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69화 (968/1,009)

***

의식이 몽롱하다.

깨어나지 않는 꿈처럼, 영면에 든 관 속에 잠든 사람처럼, 모태에서 꿈을 꾸는 태아처럼 머릿속이 뿌옇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몽유병 환자의 꿈 같다.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소리가 머리에 와닿지 않았다. 누구일까. 소중한 사람일 텐데, 깨어나지 못하는 이성은 그게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어째서 여기 있는지는 몰랐다.

단지, 눈앞에 있는 노란 로브의 남자가 적이란 것과, 가까이서 그녀를 부르는 사람이 죽게 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녀의 몸을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 프란체스카 에이트리넨은 ‘적’의 맹공을 받아치며 희뿌연 머리로 기억 속의 잠들어 있는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알겠느냐? 프랑. ‘이 미래’에는 희망이 없다.

악신에게 맞서러 떠나는 결전에 앞서서, 친구와 나눈 대화를.

─아니, 이제부터 싸우러 가도 승산이 없다는 게 아니다. 전 인류의 힘을 합치면 이길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인류는 우리가 이계에 갇혀 있던 동안 한 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쟁에 승리해도 이미 더는 문명이 회복될 단계를 지나버렸느니라.

─그래. 멸망한 세계에서, 멸절만을 기다리게 될 테지.

─그래서는 승리해도 승리한 게 아니다.

─‘심해의 군주’는 라그나로크에서 승리했을 때, 지더라도 끝내 목적을 이뤄내는 예언자를 보았지. 이 미래는 ‘심해의 군주’가 오딘님에게 패배하면서 배운 비장의 한 수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로부터 그를 빼앗고,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마저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인 모양이더구나. 정말이지 집착이 심한 여자다.

─그러나, 나는 결코 광기의 여신에게 주인님을 빼앗길 생각이 없다.

─이제부터 나는 몇 가지의 안배를 준비하겠다.

─그러나 너는 물론이고, 주인님과 다른 이들에게도 말해줄 수 없다.

─가능하다면 전선에서 물러나서 옛 지배자들을 분단시키느라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라리루라에게만은 말해주고 싶지만, 내 능력의 한계로 여의치 않구나. 미안하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의 기억이 아직 둔한 머리에 떠오른다.

꼭 죄라도 짓는 듯한 말투와 표정.

뺨을 스치는 날카로운 칼바람도 그 기억이 주는 아픔보다 쓰라리진 않다.

“유쾌하군! 그 신좌! 그 힘! 불멸하지 않는 신도 의지를 잇는 자가 있다면 그의 꿈은 불멸하는가! 흥미롭구나!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워!”

빛보다 빠른 권능이 날아든다. 그러나 읽을 수 있다. 하나 남은 눈이, 등을 밀어주는 열여덟 개의 룬이 그녀의 몸에 남은 전투본능을 일깨웠다.

‘황색 왕’이라는 존재의 권능을 회피하는 그녀의 뇌리를 기억이 스쳤다.

그때, 그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어렴풋한 혼에 기억이 조금 되살아났다. 진창이 된 듯한 흙탕물에서 마음이 싹을 틔우는 듯 하다.

사실,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분명, 너를 믿고 맡기겠다고 했으리라.

─……고맙구나.

─음. 그랬었지. 나는 사과하러 온 게 아니니라.

─한 가지, 너에게도 말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기억하느냐? 우신을 쓰러트릴 때, 키아라 콜리도는 드워프의 피가 우신과 잘 맞는다 했느니라.

─옛 지배자의 영혼이 몬스터에 씌인 괴물들의 혈맥이, 드워프의 피와 궁합이 잘 맞노라고 말이다.

─태초의 드워프는 우둔한 거인, 이미르로부터 태어났다.

─바깥 우주의 신, 태초의 요툰들이 창조한 옛 지배자와 뿌리가 같은 것이다. 유사성을 따지자면 푸른 장미와 썩은 독사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다만.

─다시 말해서, 인간과 드워프의 혼혈인 너에겐 옛 지배자들의 불멸성을 깰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

─그렇다.

─프랑, 너는…… 옛 지배자가 될 수 있다.

“【〈백토인형〉】.”

무아지경 속에서 주문을 외웠다.

순식간에 손에 잡히는 대검. ‘휘왕’을 참살했던 그녀의 무기였다.

〈백토인형〉은 골렘을 만드는 마법이며, 부속 효과로 무기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이 대검, 【희토성(希土星)】도 그 연장선이다.

모든 마나를 응축해서 무기를 만들어낸다.

작은 산을 세우고도 남을 마나를, 영 점 몇 초 유지되는 질량과 파괴력에 집약시키는 마법이다. 이 대검 한 자루에 깃든 마나는 과거에 노르드가 다루던 거신 골렘보다 높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건 신도 죽일 수 있는 질량과 힘.

골렘을 조작하는 동력과 몸을 대신하는 골렘의 팔이 공격을 감행했다. ‘황색 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위협받을 일이 드문 그의 생존본능이 인간 가죽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했다.

‘단 한 번 사용하면 끝나버리는 힘에 모든 힘을 응축했는가! 이만한 힘, 이만한 파괴력! 옛 지배자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수준이군!’

갑자기 등장한 저 존재는 그만한 강적이었다.

“하여간, 나는 예나 지금이나 예언자와 악연이 깊군.”

그리고, 그 사실은 ‘황색 왕’에게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는 데에 일절 거리낌이나 주저를 갖지 않게 만들었다.

성간우주에 군림하는 그가, 그의 우주를 침범할 권능을 가진 강자에게 온 힘을 다해 맞서는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랴.

노르드가 차원의 문으로 뛰어들자마자, 그녀의 공격이 땅을 후려쳤다.

땅에 발을 디디지도 않고 하늘에서 공간을 밟고 있던 라리루라조차 진동을 느낄 정도의 압도적인 파괴! 이대로 맞았다가는 ‘황색 왕’에게도 심대한 데미지를 입힐 만한 공격이었다.

“맞았다간, 말이지.”

파괴의 범위에서 가뿐하게 벗어나며 ‘황색 왕’은 권능을 끌어올렸다.

【성간우주의 바람】. 그의 권능이자 진정한 힘. 빛보다 빠른 우주의 바람을 지배하는 그에게 이런 느려터진 공격이 맞을 턱이 없다.

‘황색 왕’과 동격의 존재조차 방심하면 휘두르는 순간을 볼 수조차 없는 【희토성】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파리가 앉을 듯 느려터진 검이었다.

피이이이이이이잉─!!!!

바람을 감은 ‘황색 왕’은 옛 지배자들도 인식할 수 없는 속도로 물러나며, 같은 속도로 갖가지의 마법을 쏘아냈다.

그것들 모두가 인간 마법사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고도의 기술이었지만, 그녀들을 해치우긴 적잖이 모자란 견제에 불과했다.

‘피할 수 있어. 막을 수 있어!’

라리루라는 발사한 순간 적중하는, 신이라 해도 피할 재간이 없는 공격을 막고 피해냈다. 그녀의 권능으로 공간을 감지하고 비틀면 가능하다.

【보천의 편자】로는 상성 상 불리하지만, 방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조차 않았다면 로키는 라리루라와 만나기 전에 ‘황색 왕’에게 죽었겠지.

‘프랑 언니는……?!’

상식적인 움직임으론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 살아 돌아온 가족에게 가는 공격을 대신 막아주며 원호해야 하는가?

─파츠츳!

하지만 라리루라가 도울 것도 없이, 다친 몸을 이끄는 그녀의 가족은 능수능란하게 공격을 전부 피하고 있었다. 발동보다 한 박자 빠르게.

의식은 거의 없는 듯 몽롱한 얼굴이면서도, 그 순간의 공방에는 빈틈이 없다. 지난 몇 년간 갈고 닦은 날렵한 달인의 체술에 골렘의 파워를 더한 전투법이었다.

지금 그녀의 신체능력은 가히 노르드에게도 필적했다.

‘나처럼 발동하자마자 차원을 비틀어서 궤도를 트는 게 아니야.’

피해내고 있다. 별들 사이로 부는 광풍(光風)이 뻔히 보이는 것처럼── 예측하는 것처럼!

확실했다. 저 힘은 분명 오딘의 신좌다.

노르드에게, ‘심해의 군주’에게 꿀리지 않는 미래예지의 권능!

‘그치만 어떻게?! 시구르드는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변화였지만, 라리루라는 긴 시간 고민하지 않았다.

‘선배가 혼돈의 이계에 뛰어든 건 프랑 언니를 발견해서야!’

지금의 프랑이 그들을 도와줄 거라고 믿었기에 그는 이곳을 벗어났다.

그러니까, 믿자.

가족을 믿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말인가. 저렇게 다친 몸으로, 의식도 없이 싸워주고 있는 그녀를 상대로 의문을 갖는 게 그녀의 일인가?

라리루라를 위해서 죽어준 사람들이 바라던 게 그것인가?

‘그렇지 않아.’

이긴다.

‘황색 왕’과 ‘휘왕’을 해치우고, 그녀들의 남편을 위해서 싸운다. 멸망한 세상을 구차하게 살아왔던 지난 시간은, 다름 아닌 이때를 위해서였다.

‘언니를 돕는다! 공격이 ‘황색 왕’에게 맞도록!’

그녀들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10년도 넘게 알고 지낸 그녀들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맞아 들면서 놀라운 연계로 적을 몰아세웠다.

‘흠, 그래 봤자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군.’

‘황색 왕’은 이미 예상한 전법에 당황하지 않고 대항했다.

‘차원을 베는 실, 신을 베는 무기. 어느 쪽도 내 심장을 취할 만한 힘이군. 그렇지만 프란체스카는 지금 누군가와 합을 맞출 만한 능력이 없다.’

동작을 보면 안다. 골렘을 다루는 그녀 자신이 골렘인 듯 보일 정도다.

‘라리루라가 프란체스카에게 맞춰준다면 전법은 되려 읽기 쉬워진다.’

그는 전투의 여파로 날아간 돌조각이 포물선을 그리기도 전에 생각을 마쳤다.

‘방해되는 라리루라를 먼저 죽이고, 차원의 문을 부순다.’

안에 들어가봤자 이계가 붕괴하는 몇 분 사이에 노르드를 어쩔 수 없는 건 ‘황색 왕’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밖에서 이계를 파괴하면 노르드는 안에서 죽던가 알아서 밖으로 나올 것이다.

인간을 벗어난 그의 지혜가 책략을 짜올렸다.

【성간우주의 바람】은 더 수준 낮게 비유하면 원하는 대상의 시간을 수백 배로 가속하는 힘이다.

물론 ‘황색 왕’의 체감시간이 늘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스피드가 최고조에 오르면 적들은 그에게 순식간에 살해당하거나, 피하는 것도 급급해진다.

지금까지 모든 적이 그랬고, 이번에도 그러리라.

이미 톱 스피드에 도달한 ‘황색 왕’이 방심이나 과신 없이 철저한 계산을 세우고 변수를 점검할 때, 프랑은 본능대로 전투행동을 반복하며 의식의 바다를 헤맸다.

─다만, 옛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딱히 인간을 벗어나는 건 아니다.

‘옛 지배자’는 종족의 이름이 아닌, 카테고리.

보다 그녀에게 가까운 걸 찾자면, 클래스 제도 등에서 말하는 ‘달인’이나 ‘마스터 클래스’와 거의 같은 호칭이기 때문이다.

종족이 아니라 그 강함과 본연의 힘이, 옛 지배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분류를 가른다.

─나는 이제부터 그 준비를 하러 갈 생각이다. 내 권능, 【천변신의 고삐】가 처음 각성한 때로.

─정보라는 형태로 내 기억과 감정을 편집하고, 과거의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무의식적인 행동원리를 그 시절의 내게 새겨넣어서……

─……그래. 내 입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했었지.

─네 말이 맞다. 인정하마. 불안하다. 성공할 수 있을까? 주인님이 미래를 되풀이해서 수르트에게 이겼던 것처럼, 내 기억을 과거로 보내는 게 가능할까?

─오딘 님과 선지자님이 미래에 희망을 맡겼던 것처럼, 나는 과거에 이 절망을 막을 안배를 남길 수 있을까? 스스로가 의심스럽다. 실패가 두렵다. 혼자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눈앞이 하얘진다.

─하지만…… 이제는 의심하지 않는다.

─네가, 나를 믿는다고 해 줬으니까.

─……후후. 이런 날에까지, 네 웃는 낯은 전혀 변함이 없구나.

─조금 어려우니까 요약해 달라고? 으음, 나는 좋은 교수가 될 자질은 없는가 보구나. 주인님은 좋아하겠어.

한참 동안 고민한 뒤, 그 누군가는 말했다.

─……벗이여. 내 목숨보다 소중한, 내 친구여.

─죽은 뒤에도, 주인님을 사랑할 자신이 있느냐?

또렷한 대답이, 가라앉은 흙탕물 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낸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감정이 가슴을 떨게 만든다.

─……………….

─그렇지. 어리석은 질문이었구나.

─다행이다, 프랑.

─네가…… 우리의 가족이라서.

순간, 프랑의 움직임이 또다시 일변하고.

─투쾅!!

‘황색 왕’이 휘두르려 했던 창이 프랑의 반격에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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