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67화 (865/1,009)

눈을 떴다.

프랑과 네페르티티가 잠들고, 나 자신도 만족할 정도로 그녀들과 몸을 섞은 후. 오랜만의 자유를 즐기며 낮잠에 빠진 나는 눈을 뜨자마자 눈치챘다.

“꿈속이군.”

어떻게 알았냐고? 상황 판단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 아닌가. 어두컴컴한 주변을 살피며 눈썹을 꿈틀하는 나였다.

꿈속이지만 평소의 평원이 아니었다. 내가 손을 까딱거리고 있자 팔찌에서 브류나크가 튀어나와선 내 머리에 날아가 앉았다.

“삐엑─!”

녀석이 여봐라는 듯 홰를 치자 어둠이 걷히면서 시야가 탁 트였다.

“고맙다.”

“뺘뺘.”

알면 됐다는 듯이 총총 거리다가 다시 돌아가는 브류나크. 나는 팔찌를 쓰다듬고서 어둠을 헤치며 나아갔다. 육체적인 직감과는 또 다른 영감이 내 의식을 관통했다.

“예지몽인가.”

그 어둠의 끝에 신이 있었다.

긴 귀를 갖고 목에 베었다가 도로 붙은 자욱이 있는 남자. 헤니르였다.

꾸르르르륵….

내가 지켜보고 있자 헤니르는 인공신좌의 힘을 써서 어둠 안에 있는 무언가를 강화했다. 거대한 살덩이가 늪을 헤엄치며 움트고 있는 것만 같다.

살덩이는 빛이 비추지 않는 늪속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흉측한 모양새였다. 꿀럭거리며 김이 올라오는 늪에서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취아아악. (배고파.)”

두 발로 걷는 악어 같은 생물이었다. 나는 그게 생구신 팔레스의 권능으로 탄생한 생물이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목축을 관장하는 팔레스의 권능은 생명 창조.’

풍요신 포모나가 주로 식물의 생장이나 수확을 관장한다면, 팔레스는 가축을 기르는 신이었다. 그 권능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생명 창조이고 말이다.

살덩이가 헤엄치는 늪에서 꿀럭거리며 괴물들이 기어나오는 게 보였다.

‘과연 잘난 창세신이시군.’

괴물이라곤 했지만 별의 자손, 아멜리아가 만들었다는 비틀린 이족들보다는 훨씬 덜 흉측해 보일 듯 싶었다. 인간의 감수성에 맞을 뿐더러 부모의 솜씨가 더 뛰어나서겠지.

오딘, 로키와 인간을 만들었다는 헤니르에게는 이미 한 번 거쳐간 길이다.

헤니르를 보필하던 레벨리오 황자가 말했다.

“완성입니까?”

“이제 막 제 1보를 내딛었을 따름이지.”

태어나는 생명들을 보면서 헤니르가 중얼거렸다. 나는 인상을 썼다.

‘저 권능으로 신인류라도 만들 셈인가?’

아니, 저걸 인류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생김새는 그나마 평범해 보여서 착각했지만, 저 생물들은 절대로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본질을 따져보면 유니콘, 바이콘들과 비슷할까.

“끼에에에에에─!!!”

의미 없는 포효성을 지르며 늪지에서 빠져나온 그리폰이 포효했다.

저 괴물들은 괴물이면서, 신이었다.

헤니르의 손으로 빚어낸 신족.

“아이들을 몇 명 데리고, 네 일을 시작하거라.”

“예.”

두루뭉실한 명령을 받은 레벨리오 황자는 진작 설명받았었다는 듯 바로 물러났다.

그의 곁에서 기척이 몇 개인가 사라지자 어둠이 내려앉은 늪지에도 갓 태어난 신족들이 뒤척이는 소리만 남았다. 성체의 모습이지만 어떻게 보자면 사랑스럽기도 했다.

동물원이라기엔 절대 철창 안에 갇혀 있을 듯한 피조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 정도로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너희들에게도 보이고 있겠지.”

늪지에서 뿔 달린 말들이 튀어나오는 걸 발견한 내가 기어이 무표정하게 변했을 때였다. 고개만은 피조물들에게 고정한 채로 헤니르가 말했다.

“예언자의 생태에는 오딘과 어울리면서 이골이 났다.”

나와 헤니르는 나란히 늪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섰다. 그의 말이 흘러나왔다.

“미래를 읽는 권능을 깨우치는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알겠나? 그들은 과거로부터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지혜와 통찰력, 직관에 뛰어나다.”

신의 무녀로서 권능을 점지받은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깨우친 자들의 특징.

메신저가 이 새끼라서 딱히 신뢰가 가지는 않는 말이었지만, 납득은 갔다. 내가 엘리트 대갈통이라 미래를 보는 권능을 얻었다는 뜻이니까.

“……고로, 울프헤딘. 네게 같은 방법이 또다시 먹히지 않음을 십분 안다.”

〈청동 옥좌〉를 탈취했을 때와 같은 잔재주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나도 놈도 그 사실을 알았다.

같은 수작에 몇 번씩이나 당했다간 예언자라는 이름이 울 것이다.

“오너라. 나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는다.”

─빙글.

질척한 녹색으로 범벅된 생명의 보고를 굽어본 신은 몸을 돌렸다.

“시대의 변혁에는 희생이 필요하니라.”

문드러진 세계수의 뿌리가 아홉 가닥이나 모여 있는 숲에 총혜신의 조용한 선전포고가 울려 퍼졌다가, 이윽고 공허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그게 무력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크르르르르…….

으르르르르…….

늪지대의 뒤편에는, 이미 수만 마리는 될 듯한 괴물들이 도열해 있었으니까.

아직 조금 더 미래의 모습이라고는 하나, 저들 모두가 살육의 선봉장이었다. 신족 중에서도 가장 싸움에 적합한 투쟁의 화신들이 【중간 가지】에 재탄생한 것이었다.

창세의 권능과 생구신의 권능의 융합.

지력을 빨아들여서 낳은 괴물들은, 시간만 충분하다면 혹시 인류 전체를 몰살하고도 남을까.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공멸 정도는 가능할 듯 했다.

살아남는 인류도 신족도 한 줌일 뿐이겠지.

그가 떠나간 뒤에도,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 미래에 대한 위구심이 아니다.

“……‘너희들’이라.”

눈을 돌리면, 그곳에 있는 건 침묵과 어둠 뿐.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축하한다, 울프헤딘. 너는 우리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나는 그때 이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어느 개새끼를 떠올리고 있었다.

***

잠에서 일어난 나는 물컵에 물을 따랐다.

─벌컥, 벌컥.

물을 들이켰지만 딱히 초조하거나 걱정이 앞선 탓은 아니었다.

‘더럽지만 나쁘진 않은 꿈이군.’

모르고 당했다면 좆 같기 그지 없었겠지만, 저 미래를 본 순간부터 멍청하게 당해준다는 선택은 없어졌다. 나는 차분하게 턱에 흐른 물을 닦았다.

‘지금 건 미래의 광경이다. 괴물이 수만 마리나 튀어나오려면 아직 멀었어.’

그 ‘살덩이’ 같은 밑준비가 필요하다고 쳐도, 저 숫자를 고작 몇 주만에 낳을 능력이 되겠는가. 난 조바심에 휩쓸리지 않고 턱을 쓰다듬었다.

‘……총혜신의 권능은 영감이라고 했지.’

미래를 보는 권능을 얻었다고 내 일이 바뀌는 건 아니잖은가.

예나 지금이나 대굴빡을 굴리는 건 내 특기다.

‘생각해 보자. 내가 예언자를 적으로 뒀다면?’

내게는 미래를 예지하는 힘이 없는데, 적들만이 내 계획을 모조리 앞질러 본다면?

어떻게 그를 상대하고, 어떻게 이겨야 할까.

고민의 답을 내리려면 무엇이 ‘승리’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옳다.

우직하게 힘으로 밀어붙이자니 능력 부족.

지혜를 쥐어짜봤자 예언자를 상대로는 불리함의 극치다.

계획이라는 건 복잡할 수록 무너지기도 쉬우며, 반대로 간단명료할 수록 힘이 뒷받침되야만 했다. 탁상공론이 현실미를 띄면 띌 수록 강한 예언자는 그걸 짓뭉갤 수 있다.

사색의 시간이 몇 시간이고 흘러갔다.

초월자의 체력으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던 나는 문득 중얼거렸다.

“……‘본다’는 게 곧 안다는 뜻은 아니지.”

1000년도 넘게 역사상 가장 강대했을 예언자와 함께 했던 신이다. 예언이 작용하는 방식의 레퍼런스는 차고 남을 것이었다.

식어버린 안주를 간식 삼아 씹으면서 나는 헤니르의 목적과 행동 예상을 몇 개로 나누고서, 그것들을 현실성 순으로 필기하며 정리했다.

“다녀왔습니다!! 이야~ 지쳤다 지쳤어!!”

어느덧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존나 시끄러운 목소리가 째지게 울렸다.

분명 방음이 좋은 여관인데 말이지. 나는 적던 필기를 마무리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반질반질한 로키가 우다다다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오, 물주님 안녕! 덕분에 잘 놀았어!”

“공양물이라고 생각하고 축복이나 내려주셔.”

“만언신의 축복은 이미 받았으면서! 이건 굳이 따지자면 후불결제지!”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로키는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방으로 달려갔다. 손에 든 주전부리를 보면 먹을 거라도 챙겨온 모양이었다.

나는 베로니카와 티르시에게 말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즐길 만 했어요?”

“네. 좋은 여가였어요.”

“조만간 그대도 같이 가자꾸나. 즐길 거리가 꽤 많았느니라.”

즐거워 하는 아내들을 보자 나도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그런데 베로니카는 내 얼굴을 보더니만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눈치도 빠르셔.

“노르드. 잠깐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네? 아, 예.”

베로니카보다 먼저 말을 꺼낸 티르시에게 눈을 돌리자 그녀는 조금 걱정스러워 하는 눈치로 꽤나 놀라운 사실을 전했다.

“로마니아 동부에서 몬스터가 범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그렇군요. 알 만 하네요.”

이만큼 당당하면 차라리 호감이네. 개 같은 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