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97화 (895/1,009)

초월자들이 냉소를 교환하며, 고조된 분위기에 토벌군이 싸움의 시작을 직감했을 때.

─채채채챙!!!!

적과 아군을 나누는 빈 공간이 번뜩이며 금속의 광채가 터져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자초지종을 제대로 이해한 건 몇 명 없었다.

〈……칫!〉

메르키스는 그중 한 명이었다.

눈을 가린 그녀지만 감각은 남들보다 뛰어나다. 레벨리오가 기습적으로 검기를 날렸지만 오델리아가 받아쳤던 것이다.

─파츳!

차갑고 살의를 뿜어내며 3인 3색의 마나가 형형색색으로 산란(散亂)했다.

『이, 이게 서방대륙의 검성의 힘……!!』

타타르니아의 하프 엘프, 샤오라이는 강자들의 서슬 퍼런 싸움에 오싹해졌다.

고향에서도 기담(奇談)처럼 전해지는 초월자의 경지! 경악스럽게도 그 강함엔 과장 하나 없었고, 범재들의 어설픈 상상력으로 퇴색된 이야기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채채채채챙!!

투투투투쾅─!! 콰르르르르륵─!!!

색과 색의 부딪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전투는 흡사 저들이 살아가는 시간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길다는 것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검을 튕겨내고 발사한 마법이 오러를 부순다.

괴물보다 괴물 같은 근력이 해방되자 땅바닥이 얇은 판떼기처럼 튕겨져서 날아간다. 비산하는 돌 파편은 사람 머리보다 컸다. 칼날이 스친 공간이 날카롭게 베였다.

별의 자손과의 전투까지 겪고도 아직 아름답던 왕성이 폐허처럼 변해갔다.

〈이렇게 남의 집을 부숴놓으면 쓰나요.〉

보는 이들은 숨을 고를 틈조차 없는 싸움에서도 키아라는 말을 뱉을 여유가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한순간조차 열 조각으로 나눠서 20번의 기술을 교환하는 자리에서 키아라는 허벅지에 장비한 결계 유물에 손을 가져갔다.

〈이 도시가 히타이트 사람들의 유산이라면, 이 유물은 그들에게 받은 선수금이겠군요. 이어받은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쓰는 게 옳겠습니다.〉

─휙휙휙! 발차기의 반동으로 뛰고서 착지하는 키아라.

카네쉬를 조사하면서 얻은 유물은 많았고, 그중에서도 그에게 유용할 듯한 유물을 의뢰의 보수로 받았다. 마나를 불어넣는 걸 본 레벨리오가 즉시 권능을 끌어냈다.

〈경솔하시군요, 황자!〉

오델리아가 검을 상단세로 들었다. 저지하려는 시도였지만 무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원소선경(Terminus Elementorum)

절계(絶季)

차원을 가르는 절기가 뿜어졌다. 레벨리오 대신 메르키스가 리베르타스의 권능을 끌어모았다. 그 순간 그녀의 가려진 눈이 움찔했다.

신에게도 범접하는 일격이 메르키스가 펼쳐내는 꽃 모양의 방패를 후려쳤다.

〈크으으으……!!〉

─카가가가가가각!!!

불똥을 튀기며 오델리아의 필살검은 방어를 베어냈다.

레벨리오는 그 틈에 달려드는 키아라에게 열댓 번의 참격을 날려주며 눈치챘다.

역시 헤니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이때 헤니르가 차원을 찢으면서 신들의 개입을 막고 인공신좌를 쥐어짜고 있단 것까지는 몰랐다. 노르드가 그 최후의 발악을 뚫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신이 내려주는 권능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전해졌다.

시간 제한이라는 족쇄는 일방적으로 그들에게만 걸려 있던 것이다.

〈……빠르게 결착을 지으면 그만인 일!!〉

레벨리오는 눈을 부릅뜨고 의식을 집중했다.

〈메르키스! 방해가 들어오지 않게 하십시오!〉

〈예!〉

설계부터 동격의 초월자와 전투하는 걸 고려한 전투요원이 아니었기에, 메르키스는 그의 지시에 바로 물러났다. 그녀가 가진 2쌍의 손이 토벌군을 겨냥했다.

〈운명의 변곡점은, 반드시 말소합니다!!〉

메르키스에게서 빛나는 정령들이 태어났다.

그녀는 헤니르를 따라 신세계에 평화로운 자연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의 신족이었다.

─번쩍!!!! 9체의 정령들이 사방을 수놓았다.

급조한 정령들에게 초월적인 강함은 없었지만, 인간 몇십 마리 정도는 아무 문제 없다.

며칠 내내 온 힘을 다해서 만든 광휘의 정령은 헤니르의 새로운 아이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졌을 정도였다.

시간과 재료만 충분하면 가슴에 봉인한 불꽃의 정령으로 섬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다. 그녀가 낳는 자연의 화신들은 살아 숨쉬는 재해인 것이다.

〈가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기사단일 텐데요!〉

평정을 흐트러트리는 질문에 오델리아는 코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다! 나의 기사단이지! 마스터 클래스인 나와 같이 싸워온 기사단! 내가 싸울 때 짐덩이나 되도록 가르친 적은 없어!〉

경칭마저 내려놓은 그녀의 외침은 기사단원들의 귀에도 닿았다.

〈아우렐리우스 기사단!! 위치로!!〉

주군의 촌평을 들었냐는 듯 단장이 외쳤다.

〈공투진형 제 1검!! 휘둘러──!!〉

기사 10명의 검이 합을 맞춰 검무를 추었다.

불은 뭉치면 거대한 불꽃이 되고, 바람은 함께 불면 돌풍이 된다. 원소선경의 깨달음은 기사단의 개개인에게 뼛속까지 새겨져 있다.

─화르르르르륵!!

제 1진의 기사들이 한 몸이 되서 거대한 불꽃의 참격을 펼치고, 곧바로 이어서 제 2진의 기사들이 아르마알스 비검 기사단처럼 참격을 날려보냈다.

─서걱!!

9개의 정령들은 딱 그 숫자만큼의 합공기 앞에 참살당했다.

아우렐리우스 기사단의 자랑인 공투진형이다.

『마나 성질이 닮은 이들끼리 상승작용을 노린 진형이군.』

마흐잔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두려운 강적임에는 틀림없지만, 꼬리를 말고 떨고 싶어서 이런 먼 타향까지 칼을 꼬나쥐고 온 게 아니다.

『우리도 질 수는 없지!! 기마, 소환!!』

『소환!! ᛦ(Yr)!!』

우람한 뿔이 달린 사슴을 불러낸 기마병들은 그 사슴을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올라탔다. 그리고는 왕성의 실내를 야만스럽게 질주했다.

〈건방진 것들……!! 죽는 그 순간까지,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어요!!〉

메르키스는 창조능력을 계속 발휘했다.

일렁일렁….

그러나 태어난 정령들의 용태가 이상했다.

태어난 정령은 광휘를 띠지 못하고 도깨비불처럼 일그러진 빛의 분류로 되돌아갔다.

〈……이까짓 거!!〉

의문보다 앞서서 손가락으로 수인을 맺으면서, 그녀의 약체화를 노리는 룬 마법을 받아쳤다. 네 개의 손가락이 기괴한 모양을 자아냈다.

빛이 섬광탄처럼 터져나오며 기사들을 쬐었다.

〈크아아아아악!!!〉

아우렐리우스 기사단과 타타르니아 기마대에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인원이 속출했다. 갑자기 발생한 광원은 그들의 갑옷을 달구고 드러낸 맨살을 고온으로 지져버렸다.

평범한 병사, 기사들의 전투수행능력을 높이는 진형은 결코 전쟁의 주역이 될 수 없다.

그건 달인 이상의 강자들에게는 군소 약자들의 잔재주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르키스가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신족이라지만, 그런 그녀라도 정면에서 막으려면 최소한 미스릴 급의 기예나 강고한 방어력은 필수불가결했다.

〈팔레스의 권능을 막은 건…… 당신입니까!〉

살갗이 하얗게 바짝 타버린 적들을 흘겨보면서 메르키스는 외쳤다.

〈……시여. 죄없는 이들의 피와 살 대신 저의 것을 가져가시되, 이 한 목숨을 당신의 어전으로 데려가시어 영광 주심을 바라나이다.〉

얼굴에서 고장난 분수기처럼 땀을 쏟아내면서, 방언 같은 주문을 외우는 여인!

생구신 교단의 성표를 쥔 에스메랄다는 주문을 외웠다. 그녀가 억지를 부렸는데도 참전하는 것을 허락받은 원인이 그 손에 있었다.

한때, 고대에 어느 흑마법사가 악귀를 불러내는 의식을 이뤘을 때. 아무 능력도 없이 신앙심만이 지고지순했던 소녀가 일으켰다는 기적이다.

훗날 성녀로 추대받는 소녀가 교단에 기증했던 성표!

생명의 탄생을 막는 힘을 가진 성유물이었다.

오직 어떤 강함도, 능력도 없는 무구한 소녀의 손에서만 이 성물은 효과를 발휘한다.

〈……이 힘이 저희가 훔친 인간의 권능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낮게 뇌까린 메르키스는 수인을 맺었다.

〈가소롭기 짝이 없군요! 귀 기울여 들을 것도 없는 방만한 주장일 따름! 인간들이야말로 신들이 창조한 세상을 약탈한 기생충이 아닙니까!!〉

쏴아아아아아─.

빛이 가라앉고 어둠이 일어났다.

흑마법과도 구분지을 수 없는 폭력적인 마나가 용솟음쳤다.

〈당신들의 목숨도! 그 목숨을 바쳐 만든 모든 소유물들까지도! 마땅한 주인에게로 돌아갔을 뿐! 우리의 신군에게로……!! 신세계의 밑거름으로!!!!〉

어둠이 널을 뛰며 천장과 바닥을 덮고 쏜살같이 다가왔다.

왕성의 무너진 파편들이 바스라지며 빨려든다. 중력과 그림자를 섞은 대마법이었다. 급하게 빛의 검을 휘두르는 기사도 있었지만 어둠을 밝히기엔 턱도 없었다.

─촤악!

그때, 어쩔 방도도 없는 이들의 머리 위를 어떤 여인이 뛰어넘었다.

뱀 같은 세로 동공. 양팔에 드러난 황금색 비늘.

아즈테카의 스콜라키체인가? 아니다. 입은 옷은 바이츠니아 황족의 도포였다. 키가 작은 여인은 큰 동작으로 숨을 들이켰다.

─쓰우우우우우웁!!!!

공기를 들이키는 절제없는 용력에 바람이 불고.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보석 같은 비늘과 입에서 빛의 숨결이 뿜어졌다.

모든 어둠을 걷어낸 브레스는 승리를 확신했던 메르키스를 강타하고, 그녀의 훤히 열린 앞섬에서 자랑스럽게 빛나던 보석을 깨트렸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심장이 부숴진 듯한 아픔에 메르키스는 아픔이 서린 비명을 내질렀다.

【아까부터 입을 여실 때마다 품격이 점점 떨어지시는군요.】

용인 소녀는 게르마니아의 언어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신이라는 것들에게는 좋은 기억이 없으니, 장광설은 그쯤 해 주시죠.】

바이츠니아 황녀이자, 우신 토나슈일루카틀에게 바치는 제물이자 무녀로서 다시 탄생했던 드워프 혼혈. 진련국 제 8황녀, 리앤 메이링이었다.

【숙부님…… 아니, 묵련제 폐하께서는 냉정한 분이셔서요. 유이링을 위해서라도, 저는 이곳에서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답니다.】

귀국한 그녀들은 노르드의 도움으로 타타르니아 엘프들과의 임시 동맹 체계를 맺었다.

덕분에 그녀와 유이링은 내전 중인 조국에 귀환하고도 목숨을 구사일생했다.

단, 이건 어디까지나 근시안적인 해결안이다.

메이링이 타타르니아의 복수혈전에 참가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새롭게 즉위한 바이츠니아의 황제에게 이 ‘힘’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였기에.

【저주받은 힘이기에 더더욱, 저는 이 더럽혀진 혈통을 만민이 숭배하고 우러러보는 진련국의 자긍심으로 만들어 보이겠어요.】

서방대륙의 강대국과 외교를 트고 타타르니아와 맺은 동맹을 돈독히 한다.

다시 돌아온 동생과의 행복한 나날을 위해서.

그리고 그 행복을 되찾아준 남자에게 진련국의 답례를 보이기 위해서.

리앤 메이링에게 이 싸움의 가치는 그것이었다.

우신의 식인 제국에서 인간의 추악함과 이승에 강림한 지옥도를 보며 연명했던 1년.

역경과 결핍을 딛고 옥석에서 취옥으로 거듭난 하프 드워프는 우신의 무녀로서의 힘을 거침없이 뿜어냈다.

【■■■■■■──!!!!】

그것은 뛰어난 기술이라곤 없는 야만의 외침이었지만, 그래도 확고한 용의 포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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