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04화 (902/1,009)

그렇게 넓은 수도를 느긋하게 관광하고 다니던 우리의 눈에 띈 곳이 있었다.

─라벤나폴리스 미니카지노.

자그만 클럽 같은 곳이었다. 풍선까지 떠다니는 축제의 밝은 분위기와는 살짜쿵 어긋난 노름터다.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가 초월적인 감각에 잡혔다.

“합법 도박장이네.”

표현은 좀 듣기 그렇지만, 퇴폐업소는 아니다.

말이 도박이지 합법 PC방 같은 거다. 미드 같은 걸 보면 자주 나오는, 조명이 보라색이거나 하는 거기. 작은 바(Bar)가 있고 카드 게임도 하는 곳.

‘술집에서 카드 게임이나 갬블을 할 수 있는 곳 같은데.’

나는 팔짱을 꼈다. 이세계의 갬블은 거의 운에 맡긴 장르가 90% 이상이었다.

100미터 밖에서 던진 실로 바늘 구멍을 꿰뚫는 사람도 있는 세상 아닌가.

개인의 능력치 차이가 저 정도니 젠가처럼 신체능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놀이가 발달될 여지가 없었다. 기린이랑 팔씨름 하는 셈 아니냐고.

그러니 경마나 갬블처럼 운에 좌우되는 게임만 살아남을 수밖에.

확률의 주사위는 마스터 클래스한테도 동네 양아치한테도 평등하니까.

‘카드 게임은 저번에도 엘리자베트 부부에 키아라를 끼워서 했었지.’

프랑을 슬쩍 살폈다. 뱀 앞의 햄스터처럼 굳어 있다.

합법 업소이긴 하지만, 어른의 놀이터 아닌가.

우리 프랑의 감각으로는…… 그래. 딱 시골에서 올라오자마자 모텔과 술집, 담배꽁초가 즐비한 길 뒷골목을 지나가며 굳어버린 중학생 같은 소감이 아닐까.

“……다른 데가 낫지 않겠어?”

조심스럽게 권했는데, 하필 그게 프랑의 승부욕 버튼을 눌러버린 듯 했다.

“가, 갈 수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 하나도 안 무섭다─!”

티 나게 기합을 넣은 프랑은 행군하는 목각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전진했다.

〈어엉?〉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그런 프랑을 따라갔는데, 이게 웬일. 입구를 지키던 떡대가 갑자기 그녀를 가로막는 게 아닌가?

물론 그는 프랑이 새끼손가락으로 제압할 만한 상대이긴 했다.

하지만 착하디 착한 프랑은 당연히 멈춰서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고, 그 떡대는 그런 그녀와 내 머리카락 색을 번갈아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허, 참. 거기 형씨. 얘, 당신 애야?〉

〈……뎃?〉

〈이 술집은 딸내미 동반으로 들어올 만한 데가 아니거든. 저기 보여? 애들이 좋아할 법한 선물은 건 저 구획으로 가 봐.〉

친절한 떡대는 건너건너에 있는 샤르르샤방샤방한 인형 가게를 가리켰다.

팬시한 느낌이 깜찍한 소녀 감성의 가게였다.

“어…………”

나는 프랑의 말없는 뒷모습을 보며 께름칙하게 어깨를 떨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급히 그녀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프랑? 프랑? 마음 상하지 마. 우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못 알아본 거야.”

“……얼굴.”

“그래, 얼굴!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까 옷차림만 보고 부녀 관광객인 줄 안 걸 거야. 저 사람이 하는 일이 그런 손님 막는 걸 테고!”

“……내 키가 쬐끄매서가 아니구?”

“어………………”

내가 말끝을 흐리자 프랑의 눈이 퀭하니 죽어버렸다.

이런 시발, 아니라고 즉답했어야 했는데.

“……노르.”

“넵? 앗, 아니오! 옷 때문에 그런 게 맞습니다!”

뒤늦은 핑계엿다. 그러자 프랑은 마치 키 때문에 놀이기구 앞에서 빠꾸먹은 20대 직장인 여성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옷 사러 갈래. 엄청 섹시한 걸루.”

─짤랑. 프랑의 지갑이 묵직하게 짤랑거렸다.

“……넵. 안내합죠.”

프랑의 성인인증 모드인가.

저어는 일단 손해볼 일은 없을 듯한 제안이에오.

***

우리는 가까운 의복점에 가서 반지를 뺐다.

〈옷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어? 어? 넵!〉

내 특징적인 인상착의를 알아본 직원은 빠르게 점장을 불러왔다. 가문 문양 같은 게 없기에 잠깐 신분을 증명할 대화가 필요하긴 했지만, 별 문제 없이 끝났다.

〈어떤 옷이 필요하십니까, 백작님!!〉

〈오늘은 부인과의 내유(來遊)가 있습니다. 시음회에도 어울리는, 적당히 캐쥬얼한 복장이었으면 좋겠군요. 귀족인 걸 티내지 않는 선에서요.〉

〈그, 그럼 이 후보들은 어떻습니까?!〉

〈프랑. 어떤 걸로? 이거? ……네, 이걸로요.〉

〈감사합니다! 원단은 저희 점포에서 제일 가는 상품으로 준비하겠습니다!〉

프랑의 신체를 측정하고, 자기 분야에서 충분히 달인이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스피드와 속도를 보여주는 재봉사가 재단에 들어갔다.

“노르. 이거 원단 값 좀 물어보고 싶은데……”

“통역해 달라고? 알았어?”

그 동안 프랑의 취미에 맞는 원단을 몇 개인가 샀다.

그러고는 잠깐 우물쭈물 거리다가, 재단이 전부 끝날 때까지 아까 떡대가 알려준 인형점에 직행.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없이 따라갔다.

〈어서 오세요~.〉

─휵! 누가 볼세라 얼굴을 감추는 반지를 장착.

신분을 숨긴 프랑은 매니아 계층이 두터울 듯한 나무 인형을 잔뜩 샀다. 손바닥에 올려도 될 만큼 아기자기한 시리즈였다.

“그건 어디 쓰려고? 방에 장식하게?”

“우, 우리 저택에 장식이 쪼금 부족하잖아! 다른 뜻은 없구, 그냥 인테리어로!”

“듣고 보니까 그렇네. 몇 개 더 살까?”

“아니야! 지금보다 많으면 옷을 만들어주기 좀 힘들 거라서…… 앗.”

그렇게 30분 내외로 약간 삐졌던 기분을 달랜 뒤, 옷을 시착했다.

캐쥬얼한 느낌의 짧은 드레스였다. 현대 느낌의 파티 드레스라고 하면 될까? 등은 꽤 파여 있고, 가슴도 Y자로 깊숙이 보였다.

머리를 틀어묶고 손에는 란제리 장갑. 거기다가 장지갑을 하나 들자, 발랄하던 프랑은 온데 간데 없고 부유한 상인의 여식 같은 아가씨나 나타났다.

섹시함이 천박함이 되지 않을 정도의 노출도가 딱 몸매에 자신 있는 영애 같다.

〈아주 멋지네요! 기대한 것 이상입니다!〉

나는 프랑이 어떠냐고 묻기도 전에 얼른 점장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렇게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옷은 오랜만에 봅니다!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저, 정말이십니까?!〉

〈예, 정말이고 말고요! 가게의 명함이 있으시면 꼭 건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점장은 신나서 명함이랑 무슨 VIP 회원증 같은 걸 넘겨줬다.

기대하는데 미안하지만 또 올 일은 없을걸. 내 지인들한테 입소문이 돌아서 가게가 떡상하는 일 역시 없을 거고. 유부남 귀족 친구는 몇 없거든.

그래도 행복한 꿈을 꾸도록 내버려 두자. 꿈은 공짜니까.

“그, 그렇게 어울려?”

내가 점장을 연신 칭찬하는 걸 본 프랑은 기분 좋은 것처럼 쭈뼛댔다.

간접적으로 건넨 칭찬이 제대로 통한 모양이다. 칭찬에 매너리즘이나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이런 방식을 써 봐도 좋다더니, 역시 유튜브에 나오는 얘기는 다 진실이라니까.

“그럼 이, 이제 가 볼게!!”

자신감을 200% 충전한 프랑은 아까 입구컷을 당한 카지노에 돌격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떡대는 다시 찾아온 우리 얼굴을 못 알아봤다. 예의 바르게 비켜서는 자세에서는 아까 전의 껄렁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꽤 교육이 잘 된 카지노일 거라고 알 수 있었을 정도다. 아까는 부녀 조합이 어이가 없어서 원래 말투가 나오기라도 했던 모양.

〈고맙읍니다!〉

약간 어눌한 로마니아 어로 감사한 프랑이 나를 돌아보며 V자를 날렸다.

인간 승리 그 자체였다. 어깨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프랑은 이제 아무 것도 무섭지 않다는 양 카지노로 돌격하고, 3초를 못 가고 다시 굳어졌다.

‘오?’

나도 좀 놀랐다. 카지노라길래 샹들리에 같은 게 달린 밝은 분위기를 예상했거든.

그런데 내부는 내가 처음에 생각한대로 딱 바(Bar)에다가 노름판을 달아놓은 느낌이었다. 중세 술집보다는 마피아들이 시가를 피우면서 도박하는 금주법 시대 같다.

‘어두컴컴한 게 나름 분위기 있는데?’

하긴, 이 세상에 라스베가스 같은 도박장이란 게 있을 리 없나.

있어도 라리루라네 서커스단이 상주하던 영지에 있는 정도겠지. 당연하게도 프랑은 돌로 돌아갔다. 차라리 몬스터가 득시글한 던전을 덜 무서워할 듯 하다.

“아으, 에으.”

“가자. 잠깐만 놀다 가면 그만인걸.”

─슥. 몰려든 시선에 굳어버리는 프랑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프랑은 시선도 잊고 움찔하더니 작게 소리쳤다.

“……노, 노르! 사람들 다 보는데…!”

“아까 봤잖아? 아무도 우리 얼굴 못 알아봐.”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프랑은 악마의 속삭임에 당한 것처럼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 천사 프랑과 악마 프랑이 싸우는 듯 했다.

나는 그 이미지를 깊이 상상해보고 결론지었다.

‘천사 프랑도 꼴리고 악마 프랑도 꼴림.’

내 쓸데없는 생각이 사실이었던 것일까. 천사와 악마, 2명의 프랑은 남편한테 약하다는 공통적인 약점이 있었던 듯 하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조금만?”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실컷 놀아도 돼.”

프랑은 나한테 머리를 기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좀 작을 뿐, 섹시한 미녀를 동반한 나에게 눈길이 모였지만 선을 넘는 놈은 없었다. 아마도 속된 말로 물이 괜찮은 곳인 듯 했다.

“익숙한 느낌은 아닌데. 관광객인가 봐?”

적당히 도수 낮은 술을 시키고 앉아 있자, 어느 요염한 미녀가 내게 손짓을 했다.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재떨이가 수북했다.

뭐임? 내가 눈을 깜빡하자 그녀가 쿡쿡 웃었다.

“괜찮은 남자네. 야만스러운 느낌이 취향이야.”

곰방대의 재를 턴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한 판 어때? 그 빳빳한 아가씨보단 나랑 노는 게 더 즐거울 걸?”

“……지금 그거, 제 얘기에요?”

프랑이 가만히 돌아보며 눈을 반개했다.

이거 아무래도 판에 끌어들이려는 수작 같은데.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만 눈쌀을 찌푸렸다. 미녀랑 같은 테이블의 사람들을 알아본 탓이었다.

…휙.

움찔한 사람들이 내 눈을 피했다. 웃고 있는 건 남자 1명 뿐이었다.

“그럼 누구겠어? 어디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못 볼 꼴 보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을걸? 같이 온 그이는 놔두고 혼자 가 주면 더 고맙겠고.”

요염한 미녀가 신경전을 계속했다.

우리가 귀족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는 말투다.

‘아니, 아니군. 이 여자도 귀족이야.’

꽤 높은 신분 같다. 최소 백작 가문의 딸, 혹은 부인이다.

일부러 브리타니아 어로 건네는 도발에 프랑은 나한테 눈으로 의견을 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착석했다.

“현지 룰 없이, 저희한테도 익숙한 갬블이라면 몇 판 어울려 드리죠.”

“얼마든지. 마침 스탠다드한 룰이거든. 아, 나는 마틸다야.”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만. 약간 아줌마 같은 게.

나는 웃으면서 카드를 집고, 마술사처럼 섞었다.

촤르륵─!

중학생 때 취미로 했던 연습이 마스터 클래스의 감각으로 전문 갬블러 못지않은 숙련도로 빠르게 펼쳐졌다. 미녀의 눈매가 꿈틀했다.

“정말로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추파를 던진 건 아니겠지. 그 정도는 알아.”

나는 카드를 섞고 맨윗장을 넘겼다.

촤르르 섞었을 때 동체시력으로 찾아내고, 손의 감각으로 위치를 살려서 옮겨둔 1번 카드였다. 휙 던진 카드가 그녀의 잔 앞에서 멈췄다.

“갬블 중독자를 상대로 설교할 생각은 없지만,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건 그쯤 해 줬으면 좋겠어. 네 안목대로, 야만스러운 남자라 인내심이 없거든.”

“……살짝 진심으로 추파를 던지고 싶어졌는걸. 즐거운 게임이 되겠어.”

그건 아닌데. 폼만 잡았지, 운빨은 없는 편이라.

“대신 좀 섞어줄래? 손버릇 나쁜 남자가 꼈네.”

그녀가 벨을 흔들자 딜러가 와서 카드를 섞었다.

저 딜러를 신용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었다. 방금 막 내 동체시력을 봤으니 손장난 할 생각은 싹 가셨겠지.

그녀는 나를 최소 플래티넘 클래스의 모험가나 그 정도로 보고 있을 것이다.

위국전쟁에 참전했다가, 귀국하기 전에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이라고 말이다.

‘거의 틀리진 않았지.’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전쟁 자체보다 다른 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나보다, 마틸타의 예상에 더 부합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

그것도 둘이나 말이다.

나는 뿔이 난 프랑 다음으로 카드를 받고 나서 작게 속삭였다.

「이런 데서 놀고 계셔도 됩니까? 콜리도 경.」

「그건 제가 할 소리인데요? 울프헤딘 경.」

변장한 모험가 길드 연합의 총장은 실실대면서 웃었다.

「그야 뭐. 입장 차이는 비슷하죠. 이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 다 신분을 숨기고 노름판에 놀러 온 몹쓸 유명인이긴 합니다. 단지, 저 분은 좀……」

나는 키아라의 일행을 보며 한숨을 눌러참았다.

그때 카드를 배부받는 그녀의 동작을 본 프랑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여러 이유로 얼굴을 보기 전까지 깨닫는 게 늦어졌던 모양이었다.

─두리번, 두리번. 눈치를 살핀 프랑은 자그맣게 고향 말로 말했다.

【……메이링 황녀님?】

【……지, 직접 인사하는 건 처음이네요. 동생이 신세 많이 졌어요, 부인.】

프랑을 언니라고 착각했던 바이츠니아의 황녀, 리앤 유이링.

그녀의 언니이자 타타르니아와 함께 레벨리오를 해치웠던 우신의 무녀, 리앤 메이링은 자기 패에 눈길도 주지 못하고 뻣뻣한 미소를 지었다.

거 참, 이 테이블에 하프 드워프만 셋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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