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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39화 (837/1,009)

죽음은 분명하고, 저항은 무의미하다.

헤니르의 손에 목만 달랑 들려 있는 듯한 꼴이 그녀의 처지를 암시하는 듯 했다.

【……옥좌가 필요하면 가져가버려. 날 죽이고 니 맘대로 뜯어가라고!!】

그래서였을까. 아멜리아는 마지막 허세를 쥐어짜내며 악을 썼다.

목숨 구걸을 하지 않은 건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허무에 버려지는 것에 대한 공포와 무너져버린 마음을 감추면서 아멜리아는 씩씩댔다. 존엄하고 숭고한 공포의 상징, 사악한 지혜를 갖춘 괴물의 면모는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 있는 건 한낱 필멸자처럼 두려워하는 작은 영혼에 불과했다.

【가엾은 것.】

그러나, 헤니르는 조심스럽게 아멜리아의 뺨을 매만졌다.

순간 허세를 버리고 공포에 질렸던 아멜리아는 머리가 멍해졌다.

쓰다듬어? 왜?

정신이 무너진 인간을 지배하려는 기만책이라면 알 수 있다. 아멜리아도 자주 하던 일이니까. 한 번 자아가 붕괴한 인간은 이런 하찮은 호의에도 목을 매곤 했다.

허나 헤니르는 그녀를 구슬릴 이유가 없잖은가.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어차피 아멜리아한테는 반항할 능력과 의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굴복한지 오래였고, 남은 거라곤 허무함과 공포가 전부였다.

회유해서 부하로 삼아봤자, 이 공간을 나가면 고통 속에 소멸하고 말 것이었다.

【나는 긴 다리의 신. 버려진 아이들의 왕.】

그렇다면, 가슴을 채우는 이 안도감은 무엇인가.

있지도 않은 귓속에 파고드는 목소리가 이토록 눈물겨운 건 왜인가.

【너를 가엾게 여길 이유는 그걸로 족하다.】

헤니르가 머리를 쓰다듬자 아멜리아는 어렵사리 목소리를 짜냈다.

【……버려졌다고? 내가?】

【네가 믿던 신은 너희를 놔두고 도망쳤다. 그 뒤로도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너희를 비호하지 않았지. 현실을 직시하기만 하면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맞다. 사실 아멜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쉽게 꺾이고 만 것이었으니.

노르드에게 간 축복이 절반이라도 아멜리아에게 왔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필요하지 않아서 그녀를 내쳤다. 그 진실이 아멜리아를 한계로 몰아세웠다.

【바란다면, 네 신에게 했듯 기도하라.】

헤니르가 말했다.

【그리하면 내가 듣겠다.】

【……………….】

아멜리아는 자신을 쓰다듬는 손을 살폈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나 아늑한지는 금방 알았다. 건강한 혈색의 늙은 육체. 천공신의 몸이었다.

라그나로크로 정해진 죽음을 회피하고자, 옛날 옛적에 ‘심해의 군주’가 잘라낸 것.

가짜 오딘 행세를 하던 무렵, ‘그녀’가 쓰던 몸.

‘심해의 군주’가 오늘까지도 잠자며 힘을 회복해야만 했던 이유였다.

【아……】

그렇게 생각하자 공포는 씻은 듯 사라졌다.

그야 당연했다. 지혜의 신이었던 오딘은 그녀의 주인이 그만한 피해를 입어가며 해치웠던 존재다. 지혜와 힘 모두 극에 달했던 신 중의 신이다.

【안식을 바라느냐. 가엾은 아이야.】

그리고 그 오딘이 조언자로 삼았던 신이 그였다.

총혜신 헤니르. 인간에게 지성을 내려준 태초신.

아멜리아가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녀는 사무치도록 그리웠지만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던 안식에 몸을 떨었다. 눈물도 흘렸다. 고작 손길 한 번에 굶주림은 전부 충족되었다.

기도해야 했다. 소원을 전해야 했다.

하지만 태어난 성계로 돌아가봤자 그곳에는 절망 뿐이다. 아멜리아는 회개하며 자신의 착각을 자책했다. 헤니르가 그녀의 고향을 보여준 이유를 깨달아서였다.

헤니르는 그녀에게 타일렀던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기도를 그르치지 말라고.

그래서 아멜리아는 주저없이 바람대로 기도했다.

헤니르는, 아니. 그녀의 신은 기도에 응했다.

【네 기도는 들렸다. 이만 쉬거라.】

─사르륵.

아멜리아는 눈을 감고 안식을 받아들였다.

영원함은 존재했다. 이곳이 바로 우주의 끝이다.

행복하게 소멸하던 그녀는 그녀의 신께 〈청동 옥좌〉를 고스란히 진상했다. 죽어가는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헌신이 그것이었기에.

【……………….】

헤니르는 손에 넣은 신좌들을 움켜쥐었다.

─콰직!

허무로 가득하던 공간에 광휘가 터져나왔다.

***

싸움이 끝난 직후, 누군가가 나타나서 쓰러트린 별의 자손을 집어삼켰다.

베로니카는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조차 벅찼다.

불현듯 구름의 흐름에 맞지 않게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이어서 번개가 쳤다 싶더니 낯선 남자가 해치운 적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라리루라가 다나를 낚아채자마자 어둠과 로키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지금 나타난 건 헤니르야!! 총혜신 헤니르!!”

잠깐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도 기척도 분명 본인이었다. 로키는 이빨을 갈았다.

“신전의 지하에 있는 세계수를 타고 나타났어!! 〈청동 옥좌〉를 훔치러 온 거야!!”

“적이란 거죠? 알아듣기 쉬운 설명이었어요.”

프랑은 거신 골렘의 팔을 여럿 만들어냈다. 그 우신 토벌전 때만큼은 아니어도 에른스트를 찌른 무렵보다 날카롭고 강건한 팔이었다.

땅에서 자라난 팔들은 곧장 창술을 펼쳤다.

─콰과과곽!!

오러를 감은 창이 어둠에 박혔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다들, 저 공허에는 닿지 않게 조심해.”

골렘들의 팔이 회수한 창은 용암에 넣었다가 뺀 설탕 공예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쿠르르륵… 쿠륵!

그렇게 10초 정도 지나서였을까. 어둠은 새까만 늪지가 무너지는 것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남자는 다시 나타났다. 아멜리아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청동 옥좌〉.”

다나와 비슷한 이유에서 공격을 꺼리던 네페르티티가 헤니르의 손에 들린 왕관을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 때문은 아니겠지만, 헤니르는 곧 옥좌의 힘이 담긴 왕관을 치켜들었다.

─쫘악!!

그리고 엿가락을 뜯는 것처럼 찢어발겼다.

텅그렁, 텅….

고철 덩이가 된 왕관을 내던진 그는 무기를 든 여인들을 하나씩 살피다가, 로키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로두르.】

【……그러게. 하지만 썩 근사한 재회는 아닌걸, 빌리.】

【더 근사한 재회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야.】

헤니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기에 로키는 순간 말문이 막힐 뻔 했다.

【네 부하 얘기야? 걔한테도 말했는데, 오빠는 좀 더 친구를 골라 사귀는 게 낫다고 봐. 언니랑 나도 마찬가지지만 오빠도 미친 녀석들 보살피는 게 취미인 건 아니잖아?】

대답 대신 돌아온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헤니르한테서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너야말로 인간들을 돕겠다고 수만 년을 몸을 바칠 성격은 아니었지.】

【……아, 그러셔. 맞네, 내가 틀렸어. 신이라고 변하지 않는 건 아니지.】

이렇게 얼굴을 본 것도 거의 수만 년만이다.

인간에게는 까마득한 시간이고, 신에게도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신대 초기의 로키와 여기 있는 크라운 크라운이 거의 별개의 인물이듯, 헤니르도 그럴 터였다.

로키는 헤니르의 몸을 살폈다. 로브에 가려져서 보이진 않았지만 확실한 육신이다.

【몸이 없어서 못 돌아다닐 줄 알았는데. 이걸 좋아해도 될지는 모르겠네.】

【이건 ‘심해의 군주’가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서 만들었던 육체야. 라한이 니플헤임에서 찾아줬지. 그래도 오늘까지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았어.】

【……누구라고?】

【‘심해의 군주’. 뇨르드랑 오딘을 죽인 이계의 신 말이야.】

【그거 참, 듣는 구신 미치고 팔짝 뛸 소리네.】

이제 보니 바뀐 건 성격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로키는 헛웃음을 흘렸다.

【몸을 바꿔가면서 노는 데 취미붙인 거 아냐? 머리 아래로 전부 바꿔끼우면 내가 아는 헤니르=빌리랑은 90% 다른 신이잖아.】

【하지만 아무리 바뀌어도 나는 나야.】

그는 로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라오는 동생을 이끄려는 듯한 손짓이었다.

【나랑 같이 가 주겠니? 로두르.】

【미안. 이제 보니 몸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싹 다 미친 게 맞네. 모르는 것 같으니까 말해줄게. 난 네 친구라는 라한 뭐시기 씨를 죽게 놔뒀다?】

【그래서야. 라한이 죽어버렸으니 접목을 함께 해 줄 신이 없거든.】

접목?

무슨 짓인지는 몰라도 멀쩡한 시도는 아닐 것이 자명했다. 로키는 혀를 찼다. 그녀는 결코 한때의 의남매였던 신의 미친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양할게. 다른 사람의 대역이라면 이미 500년 넘도록 계속하느라 신물이 나.】

로키는 단언하면서 환영으로 신전을 뒤덮었다.

【허수아비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만 있어!! 옛 정을 봐서 안 아프게 끝내줄 테니!】

【제가 말이죠♡?】

환영이 펼쳐지자마자 라리루라는 권능으로 실을 넓게 폈다.

합동작전은 몇 번 연습한 적이 있다. 환상으로 앞뒤도 분간하기 힘든 공간은 【보천의 편자】의 공간지각력이 유효해지는 최고의 무대였다.

원래는 로키가 혼자서 펼치던 전법이지만, 헤니르가 알고 있을 확률은 낮다.

로키는 헤니르와 다닐 무렵에는 실을 사용하지 않았다. 유희신일 무렵의 로키=로두르는 싸움꾼이 아니었을 뿐더러, 주 전법은 환영이었다.

“원거리 공격을 쏟아부어라!”

베로니카가 외치며 남은 마나로 마법을 최대한 연발했다. 프랑도, 다나도, 네페르티티도 제각각의 기술과 마법을 펼치면서 헤니르를 노렸다.

【아쉬운 대답이야.】

헤니르는 로키에게만 대답하며 손가락을 그었다.

…덜컥!!! 어떠한 파장이 신전을 휩쓸었다.

“……어?”

위화감을 먼저 깨달은 건 라리루라였다.

이중에 육체의 감각이 제일 예민한 건─그녀들 중에서는─ 프랑이었다. 그렇지만 프랑은 감지할 수 없었다. 오직 라리루라와 다나만이 눈치챘다.

‘발퀴리에가……?!’

신좌의 권능이 발동하지 않는다.

날개가 사라진 다나가 무기와 발퀴리에를 잃고, 헤니르를 포위하던 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권능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었다. 로키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권능의 실을 방패 삼아서 달리던 네페르티티는 눈을 크게 떴다.

“……인간의 신좌만을 없앴어!!”

네페르티티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신좌에서 내려오게 만드는 힘!

그녀들의 전투능력은 높지만, 가장 강한 다나와 라리루라의 전투력은 신좌의 권능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신좌를 빼면 뒤에서 세는 편이 더 빠르다.

권능인가, 아니면 마법인가.

뭐가 됐건 이미 공세에 들어간 그녀들에게, 이 한순간의 공백은 치명적이었다. 헤니르의 손에서 청명한 파도가 룬 문자를 휘감으며 몰아쳤다.

그녀들 중 누구도 인간의 몸만으로 신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지금 신전에 남은 사람들 중, 그게 가능한 것은 오직 1명.

……우직!

그녀들이 모두 여기 없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문득 지반이 갈라졌다.

마치 지하에서 누군가가 강렬한 힘으로 두들긴 것처럼.

“씁, 물 타입 엘프한테는 좋은 기억이 없는데.”

─콰아아아앙!!!!

지면을 갈아버리며 날아든 노르드는 브류나크를 내던졌다.

【게르튀르 푸타르크(Geirtýr ᚠᚢᚦᚨᚱᚴ)】·ᚱ(Raidō)

차원을 빠져나간 창이 헤니르가 완성한 주문을 깨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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