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머리가 하얘져서 거절부터 하고 여기 왔다고?〉
〈……거절한 건 아니고, 시간을 좀 달라고-〉
〈똑같은 뜻이잖니.〉
〈……네. 그렇겠죠.〉
대답하는 티르시의 안색은 방금 막 죽음에서 되살아난 시체 같았다. 오델리아는 관자놀이를 붙잡고 신음했다.
〈끄응……〉
축제 마지막 날에 쉬고 있는데 대뜸 찾아온 이 젊은 ‘후배’의 사정을 듣게 된 그녀는 귀찮음이나 곤란함보다는 죄책감이 앞섰다.
불똥이 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티르시가 저렇게 된 데에는 오델리아 자신의 지분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80% 정도는 오델리아와 재상의 잘못이라고 할지도 몰랐다.
〈설마 그 자리에서 프로포즈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머리가 하얘져버렸어요. 청혼이 멀지 않겠다는 생각쯤은 했었고, 빨리 일을 매듭짓거나 미리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는데……〉
〈……혼인만 남긴 연인들이 축제 마지막 날을 단둘이 보내기로 했는데, 청혼받을 거라는 생각을 조금도 못 했다고?〉
무심코 되묻자 티르시는 더 고개를 숙였다.
〈그만, 그만! 혼낼 생각은 아니었어!〉
〈……들떠 있어서 생각이 못 미쳤어요. 지금쯤 분명 노르드는 상처받았을 텐데, 이제부터 어떻게 얼굴을 보고 사과해야 할지……〉
〈그럴 리 있겠니. 지나친 걱정이야.〉
혼자 내버려 두면 목이라도 매달 듯한 분위기라 오델리아는 빨리 말을 받았다.
〈내가 너희 관계는 제대로 모르지만, 너희들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만했어. 녀석도 놀라고 당황하긴 했겠지만 그뿐일 테지.〉
원래라면 좋아하든 부끄러워하든 했을 말에도 티르시는 묵묵무답이었다.
허나, 끙끙 앓고 있는 건 오델리아라는 절세의 검사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전사 특유의 과감무쌍한 행동력으로 오델리아는 그녀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줬다.
〈어서 가 보렴. 아직 몇 시간도 안 지났다며? 지금 바로 가면 늦지 않았어.〉
눈이 빨갛게 충혈된 티르시를 복돋아주듯 그녀는 힘 있게 말했다.
〈사정을 말해주면 이해할 거야. 적어도 화내는 일은 없을 거고. 가서 혼인을 맺을지 말지, 맺으면 언제 맺을지 차분히 얘기를 나눠 보렴. 알겠니?〉
〈……네. 알겠습니다.〉
〈어디 있는지는 아니?〉
〈연락을 남길 방법이라면……〉
말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메달을 꺼낸 티르시는 숨을 죽였다.
가족이 공유하는 〈아공간〉. 거기에 들어 있는 수첩─노르드는 ‘가족 단톡방’이라고 부르는 물건─에 그의 메모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뭔데?〉
〈……오늘밤은 외박하고 갈 거라고, 묵는 여관 위치까지 적혀 있어요.〉
오델리아와 눈이 맞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가족들에게 보낸 메시지임과 동시에, 티르시에게 남기는 글이다.
오려면 여기로 와 달라는 메시지 말이다.
〈감사했습니다. 꼭 사과하고 올게요.〉
〈문제가 해결되면 편지든 뭐든 남겨주련.〉
〈네.〉
티르시는 조언을 듣고도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깊게 머리를 숙이고 떠나가는 그녀를 배웅한 오델리아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참았던 한숨을 쉬었다.
〈젊구만……〉
이런 달콤쌉싸름하고 어설픈 연애담이라니. 오델리아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젊은 놈들의 풋풋한 사랑은 노인네에게는 살짝 낯뜨거웠다.
***
내가 프로포즈에 실패한 레스토랑의 부속 여관.
“따흐흐흑…….”
나는 그 남은 방을 붙잡고 5병째 병나발을 불며 슬픔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객관적으로 봐서, 좋은 프로포즈는 아니었다.
멘트 자체는 잘 쳤다고 생각하지만, 상대가 짠 데이트 계획대로 즐기다가 마지막에도 상대가 돈 내고 예약한 장소에서 프로포즈를 했던 것이니까.
나쁘게 보자면 그럴 여지가 얼마든지 있는 프로포즈이긴 했다.
하물며 바로 전날에는 티르시가 먼저 비밀로 한 거라지만 정체를 속이고 쳐들어가서 최면을 걸질 않나, 그래놓고 다른 아내들과 노닥거리기까지 한 나다.
‘쓰벌, 가족 전원이서 섹스도 했으니 괜찮을 줄 알았지…….’
솔직히 염치없는 생각이긴 한데, 아마 괜찮기는 했을 것이다. 티르시가 내 프로포즈로부터 도망친 게 그것 때문은 아닐 거라는 믿음은 있다.
어디 가서 돌 맞을 생각이긴 한데, 그거야 하렘 꼴마초를 목표로 했을 때부터 각오한 것이었기에 불평할 자격은 없었다.
그녀가 프로포즈에 난색을 보인 이유.
그리고 난색을 표해야 한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죽을 만큼 힘들어했던 이유는 십중팔구 달리 있다.
‘어디 나만 티르시한테 껌뻑 죽었나.’
그녀도 내 말 한마디면 불구덩이에 뛰어들 만큼 헌신적이었지 않았나.
사랑과 믿음을 확신할 만한 사건은 많았고, 나도 그녀도 합리적인 이유만 있다면 상대방을 위해서 죽어줄 수도 있을 듯한 관계였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절대 죽어달라는 부탁은 못 하겠지만, 그건 어쨌든.
나는 병나발을 완창하고 빈 술병을 내려놓았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레훼에에에엥……!!!!”
그래도 역시 슬프다. 나는 취기도 못 얻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빌어먹게 쌩쌩한 마스터-간은 혈관에 피 대신 우루사가 흐르는지 전혀 취할 것 같지가 않지만, 슬픔은 진짜였다.
여친한테 차였다고 술자리에 불러서 질질 짜던 친구 놈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미안하다 씨발럼들아. 그때는 ‘니들은 여친이라도 있어봤지’ 하고 쌍욕이란 쌍욕은 다 했었는데.
나뭇잎 마을 전기공학의 저명한 인자, 「통수」 사스케 선생께서는 말씀하셨다.
유대감이 있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고.
그걸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네가 아느냐고.
“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겠습니다, 센세……”
역시 닌자 성서에 등장하는 현자의 말은 다르다. 틀린 게 하나 없다.
갑자기 오프툼이 존경스러워진다. 나는 진짜로 차인 것도 아닌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사모님과 따님을 잃은 그는 오죽하겠는가?
아내님들이 목숨을 잃는다면 나는 100% 암흑-사이드로 빠져버릴 것이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파괴될 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
전우들이여. 생간컨대 이번 일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추억이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다. 참 열심히도.
…똑똑.
내가 포스의 암흑-사이드에 빠져서 마스터 베이션이 되는 미래를 저지하려는 것이었을까? 문짝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온 신경을 기울여서 역겹게 두꺼운 문을 뚫고서 그녀의 기척을 찾았다. 찾아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기에 나는 기뻐할 수도 있었다.
“……저에요.”
“열게요.”
문을 열자 티르시는 코를 훅 찌르는 술 냄새에 놀란 듯 흠칫했다가, 나를 이렇게 마시게 만든 게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나도 안 취했어요. 마셔도 멀쩡하기만 하더라고요.”
“……네.”
멀쩡하다는 어필을 해 봤지만 별로 효과는 없던 모양. 어쩌면 마시게 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쁠 따름이다. 2~3시간 만에 날 찾아왔다는 건, 레스토랑에서 있던 해프닝이 우발적인 것이었다는 증거였으니까.
“앉으세요. 마침 좋은 술이……”
시발. 내가 다 마셨지. 나는 아닌 척 적당한 가격대의 술을 따랐다. 가격이 문제인가? 원래 이런 건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선반에서 잔을 꺼내서 술을 따르고 물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절 끝장내려 오신 건 아닌 듯 하고, 어떤 일인지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고개를 끄덕여서 대답한 티르시는 술의 기운을 빌려는 것처럼 원샷을 때렸다.
“……전에 예전 재상님이 찾아오셨던 건 기억하세요?”
“네.”
“그때 제안을 받았어요. 혹시 공화제가 된 뒤에 출마할 생각이 있느냐고.”
출마? 티르시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일단 거절했지만, 아우렐리우스 후작님께서도 설득하시는 거에요. 로마니아 공화국이 된 뒤에는 상원의원은 기존처럼 각 지방의 영주로서 활동할 거라고요.”
“행정관 같은 겁니까?”
“맞아요. 목민관, 지방관, 자치관. 호칭은 몇 개 후보에 올랐지만, 귀족원에서 뽑힌 출신의 인물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통치하는 식이 되겠죠.”
그녀는 내가 더 따라주는 술을 멍하니 바라봤다.
“귀족 신분이지만 가문에 얽히지 않는 선출제. 제가 결혼을 누구와 하고, 어떻게 살건 상관없을 거라는 제안에는 살짝 혹했어요.”
“권력욕은 아니잖아요?”
“그럼요. 노르드도 말했잖아요? 초인이란 환상이라고요. 권위를 가지려면 대가가 따른다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분명 노르드에게 도움도 될 거고, 고향 생각도…… 조금은 있었죠.”
파이프라인은 넓을수록 좋다. 티르시가 정말로 로마니아의 영주가 된다면 편한 일도 많겠지. 직원들도 고용할 테고, 출근은 〈공간이동〉이 있다.
“권력은 귀찮지만, 귀찮다고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될 때도 많아요. 노르드는 가진 것에 비해 권력은 부족할 때도 있고…… 한두 번 정도는 일임받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1~2년 하고 끝낼 수 있는 직책입니까?”
“아니요.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군. 나는 눈치챘던 사실을 입에 담았다.
“라리루라의 놀이동산 계획에 협조한 것도 그래서군요?”
“아시잖아요? 저, 계산적인 여자인 거.”
자조적으로 웃는 티르시였다.
부유해질 구석이 없는 영지를 회생시킬 수 있을 법한 제안이니까.
지지가 필요한 티르시도, 계획만 있지 실현성이 낮던 라리루라도 윈윈이다. 그런 거래였던 것이다.
맞다. 위국전쟁으로 부상한 전쟁영웅인 그녀가 투자자와 원로원의 지원으로 내치를 집행하면 그 지지율은 다른 지원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관광객 유치의 성공률은 어쨌든, 프랑이나 나의 골렘과 원로원의 예산을 타내는 게 가능한 티르시라면 다른 후보자들과 늘어서도 군계일학이다.
하물며 그녀의 고향인 옛 아르마슈나스 령은 그 땅 크기에 비해서 인기가 없는 영지 아닌가.
자본력, 인맥, 강함 등등 동원할 수 있는 파워와 시민들의 인기는 절대적.
출마와 동시에 당선은 확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망상은 아닐 것이었다.
선출되고 10년 정도면 영지를 활성화하며 그때 얻은 권력이며 신임의 부산물로서 내게도 굉장한 힘이 돼 줄 수 있겠지.
돈 많은 양반들이 정치인 좀 해 보자고 발버둥 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저는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도 계속 고민을 떨치지 못했어요.”
“제게 상담이라도 하셨으면……”
“노르드는 계속 바빴고, 근래에나 간신히 숨을 돌리고 쉬고 계셨는걸요. 맞아요. 사실 변명이죠. 실은 출마를 각오하기 전에는 상담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노르드도, 저희들한테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이제 지구로 돌아가는 건 어려울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