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23화 (921/1,009)

“……눈치채실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물어보진 않더군요.”

“그야 눈치채죠. 남도 아니고, 바보도 아닌걸요.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을 뿐.”

나는 의외의 대답에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술에 물 타듯 목 안으로 흘려넘겼다.

여신 사티스는 말했다. 세계수의 차원들과 중간 가지를 보호하는 ‘막’이라는 보호장치는 신들이나 옛 지배자 같은 강력한 존재의 왕래를 저지한다고.

세계수의 가지 같은 매체가 있고, 니플헤임과 【중간 가지】처럼 같은 세계수의 차원이어도 두 세계 사이의 왕복은 쉽지 않다.

훌드폴크의 유적에서 생사를 오갔을 때, 오딘과 어떤 샘물의 거인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때에도 그랬다.

신적 존재인 그들도 차원을 넘나드는 걸 고된 일이라고 표현했으니까.

후속조치를 해줄 신들이 그렇게 많던 신대에도 그랬다는데, 지금은 어떻겠냐고.

“노르드는 이제 신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에요. 가진 힘, 마나, 권능, 출신, 축복과 가호. 그것들이 지구의 막을 상처입히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죠.”

“예. 돌아가지는 못할 겁니다. ‘심해의 군주’와 같은 위협도 남아 있고, 제가 멋대로 돌아가겠다 설치면 살아남은 신들의 대계에도 영향이 가죠.”

이 얼마나 뻔한 의문과 당연한 대답인가.

신과 옛 지배자가 지나갈 수 없다면, 그들마저 해치운 나는?

‘지나갈 수 있을 리가 없지.’

그야말로 ‘심해의 군주’가 기뻐 뒤질 만큼 넓은 구멍을 뚫어놓을 것이다. 그 새끼는 내가 자기를 찾아오기만 해도 좋아라 할 것 같지만.

나는 가볍게 긍정하고 부연설명을 붙였다.

“그게 뭐 대수입니까. 어차피 100% 귀환하리란 보장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나마 아예 손도 발도 못 쓰는 건 아니잖습니까?”

궁금증은 확실해졌고, 방법도 알아냈다.

단점은 나 스스로 돌아가기 힘들 거라는 것뿐.

그 2~300년 뒤에 있을 라그나로크의 마침표에 내가 살아남아서 참전한다고 쳐도, 그 이후 갈 수 있게 된 지구는 내가 아는 그곳이 아닐 것이다.

부모님이나 친구들도 진즉 세상을 떴을 테고.

“그래도 편지 정도는 보낼 수 있겠죠. 몇 번씩 계속해서 보내면 어머니, 아버지도 당신들이 보는 게 환상이나 누군가의 장난이 아니란 걸 알 테고.”

예전부터 생각해 둔 방법 중 하나였잖은가.

공간/차원의 이동에 대한 술식은 대충 안다. 저 신들의 통제와 협력만 있다면. 그리고 살아남아서 【중간 가지】의 포장지 내부를 수습할 로키마저 더해진다면 일은 쉽다.

우리 부모님들께선 10년이나 더 기다려 주셔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연락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 뿐이잖아요.”

이렇듯 나는 납득하고 벌써 다음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티르시는 오히려 자신이 더 비극을 겪는 것처럼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예?”

“귀향은 노르드의 꿈이고 목표였잖아요. 그랬던 게 이제 다신 돌아갈 수도 없다는 걸 알아버리고, 좋든 싫든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걸요.”

그렇겠습니다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티르시도 다른 아내님들도 곁에 있을 텐데.’

나는 너무나 다른 관점 탓인지, 아니면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건지 하는 의아함에 태연한 표정을 짓지 못했다. 그러자 티르시는 두 눈을 깔며 말했다.

“그래서라도 저는 영주가 되려고 했어요. 저희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거에요.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된 노르드가 이 세상에서나마 그리움을 달래면서 지낼 수 있도록.”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조만간 로키를 잠재우고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벌써 아내님들은 깊이 고민하고 자신들만의 결론 아닌 결론을 내렸던 모양이다.

물론 그녀들도 아직 나를 빼놓고 상의를 한 건 아니겠지.

그저 자연스럽게 다들 눈치챘고, 서로가 눈치챘다는 것도 깨달았던 모양이다.

라리루라도 그런 생각으로 놀이동산 계획 같은 걸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여기까진 알겠어요. 하지만 다들 원만하게 같이 상의할 때를 기다린 것 아니었습니까? 제가 요 며칠 자주 봤던 다른 가족들은 티르시처럼 큰 고민을 하는 듯은 안 보였어요.”

내가 우리 아내님들의 고민이나 위화감을 놓칠 리가 있나.

‘티르시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이 일로 고민하는 듯 했던 네페르티티는 금방 위화감을 눈치챘다고.’

아니, 그보다는 티르시도 내가 프로포즈를 하기 전까지는 멀쩡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청혼을 한 그 순간.

그때 설핏 떠올랐을 어떤 생각. 그게 티르시의 안색과 머리가 새햐얗게 만들고, 끝내는 시간을 좀 달라며 자리를 피하게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결혼하자는 얘기를 들어서, 정말 기뻤어요. 제 인생에서 그만큼 행복했던 순간은 달리 없었어요. 아무 생각도 않고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당신의 키스를 받고 싶었을 만큼요.”

티르시는 참회하는 죄인처럼 몸을 숙였다.

“하지만…… 생각해 본 거에요. 저희 할아버님, 아버님이 얼마나 누군가의 원망을 받았었는지를. 그분들이 자기 사람에게밖에 다정하지 못하셨다는 걸요.”

그녀는 술잔을 더듬거리며 내게 고백했다.

“그래서, 저는 무서웠어요. 제가 고향을 지키려 하는 중에 누군가의 원한을 사게 될지도 몰라요. 그것만이라면 상관없지만, 그 비난과 분노는 노르드나 다른 가족들한테까지 치밀 거에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티르시가 겪어본 시선이 그랬을 테니까.

“노르드가 말한 대로에요. 제가 고향을 버려둘 수 없는 건, 그게 제가 과거에 찍어야 하는 마침표이기 때문이죠. 의무감 같은 게 아니라, 저 스스로 당신의 곁에 있기를 걸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한, 그런 마침표로서요.”

그녀는 더는 술의 힘을 빌기 싫은 것처럼, 손에 쥔 술잔을 놓았다.

“그렇지만 여러분께 제 실수, 제 잘못, 제 과거 하나하나로 원망이나 비난을 듣게 하기는 싫어요. 여러분이 제 탓에 돌을 맞는 건 언어도단인걸요.”

“……그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에요?”

“네.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노르드가 이 세상에마저 학을 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자, 줄곧 받고 싶었던 반지마저 무서워졌었어요.”

내가 그녀가 말을 어떻게 마치려고 하는지 지켜보며 기다리자,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웃으며 말했다.

“결혼은…… 저 역시도 정말 바라 마지않지만, 그걸 생각하면 피하고 싶어요. 저는 노르드와 다른 분들이 소중하니까. 제가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보다, 훨씬 훨씬, 훨씬 훨씬 더요.”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티르시는 잠깐 머뭇거렸다가 고개를 숙였다.

“결혼만 하지 않을 뿐, 지금하고 다르지 않아요. 단지 제가 당신의 여자라는 사실은 공표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죠. 발뺌 못 할 증거만 없으면 비난 정도는 막아 보일게요.”

힘내서 말한 그녀는 내 손을 붙잡았다.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던 것, 정말로 미안해요. 하지만 이젠 마음을 다잡았어요.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 곁에 있을 테니, 노르드도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싫습니다.”

나는 말을 뚝 자르듯 단언했다. 티르시가 순간 멍해졌다.

시발, 뭘 멍해지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마법사님은 내가 ‘앗 그렇군요. 그럼 결혼만 하지 말고 사실혼 상태로 동거합시다’ 라고 할 거라고 생각했나?

대체 얼마나 연애를 못 하면 그런 계산이 서지.

데이트 계획이 엉망일 때부터 눈치는 챘었는데, 정말 이 아가씨는 끔찍하리만치 연애가 쑥맥이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일어섰다.

“티르시가 제 사인을 눈치채고 여기 와 주셨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은 다 풀렸거든요? 애초에 전 슬프고 우울했던 거지 화났던 건 아니니까.”

“자, 잠시만요? 노르드, 아, 아파요!”

“네. 티르시도 좀 아파 보셔야겠습니다. 어떻게 남편 가슴에 이렇게 조곤조곤 대못을 박으신대.”

서방님 화났다. 진짜 오랜만에. 내 여자 상대로 이렇게 열이 뻗쳤던 적이 없을 만큼 화가 치민다. 괘씸해서 눕혀놓고 1시간 정도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내가 아내님들 상대로 손찌검을 생각할 정도니 이 빡침의 수위는 능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잠, 어? 헤? 노르드? 노르드? 제, 제 말 이해하신 거 맞죠?”

“네이, 네이. 다 이해했습니다. 어릴 적의 트라우마가 도져서 벌레 몬스터 상대로 오줌 지리며 도망치시던 저희 마법사님의 소심한 면모가 뾱 튀어나왔다는 거잖아요?”

“네? ㄴ, 네?!”

“황폐해진 고향을 재흥시키고 싶다는 티르시의 뜻에는 별 말 않겠습니다. 제가 집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가지 말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으니. 단.”

나는 저항하는 그녀를 우악스럽게 끌어안고 그 입술을 빼앗았다.

굳어버린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숨 막히도록 혀를 탐하다가 놓았다.

“단. 추호도 납득이 안 가다 못해 화가 나기까지 하는 점이 있습니다.”

“네? 네? 어, 어디가……?”

“어디냐고요? 몰라서 물어요? 뭐? 비난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아?”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해서 이세계에 신물을 내게 되는 미래가 무섭다는 거겠지. 고향에 가는 게 삶의 제 1목표였던 놈이 꿈을 접었는데, 그런 상태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쓸 데도 없이 머리가 잘 굴러가는만큼 이 바보 영애님은 그렇게 생각한 거겠지. 그렇게 될 바엔 결혼 욕심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티르시. 티르시 아르마슈나스.”

꽈아악…! 나는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내가, 당신이 사랑한 남자가 그깟 욕 몇 마디 때문에 상처받을 것 같습니까?”

“아……”

“당신을 태어나게 해준 이 세상에 원망 따위를 품을까 봐요? 걱정도 유분수지. 지들이 뭐라고 욕 좀 하는 정도로 제 기분을 좌우한다는 말입니까?”

말문이 막힌 티르시가 입을 벙긋댔다. 괘씸하다. 뭐라고 떠들지는 몰라도 깨달은 표정이 아니니까 백이면 백 헛소리나 하겠지.

“우읍…?!”

그래서 그냥 다물게 했다. 아무리 화나도 내가 사랑하는 그녀를 때릴 순 없으니 입술로. 하려던 말을 억지로 삼켜진 티르시는 몸을 뒤틀었다.

“프하…?! 콜록, 콜록…!”

“그깟 뉘신지도 모르는 분들의 뒷담이나 분노가 신들이 죽이려고 드는 것보다 무섭습니까? 아하, 그럴 수도 있죠. 괘씸하단 이유로 때려잡지는 못할 테니 귀찮긴 할 겁니다.”

그녀의 허둥대는 눈을 들여다봤다. 당혹하던 두 눈이 당황한 듯 떨렸다.

“하지만요, 티르시. 그딴 말이 티르시가 ‘결혼은 사양하고 싶어요’ 같은 말을 들려주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플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 어? 네?”

“티르시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청혼한 건 당신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잘난 노르드님이 티르시에게 아내가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내줬다, 같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다른 경우가 더 무서우니 사양하겠다?

개소리다. 티르시에게는 못할 말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개씹 개소리다.

“티르시만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요. 나도 당신과 부부가 되고 싶은데, 그걸 왜 당신 혼자서 자기 맘대로 이해득실을 따져서 거절합니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절하는 편이 차라리 이해라도 가겠네요.”

“어…… 어?”

그런 생각은 못 해봤다는 얼굴이다. 나는 손에 잡은 팔뚝을 놓아주고, 대신 그녀의 가랑이 사이 은밀한 곳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네?! 노, 노르드! 뭐, 뭐 하시려구요!”

그걸 몰라서 묻나. 나는 눈을 반개하며 말했다.

“멍청한 윗입 대신 아랫입한테나 물어보렵니다.”

“머, 멍청…?! 히약?!”

─말랑말랑. 그녀의 사랑스런 클리토리스가 꼭 기다렸다는 듯 손에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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