
농밀한 기억은 이렇게 셰이드의 꿈에서도 눈에 띄게 드러나는 법인가.
내가 꺼림칙하게 느끼는 걸 눈치챈 걸까. 브류나크가 날개를 펼쳤다.
“뺘아─!!”
촤악─! 물 웅덩이가 갈라졌다.
심정적인 문제지만 비교적 내려가기 편하겠군. 나는 브류나크의 뒷덜미를 쓰다듬어주려다가, 이 부위가 새한테는 성감대라는 걸 떠올리고 말로만 칭찬하기로 했다.
“고맙다. 아주 효녀야, 효녀.”
“뺘쁘쁘~.”
신나하는 브류나크를 내려놓고, 꿈을 조종해서 몸을 띄우고 급강하.
‘왠지 느낌이 낯설지가 않은데?’
데자뷰를 느끼던 나는 왜 그런지 눈치챘다. 이 검은 바다를 가르는 느낌. 아틀란티스로 내려가던 중에 겪었던 심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스우으으으으─.
까마득한 어둠을 내려가자 불현듯 위와 아래가 뒤집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감각의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몸은 바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지구를 뚫고 나온 것처럼 중력의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
…퐁당.
그렇게 수면을 빠져나오자 잠시 시야가 변했다.
겪어본 적이 있는 느낌이다. 꼴마초 강북호와 ‘나’── 그러니까 이 기억의 주인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 타인의 기억을 체험담으로서 관조하며 의식이 몰매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북호로서의 자아를 굳건히 하고 의식을 고정했다.
그래서 1인칭 시점으로나마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밤하늘이 펼쳐진 구름의 바다, 그 황금 저택에 서 있는 ‘나’를 말이다.
‘쓰벌, 여긴 또 어디여?’
낯선 곳인 건 당연하지만 보통 비현실적인 곳이 아니었다.
밟아도 발이 빠지지 않는 구름. 고대문명보다 더 신비로운 저택은 신들의 터전으로 보였고, 고개를 돌리자 거인처럼 커다란 이들이 돌아다녔다.
‘거인이…… 시종?’
못 생기다 못해서 멘탈이 깎여나가는 추한 거인들이랑 다르게, 그냥 커다란 사람들이다. 앞치마를 두른 여인도 있고 수염을 기른 남자도 있다.
【테이블에 안주 떨어졌어! 티르 님께 드릴 닭 요리 없어?!】
【부엌은 저쪽이다, 망아지. 에기르 님의 저택을 더럽히진 마라.】
【뭐? 망아지라니!! 우리는 고귀한 애시르, 유니콘이라고!!】
그리고 그들 사이를 머리에 뿔이 자란 신족들이 돌아다녔다.
─톡톡.
‘내’ 머리를 만져보자 뿔이 자라나 있다. 2개다. 바이콘인가?
‘셀루스티아 남작이 바이콘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바이콘의 모습으로 숨어든 거겠지.’
하지만 하필 신대라니?
지구의 역사보다 남작 놈의 나이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그만큼 강한 놈은 아니었는데.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냥 수명이 다른 건가?
아무튼 평범한 변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셰이드의 과몰입이랑 비슷한 상태를 현실에서도 실현하는 이적.
그게 현대엔 로마니아 인 셀루스티아 남작으로 있었던 녀석의 수법일까.
‘우신들이 몬스터에 강림한 것처럼……?’
생각에 빠져 있자 몸이 스스로 움직였다.
놀랍지는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라면 남작이 이 시대에 벌인 행적을 되풀이하겠지. 기억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이제부터 확인해보면 될 것이다.
─저벅.
그런데 놀랍게도, 이 새끼는 다들 바쁜 가운데 혼자 빠져나와서 여유롭게 달 구경을 시작했다. 뭔 개씨발 폐급 새끼지, 대체?
불쾌한 건 ‘나’의 감정이 여과없이 전해져온다는 것이었다.
‘그리움?’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왜 그리움을 느끼지? 존나 전생에 ET셨나.
【오! 거기 친구! 혹시 뭣 좀 물어도 될까?】
그렇게 쳐다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놀란 게 아니라, 이 몸이 놀란 것이다. 하지만 놀란 가슴에 맞지 않게 ‘나’는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허리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존귀하신 분. 뭐든 여쭈십시오.】
【그렇게 격식 차리지는 말고. 연회장은 어디로 가야 하지? 잠깐 측간 좀 다녀왔는데, 도통 길을 모르겠네. 거인의 저택은 다 이런가?】
까리한 금발을 긁적이는 전사는, 마초였다.
그래. 내가 초면에 얼굴만 보고 이 새끼는 참된 마초다~ 하고 인정해버릴 만큼 마초였다. 단련된 강철 같은 근육과 깊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북유럽 풍의 전사다.
소일거리를 나온 농부처럼 소탈한 태도였지만, ‘나’는 서 있는 자세에서도 뿜어지는 막대한 힘과 권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와 싸우려면 최소한 산을 뽑아낼 정도의 힘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치밀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볍게 삼킬 수 있었다. 내가 평가하건대, 그건 인간이 무슈흐렐리틀 같은 우신을 상대하는 감정과 거의 비슷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는 부끄럽사오나 저도 길을 잃은 참이기에……】
【이런 제기랄……. 어쩐지. 멍하니 서 있는 게 그럴 것 같았지.】
전사는 거친 욕을 입에 담으면서도 듣는 사람이 불편하거나, 무섭게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옳게 된 꼴마초의 담대함이었다.
【피차 미아 신세군. 같이 돌아다녀 보자고.】
【보필해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뇌신님.】
뇌신?
눈을 깜빡이던 나는 없는 손으로 손뼉을 쳤다.
‘이 마초가 뇌신 토르야?’
아니나 다를까, 평범하지 않은 강함이 느껴지던 그 신은 문맹 농부라도 알 법한 대신(大神)이었다. 쓰벌, 유레카 소리가 절로 나오네.
‘잠깐. 그럼 여긴 애시르 신족의 땅인가? 아스가르드나 뭐 그런 곳이야?’
아니지. 방금 전에는 무슨 거인의 저택이랬는데.
에기르라고 했던가. 모르겠다. 신화에 남은 기록인지 나중에 베로니카한테 물어보자. 내가 그렇게 엘리트 대갈통에 메모하고 있자 ‘나’와 토르는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 딱 나서서 말했지. ‘아내의 앞에서 꺼져라, 이 망할 요물아!’. 그러니까 놈이 뭐랬는 줄 아나? 글쎄 모가지에 힘을 주고──】
‘나’에게 남은 건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금발의 꼴마초 토르는 세상 친근한 씹인싸였다. 투 머치 토커의 자질이 보이는군.
겸손하게 상대하곤 있었지만 ‘나’는 이 대화가 꽤 피곤하고 귀찮았던 모양으로, ‘내’가 해방된 건 몇십 분이 지나서 또 1명의 신이 나타났을 때였다.
【……토르 님?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응? 아니, 이게 누구야! 슬레이프니르!! 네가 웬일로 그 모습이냐!】
토르가 호들갑을 떨면서 다가간 상대는 은색의 갈기처럼 머리를 기른 중성적인 신이었다. 슬레이프니르라면 나도 꿈에서 본 적이 있는 오딘의 애마였다.
그리고 베로니카를 포함한 유니콘, 바이콘들의 선조이기도 했다.
존나 개미친 구름바다네. 신이 막 굴러다녀.
【이 짜식, 내가 등에 한 번 태워달래도 그렇게 싫다던 녀석이 연회엔 웬일이냐? 그것도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진신(眞身)까지 꺼내서.】
내가 기겁하든 말든 토르는 친근하게 슬레이프니르에게 호들갑을 떨었고, 그 친밀한 말투에는 슬레이프니르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는 듯 했다.
【주인님의 말로서 함께 왔을 뿐입니다.】
【어, 음. 오딘이 만취하면 보기 좀 그렇긴 해. 그래서 넌 연회에도 안 끼려고?】
【예.】
【고지식하긴. 네 엄마를 좀 본받아 봐.】
【……로키 님께서는 저래봬도 책임감과 사려가 다분한 분입니다.】
슬레이프니르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토르는 표현을 실수했다고 느낀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하긴 어머니를 욕 되게 말하는 걸 좋아할 이가 어디에 있겠냐만, 욱하는 게 과하지 않나. 내가 뭐 쌍욕을 박은 것도 아닌데.
딱 그렇게 생각하는 게 보일 정도였고, 그래서 슬레이프니르도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자손이 신족의 일원으로 번영할 만큼 장수한 신마답지는 않았다.
‘그런 면은 살짝 베로니카랑 닮았네.’
나는 바이콘들의 충성스러운─섬기는 사람에게 맹목적인─ 성격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저건 대대손손 DNA에 박혀 있는 성격이었나 보다.
토르는 너스레를 떨며 큭큭댔다.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은 없군. 그 오딘이랑 짝짜꿍할 정도니, 로키도──】
【……‘그’ 오딘?】
【그만, 그만. 좋은 뜻에서 한 말이잖아. 너도 술 한 잔 해. 연회장에 얼씬도 안 하는 불쌍한 친우를 위해 이 토르가 친히 술을 따라줄 테니.】
어깨에 팔을 두르는 토르. 슬레이프니르는 곤란해 하며 말했다.
【연회는 어쩌시고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이번에도 몇날 며칠을 할 텐데, 잠깐 정도 빠진다고 별 일 있겠어?】
【……주인님을 모실 때 취하면 곤란합니다만.】
【아하. 저번처럼 날다가 골아떨어져서 오딘을 떨어트릴까 봐──】
【다시는 그럴 일 없습니다. 한 잔 주시죠.】
【암! 그래야 그 할망구의 자식이지!】
토르는 호쾌하게 웃고는 손짓했다. 다행히 슬레이프니르는 지리에 밝았고, 덕분에 그들이 술잔을 부딪힐 곳은 금방 찾을 수 있을 듯 했다.
그렇게 두 신들이 따로 술자리를 가지려고 했을 때였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두 분께 술을 따라드리는 영광을 누려도 되겠습니까?】
망부석처럼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토르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다시 머리를 긁었다.
【……하여튼, 너희도 참 지극정성이야. 애시르 동포끼리 시종 노릇까지 할 것 없지 않냐? 거 대체 어디 사는 누굴 닮은 건지.】
【왜 저를 보면서 말씀하십니까?】
【피는 못 속인다 싶어서. 그래, 좋아. 가자고.】
토르는 혀를 내두르면서 ‘나’까지 데리고 슬레이프니르와 주연을 가졌다.
지켜보던 내가 조금 의아했던 건, 이 신들에게 얽히는 걸 불쾌해하던 ‘내’가 자처해서 술 시종을 맡았다는 부분이었다.
‘스파이 짓의 일환인가?’
내가 아는 바이콘들이면 선조와 신족의 대표가 술잔을 나누는 걸 그냥 보내지 않았을 것이니까. 그도 아니면 뭔가 엿들을 생각이었나?
부숴진 영혼이기 때문인지, 생각까지는 읽어낼 수 없었다.
【하하하! 고놈 잘 마신다!】
원샷을 때리는 슬레이프니르를 즐겁게 구경하던 토르가 눈을 반개했다.
그의 분위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현자처럼 표변했다.
【그래서,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냐?】
【……티 났습니까?】
【엉.】
─벌컥벌컥.
호쾌하게 술잔을 마시는, 그야말로 바이킹 같은 금발 전사의 눈에서는 이지가 느껴졌다. 나는 ‘나’의 긴장감과 경계심이 올라가는 걸 눈치챘다.
슬레이프니르는 새 술을 따라질 때까지도 망설이다가 주저하며 말했다.
【……요즘. 로키 님의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너희 엄마가? 흠…….】
수염을 쓰다듬던 토르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암. 저번에 나랑 같이 무슨 거인이랑 내기를 했을 때도 그랬어. 거인의 환술에 홀라당 속아넘어갔거든. 요 사이 몸 상태라도 안 좋은 모양이지.】
【……네?】
【거인한테 속아넘어갔다고. 그 로키가.】
속임수의 신이 거인에게 속았다는 얘기를 꺼낸 토르는 툭 던지듯 말했다.
【이름이 뭐랬더라? 우트가르트 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