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97화 (996/1,009)

공간이 떨고 시간이 울부짖는다.

‘땅거미의 발걸음’은 빨라진 시간의 난류를 그의 권능으로 억누르며, 옛 지배자의 참격을 막아냈다. 시간의 손길이 어루만지자 바위 대검이 소멸했다.

“번잡한 춤사위로다.”

“그러게! 돌아가면 춤 연습을 해야겠다!”

프랑은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돌려주며 예지로 시간의 흐름을 피해냈다.

‘땅거미의 발걸음’은 시간 조작에 유효한 권능을 가진 옛 지배자다.

예지의 권능에 그나마 대처할 수 있는 상위급의 권능! 이제 막 신화를 얻은 프랑으로선 상대하기 귀찮은 정도를 넘어서, 고전을 면하기 힘든 상대다.

“가여우며 위대하도다, 외신의 핏줄.”

단지, 그런 평가는 ‘땅거미의 발걸음’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공격이 드물어지자 프랑은 의문을 느꼈지만, 한 템포 쉬고자 멈췄다.

“후우, 후우…… 재활운동 없는 마라톤은, 살짝 빡세네……”

그녀의 부담감이야 말할 것도 없고, 같이 난류에 휘말린 로키의 체력도 고갈된 듯 했기 때문이었다.

로키는 만언신으로서의 권능을 거의 완성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검사가 갑자기 활을 드는 것처럼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일일 거라고 프랑은 생각했다.

우연한 합의로 생겨난 소강상태. 그에 ‘땅거미의 발걸음’은 질문했다.

“이제 막 유년기를 끝마친 동포여. 어인 이유로 종족의 굴레에 연연하는가.”

“사과하고 싶지는 않지만, 미안. 알아듣게 말해 주면 고마울 거야.”

“왜 사람들 편에 서서 싸우냐고 묻나 보다, 얘.”

턱의 땀을 닦는 로키가 말해줬다. 프랑은 깜빡 고개를 돌릴 뻔 했다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걸 떠올리고 참았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질의응답에 집중해도 무슨 뜻에서 하는 질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표정을 유지하는 프랑이었지만 ‘땅거미의 발걸음’은 전부 꿰뚫어 본 듯 말했다.

“옛 지배자란 계급이자 하나의 경지이요, 어느 운명을 타고나는 존재가 도달하는 별의 응집이다. 각 개체의 호오와 태생과 무관하게, 그대는 이미 우리 동포다.”

“……내가 옛 지배자라는 거?”

“옳다. 그대의 혼은 종족의 굴레를 벗어났으니, 세계수의 신좌를 버리더라도 머지않아 나와 같이 별의 운행을 깨칠 터. 고로 나는 입증한다. 그대의 유년기는 끝났노라.”

적의 말투가 정말로 바뀌었다는 것에 프랑은 좀 놀랐다.

마치 무릎을 숙여서 눈을 맞추듯이, 저 존재는 진심으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려는 모양이었다.

“이 계책, 유희신의 권능으로 보인다. 간단하며 또한 유효하다. 승리할 공산이 높노라고 여겨지는 자들의 시간을 가속하여 결착을 서두르는 것으로 보인다. 면밀하지는 않으나 나름 고뇌한 결과다.”

조금씩 언사에 경의── 동격의 상대를 대하는 수준의 예절을 갖추기 시작한 ‘땅거미의 발걸음’은 차원벽을 살폈다.

“따라서, 너는 애초부터 우리를 멸하고자 그에 걸맞은 준비를 했으리라. 위연한 신격을 갖추고도 종족의 굴레에 얽혀서는 동포와 맞서려 했으리라.”

“……그게 왜?”

“네가 그리 한 이유를 묻겠다. 외신의 격이냐? 우둔한 아버지의 시신이냐? 어떠한 갈망과 결핍이 눈을 뜨기 시작한 그대를 여기 내몰았지?”

간신히 질문을 이해하고 나서, 프랑은 즉답했다.

“노르가 그러기로 했으니까.”

인류의 멸망처럼 더 장대한 기치를 세우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프랑은 자기 본심을 그대로 밝혔다. 길고 장황한 대답을 해야만 하는 상대도 아니니까.

“종족의 굴레인가. 더 이상 그 나무에 둥지 튼 기생충들은 그대의 동포조차 아니거늘, 지배자의 격을 갖추고도 ‘심해의 군주’처럼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구나.”

지금 빼앗은 인간의 육체도 역겹다는 것처럼 ‘땅거미의 발걸음’은 탄식했다.

“……잠깐만. 너 지금 뭐랬어? ‘심해의 군주’가 뭘 어쨌다고?”

“순리를 거스르며 퇴화를 갈망한다. 어리석음을 초월한 광기의 산물일지니, 내가 이해를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를 오염시키는 행위와 같다.”

탄식에 섞인 혼잣말을 흘려듣지 못하고 로키가 묻자, ‘땅거미의 발걸음’은 비틀린 손가락을 꽜다.

“‘심해의 군주’는 종족의 굴레를, 생명으로서의 거죽을 다시 입었다. 신격을 버리고 별의 바다를 벗어났다. 벌레에게 꼬이고자 벌레가 되었다.”

옛 지배자의 육신, ‘백일몽의 영속성’을 버리고 하등생물로 전락했다.

‘무쌍의 만겁’은 그런 그녀의 몰골을 비웃는 듯 했지만, 함께 되살아난 ‘땅거미의 발걸음’은 차마 이해할 수 없는 동포의 선택에 공포마저 느꼈다.

“일견, 현명한 선택이다. 운명을 비트는 혼돈의 총아이면서도 신의 힘을 가진 적수. 운명에 묶인 채로는 이기지 못할 터. 이는 피치 못할 선택이다.”

운명에 구속되지 않고자 인간으로 전락했다.

그런 이유에서 저지른 짓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으므로, 광기도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가리키는 호칭은 광기의 신.

‘심해의 군주’가 인간이 된 건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현명한 존재라면 승산을 높이는 수단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의 거처에 흙발로 들어온 인간과 세계수의 신들을 몰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통하는가는 별개로 치더라도.

그런데 정작 지금 벌어진 상황은 어떠한가?

‘심해의 군주’는 승리하고자 싸우지 않았다. 그 끝에 죽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생사도 승패도, 동포의 부활도 우주의 패권도 전혀 관심 없어 보였다.

그 괴물의 사고와 가치관은 ‘땅거미의 발걸음’의 이해를 격절했다.

날파리에게 반해서 자기 살을 도려내며 파리의 껍질에 몸을 욱여넣는 것 같은 이상행동 아닌가.

그야말로 광질(狂疾).

“동포여. 나는 ‘심해의 군주’의 광기에 휩쓸리길 바라지 않는다.”

그는 생각했다. 발언을 끝마쳤을 때, 적이 취할 반응은 십중팔구 굉장한 수위의 격노일 것이라고.

그렇게 냉정을 잃는다면 좋고, 실패해도 좋다.

그런 진심으로 ‘땅거미의 발걸음’은 말했다.

“‘심해의 군주’는 그 인간을 취하려 할 것이다. 그 외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며, 여기 있는 우리는 그녀의 광증이 낳는 결말을 막지 못하리라.”

“……………….”

“고로, 동포여. 너는 그 인간을 포기하고 처소를 벗어나라. 혼의 탈피를 마치고 지배자로 거듭난다면, 네가 그 인간의 생사에 고집하게 될 일도──”

그렇게 말하던 ‘땅거미의 발걸음’은 눈치챘다.

“……ᚨᚺ?”

그의 눈높이가 낮아져 있었다. 정신적인 얘기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임시 육체에 자라난 두 다리가 없어졌던 것이다.

차원이 다른 힘과 속도로, 의식의 틈을 헤집고 들어온 바윗덩이에 그의 다리는 깨닫지도 못한 채 파괴되었다.

큰 타격은 아니다. 진화 전에도 그는 육신에나 집착하거나 고통받는 종족이 아니었기에. 문제는 그렇게 육신의 1/3을 잃는 과정을 그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방심하지 않았는데도 기습을 당했다. 그 사실에 ‘땅거미의 발걸음’은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사고가 멈췄다.

─콰앙!!

그 방심을 프랑은 더욱 찔렀다. 눈 깜짝할 새에 근접한 프랑이 【희토성】 대검을 휘둘렀다. 바로 정신을 차린 ‘땅거미의 발걸음’이 반격했다.

눈 뜬 채로 코를 베였지만, ‘땅거미의 발걸음’은 상관없으리라고 여겼다.

프랑의 무기, 【희토성】은 골렘 소환술을 극한까지 압축한 찰나의 병기였다. 1초 미만의 시간만 존재하는 질량 병기로 초강력의 일격을 거듭하는 전법이다.

그래서 시간을 다루는 ‘땅거미의 발걸음’에게는 효과가 없다. 주변의 시간을 조금만 가속시킨 채 놔둬도 저 무식한 무기는 권능의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소멸한다.

‘분노로 냉정을 잃었나.’

그렇게 생각한 건 잠시였다.

그는 내면에서 응축한 시간의 흐름을 해방했다. 냉정을 잃었어도 저리도 어리석은 선택을 할 턱이 있느냐고 자기 자신을 질타한 덕분이었고, 그 대처는 정답이었다.

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세월의 흐름을 응축한 격류가 흘러넘쳤다.

권능이 거의 통하지 않는 동격의 적을 죽이는 ‘땅거미의 발걸음’의 필살기. 옛 지배자라도 몸이 미이라처럼 말라붙거나, 바스라질 만한 공격이었다.

법칙을 무시하는 게 권능의 힘이다. 시간을 지배하는 그가 이 정도의 시공간 조작을 일으키는 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말로 놀랄 만한 건 프랑의 대처였다.

세월의 격류에 뛰어든 프랑은 오딘의 권능으로 개조하고 강화한 〈백토인형〉을 사용하며, 작은 별을 창조했다.

크기는 몸을 간신히 가릴 만큼 작다. 창세신의 위업에 비하면 한없이 모자라다. 혹자는 무척 큰 금속 덩어리 정도로 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작아도 별은 별이다.

─츠즈즈즈즈즈즈즉!!!

브로치처럼 달고 있던 견장을 뗀 프랑은 견장을 별의 표면에 내던졌다. 성수로 강화된 훌드폴크의 견장. 공격을 1번만 막아주는 효과가 있는 유물이었다.

당연히 옛 지배자 수준의 적에게는 거의 효과가 없겠지만, 상관없다.

별의 수명은 약 수십억 년.

인간은 유물이 수천 개 있어도 못 견딜 정도로 긴 시간도 우주를 채운 별들에게는 일상다반사다.

휴우우우웅─!!

효과를 다한 견장이 바스라졌을 때, 작은 별은 한계를 맞이한 것처럼 새하얀 플라즈마 덩어리로 일변했다.

그리고 그 담금질 된 별이 공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순간, 프랑은 모루를 박살내는 대장장이처럼 새파랗게 물든 묠니르를 별에 대고 휘둘렀다.

콰과과과과아아아아앙─!!!!

태양에 던져진 듯한 작열과 파괴력에 ‘땅거미의 발걸음’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휘말렸다. 권능을 발휘할 시간도 없이 별의 무게가 그를 메다꽂았다.

반격하려고 내민 손은 이미 팔에서 떨어져나간 뒤였다.

투쾅!! 쿠르르르르!! 콰르르르륵─!!

─쾅!! 쾅!! 쾅!! 쾅!!

권능을 짜내려고 하자마자 푸르스름하게 달궈진 망치가 날아와서 머리를 땅에 쳐박게 했다. 그의 생각을 전부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몸 동작 하나 원하는 대로 취할 수가 없다.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아주 가볍게 느껴지는 무게가 하나 더, 그의 육신에 올라탔다.

프랑은 자신이 밟은 옛 지배자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땅거미의 발걸음’에게 몸과 혼을 빼앗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가엾은 어린아이의 혼만을 보며 말했다.

“장례는 꼭 치러줄게. 안녕히.”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땅거미의 발걸음’이 보게 된 것은 눈앞을 가득 채우는 무쇠 망치와, 망치를 쥔 금속성의 팔뚝이었다.

묠니르를 휘두르는 골렘의 팔.

그게 ‘땅거미의 발걸음’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콰앙!!!!!!!!!

격리 차원이 최후의 일격에 유리 공예처럼 무너졌다.

거대한 크레이터와 성불한 아이의 뼛가루만이 ‘땅거미의 발걸음’이 세상에 남긴 흔적이었다. 승리한 프랑은 기뻐하지도 않고 골렘의 팔과 묠니르를 회수했다.

“……로키 님. 노르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어? 어, 어? 그, 위, 위치는 알겠는데…… 요?”

로키는 말을 더듬다가 존댓말을 쓰고 만 자신을 쪽팔려할 여유도 없었다.

─욱씬. 이미 포션 정도로는 회복을 바랄 수도 없이 강해진 몸이 피로감을 호소했지만, 프랑은 아무렇지 않게 채찍질을 가하며 일어섰다.

“어, 어쩌려고…… 요?”

쭈뼛대며 묻는 로키.

흙먼지를 닦던 프랑은 심호흡을 하고 웃었다.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에헤헤…… 데려가 주실 거죠?”

“……네, 넵.”

로키는 정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곱상한 얼굴 가득 떠오른, 추호도 웃는 듯한 느낌이 없는 미소. 그녀에게는 꽤 기시감이 드는 미소였다.

‘……맞아. 오딘 언니는 분노의 신이었지.’

신좌의 적성이란 건 역시 확고부동한 게 아닐까.

자신의 후계자를 생각하며 로키는 얼른 차원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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