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83화 (982/1,009)

의식이 끝나자 프랑은 오딘의 신좌를 계승했다.

“……엄청 허무해. 그리구 삭신이 무지 쑤셔.”

눈을 뜨고도 반나절 정도는 의식의 여파로 몸을 가누지 못했던 프랑의 간단한 소감이었다.

“저희가 몸을 가누지 못한 건 선배 때문인데요.”

“안 물어봄.”

탱글탱글한 엉덩이에 얼음팩을 얹은 라리루라의 말은 무시했다. 프랑은 손바닥을 뺨에 문지르다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꼬았다.

“프랑, 실감이 안 가?”

“아직은. 그치만, 허무한 건 신좌를 계승해서가 아냐.”

“그러면?”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될 수 있게 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큰 노력과 희생을 치렀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서인지 굉장히 맘이 공허해.”

기억나지 않는 꿈의 내용 따위가 괜스레 마음을 어지럽히며 눈물 흘리게 할 때가 있고, 쓸데없는 말보다는 침묵이 나을 때가 있다.

프랑이 마음을 추스르도록 시간을 줬다. 사람의 위로나 독려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지 않겠는가.

“라리루라, 너는?”

“음…… 지금은 감각이 좀 선명해진 정도네요! 그래도 꽤 느낌이 좋아요! 묘기 연습을 성공해서 감을 잡고 실전에 도전할 때처럼 손가락의 감각이 생생하답니다!”

기억을 잃어도 배운 기술은 몸이 기억한다던가.

말하자면 깨달음, 심득(心得)을 얻고 그 감각만 남겨진 셈이었다. 이제부터 연습을 거쳐서 감각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그게 라리루라의 깨달음이 되겠지.

“음, 응, 으으응……? 왠지 좀이 쑤셔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라리루라는 빨개진 엉덩이에서 얼음팩을 치웠다.

“저희는 연습하고 있을게요! 프랑 언니, 상대 좀 부탁드려요!”

“아, 응! 나야말로 살살 부탁할게.”

그녀들이 진취적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비워줬다.

‘지면 가족이 다 죽고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할 마음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기는 하겠지만.’

다른 아내님들도 미래 베로니카가 남긴 수첩을 탐독하면서 싸움을 앞두고 칼을 가는 중이었다.

‘나도 새 권능에 어느 정도 적응했고.’

힘을 빼고 창을 몇 시간 정도 휘두른 후에 다나와도 잠깐 합을 겨뤄봤다.

템빨로 권능의 가호 버프를 몰빵한 다나는 혼자 싸울 때의 힘은 이전 계승자인 레티티아보다 훨씬 셌다. 전투민족의 피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잔기술은 잘 못 해서 발퀴리에 기술을 그대로 베꼈지만. 저번에 싸워보니까 괜찮더라.”

“걔네들도 근접전은 존나 잘 하니까 걱정 없어. 아마 프레이야도 자기가 땀 흘리면서 싸우는 법을 배우지는 않았을걸. 발퀴리에들의 성과를 누워서 받아먹고 레벨 업 하는…… 교수? 교수니?”

“내가 베낀 거지 걔들이 뺏긴 게 아니란다. 나 죽으면 지들도 소멸인데, 발퀴리에들한테 자아가 있으면 먼저 베껴가라고 아우성이었다, 인정?”

“인정합니다.”

【게르튀르】의 창시자였던 룬 스톤 속 창쟁이 아지매는 아마 마스터 클래스였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딘이 그녀의 기술을 카피해서 인스톨시킨 발퀴리에들도 무술 솜씨는 그쯤 될 것이다.

다나야 뭐 검을 쓰지만, 검술도 비슷하게 신대 출신 영웅을 베낀 걸 테고.

“살다 살다 누나랑 칼전을 해 볼 때가 다 오네.”

“니가 든 건 창이라고 하는 거란다, 석사 놈아.”

“문어 대가리 레이드 갔다와서 박사 달 예정임. 나, 이 싸움이 끝나면 진급할 거야. 그리고 결혼도 할 거임.”

“이야기 막바지에서 화살 맞고 뒤지는 등장인물처럼 복선 깔지 마라. 이번 대련에서 내가 이기면 학계에 로비 넣어서 니 진급 막는다, 븅딱아.”

“내가 이기면 누나는 집에선 무조건 노팬티임. 기한은 나 박사 달 때까지.”

“어?”

그날부로 다나는 노팬티 건강법을 실천하는 이 시대의 선구자가 되었다.

“배틀 시티 안티 룰에 따라 이 팬티는 압수다.”

“앗, 야! 버, 벗기지 마! 씨발, 벗기지 말라고! 야! 노르, 이 개새끼야!”

“멍멍. 누나 팬티 존나 짱 야해 레후.”

다나의 장비 칸과 옷장에서 팬티를 전부 압수한 나는 베로니카를 불렀다.

“신들을 설득할 방법이란 거, 내가 아직 말 안 해 줬지?”

“그랬지. 설명은 뒤로 미루고 의식에 들어가지 않았느냐. 그리고 우선 손에 든 여자 속옷은 치운 뒤에 얘기하자꾸나.”

“이건 엄연히 승자의 전리품인데.”

“……신대인들은 아내의 음모를 잘라 부적으로 들고 다녔다고 하던가. 그 일환이더냐? 그렇다면 아무 말 않겠다. 수치를 무릅쓰고 나도 벗으마.”

“우가우가 원시인 문화 뒤지게 어질어질하네요. 좆밥이 깝쳐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베로니카의 팬티는 받았다. 허리에 손을 넣고 팬티를 끌어내리는 모습이 꼴려서 만류하지 않은 거 맞다. 나는 속옷을 받아서 온도를 쟀다.

“아직 따듯하군. 멀리 못 갔어.”

“내가 그대로부터 멀리 가버리고 싶어지기 전에 그쯤 해두거라.”

“넹.”

해적 안대로도 못 쓸 면적의 끈팬티를 챙겼다. 괘씸한 중2병 여신 같으니.

팬티를 곱게 개서 주머니에 넣은 내가 근엄하게 말했다.

“사티스님 혼자서는 힘들다면, 나도 같이 가서 설득해야지.”

“가다니, 어딜?”

“천국.”

뭘 그렇게 놀라? 땅 밑 저세상은 가 봤으니까, 이번엔 위에도 가 봐야지.

턱을 쓰다듬으며 나는 하늘에 눈을 돌렸다.

“여행의 참맛은 가 본 적 없는 곳에 가서, 만난 적 없는 사람과 만나는 거지. 바로 준비해 줘.”

베로니카에게 조금 더 설명해준 나는 천리안을 켰다.

브류나크의 힘을 빌려서 사정거리를 늘리고, 저 하늘보다 더 멀리까지 천리안을 뻗었다. 정상적인 관측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도 오딘의 눈이라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간 파충류를 닮은 눈을 한 어떤 남신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지만 들릴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신들이 관음증이 있어서 지상을 보고만 있어줄 리도 없기에 나는 심념을 펼쳤다.

─들리십니까…… 성함도 모르는 신이시여……. 지금 당신의 마음에 직접 말을 걸고 있습니다…….

파충류 눈깔의 신이 기함하며 놀라더니 지상을 굽어봤다. 그는 인간 세상을 관측할 힘이 없는지, 구름 바다 같은 천상에서 분주하게 이동했다.

─너는…… 울프헤딘이군. 내게 말을 건 건가?

분수가 있는 웅덩이 같은 곳에 도착한 신이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아마 지상을 관측하는 권능의 산물이 아닐까. 나는 다시 손을 흔들었다.

“맞슴다. 수신료는 발신자 부담이니까 신경 써 주십쇼.”

꼭 신만 인간에게 말을 걸거나, 강림하리란 법 있어?

이제는 인간이 신의 마음에 말을 걸고, 천상에 강림하는 시대다 이거에요.

***

“다른 분들과 대화 나누기에 앞서서 양해를 좀 구하려고 연락 드렸습니다.”

나는 위성도 없이 원거리 통신을 시전했다.

─양해라고 했나? 무슨 양해지?

“저희가 사티스님을 설득했는데, 정작 여러분은 사티스님이 저희의 목적을 전해줘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여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중하게 판단할 일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긴 시간 고민하진 않아.

“그 시간이 긴지 짧은지를 판가름하는 건 저희 인간의 시간 개념도, 여러분의 감성도 아닙니다. ‘심해의 군주’가 다음 수작을 얼마나 일찍 짜낼까. 오직 거기에만 달려 있는 겁니다.”

꼴마초이즘이 가득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가 이렇게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어필이었다.

“여러분이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든 그렇지 않든 저희는 지구로 향할 겁니다. 아, 협박은 아닙니다. 예언자로서 미래를 보고도 현실부정을 하는 건 좀 그래서 그렇죠.”

─……………….

“즉, 여러분의 협력이 있건 없건 【중간 가지】 및 지구── 신인류가 번영한 차원에는 구멍이 날 예정입니다. 그걸 저지하려는 시도도 삼가셨으면 하고요.”

막으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겠지만 말이다.

개입을 꺼리는 저들이 저 위에서 화살이니 천벌 같은 걸 몇 번 날린다고 우리가 쉽게 맞아 죽거나 할 리는 없지 않은가? 가진 힘은 얼추 동급인데.

생각하는 듯 하던 남신의 입이 열렸다.

─우리를 겁박할 셈인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여러분을 도와드린 게 몇 번인데. 오해를 받으니 정말 슬픕니다. 그냥 모두가 납득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나는 가슴을 열고 손을 적게 벌렸다.

“지구의 차원막부터 복구해서 후폭풍이 없겠단 걸 증명하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그래선 저희가 곤란하다는 게 사실입니다.”

─‘심해의 군주’의 개입을 우려하는군.

“캬, 말이 통하시는 분이셨네. 미래에선 그러다 큰일이 났잖습니까? 운명이 바뀌었다지만 ‘심해의 군주’ 년을 족치기 전에 똑같은 실험을 할 마음은 안 들거든요.”

─제안이 있다면 듣겠다. 내가 대표로 전하마.

“아. 예.”

운이 좋군. 생각보다 우리를 성실하게 대해주는 신이었다. 처음에는 생긴 것만 보고 무슨 공포의 신 같은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래서 나도 친절하게 웃었다.

“제안과 내기가 하나씩 있습니다. 제안은 지구 쪽보다 먼저 여러분들이 있는 천상과 이곳 【중간 가지】 사이의 차원막을 고쳐보면 어떻냐는 거죠.”

─후속조치가 어렵지 않은 소규모 실험인가.

“넵.”

차원막이란 값싸게 비유하면 가림막의 일종이다.

지구 쪽 차원막은 ‘심해의 군주’가 개입해댈 수 있으니 거북한 것도 사실.

‘하지만 【중간 가지】의 차원막은 다르지.’

지구랑은 거리가 머니까 개입하기도 상대적으로 힘들어질 것이며, 운명을 비틀 수 있는 나와 다른 신들이 지켜보는데 승산 없는 승부를 걸겠는가?

이쪽 차원의 차원막 복구 실험은 실패해도 즉시 수습 가능한 범주였다.

“이 제안은 여러분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겠죠. 여러분은 자연스러운 수복을 바라고 계시겠지만, 차원 마법 기술력을 보유한 인간이 직접 고쳐놓는다면 당장이라도 저 오랜 악연을 끊으러 가실 것 아닙니까?”

─……다른 신들과도 이야기를 나눠보마. 다음. 내기라는 건 또 무슨 얘기인지도 말해다오.

“크게 보면 제안이랑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미래 베로니카의 수첩을 복붙한 서류철을 꺼냈다.

“여기에는 제 아내이기도 한 여신님이 몇 년에 걸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한, 로키를 몇 년은 일찍 깨어나게 만들 방법이 적혀 있습니다.”

─……로키를 깨어나게 만든다?

“아마 로키를 치료한 분은 의술의 신이실 텐데, 저희 아내가 생각한 방식이 치료에 들어간 로키를 더 일찍 깨울 수 있다면……”

수첩을 흔들면서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씩 웃어주는 나.

“저희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버금가거나, 어쩌면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그거 재미있겠구나. 이놈이 서둘러서 뛰어가길래 관심이 동했는데, 내 감은 여전히 잘 맞아.

이 새끼 보게? 하는 느낌으로 대답한 놈은 나랑 대화하던 신이 아니었다.

호호백발을 기르고 존나 깐깐해 보이는 꼰대의 얼굴을 완비한 신이 웅덩이에 얼굴을 내밀었다.

─사제도 아닐뿐더러, 의사도 아닌 봉사종족이 내 치료법에 이의를 제기해? 인간이란 것들은 신을 좌지우지하려 할 때면 꼭 도발부터 감행하는군.

옹고집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낯짝!

만약 취직하려고 면접을 갔는데 상석에 저렇게 생긴 인간이 면접관으로 앉아있으면 속으로 애미 씨발 소리를 열 번은 중얼거렸을 것이다.

세인트-꼰대가 나를 내려다보며 턱짓했다.

─그렇게 간청하니 받아들여 주마. 내 친히 네 능력을 시험해주지. 우선 【중간 가지】의 차원막부터 고쳐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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