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신전에 때 아닌 소나기가 내렸다.
쏴아아아아아….
밝은 대낮에 쏟아지기 시작한 비에도 마법으로 생겨난 불구덩이는 꺼지지 않았다. 다나는 빗물에 젖은 머리를 넘기고 신중하게 거리를 쟀다.
싸움에서 이기고도 힘이 풀리지긴 커녕 오히려 더 매서워진 그녀의 눈매는 말라붙은 아멜리아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긴 건 확실하다. [빛의 검]은 분명 별의 자손에게도 통했다.
‘하지만 죽은 척을 하는 걸지도 모를 일이지.’
저 문어 괴물들의 생명력은 이미 들었다.
애초에 그녀의 남편도 그렇지만, 마스터 클래스 쯤 되면 보통 자기 목숨을 간수할 방법쯤 가지고 있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튀지는 못할 거고.’
적어도 라리루라가 권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그럴 것이었다.
‘애초에 노르 녀석이 라리루라를 보내준 이유도 그거겠지.’
다나는 〈청동 옥좌〉에 깃든 자재신의 권능을 쓴 황자가 라리루라한테서 도망쳤다는 점을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놓칠지도 모른다면 라리루라가 말해줬을 거라는 믿음이었고, 그건 사실이었다.
로키에게 조언을 받고, 노르드의 분석까지 들은 라리루라는 공간에 발생하는 극소한 미동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덕분이었다.
“……윽?!”
라리루라가 갑자기 권능의 실을 뻗어서 다나를 끌어당길 수 있던 건 말이다.
위험을 경고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것처럼 바로 자신을 잡아당기는 라리루라에게 당황하는 한편, 다나의 시선은 말라붙은 시체가 누운 곳으로 돌아갔다.
─쿠르르릉!!!
낙뢰가 치며 후드를 쓴 남자를 역광으로 비췄다.
‘……대체 언제?’
마나를 느끼지도 못했는데, 남자는 마치 천둥을 틈타서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처럼 불쑥 솟아났다. 유일하게 라리루라만이 눈치챘을 만큼 조용한 등장이었다.
다나는 빛의 마나로 검을 뽑으며 망설였다.
그녀는 전투에서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현명한 여인이긴 했지만, 적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대를 다짜고짜 공격할 매정함이나 경험은 부족했다.
…찌르르르!!
또 그게 아니어도, 감각적인 이유도 있었다.
프레이야의 신좌 덕분이 아니라, 얼스터의 이름 없는 신이 키워준 영감이 경고성을 날렸다. 지금 저 자를 공격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것이라고.
─까딱. 남자는 시체에 대고 손짓했다.
그러자 지면에 고인 빗물이 명령을 받은 것처럼 아멜리아의 팔을 들고 일으켜 세웠다. 후드로부터 엘프처럼 긴 귀가 드러났다.
단지, 엘프일 리가 없다.
위압감도 없이 자연에 녹아들면서, 어째선지 두 눈을 뗄 수가 없는 존재감. 그런 기척을 풍겨대는 존재가 평범한 엘프일 턱이 있을까.
“……제길, 진짜로 나오고 난리야!!”
신전으로 올라오기 전에 노르드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로키는 입을 벌렸다.
단지 그녀의 목소리가 말이 되어서 빠져나오기 바로 직전.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철퍽!
도화지에 지필묵을 내던진 것처럼, 아멜리아와 남자의 모습이 어둠에 번졌다.
***
제 3황비, 아멜리아 일론소 로마니아.
죽기 직전까지 그런 이름을 쓰던 존재는 영혼에 사무치는 추위를 느끼고 깨어났다.
‘……어디지?’
의문을 느낀 그녀는 자신이 필설하기도 꺼려질 공포 속에서 도망치다가 살해당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프레이야의 신좌를 이은 여자의 칼은 그녀에게 불가피한 죽음을 선사했다.
죽음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별의 자손들도 소멸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영원한 존재는 없기에 별의 바다의 옛 지배자들에게도 파멸은 있다.
그럼 이곳은 지옥일까?
그녀, 아멜리아라고도 불렸던 별의 자손은 평소 지옥이라는 단어를 인간들의 망상이라며 비웃고는 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멜리아의 신, ‘심해의 군주’조차 영원무결하진 못할진대 어찌 감히 인간들이 무한을 논하는가? 10년만 고통을 주어도 정신이 무너질 하찮은 지성체들 주제에?
아멜리아는 무한한 고통도 1만년만 들이면 적응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이 적막은 달랐다.
적막한 공허. 오직 그것 어둠은 그녀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사무치도록 파고드는 추위가 전부였다.
아멜리아는 확신했다.
영원함은 존재했다. 이곳이 바로 우주의 끝이다.
무한에 가장 가까운, 허무라는 이름의 영원이다.
【■■■■■■■!!】
영원함이라는 개념을 인간들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멜리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현명함을 원망하며 비명을 질렀다.
이 허무에 버려진 채로, 오도 가도 못하고 영원토록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미치는 게 낫다. 죽는 게 낫다.
단어는 표현일 뿐이다. 지옥은 안락한 망상이다.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어도 그녀의 영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극적이게도 아멜리아의 정신은 미칠 듯한 공포 속에서도 전례없이 또렷했다.
그 또렷한 정신으로, 이 허무를 누려야만 했다.
기약없이, 영원히.
화르르르르….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흐릿한 빛이 비추자 아멜리아는 환희했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그녀의 자의식 뿐인 공간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 빛이 이제부터 그녀를 고문하려는 지옥의 간수라도 좋았다. 그렇게나 무섭던 울프헤딘이라도 괜찮았다.
이 영원한 허무를 혼자 견뎌내는 것에 비하면, 어떤 상대이든 환영할 만 했다.
그 빛은 일종의 구멍 같은 것이었다. 아멜리아는 구멍에 느껴지지도 않는 눈을 들이밀었다. 놀라운 일이게도 구멍 너머에는 익숙한 세계가 있었다.
아멜리아가 태어난 별. 돌아가고 싶었던 그녀의 고향이었다.
【■■■ ■…… ■ ■■!!】
그리운 고향을 이렇게나마 볼 수 있다니?
비록 저기까지 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쁜 일이었다.
저 영원한 허무를 잊을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의 신께서 아멜리아를 이곳에서 꺼내줄지도 모를 일이잖은가.
희망을 붙잡은 그녀는 무아지경으로 그 광경에 매달렸다.
환희가 절규로 바뀌는 건 눈 깜짝할 새였다.
【■■ 마…!! 하지 ■■■!! ■ 돼, 안 돼!!!!!!】
그녀가 유일하게 의존하고 낙으로 삼던 고향은 끔찍한 파국을 맞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심해의 군주’는 잠들었으며, 많은 지배자들이 사멸하거나 ‘심해의 군주’를 따라서 그녀의 궁전에서 기약 없는 동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별의 바다의 초월자들은 서로 적대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그나로크 때 세계수의 신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옛 지배자들. 그들은 신이 죽거나 잠에 빠짐으로써 무주공산이 된 별들을 집어삼켰다.
잠에 빠진 ‘심해의 군주’는 고향 별에 없었다.
별의 자손들은 강력한 존재였으나, 군주 없이는 몰려든 초월자들의 유린을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지켜만 보는 사이, 그녀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바스라졌다.
돌아가고 싶던 고향. 별의 자손의 터전은 이미 멸망한 뒤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아멜리아는 절규하며 깨달았다. 저것은 과거의 기록일 것이라고.
저 빛은 누군가가 일부러 보여준 것이었다.
【이곳은 내가 머무르던 곳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발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아멜리아는 퍼득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의지로 그렇게 했다기보단, 누군가가 바닥을 구르던 아멜리아의 목을 집어든 것처럼 시야가 움직였다.
【라그나로크 이후, 나는 줄곧 이 심상세계에서 미드가르드를 엿봤지.】
후드를 쓴 남자였다. 귀는 길었고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목 아래로는 늙은이처럼 주름 투성이였다. 꼭 다른 생물의 몸을 목에 이어붙인 것만 같았다.
아멜리는 이 귀가 긴 남자가 누구인지를 곧바로 눈치챘다.
【……헤니르.】
【환영한다. 별의 아이야.】
후드를 쓴 헤니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멜리아는 눈물을 쏟으며 떨었다.
【……너야? 네가 날 여기로 데려오고 저 광경을 보여준 게?】
말없이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곧 대답이었다.
아멜리아는 이해했다. 이건 그녀를 향한 복수일 거라고.
【내가 네 창조물들을 죽이는 꼴을, 여기서 쭉 봐 왔으니까? 나한테도 똑같은 절망감을 주려고? 끝내주네. 아주 대성공이야.】
신에게 버려지고 돌아갈 곳을 잃은 아멜리아의 마음은 끝내 부숴졌다.
로마니아를 뒤에서 지배하면서 세상을 어지럽힌 그녀다.
헤니르가 이 공간에서 목만 남은 채로 그 꼴을 봐 왔다면, 그야 화풀이 정도는 하고 싶었을 만도 했다. 비슷한 체험을 겪었기에 아멜리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분노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녀의 영혼은 이 허무처럼 텅 비고 말았기에.
【하, 하하하하. 레벨리오를 구슬려서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 것도 너지?】
아멜리아의 영체가 남아 있었다면 그녀가 삐걱거리며 웃는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황자들을 조종하고, 배후에서 모든 걸 통제하며 옥좌를 손에 넣었던 그녀.
단지 그녀가 성공한 건 옥좌를 얻어내는 과정까지였다. 그 뒤에 쫓기고 공포심에 미쳐가며 죽게 된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멜리아가 도망치지 못하게 막고, 죽도록 만든 뒤, 이 허무로 데려왔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한 게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예상했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아멜리아는 뒤늦게 모든 일의 전말을 눈치챘다.
【다 네가 계산한대로 됐잖아? 나는 도망치면서 옥좌를 챙길 테니, 울프헤딘이 그런 날 쫓아와서 죽여놓으면, 다 끝나고 나서 〈청동 옥좌〉만 쏙 빼먹으려고?】
아멜리아가 클리안 황자를 상대로 한 짓과 같은 맥락이었다.
행동을 예상하고, 그보다 한 발 더 앞서나가서 원하는 것을 취한다.
황궁의 암투와 황자들의 반란을 뒤에서 조종한 아멜리아도, 헤니르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한낱 기물에 불과했다.
【명불허전이군. 감탄할 만 해.】
헤니르는 진심으로 그런 아멜리아를 칭찬했다.
천통절 첫째 날부터 사건의 흐름을 하늘보다 더 위에서 지켜보던 그였다. 아멜리아는 그 사실까진 몰랐지만, 탈력감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하, 하하하……. 잘나신 총혜신 납셨네.】
하지만 그 탈력감에 분노는 없었다. 아멜리아는 처연한 태도로 완패를 받아들였다.
지혜 싸움에서 밀려서?
틀렸다. 마음이 꺾여버려서였다.
‘심해의 군주’에게 버려진 그녀의 마음을, 거듭 공포와 절망으로 박살내버리는 수법. 자아를 무너트리고 굴복을 강요하는 뻔한 상투구.
그러나 상투구는 정공법의 다른 표현이다.
아멜리아는 이제 반항심을 품을 수 없었다. 이 판국에 저항해 봤자 무슨 의미겠는가.
신은 기도에 응해주지 않고, 이젠 돌아갈 곳도 없는데.
명령을 거부했다간 굴복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이 허무에 버려지기나 하겠지.
헤니르의 뜻을 망칠 변수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아멜리아의 반항심은 거세당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헤니르 자신의 손으로.
암탉의 목을 자르기 전에 깃털을 뽑아내는 요리사처럼, 섬세하고 무자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