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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해의 군주’가 숨어있는 곳으로 달리다가 발을 멈췄다.
“흠.”
차원의 난류를 서핑하듯 타고 도착하자 하늘과 땅이 구분 지어진 은하수 같은 공간이 탁 트였다.
별들이 힘을 잃고 땅에 떨어져서 해수면에만 뜬 은하처럼 땅을 수놓고, 그렇게 모든 별이 떨어진 하늘에서는 파랗고 초록색인 우주가 펼쳐졌다.
브류나크를 쥔 나는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아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시군.”
이 우주에서 단지 자신만이 존엄하다고 말하는 듯한 풍경 아닌가.
내 눈에 비친 ‘심해의 군주’의 요람은 빛을 잃은 별들을 짓밟고 군림하는 고독한 우주였다.
인류가 우러러보고, 신들이 자랑스레 여기는 저 우주의 별자리를 전부 잡동사니처럼 발치에 둔다.
이게 ‘심해의 군주’의 내면을 형상화한 거라면, 저 우주 문어가 보는 세상이란 대체 어떤 곳일까?
미래를 예지하는 권능을 갖춘 광기의 신.
세상만사가 시시하고, 지루하고, 무의미하다.
그 감상은 지루한 흑백 영화를 수백 번도 다시 보는 것에 가까울 듯 하다.
강대한 예언자에게 오늘 현재를 살아간다는 건 스킵 기능도 없는 똥겜 같은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내용 전부를 알고 있어서, 보기도 전부터 지루해지는 클리셰 덩어리 3류 영화거나.
아마 그래서다. 이 우주에 빛나는 별은 없는 건.
‘심해의 군주’가 가진 것 중에 그 문어년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반증(反證)이다.
그 사실이 어설픈 광기보다 더 섬찟하게 다가온다.
나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불쾌한 기분에 혀를 찼다.
“대충 알 만하군.”
‘심해의 군주’에게 우주의 흥망성쇠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해 본 적도 없고 관심도 가지 않는 게임, 영화 시리즈가 어떻게 개판이 나서 끝나든 알 게 뭔가. 멸망하건 부흥하건 곁눈질로 흘려넘기겠지.
십중팔구 그년은 자신의 생사에도 흥미가 없을 것이었다.
이 별의 바다에는 역겨울 만큼 허무와 무관심이 가득하다.
인류가 예지한 우주의 종말, 엔트로피의 끝처럼 공허하다.
하지만 생물의 호불호에는 기본적으로 순위와 농도가 존재하지 않던가. 뒷골목에서 썩은 음식물을 파먹는 길고양이도 더 좋아하는 먹이 정도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혹시, 우주의 모든 것에 이렇게나 관심 없는 눈길을 보내는 년에게도 갈망하는 게 있을까?
있을 것이다. 없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허무주의자에게 살아간다는 건 고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니까.
그토록 지루하고 허무한 시간도 하늘에 장식할 별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여기면 의미가 달라진다.
공허한 하늘이 가져다주는 허무함을 참으며 이 우주의 만물보다 소중한 것을 기다린다.
맞다. 내 머리를 감싸는 별의 바다는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저 하늘은 소중하게 채워 넣을 하나뿐인 일등성(一等星)을 기다리는 보석함이자, 이제야 프롤로그를 맞이하는 무대일 것이었다.
그도 아니면, 그녀가 꿈꾸는 웨딩 로드이거나.
피이이이이잉─.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니는 별들이 나열되며 내가 갈 길을 가리켰다.
이리로 오라는 듯한 속삭임이 귀를 어지럽혔다. 나는 눈을 찌푸리면서도 일단은 안내를 따랐다.
사박, 사박….
별을 밟는 건 깨진 모래시계에서 흐르는 모래를 맨발로 밟는 것 같았다. 시간에 아스러진 별들이 낡은 비디오 영상을 재생하듯 샌드 아트를 그렸다.
백의를 걸친 검은 꽁지머리의 남자가 툴툴댔다.
“교수님. 좆빠지게 일하는 남편 옆에서 마시는 차는 꿀맛입니까?”
“당연히 꿀맛이지 개새끼야. 일생일대의 천익상 프로젝트 중에 애를 배게 만든 남편놈이 낑낑대고 있는데. 느그 업보려니 하렴, 키타이 노예쉑.”
“안전한 날이라매! 안전할 날이라매!”
임신한 아내와 그녀 옆에서 머리를 긁는 남편.
하지만 등을 돌려서 보이지 않는 남자에 비해, 여인은 아예 펜으로 북북 찢어둔 사진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등을 돌리고 있긴 하지만, 별빛이 그린 남자는 내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남자의 곁에는 보라색 곱슬머리의 여인밖에 없었다.
나는 그게 내가 카르미네 대학을 떠나지 않고, 계속 대학에 남아서 학위와 연구에 매진했을 때의 미래일 듯 하다는 추측에 생각이 미쳤다.
아마 ‘심해의 군주’가 예지한, 어쩌면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만에 하나의 미래일 것이었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 보자 별빛은 다시 그림을 그렸다.
“주인님. 회담 일정이 잡혔다만 어쩌겠느냐?”
“가야지. 아틀란티스 하나만으론 인류 사회에서 떵떵거리기 힘들어. 총력을 다해서 드워프들처럼 국가를 세우는 거야. 이름은…… 뉴 아스가르드로 할까?”
“……우리끼리 상의해서 제안하겠다. 주인님은 작명할 생각 말거라.”
“아주 신이란 놈이 장식이네, 장식이야.”
어떤 미래에서 그는 저주에 걸린 신족들의 계도자로서, 그들을 다스리며 사람들에게도 경외받는 현세의 신이 되었다.
“아핫♡ 저 계속 이렇게 놀고 먹다가 몸이 녹슬어버리면 어쩌죠?”
“기름칠해 줄게. 돈과 권력은 노력을 갈음하는 거야. 공연이 하고 싶으면 가끔 홍보 때리고 각국 놀이동산이나 공연장에 찾아가도 되고.”
“꺄앗♡! 좋아요, 해 버리죠! 저희 아이에게 네 엄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유명하고 사랑받는 미소녀라고 말할 수 있을 그 날까지 파이팅이에요!”
또 어떤 미래에서는 참신한 미디어 산업과 언론으로 권력층과 시민층을 휘어잡고,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대귀족이자 사업가가 되었다.
“후후. 이만 기침하셔야죠, 폐하. 당신의 황후가 찾아왔다구요?”
“……좋은 아침입니다. 해는 서쪽에서 떴나요? 노랭이 키타이 노예가 새 제국의 황제가 됐으니, 슬슬 햇님도 서쪽에서 까꿍할 만 한데 말입니다.”
“어머나? 악신숭배자 황제에게 쫓겨났던 가엾은 공녀님과 전쟁 노예 출신 패왕님의 로맨스는 저잣거리에서도 무척이나 인기라고 들었는걸요?”
“그때 화살을 무릎에 맞았어야 했어요. 그러면 후방으로 빠져서 평생 경비병이나 했을 텐데.”
“……흐음. 진료소에서 저랑 만난 걸 그렇게나 없었던 일로 하고 싶으신가 보네요, 저희 폐하는.”
“앗.”
또 어떤 미래에서는 전쟁에서 패권을 휘어잡고 제국 황실의 치부를 밝혀낸 서방대륙의 패왕으로 군림했다.
“교주님. 오늘밤, 둘이서 훈련할 수 있어?”
“……훈련요? 밤의 훈련 얘기는 아니죠?”
“……둘 다 할래. 두 사람만의 예배…… 하자?”
“성녀님이라는 이름이 울겠네요.”
“울지 않아. 출산은 신성한 일.”
“출산까지 가는 과정은 별로 신성하지 않…… 아. 그런 종교였죠, 참. 어떻게 교주가 돼도 맨날 까먹네.”
또 다른 미래에선 흑마법사와 가뭄에 고통받던 사막 국가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모험가로서, 수렵신의 인정을 받고 하토르 교단의 교주가 되었다.
버려진 별들과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보다 많은 혹시 모를 미래들!
그 모든 IF에는 두 개, 아니 세 개의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 미래에선 늘 내 곁에 있는 여성이 단 한 명뿐이라는 점.
두 번째는 그녀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누군가가 펜으로 찢어발긴 것처럼 뭉개져 있었다는 점.
끝으로 세 번째는, 전부 내가 【중간 가지】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은 미래라는 점이었다.
“얼씨구.”
나는 문득 눈에 밟힌 흐릿한 이미지── 날개 갑옷을 입은 금발의 여신과 창을 든 백발의 마법사를 대동하고 초원을 거니는 시꺼먼 전사의 환상을 걷어찼다.
참고로 나로서는 이게 가장 불쾌한 그림이었다. 나는 앞머리를 넘겼다.
“예언도 못 되는 숫제 망상 수준의 점(占)이군.”
사람에 따라서는 꽃 점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모하는 사내를 그리워하는 처녀가 꽃을 따고 또 따서 쌓은 수북한 꽃잎이다. 나는 버려진 꽃잎들을 걷어찼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밟고 차고, 문대고 지웠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그렇게 꽃 점의 흔적을 밟던 나는 별의 바다의 남쪽 끝에서 멈췄다.
어떻게 끝인 걸 알았느냐면 그 밑으로는 어둠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지구 평면설을 맹신하는 사람처럼 자신만의 일념에 빠져 있는 듯한 내면이었다.
꽈드득…!
주먹을 쥐고 처소의 은폐된 공간을 부수려고 한 나였지만, 그렇게 하려는 내 앞에서 차원의 막이 벗겨졌다.
별의 바다가 열렸다.
마치 침대의 베일을 걷으며 침실로 들어오기를 권하는 신부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이대로 발뒤꿈치를 180도 돌려서 귀가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럴 수만도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이게 정신공격의 일환이라면 어지간히도 지략이 뛰어난 년이 아닐까.
“쓰벌.”
소름 돋도록 수줍은 느낌에 걸쭉하게 욕을 토해내며 안으로 진입했다.
고오오오오….
인간의 감수성과 문화를 억지로 흉내낸 듯한 알현실이었다. 아쿠아리움을 방불케 하는 옥좌 뒤의 유리벽으로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심해가 펼쳐졌다.
그 심해의 궁전에는 ‘그게’ 있었다.
흉흉한 6개의 안구는 문어와 해골이 섞인 듯한 얼굴에서 보옥처럼 박혀서 침침하게 빛을 꺼트린 상태였다. 섬 하나를 덮을 듯한 날개는 비바람에 맞은 비닐하우스처럼 꺾여 있다.
턱에서 현자의 수염처럼 자라난 두족류의 촉수 다발은 불을 쬔 넝쿨처럼 쪼그라들었다. 강력하고 억셌을 사지(四肢)는 아직도 핏줄에서 맥을 뛰며 생전의 생명력을 시사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건 분명한 시체였다.
무참하게 죽어 있는, 옛 지배자의 시체였다.
단지, 그 죽고 나서도 사람의 피부에 두려움과 오한을 일으키는 시체 앞에 훨씬 눈길을 덜 끄는 인물이 있었다. 눈에서 빛이 사라진 옛 지배자를 등진 소녀였다.
키는 작고 어린 소녀 같았지만, 몸매는 요염했다.
풍만한 가슴과 물기에 젖은 골반을 숨길 생각도 않고 나신(裸身)을 드러낸 흑발의 소녀!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카락을 자른 적 없다는 듯 긴 머리가 땅에 끌렸다.
‘심해의 군주’가 팔을 벌렸다.
“어서 와. 많이 기다렸어, 노르.”
에메랄드 그린 색의 눈이 사랑스럽게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