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95화 (893/1,009)

“이 바보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나 보네.”

전투자세를 유지하면서 로키가 말했다.

바보라니 너무하는군. 확신을 얻을 수 있도록 몇 개나 되는 분기와 유도심문, 그리고 거짓말 탐지-로키까지 동원한 내 노력을 뭘로 보고.

내가 입술을 내밀건 말건 로키는 용암이 흐르는 벽을 가리켰다.

“네 계획 중에 뭐가 성공해도 이 섬이 폭발하는 미래는 바뀌지 않겠지. 그러니까 네게 헛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우리의 일이야.”

“……헛짓거리?”

헤니르가 말했다. 이 잠깐 사이에 표정이 전부 사라진 그 새끼는 마치 매미 껍질처럼 무기질적인 유기물로 만들어진 동상 같았다.

식은땀에 젖은 그녀의 손가락이 실을 뿜었다.

“뿌리를 타고 도망쳐서, 네 도착을 기다리는 그 황자 놈에게 가는 것.”

맞다. 헤니르가 뒤지게 대굴빡을 굴려서 귀찮은 블러프를 깔아댄 이유가 그거니까.

“다 끝났어, 헤니르. 네가 진 거야.”

로키는 한때 가족이었던 헤니르에게 호소하듯이 말했다.

“모르지는 않잖아. 오딘 언니 외에 자기 힘으로 예지의 권능을 깨우친 건, 신과 인간을 통틀어서 저 아이 뿐이란 거.”

“……그래서?”

“권능은 ‘발현하는’ 게 아냐. ‘발현시키는’ 거지. 미래를 읽는 권능을 얻었다는 건, 저 아이가 다른 누구보다 앞일을 예측하는 데 뛰어나기 때문이야.”

그녀가 호소하는 말의 진의가 전해진다.

만언신의 권능일까. 아니면 거기에 담긴 마음의 힘일까.

─힘으로도, 지혜로도 네 패배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웃는 듯한 말로 들리는 건 아니었다. 로키는 정말로 이제 그만해주길 바란다는 것처럼, 끔찍한 꿈을 꾸는 의남매의 체념을 촉구했다.

“……아니, 아니! 아직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게도, 그걸로 꺾일 생각머리가 있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폭발하듯 융기하는 근육과, 신체로부터 치솟는 권능의 힘. 그럴 줄 알고 있었던 나는 즉시 붉은 벼락불을 뿜어내며 짧은 예지를 켰다.

─파츳!!

놀랍게도 예지에서 헤니르는 이미 번개를 피한 뒤였다.

벼락불을 뿜기 전에 먼저 예지를 봤어야 했나? 아니, 그래봤자 피했을 것이다. 나는 예지 그대로 이뤄지는 광경을 무시하고 다시 마나를 끌어내며 예지를 연발했다.

─키잉!!

이해도가 높아진 권능의 흐름이 미래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읽어냈다.

나는 로키 쪽에 【엘든 링】의 벼락불을 뿜고, 그녀를 낚아채서 위로 뛰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화산 지하의 용암지대는 출력단자가 부숴진 모니터처럼 숭숭 구멍이 뚫렸다.

공간을 처먹는 흰개미들이 깽판을 치고 갔다고 말한다면 곧이 곧대로 믿어버릴 듯한 상황! 나는 그 치명적인 공간 절단을 피해냈다.

“쏴 버려!!!”

내게 방해되지 않도록 실을 허리에 묶은 로키가 외쳤다. 나는 혀를 찼다.

“쉽지 않음.”

권능을 폭주시킨 무질서적인 차원 붕괴!

노르드 죽이기 아이디어 공모전과 비교해도 꽤 상위권에 랭크 인 가능할 듯할 기술이었다. 거의 우승 후보에 노미네이트해도 될 것.

예지로 읽고 대처하기 힘들다.

미래의 나랍시고 저 혼돈 파괴 망각에 돌격해서 뚫고 나갈 킬각이 나오겠는가. 3초 후의 나는 아직 밍기적대고 있다.

“무너져라!! 저 얄팍한 하늘을 두고 벌인 눈치 싸움을, 내 손으로 끝내주마!!”

우리가 아닌 누군가에게 외치는 것 같은 포효!

공간에 난 벌레구멍은 종이에 달군 쇠를 갖다대 긋는 것처럼 차원을 찢어갔다. 그 찢어진 구멍을 통해서 튀어나온 검은 물체가 나를 덮쳤다.

─화륵!

당연히 눈길도 주지 않고 벼락불을 휘둘렀다가 회수.

“KKK!!”

털이 달린 벌레가 용암 호수에 빠졌다. 빠지기 전부터 하반신이 날아가 있었으니까 착륙 지점을 착각한 걸 아쉬워 할 건 없을 것이다.

“저 벌레……?”

낯익은 벌레다. 이계의 털복숭이 벌레였다.

“【차원을 헤매는 것】……?! 울프헤딘! 헤니르 자식이 차원장벽을 찢었어!!”

로키가 다급하게 외쳤다.

“연결한 게 아냐!! 세계수의 차원을 찢어발겨서 이계의 공간이 역류하고 있어!!”

“그게 뭐가 안 좋은데?!”

“사티스를 만났다며!! 오랫 동안 우리들의 유지, 보수를 못 받은 세계수의 차원에 구멍이 열렸다간 인간 세상과 이계가 뒤섞일 거라고!!”

“그때 들었던 그건가!”

사티스가 에퀴녹스와 그 애비를 미리 죽여놓지 못했던 이유!

수렵신 사티스가 인간 세상에 개입하면 하늘이 무너지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녀가 밤하늘이 쏟아져서 땅을 물들이는 비전을 보여줬던 것도.

“근데 니들은 잘만 깽판 쳐대고 있잖아! 너희도 신 아니냐?!”

“우리는 【중간 가지】 안에 있으니까 그렇지! 라그나로크에서 살아남은 신들이 바깥에서부터 이 차원에 손을 뻗으면 오크가 비눗방울에 손을 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과연, 이해했다.

비유하자면 지금의 인간 세상은 지진으로 문이 잔해에 깔려버린 건물이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잘못 치우면 지지기반이 사라져서 생매장될 수 있다던가.

라그나로크 발생 전에 이미 들어와 있던 신들은 별로 문제가 없지만, 그 당시 건물의 바깥에 있던 신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문은 막혔고, 잔해를 치우면 건물이 붕괴된다.

사티스가 자신의 신도의 폭주와 타락을 지켜만 봐야 했던 연유였다.

“라그나로크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은 거의 전부 예언의 때에 ‘밖’에 있을 운명이었던 녀석들이야! 얼마나 살아남았는지는 몰라도──”

고함치던 로키가 갑자기 말을 늘어트렸다.

그렇지만 나는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내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손?”

차원이 뒤섞이는 혼돈의 공간을, 마치 물에 탄 물감을 걷어내려는 것처럼 휘젓는 손길들! 남자의 굵은 손도 있고 여성스러운 손길도 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신들인가?’

로키가 로마니아에 축복을 내려댈 때랑 비슷한 신들의 손길이었다.

“역시 지켜보고 있었느냐!! 결단할 배짱도 없는 패배자들아!!”

눈에 안 보이는 뭔가를 힘으로 뜯어내는 것처럼 악을 쓰던 헤니르가 으르렁댔다.

“썩은 과일이 홀로 회복하기를 바라는 천치들! 이미 【중간 가지】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썩고 말았다! 거기서 손가락만 빨고 지켜본다고 나아질 성 싶으냐!”

─웅웅웅웅웅!!!!

분노하듯이 손들이 떨렸지만 헤니르가 팔을 휘두르자 몇 개의 손이 피를 쏟아냈다. 큰 손가락이며 손목은 땅에 떨어지자 사람만한 크기로 돌아갔다.

“이 차원을 포기해라!! 무너지는 하늘을 받치는 우행은 멈추고, 【중간 가지】를 잘라내라!! 그런 뒤에 혼돈의 정수를 품지 않은, 신족들의 차원을 다시금 창조할 때다!!”

“헛소리 하지마!! 죽다 살아난 신들 몇 명으로 세계수 창조 때 같은 일이 가능할까 봐?!”

내가 공간을 살피고 있자 로키가 외쳤다.

“불가능할 리 있나!! 울프헤딘이 살던 신인류의 세상도 그렇게 만들어졌어!!”

“윽……!”

“가지치기의 일환이다……! 썩은 과일과 가지를 쳐내고 다음 과일을 맺게 해야 해!! 하물며──!! 저 오염을 일으킨 진드기들에겐 구제의 여지조차 없다!!”

─쿠구구구궁!!!

가공할 노호성을 터트린 헤니르가 그 진드기의 대표라도 보는 눈으로 날 꼬라봤다.

“좆 털린 놈이 뭘 꼬라 봐? 듣는 기생충들 기분 더럽게.”

“너도 지금 헛소리 할 때야?! 부탁하는 처지에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저걸 안 막으면 인간들이 감당 못할 이계의 존재들이 이 세계에 상주하게 될 거라고!!”

“뭔 소리야? 퍽이나 그렇게 되겠다.”

나는 거대한 위기에서도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 세상의 신들도 저지하고 있어. 헤니르한테 네가 우려하는 사태를 일으킬 여력은 안 남았고. 목표를 이룰 마지막 카드를 여기에 던질까.”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저 새끼의 노림수는 뻔할 뻔 자였다.

‘레벨리오 황자 놈에게 신좌를 보내려는 거다.’

나한테 좌표를 들키지 않게 차원을 일그러트린 것일까. 계획의 전모를 들켰기에 더는 날 상대로 싸우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기지도 속이지도 못하면 붕괴한 계획을 억지로 이어가는 것밖엔 없겠지.

─파직!

“끄윽……!!”

내 눈은 자재신 리베르타스의 권능으로 도주를 꾀하는 헤니르를 가로막았다.

반사까지 성공했는데 텔레포트 방해 정도야 못 할 이유가 없잖은가?

“울프헤딘……!!”

“슬슬 이름으로 부르지? 줄여 부르지만 말아줘.”

내 미소에 눈에서 튄 스파크를 억누른 헤니르는 이를 갈았다.

‘리베르타스의 권능으로는 튀지 못할 테니, 남은 방법은 한 가지.’

헤니르가 가진 공간이동 능력 중 차원 이동과는 모색이 다른 워프.

세계수의 뿌리를 타고 움직이는 총혜신의 힘.

─휙!!

우리들은 동시에 저 용암 바다에 잠겨있는 세계수의 뿌리를 눈에 담았다.

나도 저 개자식도 공간을 이동할 수가 없다면, 이 결전의 행방을 좌우하는 갈림길은 누가 먼저 뿌리에 도달하느냐에 달렸다.

다시 말해,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의 육체와 다릿심 뿐!

“로키!! 너, 남은 마나는 얼마야!!”

“내 몸은 알아서 지킬게!! 가!!”

말귀가 빨라서 살았다. 나는 즉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발휘했다. 권능과 마법, 무예를 총동원한 대쉬였다.

“흡!!”

나보다는 느린 헤니르도 어드밴티지는 있었다. 차원을 찢어서 내 앞길을 방해하고, 나보다 조금 더 세계수의 뿌리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수르트하살법 흉내내기!!”

붉게 물든 〈정화의 벼락불〉을 뿜었다. 헤니르 새끼가 권능으로 튕겨냈다.

살짝 좋지 않았다. 짧은 예지에선 5초 뒤에 저 새끼가 먼저 세계수의 뿌리에 손을 가져다대는 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마나를 길게 뽑아냈다.

“이상해씨(Doctor Strange)!! 엘드리치 채찍!!”

야수회귀의 마나를 채찍처럼 뽑았다.

뻗어낸 채찍은 네페르티티를 흉내내서 헤니르의 팔목을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도망쳤다간 나를 데리고 황자 놈한테 가는 꼴일 것이었다.

절단하는 시도는 시간 낭비다. 헤니르는 발상을 전환한 듯 멈추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내가 붙잡혀도 신좌만 보내면 그만이다!!”

찌지직…!!

팔뚝을 잡아당기는 힘을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초인적인 근력으로 버티는 헤니르.

근육이 찢어지고 팔뚝이 뜯겨나가도, 미친 신은 피눈물을 쏟아내며 나를 잡아끌었다.

“네가 죽어도, 메르키스가! 레벨리오가! 라한과 예르나의, 아슈카트와 헤스트르의 꿈을 이어받아 해낼 것이다!! 오만과 독선에 젖은 인간들이 없는 세계를 이룩해낼 것이야!!”

─텁!!

팔이 거의 찢어진 헤니르는 기어이 뿌리에 손을 얹었다. 헤니르의 신좌가 뿌리를 통해서, 세상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을 부하들을 찾아헤맸다.

“너희들에게는 세계의 영장으로 군림할 자격이 없을지니!!”

벼락불을 정통으로 맞은 헤니르는 시꺼먼 재를 피처럼 토해내며 외쳤다.

“이 우주에서 사라져라, 우리들의 과오여──!!”

─꿀렁! 눈으로 보일 만큼 선명한 신좌가 뿌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어둠이 늪처럼 범람하고──

다음 순간, 찢겨져나가는 차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레벨리오?”

황망한 표정을 지은 헤니르가 세계수의 뿌리에 정신이 팔려버린, 바로 그때였다.

─아, 아아. 여보세요? 들리니? 나야, 오델리아.

내 속주머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여성스러운 억양이 메달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여기는 모험가 길드와 아우렐리우스 기사단. 타타르니아 엘프들 덕에 레벨리오 황자와 안대를 낀 신족을 찾아냈다.

오델리아의 말투를 흉내내는 발퀴리에는 짧고, 굵게 설명했다.

─따라서, 현 시간부로 전투에 들어간다.

레벨리오 황자가 신좌를 받아가지 못한 이유를 말이다.

‘엘카, 고녀석. 편지 심부름 한 번 잘 하네.’

악귀처럼 일그러지는 헤니르의 낯짝을 보며, 난 해맑게 웃었다.

끼리리리릭…!!!!

마나 로프를 당겼다.

오른 주먹을 쥐며── 발을 내디뎠다.

“뭉게뭉게──!!!!!”

신도 때려죽일 악력이 압력으로 빛을 굴절시켜 검게 가라앉았다. 땅을 쪼개는 진각을 딛고 양손 주먹을 빛처럼 가속시켰다.

이를 악문 헤니르는 낚시찌에 걸린 해양 쓰레기처럼 마나 로프에 딸려오고.

“──총살타!!!!!!”

─으적!!!!!!!

헤니르의 안면에 제대로 꽂힌 주먹은 아랫턱과 목에서 뼈를 부수는 소리를 터트렸다. 뒤로 크게 튕겨져 날아간 헤니르를 다시 로프로 끌어당겼다.

─두두두두투다다다다다다다!!!!!!!!

찢겨져나간 차원의 중력이 부유섬처럼 지반마저 부상시키는 초현실적인 무대에서, 나는 갖가지 신비와 권능을 전부 잊은 듯 순수한 주먹을 끝없이 내질렀다.

팔뚝을 부수고 갈비뼈를 으깨며 틀어박힌 수십 번의 주먹이 피를 흩뿌렸다.

무력화된 적의 육체가 공중을 날았다. 내질렀던 주먹을 전신을 뒤틀며 회수하고, 발도하는 것처럼 팔뚝에 감아뒀던 브류나크를 쥐었다.

발휘하는 기술은, 내가 가장 먼저 깨우친 나의 고유한 절기다.

무예의 빛이 무수한 반월처럼 펼쳐졌다.

무무역역무(武無亦力無)

성성만금(星成萬禽)

촤아아악─!!

6개의 휘광이 솟아오르는 혼돈의 왜곡에서, 내 창이 옛 신의 심장을 꿰어 매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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