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1000화 (999/1,009)

‘심해의 군주’는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퍼어어어어어엉─!!!!

가스로 된 별의 하늘에 천재지변처럼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다. 그게 인간의 주먹이 낳은 결과라 한다면 그 누가 의심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인간들의 싸움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허황됐지만, 그건 나와 ‘심해의 군주’의 싸움이었다.

“칫!”

팔을 교차해서 몸을 지켰다. 원래 같았으면 조금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여기서 반격을 시도했겠지만 나는 후퇴를 선택했다.

내 공격에 맞춰 목을 내주고 팔을 잘라내려던 ‘심해의 군주’가 처음으로 무표정하게 달려들었다.

“왜 몸을 지키는 거야? 나를 죽여주는 것보다, 그 여자들과의 추억이 더 소중해? 어째서?”

“그딴 것도 모르고 처물어보는 게 니가 맘에 안 드는 이유다, 병신년아!”

“상관없어. 나는 지금 최고로 행복하니까! 몇십 년이라도 좋으니 함께 춤추자! 그러다 보면 전부 잊게 될 거야! 노르의 마음에 나만 남을 때까지!”

몰아붙이는 ‘심해의 군주’. 나는 크게 밀리거나 다치지 않고 몸을 지켰다. 주먹으로 별을 부수고 지반을 휩쓸며 우렁찬 고함으로 지진을 일으켰다.

그녀와 나는 실력이 엇비슷하다.

또한 나는 공격만큼 방어도 특기인 남자. 몸을 지킬 생각으로 맞서면 심한 부상은 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길.’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심한 상처는 면해도 작은 부상은 생긴다. 작은 부상이라도 계속 쌓이고 또 쌓이면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 죽는 건 내가 아니다. 기억이다.

아내들을 잊고 싶지 않다면 극력 방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빌어먹게도 그건 내가 겪어본 어떤 싸움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 나는 내 몸을 아끼지 않고 단련한 무예와 권능으로 적을 공격하는 전법을 애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다지 써 본 적도 없는 창세의 권능으로 몸을 최대한 지켜야 하는 판국이다.

공세에 나서면 상처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심해의 군주’에게 100% 상처를 입게 된다.

낯설고 어색하고, 불리하며 덜 완성된 전법.

나와 그녀가 동격이라면 싸움의 행방이 어디로 기울겠는가?

끔찍할 만큼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변명할 말도 없었다. 내가 결전을 앞두고 예상하고, 준비한 작전들이 싸그리 쓰레기통에 처박힌 느낌이다.

설마 저 옛 지배자가 신격을 버리고, 나를 향한 사랑만 가지고 운명을 초월하는 정신오염 승부를 걸어오다니? 나라고 이딴 걸 어떻게 예측했겠는가!

“망할 년! 이 정도로 미친년인 줄 알았으면 좀 일찍 말할 것이지!”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말해줄게!! 잔뜩, 잔뜩 이야기하자, 노르!!”

염병. 대화가 통하질 않네.

콰아아아아아아─!!!!

‘심해의 군주’가 손바닥을 펼쳤다. 블랙홀이 그 손바닥에 일어났다. 빛과 시공간의 멱살을 붙잡은 블랙홀이 나를 스페이스 문어년에게로 끌어당겼다.

“흡!”

나도 창세의 권능을 끌어올리며 받아쳤다.

쏴아아아아─!! 밀물에 지워지는 샌드 아트처럼 소멸하는 블랙홀.

내가 창세의 권능으로 맞서자 상쇄된 것이었다. ‘심해의 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굉장해, 노르! 적응이 빠르구나! 멋져!”

“나한테 반하지 마라, 애미 터진 년아!”

“너무 늦었어! 50억 년은 일찍 부탁했어야지!”

혀를 차면서 나는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창세의 권능은 그냥 제대로 현실에 뿌리를 내린 힘과 권능으로 받아치는 게 더 효율적이다. 꿈과 꿈을 부딪치는 것보다 헛소리하는 년의 대가리를 후려치는 게 더 빠르고 간단한 건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나는 일부러 창세의 권능을 사용해댔다.

‘나도 적응해야만 해. 태초신들의 싸움법에.’

이런 격전의 와중에서도 난 창세의 권능을 활용하는 법을 깨쳐야 했다.

그게 더 효율적이어서? 틀렸다.

정돈된 권능으로 맞서다간 작은 상처가 누적될 수밖에 없으니까였다.

꿈을 현실로 바꾸는 무궁무진한 전법이다. 그걸 상대하면서 주먹질 원툴? 오만함도 정도가 있지. 그건 ‘심해의 군주’를 깔보는 짓이었다.

‘상처를 입으면 그 깊이에 따라서 기억을 잃어.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는 몸을 사린다.’

나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혀를 찼다. 초조해진 의식이 실수를 낳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면서.

“에헤.”

그럴 때마다 ‘심해의 군주’는 너무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게 기쁘다는 듯 하다. 역겹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게 경멸당하는 것마저 그녀에게는 기쁜 일일 것이다.

‘차라리 걸린 게 내 목숨 뿐이라면 사생결단에 나섰을 것을.’

이 소우주에서 ‘심해의 군주’는 절대적인 신으로 군림하는 존재다.

그러나 정말로 영원불멸하지는 않을 터였다. 내 뛰어난 엘리트 대갈통은 그녀의 불사성의 원리와 그걸 소멸시킬 방법을 눈치채고 있었다.

‘운명을 비트는 힘을 창세의 권능으로 강화해서, 그녀 자신이나 내 상처를 무위로 돌리고 있다.’

궁니르가 가진 운명고정 능력을 더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쓰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 될 터였다.

파훼법도 간단하다. 저 힘을 이루는 건 ‘심해의 군주’의 의지력.

즉, 내 의지력이 그녀의 사랑을 웃돌기만 하면 된다.

‘내가 그녀를 죽이는 운명을 관측하고, 궁니르의 힘으로 고정한다!’

그렇게만 하면 싸움은 결판이 난다. 의지력으로 운명을 휘어잡기만 하면 ‘심해의 군주’를 죽일 수 있다.

창세의 권능을 겨루는 싸움은 꿈과 꿈의 격돌. 의지력 싸움이다.

태초신의 힘, 창세의 권능으로 이 작은 우주를 지배하는 자가 이긴다.

더 강력한 의지로 상대의 꿈을 밟고 우뚝 서는 쪽이 말이다.

“후우우우……”

나는 고민하길 멈추고 수세(守勢)를 취했다.

까짓거 ‘심해의 군주’의 노림수에 어울려주자.

잡념은 버렸다. 내게 목숨보다 소중한 아내들에 대한 걱정마저 머릿속에서 비웠다. 생각을 지워낸 후에 의식을 가능한 ‘심해의 군주’에게 집중했다.

쏴아아아아아─!

내 의지가 ‘심해의 군주’의 소우주에 개입했다.

허무한 우주에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밤과 낮이, 푸른 하늘이 생겨났다. 나의 내면세계이기도 한 초원이었다.

‘의식을 집중해라. 분노를 끌어올려.’

저 맹목적인 사랑보다 거센 분노의 불길을 불태워라.

쿠와아악─!!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에서 야수회귀의 마나가 뿜어졌다. 구신의 마나와 분노가 블랜딩된 하얀 태양이 난폭하게 불타올랐다.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건 아니꼽지만, 잡생각을 하면서도 다치지 않고 맞겨룰 만한 적이 아니다.

나는 ‘심해의 군주’가 내뱉는 한숨을 보았다. 그 눈이 움직이는 곳을 보고, 다리가 뻗는 곳을 보며 촉수가 노리는 술수나 마나의 흐름을 살폈다.

내 모든 의식을, ‘심해의 군주’에게만 집중한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아하. 아하, 하아아아아…!!”

내가 오직 자신에게 집중한 것만으로도 ‘심해의 군주’는 세상 모든 걸 손에 넣은 것처럼 황홀하게 숨결을 토해냈다. 빛살처럼 날아오던 속도가 늦춰졌을 정도다.

“그래, 노르…… 그거면 돼. 나를 봐. 나를 죽일 방법만을 생각해!”

희로애락이 전부 충족된 것처럼 허리를 떨면서 ‘심해의 군주’가 웃는다.

“최고야, 노르!! 생애 최고의 데이트야!!”

‘심해의 군주’가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스스로 몸을 던졌다.

몸에 들끓는 애정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육탄전을 시도하는 그녀였지만 나는 미동도 없이 받아치며 흘러넘겼다. 촉수 한 가닥을 잡고 땅에 후려쳤다.

“아아아아!!!!”

쾌락 섞인 신음을 지르며 지면에 깊이 꽂혔던 ‘심해의 군주’가 대륙의 지반을 엎었다. 해일처럼 바위가 쏟아지자 나는 오감을 곤두세우며 멈췄다.

인간 국가 하나를 10초면 멸망시킬 대재앙이 내 온몸에 쏟아진다.

“좆까고 니 촉수로 덤벼, 개년아!”

“그렇게 말할 거면 쫓아내지 말아줘! 네 온기를 몸으로 느끼고 싶은걸!”

창세의 권능으로 만든 지각운동을 상쇄시켰다. 바위 해일을 뚫고 나타난 ‘심해의 군주’를 쳐냈다. 반격은 생각하지도 않고 방어하다가 후퇴했다.

내가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던 건 내가 다치는 게 아내들이 다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다. 그렇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얘기가 다르다.

이 싸움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게 바로 아내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아내들이 날 걱정하며 말했을 때처럼, 나도 내 몸을 아끼며 싸울 날이 오고 만 것이었다.

‘……망할.’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기억도 어딘가 먹칠 된 듯 느껴지는 건.

중요한 걸 잊어버렸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뭘 잊었는지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다.

우주를 창조하고 파괴하며 ‘심해의 군주’와 나는 수천 차례 부딪쳤다.

콰과과과──!!!

촉수를 받아쳐내고 방어에 몰두했다. 접근하는 족족 물러나거나 쫓아내고, 때로는 수십 광년을 쭉 후퇴하며 도주극이나 다름없는 회피를 시도했다.

그녀만을 보며 혈투를 벌였다. 가끔씩 둔탁하게 쌓인 아픔이 사라질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창세의 권능을 다루는 기술은 그럴수록 더 능숙해졌다.

내면세계를 묘사한 초원에 해가 뜨고 달이 떴다.

낮과 밤이 초고속 카메라 영상처럼 느릿하다가 수백 배 빠르게 재생한 비디오처럼 지나갔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며, 보름이 된다.

보름은 어느덧 1개월이 되고, 2개월을 넘었다.

최소 2달은 지났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나나 ‘심해의 군주’나 몸은 지치지 않고, 체력이나 마나도 고갈되지를 않았다. 이게 악몽이라면 깨지 않는 최악의 악몽이다.

집중이 해이해졌다.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문다.

“다른 데 정신을 팔면 못 써, 노르.”

요염한 몸이 순식간에 내려앉고 돌려차기가 내 옆구리를 찼다. 갑옷과 마나 코팅이 막았지만, 그 방어를 뚫는 위력이었다.

내상으로 입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아하하…… 아하하하하……!! 콜록, 콜록……!!”

물론 그 대신 ‘심해의 군주’도 옆구리에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났지만, 주고받은 상처는 내 쪽이 깊었다.

또 무언가를 조금 잊고 말았다는 자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잡념이 계속 치솟았다. 분노와 증오가 침전물이 가라앉는 것처럼 뱃속에 잠기자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다른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언제부터지? 나도 모르게 저년을 그녀라고 부르고 있었어.’

저년, 씨발년, 문어대가리 썅년 등등으로 부르던 게 어느샌가 ‘그녀’라는 호칭으로 바뀐 상태였다.

쌍욕을 퍼부어도 모자랄 상대인데 대우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이다.

아마도 처음 상처를 입었을 때부터 그랬었던 듯 하다.

당연히 내 의사가 아니다. 타의에 의한 영향이다.

그걸 깨닫고 나자 알아차렸다. 심해의 군주는 내 기억이나 인식 자체를 건드리고 있었다. 내가 아내들을 잊고, 오직 자신만을 보도록 말이다.

“후우……!!”

─콰앙!!

정신을 차리려는 마음으로 몸을 고치는 썅년을 후려쳐서 날려보냈다.

“아하하! 아직 1년도 안 지났어, 노르! 벌써부터 잊어버릴 정도라면 그 여자들도 노르한테는 별로 소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행복하게 웃으며 심해의 군주는 터졌던 얼굴을 고쳤다.

나는 저도 모르게 집중이 흐트러졌지만, ‘심해의 군주’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싸워도 처음 만났을 때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겠지. 분노는 영원하지 않고 증오는 정도를 넘으면 차갑게 식는 감정이다. 거세게 불태워도 몇 달, 몇 년을 계속 유지되지는 않는다.

내가 예르나를 향한 복수심을 일부러 아껴뒀던 것처럼.

증오엔 한계가 있다. 분노에는 역치가 존재한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다.

“노르, 노르, 노르! 몇 번이고 불러줄게! 노르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언제든 네 귀에 머무르도록!”

증오는 사랑을 이길 수 없다.

남을 해치려는 증오가 남을 사랑하는 연정보다 강력할 수는 없으니까.

다시 끌어올린 증오는 1년이 지나자 사라졌다. 분노를 터트렸지만 반년 이상 가지 않았다. 내가 짜낸 증오와 분노는 놀라울 만큼 계속됐지만, 그 결말은 항상 같았다.

피가 튄다. 내 피였다. 상처를 보듬는 촉수들이 악마의 계약처럼 아픔을 달래고 기억을 가져간다.

덧칠됐다. 덮어 씌워졌다.

모든 과거와 미래가 바뀌며, 뭐 하나 비틀리지 않는 게 없다.

“에헤♡ 노르, 잡았다.”

심해의 군주가 나를 끌어안았다. 2년이 지나서 바닥나가던 증오를 다시 터트리려던 찰나여서 그 살기라곤 없는 포옹을 순간 받아치지 못했다.

─푹푹푹푹푹!!!!

‘심해의 군주’는 촉수로 자기 몸을 뚫고, 껴안은 내 배에 바람구멍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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