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교대!”
─파앗!! 권능을 펼친 라리루라가 나랑 위치를 뒤바꿨다.
코앞에 나타나서 덤빈 나를 보스 스펙터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데미지를 못 주는 나보다는 차원을 조종하는 걸 본 라리루라를 노리고 드는 것이다.
‘그래봤자 라리루라의 차원벽을 뚫을 화력은 못 낸다.’
들이박기 전에 천리안으로 관찰하고 확신했기에 그녀를 데려온 것이다.
베로니카의 마법이 뚫린 건 마나로 된 실드라서 그렇다. 마나보다 상위차원을 주무르는 권능으로 방어하면 문제없다.
차원을 찢는 공격은 유령의 몸으로 버틸 테고, 가뒀는데 아예 먼 곳으로 튀어버렸다가는 귀찮다. 왜 내가 배부터 조져놨는데.
하지만 그런 판단이 가능하다는 건 맹점이었다.
‘지능은 없어도 생전에 짜둔 전략이나 경험치는 어디 안 가는군.’
그 지혜 보따리도 꼬락서니가 저래서는 자신을 지옥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일에 일조하고 있을 뿐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늘 말하듯,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내 마누라들을 공격한 건 눈 감아 주마. 여기 데려온 건 나니까.”
하늘도 감읍할 자비심을 발휘하며 나는 팔찌로 되돌린 브류나크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미스릴의 광택이 늘어나면서 내 몸을 감쌌다.
“근데 아예 나까지 무시하는 건 좀 서운한데.”
펼쳐지며 건틀렛으로 변한 주먹으로 연기 같은 몸통을 후려쳤다.
─■■■■!!!!
보스 스펙터는 영혼이 원념이라는 멧돌에 세게 갈려나가는 것처럼 하울링을 내질렀다. 별 타격은 없겠지만 혼이 찢기는 게 아프지 않은 건 아닌 듯 했다.
“얌전히 굴어. 더는 아프지 않게 해줄 테니.”
철커덕, 철컥─!
전신 브류나크 갑옷을 입은 나는 건틀렛에다 룬 스톤을 끼웠다. 공격 마법을 막는 ᚦ(Thurisaz)의 룬이다. 움켜쥔 주먹에 푸른 불꽃이 피어났다.
─예리한 얼음이여(???????????? ????????)!!!!
보이지 않을 만큼 얇은 얼음 침이 쏟아졌다.
나는 방어조차 하지 않고 정면에서 뚫었다. 내 야수회귀 코팅이나 오러권도 마나였기에 뚫려버리기는 했지만, 브류나크는 엄연한 물질이다.
‘창으로도 상쇄는 가능했다. 내 몸으로 때울 만한 위력이야.’
방어는 룬 마법과 브류나크에게 맡긴다.
우신 가죽 갑옷보다 믿음직한 미스릴 갑옷이 내 몸을 지켰다. 급속접근한 나는 보스 스펙터를 푸르르게 타오르는 불주먹을 휘둘렀다.
“안락사 펀치!!!!”
혈수마공(血手魔功)
터쿼이즈 블루 오버 드라이브(Turquoise Blue Overdrive)
스펙터의 방어력을 까마득하게 웃도는 절기다. 무자비한 폭력에 직격당한 보스 스펙터는 수류탄 호에 들어간 산토끼처럼 찢어졌다.
─크아!!!!
하지만 유령이 몸이 찢어진다고 죽을 리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의 형태로 돌아온 스펙터가 라리루라에게 마법을 발사했다.
바위 사자가 같은 거대한 모래 파도! 우리들을 싸그리 휩쓸 기세였다.
─파스스스!!
그 바위 사자의 턱에 손을 집어넣고 좌우로 쭉 찢었다. 오러로 카이저 피닉스를 형성해서 꽃처럼 벌어진 주둥이를 폭발시켰다.
─■■■■■■!!!!
보스 스펙터의 권능이 자신한테까지 날아오려는 불꽃을 제거했다.
오딘의 눈으로 적의 상태를 살폈다. 마나가 꽤 줄어든 게 보인다.
“권능은 체력을 소모하지.”
그러면 유령은? 죽은 놈에게도 체력이 있을까?
“설마. 시체한테 체력이랄 게 있을 리 있나.”
그렇다고 권능을 무한히 쓸 수 있는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마법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리치 테크를 탈지도 모른다. 당연히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죽은 자의 체력은 곧 생전의 생명력과 힘.’
형태는 달라도 결국은 마나다.
유령이라면 육체의 힘을 남기지도 못했을 거고.
영혼에 남은 마나. 그걸 연료로 생존한다. 여기 이 섬에 고인 마나가 저들을 움직이게 한다면, 저 스펙터들의 체력은 곧 마나였다.
육체를 잃고 포스의 영이 된다 함은, HP통과 MP통이 결합해서 하나의 엔진이 된다는 뜻이다.
“그럼, 어디 보자.”
생명력을 불태우는 포화를 뚫은 나는 스펙터의 머리를 터트렸다.
“너, 그 권능 언제까지 쓸 수 있겠냐?”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 나 또한 기다리지 않았다.
촤좌좌좌좌좌좌좌좍─!!!!
나는 쉴 틈 없이 보스 스펙터의 안개 같은 몸을 찢고, 또 찢었다.
날아올라서 거리를 벌리는 보스 스펙터를 바로 따라잡는다. 마법을 튕겨내면서 불꽃과 섞인 오러, 다시 말해서 파괴의 마나를 퍼부었다.
─파슥!! 나한테 마법을 쏘려던 팔을 후려쳤다.
팔은 안개처럼 흩어지고, 마법은 발동하지 못한 채로 취소됐다.
“【ᛃ(Jēra)】. 【ᛃ(Jēra)】. 【ᛃ(Jēra)】.”
이에 그치지 않고 건틀렛의 룬 스톤을 교체했다.
마나를 흡수하는 룬이었다. 우리 아내님들에게 장난을 치며 마나를 쪽쪽 빨아먹고 도로 돌려주며 연습한 기술이 스펙터의 권능 사용을 독촉했다.
권능으로 저항하는 보스 스펙터를 피하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굳이 안 막아도 돼. 어차피 내가 쓰는 ᛃ(Jēra)는 가성비가 나빠서 마나 회복용으로는 영 안 좋거든. 근데 어차피 말해봤자 이해 못하지?”
─별이여(????????????????????)!!
보스 스펙터는 별빛을 응축시킨 마법을 쏴댔다. 오러와 비슷한 파괴의 마나였다. 나는 그 굉장한 출력을 목도하고 직격 직전에 미소지었다.
“【엘든 링】.”
필살, 수르트하살법 받아치기.
─콰앙!!!!
역류하다 못해 반사된 에너지가 보스 스펙터를 뒤로 날려보냈다.
그 위치에는 베로니카나 라리루라의 텔레파시를 듣고 온 듯한 다나가 있었다.
“자, 여기. 네 부하들.”
─오오오오오……!
에인헤리로 승격한 스켈레톤이나 스펙터들!
영혼들이 보스 스펙터에게 달라붙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에인헤리로 삼을 수 있을 만큼 혼이 멀쩡한 원령들이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에인헤리들이 뼈와 원혼으로 만든 행위예술가의 작품처럼 보스 스펙터를 감쌌다. 발퀴리에들이 그 원혼의 구슬을 마법으로 봉쇄했다.
─그으으윽……!!
조금 놀랍게도, 그렇게 된 보스 스펙터는 더는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부하들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을 해쳐가며 공격하진 않은 것이다.
촤아악─! 나는 모래사장을 미끄러지며 원혼의 구슬을 붙잡았다.
‘마나랑 원념으로 저항을 해대면 불가능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겠지.’
내 손이 원혼들에게 닿았다.
울프헤딘의 권능이 발현한다.
슈와아아아악─!! 원혼들은 실타래처럼 시꺼먼 원념을 풀어헤쳤다. 에인헤리들이 감싼 보스 스펙터에게서 구정물처럼 탁류가 넘쳐났다.
─삐엑? 뺘악!!
“어허. 먹지 마. 너 먹을 거 아냐.”
지지야, 지지.
원혼도 흡수하려는 머리 나쁜 까마귀를 혼내고 손을 뗐다.
─아아…… 태양이 떠오른다. 밤이, 저문다…….
─빛이란…… 이리도 따스한 것이었던가…….
에인헤리들은 내가 쓴 권능에 하나둘씩 영면에 들었다. 그들은 흉측한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인간 모습을 되찾고 영혼의 완전한 소멸을 맞이했다.
─……안식에 감사를. 당신의 자비에 경의를.
마지막에 남은 건 가장 짙은 원념에 싸여 있던 보스 스펙터였다.
나우넷의 진흙으로 봤던 생전의 모습을 되찾은 그가 몸을 낮췄다. 귀족이 지체 높은 타국의 왕족 등에게 하는 것처럼 경의를 표시하는 자세였다.
나는 주먹의 힘을 풀었다.
“기억이 떠올랐나. 생전만이 아니라 죽은 후의 기억도 있나 보군.”
─……죄를 저질렀음을 기억합니다. 바로 오늘도, 조국의 보물을 훔쳐간다고 믿고 무역선에 탄 학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했었죠.
“보물을 훔쳐갔다고?”
그러고 보면 애초에 델타사가 탄 배는 왜 노린 거지?
히타이트의 물건을 옮기고 있었나? 아니,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우넷의 진흙으로 과거를 증명한 델타사다. 그 새끼가 히타이트의 유물을 가지고 있다는 추측은 아무리 그래도 무리수였다.
‘신용카드나 델타사 본인은 관계없겠고, 같이 온 학자들 문제인가.’
물어보면 되겠지. 아니, 이들이 환수했던 유물을 직접 봐도 될 것이다.
보스 스펙터, 아니, 히타이트의 제독이 비통하게 말했다.
─이미 속죄할 길은 없으나, 최소한 이 마지막 유예를 당신을 위하여 사용하고자 합니다. 참회는 되지 못할지언정, 부디 올바른 곳에 써주시길……
사라져가는 그는 영혼의 조각과 마나를 뭉쳐서 마법으로 갈고닦았다.
어떤 심볼과 같은─히타이트 해군의 마크일지도 몰랐다─ 모양으로 변한 영혼의 일부다. 나는 별 군소리 하지 않고 받았다.
저주 같은 게 아니라는 건 간파했고, 걸어봤자 저주 따위는 걸리지 않는 몸이 아니던가.
─저의 마나와 기억입니다. 그게 있으면 기지의 유물도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받아두마. 나쁜 일에는 안 쓸 테니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영멸을 받아들였다.
그다지 행복해 보이는 최후는 아니었지만, 어쩌겠는가. 후회하기에도 너무 오래 전에 지나가버린, 애먼 원념과 죄로 점철된 수백 년이다.
그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나는 소멸해가는 그 영혼을 끝까지 지켜봐 주고 타의 없이 묵념했다.
쿠웅…….
백골이 가득한 모래사장에 꺾여 부러진 돛대가 육중하게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