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의 식인 제국에서 인간의 추악함과 이승에 강림한 지옥도를 보며 연명했던 1년.
역경과 결핍을 딛고 옥석에서 취옥으로 거듭난 하프 드워프는 우신의 무녀로서의 힘을 거침없이 뿜어냈다.
【■■■■■■──!!!!】
그것은 뛰어난 기술이라곤 없는 야만의 외침이었지만, 그래도 확고한 용의 포효였다.
〈좋네요.〉
키아라는 자신과 닮은 포효에 싱글벙글 웃었다.
〈역시 울프헤딘 경이십니다. 제 꿈이 한 발 더 가까워진 기분이에요.〉
리앤 메이링의 혈통이 가치를 인정받는다 해도, 그녀는 보통 인간과의 자손을 보기는 어려울 터. 우신의 혈통이란 그런 것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신의 혈통을 짙게 잇는 하프 드워프 정도일 것이다.
모험가 길드 연합의 총장 정도면, 황녀 상대로 크게 꿇리지는 않지 않겠는가?
〈아하하하하하하!!!〉
오델리아는 전투 중에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큰 웃음을 터트렸다.
〈나이 차이를 생각하지 그러니! 저 어린 애가 불쌍하잖아!〉
〈물론, 누구를 사랑할까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매우 멋진 일이죠.〉
레벨리오의 검을 막은 키아라가 천장을 디뎠다.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한, 신분 차이를 극복한 사랑. 아주 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리고 드디어, 기회를 붙잡았다.
─찰칵!
오매불망 기다리던, 유물을 발동할 기회를.
왕성 천장을 딛고 쏜살처럼 미끄러진다. 검으로 요격하려는 레벨리오를 오델리아가 막았다. 차원 연구를 선도하던 히타이트의 유물이 발동한다.
키아라가 애용하는 〈암막 결계〉를 주축으로, 차원이 확장했다.
〈……마무리라면 저 또한 바라던 바!!〉
흉맹한 힘을 품은 육신을 낮추며 레벨리오는 두 강적을 동시에 척살할 기술을 준비했다.
달인끼리의 싸움에서는 자신의 특기이자 절기를 맞추기까지의 응수가 싸움의 핵심이었다. 치밀한 속임수와 공방에서 빈틈을 억지로 발생시키는 힘.
그게 곧 달인의 강함이다.
시간이 있다면 레벨리오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끝을 낸다.’
레벨리오는 용골검을 하단으로 당겼다. 시간은 촉박하지만 없는 것에 불평하기에는 그의 삶을 좌우했던 우여곡절이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건곤일척, 혹은 육참골단.
뭐라고 불러도 좋다. 끝을 지을 때다.
차원벽을 형성하는 어두운 암막에서 황자는 이 삶에 종지부를 찍을 각오를 다졌다.
이겨서 신세계의 태초신이 되는가. 패배하고서 인간 황자로서 죽는가.
이곳은 그 분수령이다.
〈헤니르 님…… 헤니르 님, 헤니르 님, 헤니르 님!!!!!!〉
그리고, 자폭용 마나를 봉인해두는 보석을 잃은 메르키스도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렀다.
자폭이란 결말은 절대로 사양이다. 살아남아서 신의 곁에서 영원토록 그를 보필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올바르게 정립된 세계에서 만물의 어머니가 되고 말리라.
거의 찢어진 안대를 붙잡고 메르키스가 전신을 폭염으로 불살랐다.
【이 육신, 아무리 추해진다 한들! 삶도 죽음도 기필코 당신의 곁에서──!!!!】
메이링은 증오를 선혈처럼 뽑아내는 신족을 보면서도 침착했다.
이 정도의 열기가 왜 두렵겠는가. 그녀가 갇힌 제단에서 하루가 머다 하고 피어올랐던 ‘요리용 불꽃’의 끔찍함에는 전혀 못 미친다.
그 불로 만든 ‘요리’를 제물로 받던 ‘하늘을 덮는 태양’의 두려움에도 말이다.
─주르르르르륵!
콸콸콸콸콸….
선혈처럼 뿜어지는 검붉은 액체는 어떤 정령의 태어나다 만 태아일까.
죽은 정령들을 창조하고, 그 마나를 토대로 큰 마법을 발동하려 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계속되는 산모의 사산과 같았다. 황야의 생존투쟁에 익숙한 엘프들도 헛구역질을 참기가 힘들었건만, 메이링은 눈썹 한 번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마흐잔 씨. 샤오라이 씨. 한순간만 저 악신의 마법을 받아쳐 주시겠어요?】
【……못 하겠다고 빼지는 않겠소. 혹시나 이것으로 동료의 영전에 가더라도.】
【그만. 잡설이 길어요.】
마흐잔의 결심을 잘라 끊은 그녀는 세로 동공을 좁혔다.
【살아서, 이깁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해드리겠어요.】
눈을 끔뻑거리던 마흐잔은 금방 히죽 웃었다.
〈……기사단 제군!! 협력 바라오!! 처음 한순간, 몇 초만이라도 함께 막아주시게!!〉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전투 가능한 기사들은 화상에 문드러진 손으로 검을 쥐었다.
등 뒤에 펼쳐진 암막이 걷혔을 때, 매일 그랬던 것처럼 당당히 그들 앞으로 나타날 주군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황녀란 신분도, 참, 편하지만은, 않네요……. 잃고 나서야, 보이는 것도……〉
목을 타고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에스메랄다는 다시 주문을 외웠다.
성스러운 성유물은 부족한 신앙심을 대신해서 이 기적의 값에 비견될 그녀의 수명을 요구했다. 억지로 가불받은 기적의, 당연하기까지 한 요금이었다.
생명이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성물.
교단이 오늘까지 봉인했던 것도 당연한 끔찍한 힘이었다.
하지만 이 힘으로 어느 소녀는 사람을 구했다.
어떤 힘도 믿음도, 다루는 사람에게 달린 것.
〈그러니 제게, 오라버니를 막을 힘을……!〉
쏟아지는 땀에서 투명함이 사라지고, 점성 높은 붉은 피로 바뀌어가도.
온몸의 모공에서 흘린 피가 바닥을 적셔도, 두 눈을 뜨고 에스메랄다는 기도했다.
─투확!
성물의 빛이 드디어 정령의 탄생 자체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더는 의미가 없다는 걸 눈치챈 메르키스는 무아지경의 한가운데에서 마법을 발동했다.
【천락(ᚢᛈᛈᚺᛁᛗᛁᚾᚾ)!!!!】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내리는 구름의 파편은 각기 태산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거의 상공 수천 미터에서 떨구는 질량폭격이나 다를 게 없는 천재지변이었다.
〈바람은 표표히 흐르매, 하늘 아래 가지 못할 곳이 없고.〉
【죽음은 시체를 창백하게 만드니(Bǫl gørver nán fǫlvan).】
아우렐리우스 기사단과 타타르니아의 기마대는 그 구름의 흐름을 간파했다.
그럴 수밖에.
자연과 함께하며, 자연을 극복한다. 국경과 황야의 대자연과 동고동락하던 그들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들의 검이 마나를 휘감았다.
〈불꽃은 젖은 재와 흙을 바람에 실으매, 대지 위에 하나 아닌 것 없노라!!〉
【레긴은 지고의 검을 벼려냈다(Reginn sló sværðet bæzta)!!】
─촤촤촤촤아아아아아아악!!!
여러 줄기의 검풍이 합쳐지며 두 줄기가 되고, 다시 합쳐져서 일직선의 길을 만든다.
쏟아지는 태산의 무게를 흐르는 물과 바람처럼 흘려넘기는 놀라운 기술이었다.
하지만 해봤자 필멸자의 힘. 50명이 넘게 힘을 합친 것이었지만, 신의 천벌을 맞으면 2초 정도면 무너지고 말 통로다.
【날개는 없지만, 바람에는 ‘탈’ 수 있어요.】
메이링은 그 2초를 원했다.
그녀가 내딛은 용의 발톱이 바람에 몸을 실었다.
까드득, 우드드드득…!!
때를 같이 하여, 계곡처럼 깊게 확장한 암막의 차원벽에서도 키아라가 변이를 마쳤다. 150미터의 반지름으로 형성된 공간 왜곡의 무대였다.
추락하며 그는 날개를 펼쳤다. 그 권능, 스스로 이름 붙이길──
【원초 해방(Mochiuayotl Amotlaxtlauas)】.
─Hwuuuuuuuuuuuooooooooooooooo!!!!
권능을 발휘한 키아라의 신체능력은 노르드마저 뛰어넘는다.
어리석은 신의 혈통이 뿜어내는 폭력의 화신과 같은 압박감.
레벨리오는 용골검을 휘둘렀다. 그 용뼈 칼날은 드래곤을 죽이는 데 특화한 신물이었지만, 평범한 참격 1번에 저지될 키아라가 아니다.
가볍게 튕겨내고, 마차보다 두꺼운 손톱에 힘을 준다.
〈유언을 듣겠어, 레벨리오 황자!!〉
키아라의 뿔을 딛고 밑으로 점프한 오델리아가 절계를 준비했을 때였다.
〈제 강함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제후.〉
─챙!
레벨리오가 검을 검집에 수납했다.
〈이 영혼…… 어디에 있어도 신군과 함께!〉
─휴우으으으으으으으응!!!!
6종류의 권능이 시공간을 역주행했다. 휘둘렀던 참격이 역재생처럼 되살아났다.
─슈윽. 슈슈스윽.
1개는 2개로, 2개는 4개로.
─슈슈스슥!! 슈샤샤샤샤샤샤샥!!!
─슈샤샤샤샤샤샤샤샤샤샤샥!!!!
8개는 16개로. 32개는 64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참격이 공간을 지배했다. 입방 방어를 무시하는 테미스의 권능이 선보이는 살육 공간이 키아라의 머리와 오델리아의 온몸을 난자(亂刺)했다.
말 그대로 신화 속의 괴물과 영웅도 죽일 권능.
〈내게 검으로 도전하다니, 50년은 일러!!!〉
─Llllllllllaaaaaaaaaaaaaaaa!!!
그리고 신대엔, 파멸의 운명을 뛰어넘는 자만이 영웅이라고 불렸다.
─파츳!
인간 사이즈까지 수축한 키아라의 진체가 살육 공간을 날개짓 한 번에 빠져나왔다.
차원을 조작하는 유물은 그에게 아주 유용했다.
진짜 모습을 드러낼 공간을 얻을 때도, 그 몸을 사람끼리의 싸움에 적절한 사이즈까지 작게 만들 때에도 말이다.
─Laaaaaaaaaaaaaa!!!!!
키아라가 날개와 꼬리로 선풍을 일으켰다.
방해되는 참격이 튕겨져서 날아간다. 회전력을 활용한 그는 한계까지 당긴 용의 다리로 난폭하게 돌려차기를 날렸다.
─턱!
그 발바닥에 두 발을 맞댄 오델리아는, 우신의 힘으로 빛살처럼 발사되었다.
같은 순간, 메이링이 바람을 타고 메르키스에게 도달한 것처럼.
반드시 해치울 생각으로 여력을 남기지 않았던 그들에게 자기 몸을 지킬 방법은 없다. 레벨리오와 메르키스의 얼굴이 한계까지 일그러진, 그 찰나.
─콰직!!!
장타(掌打)가 메르키스의 두개골을 부수고.
─촤악!!!
아름다운 검섬(劍閃)이 레벨리오를 양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