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89화 (988/1,009)

네페르티티에게 선물을 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새 사라진 로키는 다시 프랑과 라리루라에게 살아생전 오딘&토르가 쓰던 전법을 가르치러 간 듯 했고, 다른 아내들도 각자 집중 중이었다.

베로니카와 티르시는 좌선을 하듯 명상 자세로 내면세계에서 현실보다 빠른 속도로 마법을 훈련 중이었다.

다나는 어디 있나 싶어서 천리안을 켰다.

우리 눈나는 남는 방을 잡고 이마에 빛의 검을 대며 빡집중하고 있었다.

“프레이야의 권능은…… 옛 지배자의 불사성을 파훼하려면…… 꼭 백일몽의 경계에 있는 존재가 아니더라도…… 가호의 권능을 빛에 담아서……”

뭔가 혼자 중얼거리고는 있는데, 보는 나로서는 집중하기 힘들었다.

왜냐고? 다나가 개쎅스한 슬랜더한 몸매를 훤히 드러내고 있어서였다.

‘왜 알몸인 것?’

우리 누나, 빨가벗어야 집중이 되는 타입이었나.

솔직히 미치도록 야했다. 몰래 숨어서 훈련하는 이유가 있네.

“그때 영성을 깨워주신 여신님을 떠올려서…… 힉?!”

집중하던 다나가 한쪽 눈을 슬그머니 뜨더니만 자기 몸을 가렸다. 그리고는 정확하게 나랑 눈을 마주쳤다. 얼굴이 새빨간 걸 보면 눈치깐 게 맞다.

“……노르 너 이 새끼, 지금 나 훔쳐보고 있지?”

“뭐야 시발. 어떻게 알았어요.”

자기를 보는 천리안의 시선을 자각할 정도라니. 다나는 정말로 신좌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경지에 도달한 모양이다.

“보지 마, 개새끼야! 쪽팔리니까!”

“애초에 왜 벗었음? 섹시하고 환상적이긴 한데.”

“엄마한테 배운 정신집중 마법이 옷 벗고 쓰는 거였다고! 내가 라리루라인 줄 알아?! 노출하면서 좋아하게?!”

“다나 언니!! 지독한 유언비어가 들리는데요?!”

싸울 때 빨가벗고 저러지만 않으면 됐다. 혹시 내가 봤다간 싸움에 집중 못 하고 정신이 팔리고 말 것이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5일의 훈련 후에 남은 이틀을 싸움을 앞두고 명상하며 심신을 극한까지 날카롭게 갈고닦는 작업에 투자했다.

“……………….”

풍족한 환경은 심신의 안정을 돕는다.

부족함 없는 저택에서 복식 호흡을 하며 아침이 밝도록 투지를 가다듬고, 불쑥 어떤 직감이 들며 눈이 뜨였다. 주변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꾸르르륵.

아니, 틀렸다. 빛 한 점 들이치지 않지만 어둠 속 같은 게 아니다.

바닷속 깊은 해구 어딘가의 심해다.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안력을 일으켰다. 거인의 궁전에 온 요정의 기분이 이럴까? 구조물이 비정상적으로 큰 궁전이었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소름 돋게 불길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 떠올랐다.

거리를 재는 게 무의미하리만치 먼 거리도 우리 같은 예언자에겐 무의미하다. 심해의 괴물과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슬쩍 입가를 비틀었다.

“곧 만나러 가마.”

꾸르르륵….

잠에서 일어난 ‘심해의 군주’가 기다리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

결전의 날이 밝았다.

─로키. 너는 멋대로 내려간 김에 거기서 울프헤딘이랑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차원을 이동해.

임전무퇴의 정신인지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사티스는 그렇게만 선언하고 연락을 끊었다. 내가 로키에게 시선을 주자 그녀가 손을 저었다.

“즉시 성에 돌입하진 않아. 옛 지배자의 영역을 마법이나 권능으로 돌파하는 건 소모가 크니까.”

“그렇겠지. 겪어 봐서 알아.”

‘황색 왕’의 영토가 된 아이키븐 섬에 워프하려 할 때도 그것 때문에 대륙의 끝까지 가로질러야만 했잖은가. 이번에도 처음에는 평범하게 지구의 한 대륙에 내릴 예정이다.

“후……. 싸우러 가는 것보다 노르드의 세계에 가는 게 더 긴장된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티르시가 농담하듯이 한 말에 잠시 웃고, 우리 가족은 로키가 연 길로 뛰어들었다. 길을 이끄는 로키를 라리루라가 권능으로 보존했다.

차원을 넘나드는 건 웜홀을 빠져나가는 기분에 가까웠다. 지구의 인류는 물리법칙을 연구한 끝에 세상의 진실에도 거의 근접했던 것일까.

베로니카는 무한하게 펼쳐진 별의 바다를 멀리 내다보았다.

“……저토록 아름답거늘, 무척이나 잔혹하게만 느껴지는구나.”

우주로부터 온 별빛은 무자비한 색채로 빛났다.

사람들이 ‘이 세상’이라고 인식하는 차원과 별. 그건 오직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에 한정된다.

우주를 우리 은하, 다른 은하 거리며 구분 짓는 것만큼 오만한 일이 또 있을까. 땅 위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현생인류에게는 지금 사는 별마저 과분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저 별들은 모두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우주의 아름다움에 홀리는 사람들은 식충식물의 향에 꾀이는 가엾은 벌레일까? 별들의 사이에서 기괴하게 솟구치는 악의를 악의인 줄도 모르고 쫓는 벌레?

다나는 자신의 신좌가 사라지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듯 가슴을 눌렀다.

“……넓네. 정말로.”

신의 권능을 얻고, 신들의 경지에 도달한 우리.

하지만 인간의 지성으로는 차마 무신경하게 볼 수 없는 게 우주의 광활함이었다. 우리 앞을 가는 창세신이자 태초신인 로키보다 오래된 빛도 우주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래도 나는 우주의 광대함과 인간의 쇄말함을 무심(無心)으로 흘렸다.

벌레는 사람을 죽이는 생물이다.

한 마리의 벌에게는 우리의 별도 우주처럼 넓게만 보일 테지만, 어떤 벌의 독침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기에 하등 부족함이 없다.

이 혼돈스러운 우주에 군림하는 존재들보다 더 혼미한 존재가 인간이다.

나는 살짝 압도된 듯한 라리루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긴장 풀어. 초행길이니까 길 좀 잃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놀란 라리루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럴 순 없죠. 저희 업계에서 처음 가는 곳에 사전답사를 가 보고, 장사가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얼른 물러나는 게 제일 중요하거든요♡”

퀴에에에에에에─!!!!

그녀의 대답에 대한 대답은 멀찍이서 들려오는 포효였다.

“장사는 글러먹었겠는데.”

다나는 혀를 차며 혜성처럼 우주에 늘어지는 한 덩이의 빛을 힐끔댔다.

신들의 군세가 형형색색 이족들의 피를 쏟으며 별의 바다를 나아갔다.

우리는 라리루라의 힘으로 별의 바다를 최대한 안전하게 빠져나갔지만, 신들은 조금 달랐다. 별의 바다를 헤매는 이생물체, 주인을 잃은 봉사종족들 사이를 뚫는 것이었다.

“도와드려야 했던 거 아닐까요?”

“내버려 둬. 좀이 쑤셨을 테니.”

라리루라가 질문해도 로키는 싸움을 힐끔거리는 것에 그쳤다.

로키나 라리루라가 체력을 써서 저들을 옮기든, 힘으로 뚫고 나가든 소모는 엇비슷하다. 그러므로 저 봉사종족들과의 교전은 신들이 선택한 것이다.

“저들도 걱정이나 동정을 받을 만큼 나약하지는 않아.”

별들의 빛을 압도하는 광채가 뿜어졌다.

광증에 시달리는 이생물체들을 상대로, 신들은 고함 한 번 외치지 않았다.

너희들에게는 케케묵은 감정을 쏟아부을 가치도 없다는 듯, 방해되는 장애물을 걷어차며 나아간다.

그저 살기등등하게 무기와 권능을 흩뿌리면서, 우주의 거리를 공간을 압축해서 주파한다. 앞서는 우리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여신이 시위를 놓았다.

혜성의 꼬리가 앞으로 나아갔다. 일직선으로 쏜 화살은 주인이 없어서 광증에 빠졌을 뿐, 강함은 별의 자손과 비슷할 존재들을 여신의 화살이 순식간에 일소했다. 로키가 혀를 찼다.

“저 바보가. 힘을 낭비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투쟁심도 없이 힘만 넘쳐나는 전사보다는, 지쳐도 싸울 의지를 가진 전사가 더 강해.”

중얼거린 네페르티티가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우주의 한 구석, 얼어붙듯 차가운 허무도 마음을 나눌 공기 한 점 없어 미적지근한 그곳에 빛나는 익숙한 푸른 별.

나는 녹음이 우거지고 사막이 말라붙은 아시아 대륙을 보며 중얼거렸다.

“꿈꾸던 것보다 훨씬 화려한 금의환향이군.”

여기까지 약 4년.

생각보다 까마득하게 짧았지만, 그래도 너무나 길었다.

방점처럼 작기만 하던 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확 커졌다. 라리루라가 미끄럼틀 같은 웜홀을 넓혔다. 속도가 느려지며 관성으로 가속했다.

인공위성과 우주 쓰레기의 바다를 넘어, 우리는 인류의 과학으로는 관측하지 못할 차원의 뒤에서 차원막을 가뿐하게 뚫고 지상에 내려섰다.

쿠우웅…….

가벼운 착지였지만 10미터가 넘는 크레이터가 생겼다. 코끼리가 밟은 듯한 자국이었다. 신들에게 필적하는 우리의 존재감이 남긴 여파였다.

“스으으……”

깊게 숨을 들이켜다가, 중간에 관두고 퉤 하고 뱉었다.

“이 더러운 공기, 우리 지구가 맞습니다.”

한국보다는 낫지만, 이세계에 비하면 더러운 게 맞다. 중금속이 섞인 듯한 공기 맛. 뒤늦은 실감이 폐를 파고든 공기처럼 혈맥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돌아왔다. 4년 전에 꿈꿨던 것처럼.

“로키 님. 여긴 어디쯤인가요?”

“대륙 이름까지는 모르는데…… 적당해 보이는 섬인가 대륙에 내렸어.”

“오세아니아라고 합니다.”

지구의 중력에 적응한 내가 티르시에게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호주. 그런 이름이에요.”

‘심해의 군주’의 궁전까지는 남미, 아니면 남극 쪽이 좀 더 가깝겠지만, 착지에 실패해서 바다에 퐁당 떨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치자.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엔 캥거루를 보러 갈 수 있겠네.”

북쪽으로 돌아가려는 머리를 의식해서 멈췄다.

아직 강북호로 돌아가기에는 이르다. 기왕 4년 내내 불효자로 산 거, 어깨에 튄 불똥도 다 털고 돌아가는 게 제대로 된 효자 노릇일 것이었다.

슈우우우우우…….

나는 내려오는 사티스와 신들을 보며 노랫가락 한 곡을 기깔나게 뽑았다.

“문어다~ 문어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문어다~.”

적자생존과 종의 멸절, 자연도태의 비극을 담은 낡은 명곡이 구슬프게 호주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요놈의 문어를 사로잡아~ 우리 아빠 보약을~ 해드리면~ 아이구 씹새끼 돌았구나~ 하고 좋아~ 하실 거야~.”

우주 산낙지 탕탕이라. 아버지께 드릴 만한 건 아니군.

호주의 여름은 덥다.

먹지도 못할 쓰레기는 어서 음식물 쓰레기통에 분류해야겠지.

별빛에 홀린 벌레가 태평양에 꼬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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