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푹푹푹!!!!
‘심해의 군주’는 촉수로 자기 몸을 뚫고, 껴안은 내 배에 바람구멍을 냈다.
─우드득!!
나는 그것보다 먼저 ‘심해의 군주’의 머리를 세 바퀴 돌려놓았지만, 해봤자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무릎에 맞고 바닥을 구른 ‘심해의 군주’는 내게 예쁘게 보이려는 것처럼 목을 손수 역방향으로 세 번 돌리고, 뼈를 맞추더니 뺨을 쓰다듬었다.
“아하, 에헤헤헤, 에헤헤♡ 벌써 뺨도 만져줬네. 겨우 2년 차인데 진도가 살짝 빠른 거 아닐까?”
“……우주 문어는 시간관념도 플라토닉하시군. 수천억 살 먹은 운석 같은 거랑 사귀시지 그래.”
욕설을 토해냈지만, 의미가 없다는 건 안다.
굳이 도발하지 않는 건 그래서다. 죽음조차 받아들였던 그녀에게는 내가 말을 건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준 증오, 분노는 그녀에게 조금도 고통이 아니다.
목이 비틀리고 촉수가 뽑혀서 심장이 박살나도 ‘심해의 군주’는 그저 웃는 얼굴로 나를 사랑했다.
신격을 내던지고 예지를 버린 옛 지배자.
그런 그녀가 품은 애정은 내가 예측할 수 있는 어떤 미래든 가뿐하게 웃돌았다. 내 살의마저도.
내 분노와 증오는 그녀의 사랑을 이길 수 없다.
감정의 총량이 까마득하게 모자라다. 의지력의 단위가 비교를 불허했다.
거절, 욕설, 비난, 경멸. 모든 악의를 퍼부어도 그녀의 애정에 얼룩을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저 꾀꼬리처럼 우는 목에 창을 박아넣고 증오를 토해내거나, 분노에 몸을 맡겨서 부드러운 나신을 수백 갈래로 찢어도 그녀의 사랑은 변함없겠지.
내가 가진 어떤 강함도 ‘심해의 군주’의 사랑을 짓밟기엔 역부족이었다.
미래의 내가 그녀를 이겼다고?
당연히 그랬겠지. 천공신, 해신, 옛 지배자들의 대사제, ‘심해의 군주’를 쓰러트리고 죽였을 터다.
하지만 그건 꿈속에서 계산한 가짜에 불과하다. 계산된 시뮬레이션, 굴러가는 차가운 의지에 내가 모르던 저 강렬한 감정을 변수로 짜 넣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노르, 노르, 무서워할 것 없어. 100년 안으로 어째서 나랑 싸우고 있는 건지도 잊게 해 줄게!”
운명에 흐름에 귀속된 신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저항하고 맞섰지만, 거기에도 한도가 있었다. 상처는 조금씩 생겨나고 의지력의 싸움에서는 한시도 이겨내지 못했다.
“왜 나를 죽이고 싶었는지 잊고, 다시 100년이 지나면 싸울 의지가 줄어들겠지? 또 또 100년이 지나고, 지나고, 또 지나면 혹시 노르도 나를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도 난 언제까지든 노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테니까!”
밀려난다. 숨쉬기가 힘들다. 아픔이 사라지는 게 어떤 상처보다 쓰라렸다.
부딪혀 오는 감정에는 어떠한 계산도 없었다.
우리가 주의하던 함정? 그딴 건 있지도 않았다. 꾸릴 필요도 없었으리라. 그녀가 가지고 있던 건 사악한 비수가 아니라, 열화와 같은 연정이었으니.
야수와 같은 힘. 미래예지. 성뢰신의 권능. 뇌신 토르의 신좌. 궁니르.
어떤 신보다도 강한 오딘의 후계자.
광전사 울프헤딘.
그따위 하찮은 이름값이 한낱 여인의 사랑보다 강할 리가 없었다.
신의 힘이 인간의 의지를 초월할 수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에서 으뜸가는 광기.
자신을 죽이는 남자를 사랑하는 광기의 여신을, 대체 어떤 증오와 분노로 욕보일 수 있겠는가.
“쯧……!”
다시 수백 일이 지났을 때, 내가 방어한 팔뚝에 촉수가 휘휘 감겼다. 찢어내는 것보다 빨리 여린 팔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넘어트렸다.
─쿵!!
힘 차이가 의미 없어지는 운명의 강제력이었다. 내 팔을 다리로 억누른 ‘심해의 군주’가 배에 올라탔다.
“하아…….”
─부르르. 그녀는 나를 뭉개는 부드러운 나신을 흥분으로 떨었다. 나한테 죽은 횟수가 4자리 수를 넘을 텐데도, 그 모든 죽음이 사소한 선물이라도 되는 듯 했다.
나신으로 내게 올라타며 ‘심해의 군주’는 홍조를 띄웠다.
“……에헤, 조금 남사스러웠나? 그치만 노르는 야한 걸 좋아하지?”
“니가 다이어트 전에 몇 키로였는지 생각해라. 무거우니까 저리 꺼져.”
불꽃과 얼음의 마나를 회전시켰다. 폭풍이 몸을 흔들어도 ‘심해의 군주’는 알 바 아닌 듯 웃었다.
“나를 쫓아내도 소용없어. 여기에는 나랑 노르 말고 아무도 없는걸. 노르가 날 사랑해주면 우린 이 세상의 아담과 이브가 될 수 있어.”
그녀를 죽이려 하는 나를 쓰다듬으면서 ‘심해의 군주’는 내 뺨을 긁었다.
“이 우주는 노르랑 나만을 위한 세상이니까.”
조금 더 깊은 상처를 내려고 하면 마법 준비를 멈추고 반격했겠지만, ‘심해의 군주’는 그 선까지 전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아주 얕은 상처만 냈다.
“있지, 노르. 지금은 몇 명이나 기억나?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3년도 안 지났을 테고, 10년 안에 모두 잊게 해 줄게.”
─뚜둑!!
‘심해의 군주’가 내 목에서 뭔가를 뜯어냈다.
“이런 못생긴 장식을 준 여자가 누구였는지도.”
그녀가 흔드는 검은 끈이 눈에 들어왔지만, 난 직접 보면서도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목에 찬 걸 보면 내가 달아둔 게 분명할 텐데도.
─……생각해보면, 그대여. 나의 소중한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받기만 했지, 무언가를 돌려주었던 적은 없구나.
─이렇게 말하면 그대는 필시 그렇지 않다고 할 테지만, 그렇지 않은 게 아니다. 마음은 물건으로 남을 때가 가장 오래 가는 것이야.
아니, 어쩌면, 내가 직접 단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겠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 것 같았는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시시한 물건이네. 하찮은 솜씨에 질 낮은 재료. 이딴 걸 달고 있을 필요 없어, 노르. 좀 더 어울리는 옷이랑 목걸이를 준비해줄게.”
하지만, 그 끈을 휙 내던지는 모습에는 분노가 치민다.
나는 더욱 분노를 짜냈다. 야수회귀의 마나마저 반응할 만큼 강렬한 분노가 뱃속에서 쿵쾅댔다.
“……에헤, 화났어? 그런 표정도 멋져.”
거기까지 분노해도 ‘심해의 군주’의 사랑과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다.
내 위에 엎드린 그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랑해, 노르.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애틋한 얼굴로 ‘심해의 군주’는 입술을 내밀었다. 그 동작은 너무나 풋풋하고, 처음 하는 키스라는 걸 첫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색했다.
그렇게 그녀의 애정이 내 입술에 닿으려 하며, 아직 그딴 개 같은 짓거리에 어울려줄 마음 따위 없었던 내가 절대천공영역을 펼치려 했을 때였다.
“이 세상 누구보다 더? 건방진 소리를 하네.”
─번뜩!! 제 3자의 목소리가 유성 같은 섬광의 꼬리를 이뤄냈다.
안색이 바뀐 ‘심해의 군주’는 나를 놓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뜨거운 피가 얼굴에 튀었다. ‘심해의 군주’의 목에서 튄 새빨간 혈액이었다.
“꼴에 꽤 잽싸네.”
─휙. 빛의 검을 치운 여인이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같은 말이 하고 싶으면 최소한 우리 6명은 제치고 떠들지? 이딴 어두컴컴한 데 숨어서 몰래 남의 남편을 덮칠 게 아니라. 이 양심도 없는 문어 새끼야.”
“……………….”
표정이 사라진 ‘심해의 군주’는 마네킹을 방불케 하는 얼굴로 침묵했다.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아는 듯, 하얀 날개를 접은 여인은 인상을 썼다.
“뭘 그렇게 노려봐? 뒤질려고.”
그녀는 내가 감고 있던 검은 끈을 매개체로 이 세상에 도달한 것처럼 끈을 자기 목에다 감았다. ‘심해의 군주’는 그러건 말건 아무 말이 없었다.
코웃음을 치던 여인은 갑자기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야, 망할 남편놈아. 졸린 거 아니면 일어나. 나 혼자 싸우다 뒤지면 장례 치를래? 어머님께 실은 아내가 6명 있었는데 혼날까 봐 1명 줄였다고 하게?”
모르는 사람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였다.
“……다나, 맞지?”
하지만 나는 무아지경으로 입을 열었다.
지워지고, 먹칠 돼도 잊히지 않는 게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그럼 나지 로키 님이겠니, 남편놈아. 아주 그냥 걸레짝이 다 됐네.”
콧방귀를 뀐 다나는 픽 웃고서 ‘심해의 군주’를 매섭게 노려봤다.
“나도 등에 안 어울리는 날개가 자라긴 했지만, 척추에 문어 다리를 붙인 미친년이 잘도 우리 서방님을 개 패듯 패줬네. 살다 살다 불륜현장을 다 급습해 보고, 덕분에 별 좆같은 경험 다 해 본다?”
“……………….”
“네 손에 죽은 아스가르드의 신들, 베로니카의 선조님들을 대신해서 이 베르베이아 박사님이 교양 강의를 해 줄게. 고마워해. 수강료는 무료니까.”
다나는 못난 학생을 가르치듯이 싱긋 웃었다.
“너한테 남의 걸 빼앗아서 행복해질 자격 따위 없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짓밟아댄 이기주의자년.”
“……사라져.”
‘심해의 군주’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기보다는, 없애야 하는 버그 파일을 음성인식으로 지우려는 것처럼 말했다.
“──나와 노르의 세상에서, 나가.”
“누구 맘대로? 노르랑 키스해도 되는 건 우리뿐이야.”
그 찰나, 빛과 어둠이 혜성의 격돌처럼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