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란 사랑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다.
따라서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고.
은하수가 촘촘히 박힌 허무의 저편에서 불현듯 현실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그녀는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이토록 우둔한 세계에서 누구보다 지혜로웠기에 끝없는 지혜를 쌓았지만, ‘그리움’을 뜻하는 말을 배운 건 그로부터 한참 훗날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그렇게 그 단어가 뜻하는 감정을 알았을 때.
녹색 프로미넌스에 오른 ‘심해의 군주’는 그녀가 아직 만난 적도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라, 예언자란 이리도 비참한 존재다.
만난 적도 없는 누군가를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해야 하므로.
【……■■.】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운명의 상대.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별을 올려다본다.
정념을 처음 품은 소녀처럼, 그 순수한 감정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그와 만나는 날을 첫 만남보다 전부터, 목메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옛 지배자는 운명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니, 이 얼마나 멋진 축복일까!
모든 일이 운명대로 흐른다면, 그녀는 그저 텅 빈 눈으로 별을 올려다보고만 있어도 됐다. 만날 날만 고대하고 있으면 모든 대소사는 알아서 해결될 것이니까.
굳이 무언가 하려 들지 않아도 미래는 그녀가 ‘본’ 대로 흘렀다.
꿈을 꾸며 잠자고 있어도 그녀의 강대한 사지는 모든 적을 분쇄했다.
외신들이 사라진 우주에 군림하고자 자신을 옛 지배자라고 지칭하기 시작한 이들이 횡행할 때도, 그들을 제패하며 공포의 화신으로 군림했을 때도.
그녀의 마음은 깊은 잠 속에 빠진 채였다.
그녀의 꿈은 잠들었을 때밖에 이룰 수 없으니까.
본디 그녀는 날 때부터 동포의 목을 꺾으며 옛 지배자의 최정상에 오를 운명이었으므로, 그녀의 육신은 운명이 부과한 책무를 다했을 뿐이다.
고로, 그녀는 꿈을 꾸며 기다린다.
전 우주의 명운을 수더분한 애피타이저 삼아서.
그런 그녀의 염세적인 허무는 봉사종족과 다른 옛 지배자들에게는 병적이고 무시무시한 광기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해를 바란 적이 없기에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렇게 물릴 대로 물린 애피타이저를 관성으로 해치워 나가던 그때. 운명의 상대가 조금씩, 아주 얇은 면도칼로 박을 벗기듯 예지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할 무렵.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운명의 날.
──별을 올려다보던 지배자는, 외눈의 여신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
집결한 우리는 태평양을 향해서 비행했다.
아직 ‘심해의 군주’의 영역은 아니어서 이동하긴 상대적으로 편했다. 초음속 항공기에 타도 이보단 느릴 듯한 속도로 풍경이 뒤로 슥슥 지나갔다.
“이미 별의 바다를 건넜는데, 계속 차원의 틈을 열고 이동할 필요가 있어? 이거 꽤 지치는데…….”
“이 동네 사람들한테 관측당하기 싫으면 관둬. 지구엔 인공위성이라는 게 있단다. 그리고 문어년한테 습격을 안 들키면 좋잖아?”
불평하는 로키의 군소리를 일축하는 나.
21세기에 보기 드문 UFO 사진으로 9시 뉴스에 나올 생각은 없다.
아무튼 쾌속 여객기에 탄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이동이 가능해지니 좋네.
라리루라의 체력은 이 작전의 핵심 중 하나다. 로키가 아니었으면 배를 잡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신분증은 좆도 언감생심이라 밀항 말고는 답도 없었겠고.
완전히 권능으로 삼은 만언신의 힘을 발휘하는 로키를 쳐다보던 앙구스가 나한테 손짓했다.
“기척을 숨기는 의미가 있을까? ‘심해의 군주’는 예언자잖아.”
“의미야 있죠. 오딘이나 저년은 가까운 미래는 잘 못 보거든요.”
단거리 스프린터와 마라토너는 다르잖은가?
순수 인간 출신 예언자인 나는 가까운 미래를, 운명의 흐름에 속한 신적 존재인 저들은 먼 미래를 보는 게 특기다. 로키도 저번에 그렇게 말했었지.
“죽음으로 직결되는 게 아니면 먼 미래를 보는 예언자는 코앞의 일까지 하나하나 읽지는 못해요. 만약 읽고 치명적인 함정을 파면, 이번엔 제가 그 위험을 예지하죠.”
“룰이 정해진 소꿉놀이 같네. 적이 미래를 읽는 미래를 내가 읽으면, 적은 또 그 미래를 읽고…… 에휴, 이러니까 예언자들이란.”
앙구스가 투덜거리자 오그마가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
“싸움은 원래가 아이들 생떼처럼 옹졸한 거야.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부정하고, 피를 보게 되더라도 자기 억지를 밀어붙이는 야만과 치기의 결정체지.”
“전쟁의 신이 그런 말을 해도 돼?”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전쟁은 최고로 치졸한 놈이 이기거든.”
─휙휙. 오그마는 버릇처럼 공중에 오감 문자를 그렸다.
“울프헤딘. 어떻게 생각해?”
“뭘요?”
“네 비장의 수를 예지했을까? 예지했다면 어떤 만반의 준비를 했을까? 정면에서 싸우면 저 별의 바다의 군주도 너를 이기지는 못할 텐데.”
비장의 수라는 건 미래 베로니카의 수첩 얘긴가.
그래도 ‘심해의 군주’가 날 이기지 못한다는 건 아부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허언이 아니다. 매우 모순적이 되지만, 예언자끼리 싸우면 그렇게 된다.
‘강함이 엇비슷하면, 예언의 신은 인간 예언자를 이길 수 없다.’
모순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럴 만 했다.
시구르드와 내 싸움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가 시구르드에게 털리는 미래를 봤는데, 정작 그 운명을 거역할 방법이 없다? 그럼 난 처음 한 수를 겨루자마자 초콜릿처럼 사르르 녹았을걸?
힘이 동격이라면 패배할 확률도 높아진다.
그런데 나야 운명을 파훼하면 그만이지만, 문어 대가리 년은 옛 지배자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 말이다.
시구르드는 괜찮았다. 그놈도 운명을 바꿀 수는 있었으니.
신적 예언자들끼리 싸울 때─오딘이랑 문어년이 싸울 때─도 문제는 없었다. 조건은 같으니까.
하지만 ‘심해의 군주’랑 내가 싸우면?
“자기가 뭘 낼지 미리 알려주는 가위바위보죠. 그런데 저만 내는 모양을 바꿀 특권이 있는 거고. 이런 룰인데도 질 만큼 제가 병신은 아닙니다.”
내가 ‘심해의 군주’와 싸우면 백전백승이다.
9년 뒤의 미래에서는 여러 옛 지배자를 뚫느라 지친 몸 상태로도 그년이랑 동귀어진했을 정도!
만반의 준비를 한데다 미래에 비해서 전력까지 훨씬 확충했으니, 승산은 툭 까놓고 90%를 웃돌 것 같다. 그냥 감으로 대충 따진 수치긴 한데, 뭐 아무튼.
그렇게만 풀리면 나도 이기는 것보단 사망자가 없기를 더 바랄 만큼, 케이크를 먹듯 개같이 이길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절대로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뜻이에요.”
프랑이 한참 전부터 공유한 사항을 되뇌었다.
맞다. 우리가 90% 이긴다면 ‘심해의 군주’한텐 죽음의 위기다. 그러니까 운명이 확정되기 전부터 방책을 세워뒀겠지.
그 방책이란 게 뭔지도 뻔할 뻔 자다.
“……기다리고 있어요. 처소에서.”
프랑이 말했다. 미래예지를 발동시킨 것이었다. 사티스가 시위를 튕겼다.
“사냥의 신씩이나 돼서 할 만한 질문은 아니긴 한데…… 뭐가 보이지?”
“되살아난 옛 지배자들이에요. 그리고…… 전원 자의식이 있어 보여요.”
“자의식이 있다고?”
그 말에는 나도 놀랐다. 의외였기 때문이다.
“‘심해의 군주’의 노예 상태인 게 아니고? 며칠 전에 프랑 네가 처음 미래를 봤을 때는 그랬잖아?”
우리 파티에서 탐지를 담당하던 프랑은 오딘의 신좌를 계승하고 기어이 미래까지 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여기 오기 전에도 나 대신 미래를 살짝 봐 줬고.
먼 미래를 보는 프랑과 짧은 미래를 보는 나.
서로 단점을 보완하는 예언자 부부 사기단이다.
“제약을 걸고 풀어준 게 아닐까 싶어. 지배해도 싸움에서 져서 노르한테 죽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리고 옛 지배자들이 세운 대책도 예상대로였구.”
그녀의 눈이 빛나자 앙구스가 침을 삼켰다.
“인간들.”
“전부 이 세상의 사람들이에요. 노예나 대사제, 제물이 되고 싶어서 모여든 신도들. 홀린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의지력이 강한 사람들을 뽑아서 부리고 있어요.”
프랑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나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 니미럴 우주인 팬클럽들.”
그래 시발, 상식적으로 코즈믹 괴물들이 있으면 와! 포켓몬 괴담! 하고 앵기는 공포 영화의 엑스트라-흑우들이 없으면 섭하지.
사람은 벌레에 불과한 누에를 키우며 실을 뽑고 어떨 때는 말벌도 술에 담가서 약주로 만든다.
옛 지배자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긴 했다.
“아깝군.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옛 지배자들의 음모를 막는 파란만장한 탐험기를 찍었을 텐데.”
인간 동충하초 계획이라. 나는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당연히 즐거워서 지은 웃음은 아니었다.
“우신은 옛 지배자가 몬스터에 빙의한 거였죠? 그럼 자기 신도를 죽이지 않고 흡수했다면──”
“이론상으로는 운명에 저항할 수도 있어.”
마법 실력도 뛰어난 오그마는 코웃음을 쳤다.
“궁여지책이지. 말처럼 쉽게 극복되면 운명이라 부를 일도 없어. 라한처럼 인간으로서 제 권능을 갖춰야 간신히 빌어볼 만한 기적인데.”
카네쉬에서 쓰러트린 헤니르의 마지막 따까리. 그놈처럼 신격과 별개로 운명을 극복하는 권능을 깨우쳐야 말이 되는 수준의 억지다.
오그마의 말처럼 인간에 빙의한다고 해도 그건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그냥 빙의한다고 끝나는 일도 아닐 테고.’
오딘을 사칭할 만큼 마법이 뛰어난 ‘심해의 군주’가 추가로 수작을 부렸겠지. 하지만 잔재주는 잘 써봤자 잔재주다.
오그마의 말마따나 저걸로 모든 운명을 극복할 수는 없다.
“궁지에 몰린 나머지 헛된 저항인 걸 알면서도 억지를 부렸다── 고 위장하고 진짜 목적을 숨길 생각이겠네.”
로키가 눈을 반개했다.
“빤히 보이는 속임수지만, 안 넘어가 줄 수만도 없고.”
“뭘 노리고 있건 헛수고할 시간은 주지 않는다. 다들 준비해.”
시위를 계속 당기고 있던 사티스가 활을 겨냥한 각도를 점차 밑으로 내렸다.
“이미 바로 밑이다.”
사냥의 신답게, 사티스는 벌써 ‘심해의 군주’의 처소가 어디 있는지 간파한 듯 했다.
로키가 룬 문자를 넓게 펼쳤다가 마법진처럼 한곳에 뭉쳤다.
이상하게 서늘한 태평양이 일그러졌다. 차원의 벽을 억지로 벌린 것이다.
“울프헤딘!”
“갑니다.”
일행에게 선언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적재적소를 따지면 라리루라가 맡을 일이지만, 오늘은 내 몫이다.
“진심 펀치.”
─빠캉!!!!
흐릿하게 번개를 감은 주먹이 차원을 파괴했다. 몇 번을 쳐도 상쾌하다. 취미가 될까 봐 무서운걸.
콰드드드드드드드득─!!!!
주먹이 파괴한 차원이 나선형으로 회전했다. 꼭 바다에 일어난 소용돌이 같았지만, 회전이 만드는 건 해류가 아니라 어둠이었다.
“내려간다! 라리루라!”
“합동 공연을 해 보길 망정이네요!”
─짝! 라리루라가 합장했다가 벌린 손이 권능을 발휘했다. 닿으면 공간 째로 찢어지는 시공간! 그 파괴의 분류를 라리루라가 낚아챘다.
“여기!”
로키가 손을 휘둘렀다. 룬 문자가 마치 가이드 라인처럼 길을 텄다.
라리루라는 풍어에 성공한 그물을 내팽개쳤다.
촤아아아아악─!!!!
처소에 있는 해수가 전부 뽑혀 나왔다.
공간이 말려 들어갔다.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심해까지 파고들자, 우리는 기이한 포럼의 궁전에 도달했다.
아니, 여기를 궁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이 비틀린 건조물을 궁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개미굴도 뛰어난 성이라고 여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
오그마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냉큼 밝혔다. 보통 어둠이 아니다. 나랑 프랑 외의 동료들은 이 어둠을 간파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광활한 건조물은 산처럼 큰 성의 주인이 돌아다니기 부족함 없이 넓었기에, 우리는 정말 인간의 성에 들어온 개미처럼 왜소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전혀 왜소하지 않을 테지만.
“……왔나.”
잡담에 끼지도 않고 전의를 가다듬던 소베크가 지팡이를 들었다.
어둠에 비늘이 떠올랐다.
찐득한 어둠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도저히 같은 별에서 창조되고 태어나고 진화한 생물이 만든 것 같지 않은 기둥이 크게 진동하며 우리를 감싸안는 무언가의 접근을 알렸다.
기다란 몸통으로 둘둘 둘러싸고 있지만, 포위를 저지하기는 곤란했다.
그놈의 크기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사티스라도 아니라면 유효타를 먹이기 어려울 장거리에서부터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개를 푸드덕대는 듯한 소리가 접근해 왔다.
“냄새 하고는. 초장부터 만만치 않은데.”
로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안녕, 낳은 적도 없는 아들! 꿈꾸다 죽은 노란 아빠의 복수를 할 만큼 효심 깊진 않지?!”
비웃는 로키의 질문에 대답하려는 것처럼 뱀이 쇄도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그건 비늘 하나하나가 단단한 눈알로 된, 꿈에 나와도 잊혀지지 않을 듯 역겨운 뱀이었다. 크게 벌린 입에 빼곡한 송곳니마저 전부 눈알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위치엔 건물 하나가 들어갈 듯 커다란 어둠의 소용돌이가 흙탕물처럼 돌아갔다.
소베크가 파충류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요르문간드!”
우둔한 거신, 이미르의 시체를 파먹으며 저력을 기른 옛 지배자.
라그나로크에서 뇌신 토르와 공멸했던 【중간 가지의 뱀】이 빛을 잡아먹으려는 듯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