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88화 (987/1,009)

***

“……10년 정도는 영혼 상태로 느긋하게 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어쩐지 조급하게 되살리려 한다 싶었지.”

내가 미래 얘기를 해주자 로키는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탄식했다.

“라리루라에게는 괜히 미안하네.”

“미안해? 뭐가?”

“다비드── 그러니까 별의 자손 중에 한 놈이 그 애한테 지껄였었거든. 내 신좌는 저주나 다름없으니까 받을 생각 말라고. 고위 봉사종족이랍시고 똑똑한 녀석이었네.”

“니는 뭘 또 쓰잘데기 없는 자조나 하고 있냐?”

─딱! 자학하는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놔 주자 로키가 비명을 질렀다.

“악! 무슨 짓이야?!”

“몸이 작아지더니 가성비가 좋아지진 못할망정 애가 감성적으로 변했네. 깝치다가 뒈졌던 산낙지 새끼의 망언 같은 걸 뭣하러 의식하고 앉았어?”

로키의 뺨을 잡아당겼다. 어려져서 그런가. 괜히 조카를 괴롭히는 삼촌 같은 짓을 하게 된다.

나이 차이를 참작하지 않아도, 관계상 내가 더 조카에 가깝겠지만.

“그딴 고민은 다 말아먹은 뒤에 해도 돼. 오지 않은 미래를 고민하고 염병임? 니가 예언자냐?”

“아, 그 예언자가 일어났을 뻔한 미래를 말해줬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미래에서 난 여기 퍼질러 누워 있다가 ‘황색 왕’한테 씹어먹혔을 건데!”

“더 쓸데없는 고민이군. ‘황색 왕’도 뒈졌으니.”

“뭐?”

개괄적이었던 설명에 조금 더 사족을 붙여줬다. 로키의 얼굴이 복잡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잘못 볼 리 없이 확실한 흥분과 기쁨이 서렸다.

“언니의 신좌를 되찾았다고? 시구르드가 죽고, ‘황색 왕’도 꿈속에서 죽었어? 그게 정말이야?”

“궁금하면 속세로 내려가서 직접 들으셔.”

나는 손을 털며 말했다.

“이제 네 상처는 거의 회복됐어. 지상의 신앙이 새 육신에 흘러들어오고 있으니, 만언신의 권능도 강해지겠지. 천상에 신좌가 하나 더 생기겠는걸.”

“……로두르의 권능이라.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지. 아무튼, 우울하던 중에 예상치 못한 희소식이네!”

의욕이 생겨난 건 좋은 일이다. 로키는 손으로 몇 가지 고민거리를 꼽더니, 그중 일부를 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나를 되살린 건 왜야? 전력을 늘리려는 생각이었다면 솔직히 별로 유효한 전략은 아니다? 저 또라이 돌팔이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쌈박질에 서투르다고.”

“전투에 도움이 되길 바란 건 맞지만, 그 전의 문제지. ‘심해의 군주’의 궁전에 가려면 라리루라 혼자만으론 어렵고, 다른 신들이 체력을 소모하는 건 악수니까.”

수준과 격은 차원이 다르지만, 이것도 공성전의 일종이다.

‘그리고 성을 두고 싸우면 보통 공격하는 쪽이 불리해.’

그야말로 미래에서 【중간 가지】에 재림한 옛 지배자들도 다 뚝배기가 터져나가고 말았을 만큼.

차원의 틈새, 공간의 뒤편에 있을 성에 쳐들어갈 방법은 아무리 스무스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전쟁 중에는 활약 못 하더라도 로키의 경험과 힘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미래의 베로니카가 남긴 말을 복붙한 것에 불과하긴 한데, 아무튼 그렇다.

“알았어. 워프용 짐말이 되란 거구나? 좋아.”

“쿨하군. 그래야 내가 아는 로키지.”

“나는 원래 쿨해! 찌질하게 변명하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건 승부에서 졌을 때랑, 불리할 때랑, 또 아니꼬운 놈들이 으스댈 때랑, 그리고, 그리고…… 아무튼 그 정도뿐이야!”

“거 존나 쿨하시네. 과연 니플헤임 담당관이셔.”

“……차원막을 고쳤으니까 내가 굳이 내려가지 않아도…… 아, 제길. 니플헤임에 떨어진 아이들을 보살펴줄 신이 없구나. 이긴 뒤에도 바빠지겠네.”

자문자답 후에 알아서 고개를 젓는 로키.

벌써부터 승전 후를 고민하는 그녀였지만, 지난 일에 매몰돼 있던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내 앞담은 다 끝났나 보구려.”

꼴에 불쾌한 듯 투덜거리며 디안이 손짓했다.

“이제 자네도 지상으로 돌아가서 준비하시게나. 속세의 기준으로 일주일. 그 후에는 개전할 걸세. 혹시 시간이 부족하다면 소베크에게 말을 걸었듯 로키나 사티스에게 말을 거시게.”

“그렇게 하지 뭐.”

일주일이라. 절대 길다고는 못할 시간이다.

하지만 새롭게 힘을 얻은 나랑 아내님들도 그걸 몸에 익히려 절차탁마하는 중 아니던가. 충분하진 않지만 모자란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완벽한 준비는 있을 수 없고.’

시간의 가치와 준비의 철저함은 반비례한다.

일각을 다투는 일이라면 특히 그랬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존버라는 건 타이밍을 재는 인내심이지만, 주식 업계에서 누누이 말하듯 10년을 내다보고 존버할 여건이 안 된다면 차라리 서두르는 게 맞다.

완벽을 추구하다가 실패할 바에야, 가장 적절히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하는 편이 옳을 것이리라.

달인이자 예언자인 내 직감과 경험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쥐락펴락하고서 말했다.

“로키.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 좀 도와줘.”

“고쳐놓은 차원막을 힘자랑하다 찢어먹었댔지? 요령 있게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줄게. 나가자.”

로키는 짧은 다리를 분주하게 놀려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손을 모으며 작은 룬 만다라를 띄웠다.

“눈 잘 뜨고 봐. ᚱ(Raidō)의 룬은 이렇게 쓰는 거야.”

끼리릭, 끼릭…!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듯 공간이 삐걱거렸다. 룬 마법의 힘이 공간의 틈새를 간파하고, 빠져나가는 사용자의 몸을 슬라임처럼 유동시켰다.

“시공간의 흐름은 뚫고 지나가는 게 아냐. 너는 살짝 발상이 무식해. 차원막의 손상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그 흐름에 타는 거지.”

포토샵을 가하듯 공간이 일그러져도 그 안쪽에 있는 육체도 뭉개지지 않았다. 파이프 속을 슉슉 빠져나가는 물이 된 기분이다.

나도 룬을 펼치며 선행하는 로키를 뒤쫓았다.

“억?! 로키!! 너까지 내려가면 어쩌자는 거냐!!”

그제야 황급하게 상황을 깨달은 디안이 외쳤다.

집중하던 나도 눈을 깜빡였지만, 뒤를 돌아보는 로키는 꾸물거리며 뭉개진 얼굴로 씨익 웃었다.

“하늘 위는 지루하거든. 난 따분한 건 못 참아.”

─파앗!!

베로니카가 새겨둔 차원 수복 마법의 에너지를 거의 소모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지상에 발을 내디뎠다.

한때의 유희신이 좌표를 잘못할 리도 없고, 내 눈앞에는 휴스로이트의 내 저택과 아연하게 입을 벌리는 바이콘들이 나타났다.

“오딘 언니의 신좌랑 내 신좌, 그리고 그 근육 멍청이의 망치를 다루는 법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스승이라면 당연히 같은 눈높이에서 가르쳐야지!”

나를 보며 히죽댄 로키는 청각을 곤두세우듯이 귀에 손을 가져갔다.

“아아, 들린다, 들려……! 나를 찬양하는 소리! 현역 시절보다 경건한걸! 그래, 부모는 아이에게 사랑받을 권리가 있잖니!”

우리가 퍼트린 로키 신앙이 상당히 유의미하게 작용한 걸까. 마그멜에 있을 때보다 눈에 띄도록 컨디션이 좋아진 로키가 하늘에 주먹을 내질렀다.

“인류의 아이들아! 나는 돌아왔다!”

“로, 로키님?! 상처는 다 나으신 겁니까?!”

“어라? 바로 알아보네? 으히히. 내 주체 못 할 미모는 이런 몰골이 돼도 변함이 없구나? 이야~ 이거 내 현역 시절의 여신상을 보고 나를 흠모한 신도들이 살짝 불경을 저질러도 용서해야겠는걸!”

“다, 다들 모여! 로키 님께서 돌아오셨다!”

“으헤, 레이틀링, 아델라이데, 안녕! 1달 만이네! 내가 너무 빨랐나?”

폴짝폴짝 뛰며 바이콘들에게도 인사하는 로키.

존나 라리루라가 1명 더 늘어난 기분이었는데, 썩 나쁘진 않았다.

활기라는 건 전파되는 것이라서, 희희낙락 분위기를 주도하는 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이토록 극명하게 다른 것이었다.

우리가 구멍낸 하늘의 차원막에 주먹을 내걸며 로키가 외쳤다.

“가자, 울프헤딘! 기적도 행운도, 본분을 다하는 놈들에게만 오는 거니까!”

결전까지 앞으로 일주일.

천천히 회복되는 차원의 틈새에서 어쩐지 살짝 그리운 고향 냄새가 났다.

이것도 일종의 향수병일까. 유독 된장찌개가 땡기는 하루일세.

***

옛 지배자들의 공략법은 숙지했다.

‘이제는 훈련만이 답이지.’

공략을 알아도 스펙이 후달리면 못 깬다. 우리 가족은 1달여의 훈련을 마무리할 최후의 집중훈련 시기에 들어갔다.

네페르티티의 권능은 3일째 되는 날 완성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고 완벽하게 완성됐다.

그 성과의 MVP는 이번에도 역시나 우리 효녀 브류나크 덕이었다.

“……브류나크, 궁니르의 힘 너무 반칙이야.”

“뺘악.”

“자기가 할 말이라고 그러네요.”

“……브류나크, 아빠를 닮았어.”

“말하는 것 봐. 이제 진짜 애 엄마 다 되셨네.”

운명을 고정하는 창과 운명을 때려 부수는 권능!

서로 간의 상성은 유리하면서 불리하다. 죽창을 먼저, 그리고 잘 찌르는 쪽이 이기는 싸움! 그런 조합에서의 훈련은 네페르티티가 감을 잡기 아주 최적의 환경이었다.

운명이 고정됐다는 건 때려 부수기도 편하다는 뜻이니까.

나는 브류나크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전사는 첫째가 체력, 둘째도 체력입니다. 네페르티티 씨, 밤에만 그런 게 아니라 낮에도 3분을 못 채우고 헐떡이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소모가 큰 권능이래도요.”

“응. 체력증진은 운동이 답.”

“시간이 없는 게 문제죠. 영약도 마스터 클래스에게 가시적인 효과를 줄 정도는 못 될 테고…… 잠깐 교황들 호주머니 좀 털고 와 볼게요.”

시간 남는 바이콘을 데리고 워프.

토르의 권능은 일과 중에도 적용하고 훈련할 수 있었기에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룬 허리띠가 번쩍거리느라 이목은 피해 다녀야 했지만 말이다.

“……권능의 소모를 줄여주는 성유물이라. 그런 편리한 물건은 아는 바가 없군요. 애초에 마스터 클래스 자체가 인류 역사에 몇 명이나 됐었을지.”

“로물루스 교에선 그리 말했답디까? 저희로서도 적당한 물건을 드리기는 어렵겠으나…… 풍요신의 교단에 찾아가 보시면 어떠십니까?”

“로키 님이 돌아오셨다고요?! 이게 로키 님의 새 옥체를 그린 초상화?! 아아, 어쩜 이리도 경건한 모습이실까! 성유물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행히 발품을 뛴 의미는 있었다. 나는 풍요신 교단에서 돌아와서 저택의 훈련장에 있는 로키를 찾았다.

그녀는 라리루라의 차원벽에 묠니르를 휘두르는 프랑을 지도하고 있었다.

극기 훈련인가. 골렘 팔이 묠니르로 벽을 쪼갤 때마다 라리루라가 핼쓱해지는 게 조금 웃겼다.

하지만 로키는 영 불만족스러운지 계속 옆에서 소리쳤다.

“그게 아니야, 프랑! 좀 더 무식하게! 그 망치는 뇌를 비울수록 빨라져! 자자, 복창하렴! 【번개는 무엇보다 가벼우니, 토르의 머리도 그러하다】!”

“【버, 번개는 무엇보다 가벼우니, 토르…… 님의 머리도 그러하다】!”

“존칭은 생략해! 그 바보는 술만 잘 마시면 말 놔도 신경 안 썼어!”

“아핫♡! 그럼 언니는 존댓말 쓰셔야겠네요?”

큰 싸움을 앞둔 것 치고는 평상시 그 자체로군. 좋은 일이다.

나는 스포츠 만화 감독처럼 나불거리는 로키를 따로 불러냈다.

“바쁜데 미안하다. 로키, 잠깐 시간 좀 내줘.”

“엥? 너도 여기 껴서 훈련해도 모자랄 판에?”

“1~2시간이면 되니까.”

로키를 끌고 풍요신 교단으로 간 나는 나름 한 나라의 교황이라는 놈이 울부짖으며 꼬마 여신의 발치에 조아리는 꼴을 짜게 식은 눈으로 보다가, 주문제작 성물을 요구했다.

“훌쩍…… 권능은 곧 심력, 체력으로 이 세상의 법칙을 비트는 힘입니다. 그 효율을 높이는 건 제 식견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나, 지친 심신을 달랠 방법이야 많죠.”

“그럼 그 심신 회복 신성마법 중에 최고로 효율 좋은 스킬을 가능한 덕지덕지 달아주십쇼. 요금은 브리타니아 왕궁에 청구하시고요.”

엘리자베트가 기겁하겠지만 미래를 지키는 국방비를 내 주머니에서 내는 건 너무 슬프잖아? 이게 다 세금의 유효활용 아니겠는가.

“……나는 신성력 셔틀로 부른 거니?”

“투자받은 걸 생각하렴. 템 파밍이 쉬워서 너무 행복하네요.”

이게 돈이 돈을 번다는 그건가. 인맥과 금전을 총동원하자 꼴랑 하루 만에 네페르티티 전용템이 뚝딱 완성됐다.

단, 네페르티티의 반응은 조금 싱숭생숭했다.

“……고마워. 소중하게 쓸게.”

“마음에 안 드세요?”

“……반지가 더 좋았어.”

시발, 미치겠다. 눈 돌리는 것 봐. 존나 귀엽네.

난 참지 못하고 한동안 웃어제끼다가 대답했다.

“프로포즈는 미뤄둡시다. 전쟁 전에 결혼 약속 같은 걸 맺으면 백이면 백 결혼까지 못 가고 골로 가버리더라고요.”

“갑자기 반지 받기 엄청 싫어졌어.”

평소 이상의 무표정으로 쌉정색한 네페르티티가 내 손을 잡고 조몰락댔다.

“……노르드, 절대 죽으면 안 돼. 약속이야.”

“고향 땅에 물리적으로 뼈를 묻을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부모님들한테도 손주 좀 안겨 드려야죠.”

“노르드네 고향, 일부다처제 있어?”

“……이긴 후가 더 걱정이네요, 쓰벌.”

팔찌를 받은 네페르티티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삐엑~ 뺘아~♬”

브류나크도 자기 팔찌 모드를 모티브로 제작한 성물이 마음에 드는지 기뻐했다.

‘인제 보니 이거 커플링이네.’

팔에 거는 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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