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자들을요?”
라리루라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선배가 가자면 가겠지만, 왜 그 사람들을?”
따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몰라서 묻는 듯 했다. 하긴, 정보 공유는 중요하지.
나는 멀리 떨어진 순례길 쪽을 가리켰다.
“성배가 가짜여서는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변수는 제거하는 게 나아. 어쩌면 그 황자들한테 알아낼 게 있을지도 모르고.”
다행히 천통절의 마지막까지는 여유가 있다.
돌아가도 기다리기만 해야 할 거라면 움직이는 게 나을 것이었다.
‘제 5지점의 황자도 다른 황자들이랑 협력했을 거고.’
성배가 가짜인 걸 들키지 않으려면 다음 타자를 포섭하는 건 필수다.
도난 과정에서 벌어진 자작극을 보면 순 지레짐작은 아닐 것이었다.
“단, 그렇게 쳐도 과격해. 뭐가 목적이어서 이런 짓을 벌였을까?”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가면을 챙겼다.
“다음 타자 입장에선 성배를 못 알아봤다는 건 들켰을 때에 쓸만한 변명거리가 안 돼. 황자들이 협력했대도 너무 대책없는 작전이지.”
“그렇긴 해요. 지금 같을 때 개국기념일을 망쳤다간 황자라도 뎅겅~ 일 거라구요?”
바꿔치기 당한 성배를 받았는데 가짜라는 걸 못 알아봤다?
‘그걸 누가 믿어?’
가짜로 바꿔치기 한 것조차 순례자들이 많지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
천통절이 끝나고 있을 황제의 해명을 미루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올 수 있었고, 극대노한 황제에게 ‘너 처형’ 당할 수도 있었다.
평범한 항의라기엔 좀 지나치게 과격한 시도!
“그게 아니면, 뒷감당까지 해버릴 작정일지도요.”
티르시가 머리에 붙은 얼음 조각을 털며 말하자 라리루라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황제의 분노를요? 그 사람이 저희한테나 별의 자손한테 휘둘리는 바보 아저씨지, 황자들한테는 자기네 아빠이자 로마니아의 만인지상인데요?”
“황제가 분노하건 말건 상관이 없다면, 염려할 필요도 없지.”
나는 알기 쉽게 손가락으로 목을 쭉 그었다.
라리루라는 입을 벌렸다.
“아버지를 죽이고 황위를 이으려고요? 으엑.”
“가능성은 있죠. 암군은 반역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황제가 되면 어차피 쌓여있는 문제의 책임을 질 필요가 있고요.”
티르시는 피곤한 모양이었다. 황자들이 꾸민 게 황위 찬탈 계획이었다니? 쉽게 받아들이기엔 약간 무거운 얘기긴 했다.
‘그래도 답이 나왔군.’
황자들은 반역을 꾸미고 있다.
성배 도난에 대한 책임? 반역이 성공하면 그런 건 좆도 문제가 안 된다.
황제 대가리를 똑 따서 내밀고서 야부리를 털면 수습될 일이었다.
─교만한 황제는 죽었다! 난 황태자로서 황위를 잇고, 그대들의 의문에 답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성배를 쌔빈 것도 죄가 아니니까.
정권을 잡은 반역자한테 사사롭게 군을 일으킨 죄를 묻는 게 어디 가능하던가? 마찬가지였다. 저 지랄을 벌인 뒤에 해명, 사죄, 수습에 나서면 뭐가 문제겠는가.
“우리들만 아는 속사정을 빼면, 대외적으론 새 황제가 생기는 게 더 낫긴 해.”
“반역 후에도 지지를 받으면 받았지, 비난받을 일은 없죠.”
티르시도 나랑 같은 의견이었다.
‘황제’라는 꼬리를 자르고 살아나려는 건 귀족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만하고 불통(不通)한 황제보다는 해결에 나서려고 하는 황제가 낫다. 국민들이나 다른 나라의 수뇌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레볼루숑의 전형적인 클리셰로군.
“그치만, 어떻게요?”
라리루라는 스스로도 생각하면서 말했다.
“반역이 말처럼 쉽지는 않잖아요? 성뢰라는 게 강력한 마나 덩어리고, 성뢰를 다룰 실력이 황자들한테 있어도, 반역을 성공시키는 건…… 음……”
“네. 황자들만으론 불가능하겠죠.”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나마 로마니아의 사정에 해박한 티르시다. 그녀까지 단언하는 거면 거의 틀림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못난 계획은 아냐. 과감한 실행속도나 준비성을 보면 걔들도 머저리는 아닐 텐데, 우리가 떠올릴 문제 정도는 생각해 뒀겠지.”
계획의 허술한 부분을 실행속도로 메우고 있다.
시간적으로 봐서 급조한 작전이다.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실패 가능성을 낮추기보단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다 그렇지 뭐.
그리고 반역에 필요한 건 명분과 지지와 힘이다.
황자들은 명분은 충분하고, 지지자도 예약석까지 챙겨둔 상태!
‘그렇지만 힘에서는 후달리지.’
로마니아는 미스릴 클래스로 팀을 꾸릴 수 있는 나라 아닌가. 황제의 친위대를 무대뽀로 뚫는 건 머리를 아무리 잘 굴리는 사람이라도 불가능하다.
‘폰만 가지고 퀸만 16개인 상대랑 체스를 두는 짓이지.’
힘 차이가 저렇게 역력하면 체스를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상관인가?
“어떤 수단을 갖췄건 간에 반역이 일어나는 건 우리한텐 손해기도 하고.”
반역 코인에 올인한 황자님들이 성공하든 말든 손해는 손해다.
내가 그리던 큰 그림에 난입자는 필요없다.
붓을 들이미는 대신 물감을 선물해주는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애들한테 연락해 줘. 여기서 대기하다가 참모 새끼가 남긴 암호를 보러 올 놈들을 매한테 쫓게 만들던가, 아니면 황자의 족적을 추격하면 돼.”
그렇게 말한 나는 오프툼의 보고서를 펼쳤다.
급하게 보낸 걸 보면 중요한 얘기일 것이었다. 혹시 뭔가 타계책이 있진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살펴본 것이었다.
“……하아.”
하지만 몇 줄 읽고 나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역시 황자들은 그리 멍청하지 않았다. 걍 욕심 뒤룩뒤룩한 병신 어그로 트롤꾼들이었으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말이다.
“노르드? 왜 그러세요?”
표정이 좋지 않았던 티르시가 물었다. 그녀로선 가문을 숙청한 황실의 구성원들을 찾아가게 되는 만큼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그 보고서를 건넸다.
“수도에 계신 분들의 보고입니다.”
쿼터 드워프인 제이드의 말을 오프툼이 그대로 옮겨둔 보고서였다.
티르시는 서면을 받았다.
“금속의 유통량이 많다. 주괴의 유입에 더불어 막대한 자본으로 무기/갑옷류까지 반입하고 있다. 높은 확률로 수도에서 은밀하게 금속을 모으는 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을 읽은 티르시도 나랑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제이드가 추측하길…… 〈청동옥좌〉를 기동하려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청동옥좌〉요?”
라리루라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다는 듯한 얼굴로 궁금해했다. 배가 고프다는 매에게 고기를 먹이던 내가 대답햇다.
“로마니아의 국보.”
“아, 맞다. 그랬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 네? 국보요?!”
한 박자 늦게 놀라는 라리루라.
당연히 국가기밀이니만큼 정확한 내용이 알려진 건 아니지만, 강력한 유물이라는 얘기는 파다하다. 아마 황자들은 그걸 탈취할 생각인 듯 했다.
국보인데 가능하겠냐고?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황자들도 계획을 짠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이 나라의 스케일을 대충 안다.
인간의 힘으로 신좌를 만들고, 신에게도 비견될 아르마 슈나스를─초대 원로원의 혈통을─ 무기로 만들어서 조종하려던 사람들의 나라.
히타이트 이후 처음으로 신의 경지에 손을 뻗은 국가.
그런 나라가 아끼고 아낀 국보.
“……쓰벌, 오늘 잠은 다 잤네.”
생각치도 못하게 일이 커지는군.
***
이후 나타난 황자 측의 인물은 수도를 향했다.
우리는 멀찍이서 그들을 미행하면서 로마니아의 수도에 입성했다. 첩자의 암호를 읽은 이들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확인하고서 오프툼과 만났다.
〈오랜만이오. 잘 지내셨나?〉
〈보시다피시요.〉
〈하하! 하긴, 소문이 끊이는 날이 없더군!〉
〈그래서 최근에는 일부러 조금 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잠깐 재회하며 대화를 나누고 제이드를 불렀다.
【청동옥좌라는 유물에 대해서 아시는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도 니다벨리르에 있을 무렵, 우연히 듣게 된 얘기요.】
그는 내 질문에 곧장 대답했다.
【신성제국의 옥좌. 앉는 자는 삼라대지의 모든 평원을 굽어보리니.】
【시적이네요. 무슨 뜻입니까?】
【난들 알겠수? 그 옥좌를 제작한 사람들 중에 드워프가 있었겠지. 하지만 장인이 어디 돈 받고 만든 물건의 성능을 떠들고 다녔겠소? 돈을 대준 놈이 말하지 말라면 더 그렇지.】
【그러면 금속 유통량 운운은요?】
【그것도 그쪽에서 들었던 얘기요. 기동 자체에 굉장히 많은 땅의 마나를 요구한다고 했고, 그걸 대체하는 게 금속이라는 소문이었소.】
니다벨리르 일부 지방에만 남겨진 전승일까.
매번 말하지만 이세계 마법학에서 금속은 땅의 마나를 품은 물질이다.
프랑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성뢰는 금속을 녹이려고 챙겨간 거 같애.】
【금속을 녹이려고?】
【응. 그렇게 많은 금속을 녹이려면 마법이 꼭 필요한데, 불의 마나를 너무 많이 넣으면 금속이 품은 땅의 마나가 변질된다구 그랬어.】
금속을 녹여서 땅의 마나라는 동력을 추출한다.
〈청동옥좌〉의 원리가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잘 아네. 대장장이의 기술이야?】
【응, 귀동냥이지만. 성뢰는 아마두 번개나 빛의 마나겠지? 땅의 마나랑 궁합이 좋진 않아두, 나쁘지도 않대. 번개는 원래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는 거기도 하구.】
흑마법사의 골렘만 봐도 알듯, 흙은 빛과 어둠 계열 마법의 좋은 소재였다.
하지만 번개의 마나라고 궁합이 나쁘지도 않다.
같이 써도 버프 같은 건 없지만 마이너스 효과 같은 건 발생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고순도 작업에서는 불의 마나보다 낫다는 얘기였다.
【그렇수다. 불꽃과 땅의 마나는 농도가 굉장히 진해지면 딱 달라붙걸랑.】
제이드도 첨언했다. 용암처럼 변질되는 걸까.
‘불꽃은 금속을 녹이는 걸 넘어서 증발시키거나 태울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될 듯 했다.
아무튼 황자들이 성뢰 성배를 훔쳐간 이유까지 설명이 되지 않는가. 〈청동옥좌〉란 유물을 손에 넣으려는 게 반역 계획이라는 건 거의 확실시해도 될 것이었다.
“반역자가 동시에 둘 씩이나 나온 거네. 우리랑 황자들.”
“황제, 인망 없어.”
다나랑 네페르티티의 그런 말이 좀 인상 깊었다.
오프툼은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싸울 거요? 나도 황자들 추적에 함께 갈까?〉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황자 측의 인물이 들어간 곳이 좋지 않았어요.〉
나는 매를 따라서 쫓아간 그들의 족적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알고 보니 재상의 저택이라더군요.〉
재상. 내가 예상한 별의 자손 후보 중 1명.
그래서 평소처럼 잠입해서 심문하기 어렵다.
〈재상은 반역도인 황자들의 협력자거나──〉
〈연락으로 들었던 ‘위험한 적’이다?〉
〈예, 그렇슴다.〉
재상이 진짜 무고한 사람이 아니어도 닥돌하는 건 악수였다.
‘강대국 재상의 집답게 보안도 철저하더만.’
재상은 나라의 돈줄을 쥔 재계의 최고권력자다. 돈과 권력이 넘친다는 소리다.
그런 만큼 재상의 저택은 유물과 매직 아이템을 마구 쳐바른 공간이었다. 대충 봐도 울프헤딘 저택 뺨치더라. 마스터 클래스여도 잠입하기는 힘들다. 다 때려부순다면 몰라도.
물론 나는 그 보안을 은밀하게 뚫을 수 있다.
암살자도 뭣도 아니지만, 오딘의 눈으로 함정을 해제하고 룬 마법─벽뚫 치트─의 도움을 받으면 비벼볼 만 했다.
삐끗해서 실패해도 튀면 되고.
‘하지만 집행관들이 추격해왔다고 착각한 이상, 재상의 경계심도 올랐을 거야.’
게다가 만약 나 혼자 들이닥쳐서 부딪혔는데 그 새끼가 별의 자손이었다?
바로 저택에 차원벽이 치솟고, 영혼의 한타 겸 꼴마초의 맞대결이 시작된다.
황궁에 암약하는 괴물과 1대 1 보스전 스타트다.
‘결국 황자들의 반역이고 뭐고 다 생략하고, 내 안전 마진까지 버리고 붙게 돼.’
진짜 그렇게 되도 이기면 된다, 이기면.
근데 ‘아무튼 이기면 그만임!’하고 꼴박하는 건 전술도 뭣도 아니잖아?
중요순위를 명심하자.
황자의 반란이고 지랄이고 좆 까라 그래라. 내 목표는 우리 가족─나 포함─이 안전해지는 거다. 그래서 우리 안전의 불안요소인 황실에 여론으로 선빵을 갈긴 거고.
‘다치는 사람 없이 별의 자손을 죽이는 게 최우선적인 목표다.’
그 목표를 최대한 안전하게 수행하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반역이고 여론전이고 얼마든지 해도 좋다. 뇌를 비우고 들이박았다가 누구 송장 치우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는다.
보스방까지 가는 퀘스트를 생략했다간 나 혼자 모든 위험을 감당하고 말 것이었다.
그러자 라리루라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배? 알고 계시죠♡?
─안다고. 혼자서는 안 가. 이길 자신은 있지만 놓치지 않을 자신은 없기도 하고.
별의 자손들은 자신의 원래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처지다. 위험해지면 튀겠지.
셀루스티아나 다비드 때랑은 다르다.
이미 그들의 동포가 내 손에 뒤져나간 상태!
또한 저 놈들이 죽는 한이 있어도 나랑 싸우고 싶은 이유도 없어졌지 않나.
‘나한테서 【해신】의 권능은 사라졌으니까.’
가치가 떡락해버린 나한테는 집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때 다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 같이 다굴하면? 재상이 별의 자손일 때만 대기하던 우리가 차원벽을 뚫고 합류해도 되는데. 라리루라가 권능으로 저지하면 별의 자손도 못 튈 테고.
─관두자꾸나, 다나. 수도에서 권능을 부딪히며 싸울 셈이더냐?
─……씁. 그게 그렇게 되나.
다나는 팔짱을 끼며 침음성을 흘렸다.
실수로 ‘당첨’을 뽑아버릴 경우, 우리가 준비한 모든 작전이 무의미해진다.
‘승산만 보고 사람이 즐비한 수도의 한복판에서 총력전을 뜬다?’
재상이 진짜 별의 자손이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죄없는 공무원 군바리들과 친위대까지 다 모여서 우리 가족을 역적이라며 죽이려 들 것이었다.
‘그걸 감수할 거였으면 그냥 처음부터 우리끼리 황궁에 쳐들어갔지.’
별의 자손이 어떤 비장의 패를 감추고 있는지도 모르고, 문어 한 마리 잡겠다고 죄없는 사람들을 죽게 할 수도 없으니 이러는 거라니까?
국가의 뒤에 숨는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미친 짓이지. 비선실세를 몰아내겠다고 군대를 일으키는 거랑 똑같고.;
내가 복잡한 사회의 귀찮음에 침울해지자, 오프툼은 물을 마시고 말했다.
〈어찌됐건 재상과 접촉할 필요가 있는 거군?〉
〈예. 황자들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청동옥좌란 게 어디 있는지 캐내야죠.〉
결론은 그거다. 단서를 놓쳤으니 찾아야 한다는 거.
‘반역에 대한 거랑 가짜 성배를 갖고 협박…… 아니, 설득하면 돼.’
재상이 무고하다면 별의 자손에 대해 알려줘도 되고 말이다.
〈다행히 반역의 타이밍은 감이 잡힙니다.〉
〈천통절 마지막 날, 신전에서 성배를 받을 때.〉
〈예. 잘 아시네요.〉
황제가 천통절의 의식을 마무리하려고 나올 때!
성배를 받으려고 재상의 저택보다 훨씬 철저하게 보호받는 황궁을 나올 때다.
친위대와 국군만 데리고 신전에 맨몸으로 서는 그때가 제일 무방비하다.
황제의 해명을 들으려고 모여든 귀족들을 어찌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죽여버렸다간 황제의 잘못을 규탄하려고 반역했다는 핑계도 안 통할 텐데.
〈대충 알아들었소. 방법이 없지는 않군.〉
〈정말입니까?〉
내가 화색이 되자 오프툼은 픽 웃었다.
〈그 록시인가 하는 아가씨의 정보요. 마침 내일 재상이 참석하는 모임이 있다고 하더군. 아르마알스나 아우렐리우스 가문의 연을 빌리면 참석쯤은 가능하지 않겠나?〉
〈모임이요?〉
이세계 귀족들이 할리우드 스타들이나 해적처럼 파티에 미친 건 알았지만, 재상까지 연회에 참석한다고? 반역까지 이틀 남은 지금?
‘아니, 그런가.’
반역 당시, 황제의 해명을 듣고자 모인 귀족들 중 몇 명과 만날 생각인가.
입을 맞춰두고 행동을 정하는 과정에서 조촐한 모임 정도는 이상할 게 없다. 마침 보이콧 하듯이 연회가 남발하는 타이밍이니 의심도 안 사겠지.
티르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참석해야겠군요. 그 모임에.〉
나는 티르시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훔쳐보고 내심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 얘기했듯 티르시는 이럴 때를 위해서 이 나라에서 명예 귀족 작위를 받고 엘리자베트와도 대화했던 것 아닌가.
10여년 전 로마니아에서 벌어졌던 대숙청.
이 나라의 재상이 거기에 관련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