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61화 (859/1,009)

로마니아의 교황만큼 손에 피를 묻힐 일이 드문 직업은 달리 없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성기사로 복무하는 등─ 생명을 해치는 일은 있겠지만, 그 후에는 다르다. 교황의 권좌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아야 하는 법.

따라서 어떤 성직자보다 정치질과 협잡에 능해 교황이 된 이들은 알지 못했다.

자폭. 양날의 검. 상호확증파괴.

피 튀기는 싸움에서 동귀어진을 시도하는 것의 의미를 말이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협박 수단은, 상대방이 폭발 범위에 없으면 의미가 없다.

‘이걸 이렇게 빠져나간다고?’

리베르타스교 교황은 등이 흥건해졌다.

그들이 예상한 바, 인공신의 비밀은 준비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카드였다.

황제에게 수백 년 간 기만당해 왔다는 분노!

그것에 분개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국가 형태를 세우려 하는 신 정부가 울프헤딘 백작 패거리의 명분이자 기치(旗幟) 아닌가!

그런데 그 새 정부마저 7대신이 거짓이라는 걸 숨기고 있었다?

이 점을 까발리면 교황들만 아니라 백작 패거리 역시 굉장히 아플 터였다.

아니, 어디 아플 따름인가? 포션을 꽂고 병석에 누워있는 중병 환자, 로마니아 씨에게 팔팔 끓인 물을 끼얹어서 발작과 쇼크사를 일으키는 셈.

이후의 정치 싸움과 명분으로 목숨은 건사할 수 있어도, 나라는 끝장난다.

교황들의 목을 치면 백작도 독침을 맞게 되니, 상식적으로 이 수단을 고르지는 않을 거라고 믿은 것이었다.

빈대…… 아니, 독사 쯤 되는 교황들을 짓뭉개겠다고 궁궐을 태우는 수준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어떤가?

저들은 기어이 면피의 수단을 넘어서 교황들을 때리는 위치에 서는 것마저 가능하게 됐다.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 전에 모든 옥에티와 흠집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말이다!

─진정들 하십시오!!

그때였다. 자기가 가장 침착하지 못한 심념으로 베스타교 교황이 외쳤다.

─정말로 사실대로 공표하고 저흴 묻어버릴 생각이었다면 이걸 말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친절히 대접하는 척 하다가 뒤통수를 쳤겠지!!

─알키데스!! 자네, 혹시나 백작과 결탁한 것은 아니겠지!!

베스타교 교황이 울프헤딘 백작과 사전에 만나 접촉했다는 건 그들도 알았다.

평화로운 표정 밑으로 그들은 악귀처럼 외쳤다. 안전을 약속받고 그들을 속인 건 아니냐는 규탄에 베스타교 교황도 몰래 이를 악물었다.

─헛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지금 절 추궁해서 뭐가 나아집니까?! 백작은 무언가 따로 원하는 게 있어서 공갈하는 것일 터!! 우선 그것부터 알야아 합니다!!

의심암귀를 가라앉히고 나자,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죽일 생각이라면 왜 미리 귀띔해주지? 해 봤자 선전포고밖에 더 되는가?

교황들과 백작 패거리는 등 뒤에 단검을 숨기며 악수를 나누는 사이! 처음부터 세간의 이목을 피해가며 벌여대는 음지의 각축전이다. 이제 와서 정정당당? 개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예……!! 예!! 정말로 그렇습니다!!〉

─덥썩! 포모나교 교황이 노르드의 손을 붙잡고 눈물짓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저를 믿고 무구한 눈으로 바라봐주는 소중한 신도들을 보며, 평화를 무너트릴 수 없어 거짓을 고해야 했던 고통!! 그 고역을 알아주시는 분께서 이렇게 나타나시다니!!〉

순해빠진 교황은 이 상황에 이르러서까지 일의 속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울부짖었다. 그 요란한 리액션에 노르드는 즐겁게─겉으론 슬프게─ 호응했다.

〈개의치 마십시오! 개의치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풍요신님의 인도입니다!!〉

〈제가, 제가 기도해도 괜찮을까요? 천명을 다 하시고도 아직 세상에 남아 저희의 오만한 소원을 몸소 짊어져 주셨던 여신님께, 제가 다시 기도를 바쳐도 되는 것일까요?!〉

〈물론입니다! 기도는 죄가 아닙니다! 풍요신님께서도 이해해주실 터!〉

〈아아…… 아아!! 그렇다면 기도하겠나이다!!〉

그들은 손을 붙잡고서 눈물을 쏟으며 신파극을 찍어댔다.

물론 보고 있던 교황들의 정신은 아득해질 뿐이었다. 신파극에 눈을 질끈 감은 테미스교의 여교황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백작님. 저희에게 바라시는 게 있으십니까?〉

정치적 수식이 전혀 없는 직설적인 물음!

정신이 나가버렸던 교황들도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한 직구였다. 하지만 조금 생각하자 나쁜 발상은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토록 패색이 짙거늘 본심을 숨겨 무얼하리오.

그럴 바엔 태도라도 진솔해 보이는 게 나았다.

〈제가 어떻게 전세계 신도님들의 지지를 받는 분들께 부탁 따윌 하겠습니까만은,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저는 나라의 안녕을 바랄 따름입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대답하는 노르드.

눈물을 그만큼 흘려놓고 눈은 붓지도 않았다.

〈그러나 저는 고고학자이며, 지금까지의 경험에서부터 배운 것이 있습니다. 모든 진실은 언젠가 발굴되어 햇볕을 쬐게 되는 법이더군요.〉

〈지금까지처럼 감추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까?〉

〈예. 단지, 어떤 진실은 듣는 이들도 받아들일 준비와 각오가 필요하죠. 거짓말을 거짓말로 감춰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교황들은 마음을 놓았다. 역시 저들도 이 일을 바로 공표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럼 그들의 목줄을 잡고, 무엇을 원하는가.

죽으라는 명령은 할 이유가 없다. 죽일 거라면 몰래 함정을 파서 죽이면 됐으니.

〈황제의 자백에 따르면, 로마니아의 7대신이란 신들이 사라진 고대문명 초기부터 시작된 인류의 유산입니다. 그리고 이 설계도는 그 유산을 강탈하려고 들었던 자들의 흔적이죠.〉

설계도의 사본을 보여주며 노르드는 설명했다.

별의 자손이 〈청동 옥좌〉를 사용하려 한 것.

그것을 막내 황자가 빼앗아서 자신이 추종하는 악신에게 갖다바친 것을 말이다.

헤니르에 대한 설명은 축약했지만, 괜찮았다.

〈그, 그 악신이 바이츠니아를 헤집어놓은 광신도들의 신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예에. 사람의 몸 속에 벌레를 심고 지배하며, 때로는 괴물로도 만드는 놈이지요.〉

거짓말은 안 했다, 거짓말은. 노르드는 진지하게 하소연했다.

〈신들이 거짓이고 기도를 보살피는 자가 없다 하여도, 이 거짓말의 근저에 깔린 의도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선의였다는 걸 알려야 합니다. 그게 교황 여러분을 위한 길이기도 하죠.〉

안 그러면 업보 청산하고 뒤질걸?

그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교황들은 속뜻을 알아듣고 침을 삼켰다.

〈그러나, 백작님께서 말씀하신대로라면 성뢰신님의 신좌 외의 여섯 신좌는……〉

〈예. 막내 황자가 추종하는 ‘사악한 신’이 훔쳐간 상태입니다.〉

〈……빼앗긴 신좌를 되찾을 수는 있을까요?〉

〈되찾든 되찾지 못하든, 저희는 그 후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신앙이 거짓이라는 걸 밝히기에 앞서 노르드가 고민했던 바는 하나였다.

‘자기가 믿던 신이 가짜란 걸 신도들이 믿을까?’

고민은 길었지만 답은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같은 거짓말이라도 언제, 어떻게, 밝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니어도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이 있을 것이며, 그걸 악용당했을 때가 제일 큰일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제 3자의 개입은 교황들에게도 최악의 사태다. 대비하지 못하고 비리를 까발려진 정치인처럼 한순간에 몰락하고, 뭇매를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노르드로서도 마찬가지!

로마니아가 무너져버리면 그도 무척 곤란해진다.

투자한 나라가 부도가 나 버리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금전적인 면은 어쨌든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갈 텐데, 향후 10년은 꿈에 나올 것이었다.

‘망하면 곤란해. 기껏 이 나라를 헤니르 같은 씹새들에게 맞설 첨병으로 삼았는데.’

그가 염려하는 사태는 아직도 예언에 비춰지지 않는 헤니르의 돌발행동이었다.

‘내가 헤니르라면 훔쳐간 신좌의 권능을 쓰면서 진실을 밝힌다.’

그러면 로마니아의 국민들은 혼란에 빠진다.

원로원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이들도 나오겠지.

기껏 나라와 예지력을 안정시켰는데, 전부 말짱 도루묵이 되는 것이었다.

‘내 양심의 가책을 빼놓고 봐도 인공신좌 건은 숨겼다간 좆될 부분이라는 거지.’

그래서 고민했다. 7대신의 신도들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에 대한 답은 나온 뒤였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이곳의 종교관이 노르드가 나고 자랐던 푸른별 지구에 비해 양호한 부분이 있다면, 그 신앙이란 게 딱히 유일신 체계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세계에 신은 많고, 신화에 따라선 죽기도 해.’

현대 지구인에게 외압으로 종교를 갈아치우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하지만 이 세계수에는 신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도 다신교 신앙에서 전지전능하며 절대적인 신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지구의 천주교도라면 신이 가짜란 걸 알았다고 알라나 부처를 따를 리는 없지만……’

이세계인들은 달랐다.

자신이 믿는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보는 신도는 적다. 신이 죽어서 없어지거나 사멸하는 종교들도 있다. 그 연장선이다.

신도들이 진실을 수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구설수에 오른 아이돌의 팬덤이 공중분해되는 느낌이랑 비슷하지.’

그 아이돌을 통해서 생업을 이어가거나, 그들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

그래도 대다수의 팬들, 신도들은 버틸 수 있다.

‘적어도 유일신교가 부정당하는 것보다는 파장이 적을 거야.’

당장 교황들만 봐도 그렇다. 신도들의 대표라는 이들이 이 얼마나 세속적인가.

신심 깊은 신도들의 반발과 현실부정은 있어도 평상시라면 수습이 가능하다.

문제가 있다면 빈사 상태의 로마니아는 그만한 쇼크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였다는 점과, 견딜 만 하더라도 엄청난 반향을 부를 거라는 점이다.

성명발표의 자리에서 이 사실을 밝히지 않기로 했던 이유였다.

〈신도들과 만민의 평화와 안전은 우리 교단도 꿈꿔 마지 않는 일입니다!〉

〈뚜껑을 덮어놔도 꺼지지 않을 불씨라면 불을 끌 준비를 하고 키워야 하오.〉

물론 교황들에게는 거기까지 설명해 줄 필요도 없었다. 자신들의 목숨과 안위가 경각에 달하자 입을 모아 대답하기 바빠졌으니까.

또한, 노르드는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나름대로 궁리한 뒤였다.

〈저희들에게 맡겨주실 일이 있으신지요?〉

〈예. 있고 말고요.〉

이제야 서열 정리── 아니, 협의가 된 셈인가. 노르드는 픽 웃었다.

‘드디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갈 수 있겠어.’

그는 이 지경이 되어서 딴 생각을 품는 교황들을 모아서 줄빠따를 때려놓고, 반항하지 않고 협력이 가능하도록 입장 차이를 알게 해 준 것이었다.

표현 나름으로는 오늘이 정훈교육의 자리였다고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짝짝짝짝! 노르드는 박수를 치며 요란스럽게 정중한 자세를 갖췄다.

〈소개하겠습니다! 이 세계를 창조한 태초신들 중 한 분이며! 게르마니아 구신(九神)의 일각이신 유희신이자! 때로는 만언신 로두르로도 불리었던 신대의 여신!!〉

휘황찬란한 소개를 들으며 어느덧 나타난 광대 옷차림의 여성이 가슴을 폈다.

〈태초의 창세신, 로키=로두르 님이십니다!!!!〉

〈엣헴!!〉

우쭐대며 콧잔등을 훔친 로키는 허리에 손을 딱 얹고 잘난 듯 턱을 당겼다.

〈……………….〉

〈……………….〉

하지만 교황들은 이게 무슨 농담이냐는 듯 노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킁.”

뻘쭘해진 로키는 코를 마시더니 노르드의 목을 팔로 휘감았다.

뺨을 맞댄 그녀는 질색하는 노르드에게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저기요, 울프헤딘 씨? 그러게 제가 말했죠? 이 슈퍼 대단한 전설의 광대가 예상하건대 관객석이 짜게 식지 않겠냐고 그렇게 경고했죠?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응?”

“경고하고 자시고, 내가 뭘 어떻게 소개한들 저 사람들이 ‘앗 그렇군여 안녕하세오’ 하며 납득하겠냐고. 이런 리액션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냐?”

“당연하면 나더러 어쩌라고? 부탁받은대로 옛날 얘기나 들려줘? 환상이랑 창세의 권능을 마구마구 써대는 게 아니고서는 절대 안 믿어줄 각인데?”

의혹과 경멸의 시선이 등에 쿡쿡 박히는 걸 못 견딘 로키가 떽떽대자 그는 대답했다.

“말의 설득력은 메신저랑 여건에 따라 갈리지. 1시간 정도만 다녀와.”

“……다녀오라니?”

“인공신좌들이 박혀있던 니플헤임의 하늘. 그걸 좀 보고 나면 싫어도 이해하겠지?”

노르드의 웃는 낯을 본 로키는 몸을 떨었다.

저 옛날, 똑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엿 먹이던 모 여신과 무척 닮은 미소였다.

〈아무래도 믿어주시지 못하는 듯 하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겠군요.〉

─쿵쿵. 노르드가 발로 바닥을 찧자, 뻐끔 하고 응접실 바닥에 구멍이 열렸다.

아랫층에서 사인을 들은 티르시가 명계로 가는 문을 연 것이었다.

〈……허?〉

당연히, 그 구멍 위에 서 있던 교황들은 밑으로 푹 꺼질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풀썩!

좌표는 니플헤임의 지상 1미터 위.

떨어진 교황들은 눈밭에 덜컥 주저앉았다.

〈아, 설명은 여기 로키님께서 해 주실 겁니다.〉

〈……불신자를 계몽시킨다고 지옥에 떨궜다가 건져? 넌 무슨 신화 속 주인공이니?〉

썩은 표정을 지으며 니플헤임에 폴짝 내려가는 로키.

─휘오오오오오!!

설원에 몰아치는 바람은 얼어붙을 만큼 차다.

플랭크 자세로 하는 회의처럼 매우 효율적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게다가 머리도 차가워질 테니까 냉정하게 사고할 수 있을 것이었다.

노르드는 빵끗 웃으며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을 보듯이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문은 열어둘 테니, 1시간 정도 역사 공부 좀 하다 오시지요.〉

거짓된 신의 이름으로 군림하던 교황들, 지옥에 떨어지다.

시 한 편 뚝딱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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