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밖으로 뉘엿뉘엿 해가 졌다.
내가 물구나무 자세로 그랜절을 하며 우리들의 지난 4년을 설명하기까지 무려 12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 평범한 아파트 거실에서 얼마나 많은 마법과 환상이 펼쳐졌는가는 입 아프게 떠들 것도 없었다. 설득력은 메신저와 연출에 달렸으니.
“노르드…… 노르드란 말이지.”
아버지는 제정신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까신 양주─이세계 위스키─를 원샷 때리시고, 근엄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그래, 우리 아들 이름이 며느리들이 부르기엔 어려웠겠지.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이해했다. 너희 세상에서 그렇게 불렀다면 우리 앞에서도 편하게 부르거라.”
“네, 네에……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신이 내린 듯 나를 훈육하시는 모습을 봐서일까? 악신 상대로도 패기 있게 맞서 싸우던 우리 아내님들은 거의 호랑이 입에 물린 하룻강아지처럼 얌전했다.
“미치겠구나. 믿을 수가 없는데, 믿어야 하네.”
“아버님. 한 잔 따라드릴게요.”
바로 병을 잡고 예의 바르게 따르는 라리루라. 자기소개 때의 TMI로 깎인 점수를 회복하려는 건 아니겠지.
“……고맙구나. 프리실라 양이라고 했었나?”
“네!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세상에선 예명을 애용했지만, 아버님 어머님께서 본명으로 불러주시면 너무 기쁠 거에요!”
“허어.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할꼬.”
아버지는 불편해하면서도 기특한 눈치셨다.
“그리고 너는…… 하아.”
반대로 나한테 박히는 시선은 기특해 하면서도 불만스러우시다.
“그래, 정말 대단하더구나. 어디 가서 내 아들이 이렇게 듬직하다고 자랑하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만큼 대단한 얘기였다만, 이게 참…… 하아……”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
그러실 만도 했다. 사실 조금 전의 소개는 내가 봐도 상당히 심각했으니까.
“그래도 그 뭐시냐, 믿어는 주시네요?”
“그래, 자식아. 한 번에 소화하기 힘들 이야기를 우르르 쏟아내니 사기 계약 당하는 것마냥 애미고 애비고 어어어 하는 사이에 넘어가게 생겼구나.”
“헤, 헤헤헤…….”
“어쭈? 웃어? 풍 맞을 불효자 놈아. 아들 하나 낳는다고 낳아서 길렀더니만, 두상도 예뻐지라고 애지중지 보살펴준 똑똑한 머리로 아주 죽으려고 환장을 하고 다녔더구나.”
“뎃?”
“이 애비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아들 살아 돌아왔다고 떡 주러 와선 ‘그런데 우째 강 씨네 아들내미는 볼 때마다 같이 있는 아가씨가 바뀌어야~’ 하면 우리 아들이 하도 잘나서 며느리들이 껌뻑 죽는다고 해야겠어.”
이 현란한 혓바닥-펜싱. 우리 아빠가 맞습니다.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얹고 말을 잇지 못하시던 어머니가 타박하시는 아버지의 등을 힘없이 쳤다.
“여보, 그만 해요. 북호 얘기 못 들었어요?”
“내가 들었으니까 이러지. 우리 아들놈이 남의 세상 싸움에 휘말려서 몇 번이나 죽을 뻔하다가, 진짜로 죽고 살아나고, 또 죽고, 살아나고……”
가슴을 두드리던 아버지는 체한 걸 소화하시는 것처럼 숨을 뱉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됐으면서, 아득바득 예까지 혼나러 와서는 한심한 애비한테 굳이 맞아주기까지 했다는데, 내가 어찌 태연하겠소.”
“……넵?”
다시 나를 훈계하는 말씀이겠거니 해서 물맞은 똥개처럼 가만히 있었는데, 뉘앙스가 좀 이상했다.
저래서야 꼭 내가 아니라 아버지 자신을 탓하는 말씀 같지 않은가.
“뭘 놀라고 있냐, 못난 놈아. 우리는 진작 니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아들놈은 저 험한 세상에서 몸을 던져가면서 애미 애비 품으로 돌아오려 하고 있었는데, 우린 널 찾으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단 말이다!”
내가 놀란 눈치자 아버지는 계속 가슴을 치셨다.
“어…… 아버지?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아요?”
내가 아는 게 맞다면 실종되고 5년이면 호적상 사망 신고를 올릴 수가 있게 된다고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CCTV, 주민등록번호처럼 신분 증명과 실종자 수색이─상대적으로─ 유리한 한국 아닌가.
그런데도 4년이나 실종자를 못 찾았다?
수사기관의 태만이 아니라면, 죽었거나 고의로 잠적했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인 생각이다.
게다가 나는 바닷가에서 떨어져서 실종됐으니, 목격담이나 바닷속에서 떨어트렸을 스마트폰 같은 게 발견되면 대충 물고기 밥이 됐을 거라고 봐도 할 말이 없다.
“어쩔 수 없다고? 개소리 말아라, 이놈 자식아!”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셨다. 당신께 화가 나신 것이었다.
“4년이었다! 네가 실종된 지도 무려 4년이었어! 그런데 그 고생을 하며 돌아온 아들한테 매질이나 하고!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야……!”
“그니까 아버지. 아버지 반응이 정상이라니까요.”
기이하게도 실종된 본인과 찾는 가족의 입장이 정반대인 우리였다.
그도 그럴 게, 우리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일단 내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건 팩트. 몸도 성하니까 어디 감금됐거나 험한 꼴을 겪다 온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주 당연하다.
마나를 깨우친 후로 얼굴에서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지, 떡대도 커졌지.
크리스토프 덕분에 의상도 현대 옷으로 말끔히 갖춰 입기까지!
거울을 보면 딱 봐도 어디서 호강하다 와서 4년 만에 얼굴을 비춘 개씹불효자 씹새의 와꾸가 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아내를 6명이나 대동해 와?
거기다가 멀쩡하게 생긴 미인들이 나란히 손을 모으곤 ‘저는 아드님의 N번째 아내로 살기로 결심했답니다’ 하고 말해?
상식적으로 봐서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내가 아버지였다면 내가 어디 테러 단체나 폭력 조직, 마피아 같은 데 가입해서 죄 없는 여성들을 노예로 삼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뉴스를 키면 가끔 나오는 그런 범죄자들 말이다.
“당사자인 제가 봐도 여기까지 변명을 들어주신 것만도 참 대인배시다 싶은데, 왜 더 혼내시지는 못하실망정 이상한 자학을 하고 계세요?”
“아파서 그런다. 니 애미랑 업어 키운 아들내미한테 손찌검이나 한 게 가슴이 아파서.”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쭈글쭈글해지신 손으로 술병을 치우고서 내 얼굴을 더듬었다.
“이 천하의 미련한 녀석아. 그 세상에서 그렇게 잘 먹고 잘살 수 있으면 그냥 거기서 살 것이지, 뭐하러 이렇게까지 했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면서도 부모 얼굴 한 번 안 보고 사는 놈들이 저렇게 많은데……”
“아니 좀, 아버지. 울긴 왜 또 우십니까.”
“이놈이? 울기는 누가 울어.”
“누구긴요, 아버지가 우시죠. 어머니도 우시네. 저도 울면 될까요?”
아버지가 우시는 걸 얼마 만에 보는 걸까.
아마 할아버지가 기르시던 강아지가 병 때문에 무지개 다리를 건넜을 때가 마지막이었던가.
시골에서 소 치며 사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우시던 당신은, 조부가 남긴 아이도 제대로 못 보살폈다며 술로 밤을 지새우셨다.
그날이 내가 대학의 진로를 정한 날이었다.
“……저도 불효자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멋쩍게 뺨을 긁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강아지로 그렇게 우시던 아버지다. 하물며 자식인 내가 휙 사라졌으니 저리 비쩍 마르실 만도 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쉬셨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못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내 자식을 욕해도 보듬어주는 게 부모인데, 어떻게 이 애비가 생판 모르는 세상의 남녀지사에 왈가왈부를 하며 아들 욕에 동참하겠느냐.”
“남의 세상 일이기 이전에 아들내미 일인데요, 뭘.”
“옳다, 아들아. 말 잘 했다. 어느 곳에서건 남을 돕고 가족을 웃게 하면 남자는 본분을 다한 거다.”
프랑이 조심스럽게 내민 휴지로 코를 푸시고는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며느리들이 혼나러 오는 길에 함께 와선 안절부절 못하면서 너 하나 좋게 말해주겠답시고 열과 성을 다하는 걸 보니, 네 가정이 평소 어떤 모습인지도 대강 알겠더구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어머니 아버지께 자랑하기는 좀 망설여지는데요.”
“그럴 양심이 남았으면 됐다. 네가 노력한 결과이고, 며늘아가들도 받아들였다면 나도 더는 아무 말 않으마.”
“……흐흐,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역시 조금 이상하긴 하죠?”
남편 하나, 아내 여섯.
이세계 물을 퍼먹고 감각이 무뎌졌던 나도 친가 거실에서 말하자니 이렇게 기이한 일이 또 없다. 아버지는 혀를 차시다가도 눈빛이 온화해지셨다.
“아무렴 말이라고 하느냐. 하지만 네가 겪었던 일 중에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세상에서도 넌 줄곧 우리 두 사람의 아들이었어. 그렇지 않으냐?”
“……옙.”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경지까지는 못 이뤘지만, 정신 승리를 조금 가미하면 나중에 내 자식이 물어봐도 뻔뻔하게 아빠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되었다. 가정을 떠받치면 너도 어엿한 한 사람의 어른이다. 자, 너도 한 잔 하거라.”
또르르르….
아버지의 병에서 넘친 술이 내 잔을 채웠다.
“혹시라도 네가 못난 애비에게 못다 한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면 방금 맞은 걸로 갈음하자꾸나. 이제 나한테 죄스러울 것 없이 당당히 살거라.”
“네입. 어머니께는 좀 죄스러움이 남았으니 또 종종 찾아뵐게요.”
“고얀 놈이 애비 말은 죽어도 안 듣는구나. 넌 며늘아가들 눈에 눈물 고이게나 하지 마라. 니가 그러는 날에는 내가 혼쭐을 내러 갈 테니 그렇게 알고.”
“아버지께서 부모자식 간의 도리는 방금 때리신 걸로 땡치기로 하셨으니, 그때는 저도 쪼금만 막겠습니다.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 하기 있기 없기?”
“내가 아들놈한테 또 사기를 당했구나. 여보랑 며늘아가들도 웃지 말고.”
─짠.
잔을 부딪친 아버지는 나보다 빨리 잔을 비우고 우리 아내님들에게 머리를 깊이 숙이셨다.
“우리 아가씨들도 나를 어려워할 거 없습니다. 내가 꼴에 여러분 남편을 길렀답시고 웃어른처럼 굴었지만, 그 꼬장도 오늘 이 자리로 끝입니다. 제 못난 아들을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아버님이라고 부르게 해 주시면, 그렇게 할게요.”
다나가 슬며시 웃으면서 말하자, 아버지는 허를 찔리신 것처럼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셨다.
“그렇게 하십시다. 에고, 이제 폼은 그만 잡자. 북호야. 안주 좀 없냐?”
이번에는 우리 아내님들께서 멍해질 차례였다. 어머니가 슬쩍 웃으셨다.
“다 끝나셨어요? 저는 또 여보한테 돌아가신 아버님 귀신이라도 쓰인 줄 알았지 뭐에요?”
“요즘 같은 시대에 꼴랑 50살 먹고 이러시오~ 저러시오~ 하긴 좀 그렇지 않아? 간만에 얼굴에 힘줬더니 쥐 날 것 같다 이거에요.”
“물파스라도 발라요. 그래서 아들,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잠깐 또 돌아가 봐야 한다며? 엄마 밥은 내일 아침에 먹고, 야식으로 뭐라도 시켜줄게.”
태세전환 한 번 대단하셔. 역시 연륜은 얼굴에 까는 철판이지.
아내들이 멍한 얼굴로 나를 보길래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뭘 그렇게 놀라? 너희 남편을 기른 게 누구실 거 같아?”
“……듣고 보니 그렇네.”
“부전자전.”
그 리액션은 서방님이 좀 슬프단다, 여보들아.
“그보다 아쉽게 됐네. 어떻게 우리 아들이 결혼식을 6번이나 했는데, 엄마랑 아빠는 한 번도 네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없으니. 미안해서 어떡해.”
더듬더듬 배달 앱을 깔던 어머니가 말씀하시자 나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음, 그게요, 어머니? 실은 아직──”
“실은 아직 6번을 다 마친 건 아녜요, 어머니.”
─꼬옥. 어머니의 손을 공손하게 붙잡은 네페르티티가 말했다.
“저랑 노르드의 결혼이 아직이에요. 급한 일이 많았고 저희 세상의 귀족은 혼인 절차가 번거로울뿐더러 바로 최근에 전대 국왕님의 국장(國葬)이 있어서 좀처럼 식을 올릴 분위기가 아니었죠.”
열의가 느껴지는 네페르티티의 설명. 청산유수 그 자체였다.
나 얘가 이렇게 능숙하고 길게 말하는 거 처음 봐.
논리정연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남편의 입장까지 배려하는 언변! 오죽 놀라웠으면 긴장이 풀린 티르시는 마시던 물을 뿜다가 사레에 들렸다.
단, 네페르티티의 평소 모습을 모르는 어머니는 진지하게 곤혹스럽다는 듯이 뺨에 손을 대셨다.
“그래요? 시류가 좋지 않았네요. 손 없는 날을 피하는 것 말고도 결혼은 신경 쓸 일이 참 많죠. 우리 아들은 그 번거로운 걸 어떻게 5번이나 했나 몰라.”
“책임감도 노르드의 매력이에요. 그리고 저와의 결혼식이 미뤄진 건 운명의 인도라고 생각해요.”
“어머머? 어째서요?”
관심이 끌린 어머니의 귀가 쫑긋 섰다. 네페르티티는 즉답했다.
“제가 어머님 아버님의 고향에서 식을 올리면, 두 분을 초청할 수 있어요.”
“어머나, 어머나!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그쪽 세상에서 올리는 편이 더 성대하고 할 텐데……!”
“전 연고자가 없어서 상관없어요. 자격 미달로 보셔도 당연한 제가 어머님께 노르드의 결혼식을 보여드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제 기쁨이에요.”
다나는 우리 사차원 아가씨가 싸우다가 머리를 심하게 다친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이따 치료해야 하는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야, 약삭빠르게 점수를 따셨군요?! 네페르티티 언니……!”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리는 라리루라. 머리를 긁던 나는 어머니와 두 사람의 세상에 빠진 우리 사차원 아가씨를 픽업해서 방구석 모서리로 갔다.
“진짜로 결혼식을 여기서 하시게요?”
신분 증명은 어쩌고? 크리스토프가 만들어줬던 임시 신분은 있지만, 이 철저한 개인정보 관리국 디스토피-코리아의 공인인증서 방화벽을 무시할 수준이긴 할까?
‘……아, 혼인신고는 따로 올리던가?’
식을 올릴 뿐이라면 신분이 필요 없으려나.
웨딩 홀의 매니저도 돈을 준다는데 굳이 신분을 아득바득 캘 리는 없다. 의심도 안 할 게 분명한 이치. 그게 바로 자본주의의 힘이 아니던가.
비용이나 이세계에서의 절차 같은 번잡한 문제 정도는 내 선에서도 해결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나, 노르드네 고향에는 예전부터 흥미 한가득.”
그러자 네페르티티는 무표정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노르드, 처음에는 나한테 바이츠니아가 고향이라고 거짓말했어. 애벌레 먹는 나라에 데려가서 엄청 쎈 엘프랑 싸우게 했어.”
“어, 그게, 음……”
“거짓말, 하면 안 돼. 아니야?”
“……맞습니다. 맞는데, 그게.”
“나 울지도 몰라. 히잉.”
“할게요! 합시다!”
오늘의 MVP 씹새끼는 누가 봐도 나였다.
하여튼 내 숙적은 언제나 과거의 나다. 강북호 네 이놈! 대영웅 노르드 폰 울프헤딘님의 발목을 잡지 마라!
아무튼 아내님의 소원이라면 이뤄주는 게 하렘 꼴마초의 의무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질문했다.
“귀가까지 일주일은 남았으니 어떻게든 할게요. 프로포즈는 어쩔까요?”
“이미 잔뜩 들었어.”
그랬지 참.
새삼 다시 할 것도 없구나. 내가 워낙 낯뜨거운 소리를 하도 많이 해대서.
“……하긴. 쾌락 없는 책임이지만 딸까지 있긴 하죠.”
“……딸? 아들, 너 지금 혹시 딸이라고 했-”
“암것도 아임미다, 어머니! 저 잠깐 프로포즈 좀 하게 냅둬주세욧!”
나는 라마즈의 호흡을 하며 반지함을 꺼냈다.
준비가 철저한 남자, 그것도 나다.
프로포즈 대기 중인 남자한테 개인 인벤토리를 던져주면 누구나 이러고 다닐걸? 각이 언제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잖어.
나는 살짜쿵 눈치가 보이는 환경에 망설였는데, 네페르티티는 1초 만에 이 세상에 나랑 그녀만 존재한다는 듯 집중하며 나만 바라봤다.
집중력 봐. 이게 달인급 전사로서의 짬바인가.
하는 수 없다. 나는 폼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아, 생각해 보니 내가 가오에 미쳐 사는 건 아마 DNA 문제일 것이다. 아버지가 웃는 걸 보니 거의 140% 빼박임.
“……약속했었죠? 당신이 모르는, 알려고 하지 않던 세상의 즐거움을 알려주겠다고. 그러니까 절 믿어달라고.”
“응.”
어린 소녀 네페르티티가 죽고, 복수귀 네페르티티가 태어났던 그녀의 고향. 나는 과거를 재현한 지옥도를 몸으로 가리면서 그녀에게 약속했었다.
복수를 마친 뒤를 생각지 않던 네페르티티에게 억지를 써서 내 곁에 있게 했다. 즐거움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이다.
노력은 했다고 생각한다. 자랑스럽다고는 말하지 못할 나였지만 말이다.
─웅웅. 팔찌로 찬 브류나크가 울었다. 나는 픽 웃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페르티티, 저는 약속을 지켰나요?”
복수를 마친 지금, 사랑하는 네페르티티가 예전처럼 무뚝뚝하기만 하지 않다는 사실이 기뻤다.
결혼처럼 평범하면서 중요한 일에, 자기 성격도 극복하고 열심히 달라붙을 만큼 평범해진 게── 그렇게 행복한 생활을 바라게 됐다는 게 말이다.
부모님께 자랑스럽게 보여드릴 만한 게 그다지 없는 나도, 이 귀엽고 매력적인 아내들만큼은 썩 자랑스럽게 보여드릴 자신이 있었다.
질문을 받고 고민하던 네페르티티가 말했다.
“……응. 약속, 오늘까지는 지켰어.”
이런, 평가가 엄하시네.
내 쓴웃음을 네페르티티도 웃음으로 받았다. 꽤 자연스러워진 감정 표현이 인상 깊다. 촉촉한 꿀이 묻어나오는 듯 하다.
“내일이나, 또 내일모레에도 지켜줄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답을 아는 남편이 재촉하자, 네페르티티는 눈을 피하며 나를 힐끔거렸다.
“……더 많이 많이, 나한테 행복을 가르쳐 줘.”
“그렇게 할게요. 앞으로도 쭉.”
나는 네페르티티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고, 빨개지려는 얼굴의 혈류를 의식적으로 절제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본받아 철판을 깔고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왜애?”
“뭐냐, 아들아.”
“결혼식, 와 주실래요?”
부모님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턱. 아버지는 맡기겠다는 듯이 어머니의 등을 두들겼다. 우리 어머니는 못 살겠다는 듯 이마를 짚으셨다.
“설마 안 불러주려구 그랬어? 후후. 애가 아직 덜 혼났나 봐요, 여보.”
위대하신 선학들게서 말씀하시길,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한다.
그럼 자식도 핸디캡을 지고 승리를 양보해주는 부모에게 이기려고 바락바락 대들어선 안 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저분들께 이길 수 없는 건, 역시 내 내면에서 유교 드래곤의 시체가 살아 숨 쉬고 있어서일 터였다.
***
“결혼식이요? 하하, 농담이시죠? 일주일 뒤에는 미드가르드로 돌아가신다면서요? ……농담 맞죠? 그렇죠?”
비극적이게도, 결혼식장의 예약은 크리스토프의 비명으로 완성되었다.
이 좋은 날에 불러주려고 했더니 극구 사양하며 시체 같은 꼴로 물러나는 아셰라드의 아들. 그의 어머니도 그렇고 사람이 성실하면 이렇게 손해를 보는 것이다.
“나도 존나 성실한 편이라서 모를 수가 없지.”
“네? 손님, 뭔가 말씀하셨어요?”
“아뇨. 암것도.”
식장에서 대기하며 중얼거렸는데, 입장 전까지 머리를 만져주던 미용사가 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젓지도 못하고 대답하자 그녀는 피식댔다.
“끝났어요. 사진 잘 찍고 싶으시면 머리 만지면 못 써요! 신수가 훤하시니 인물이 사시네요!”
살아 돌아왔다는 나를 찾아온 지인들이랑 잔뜩 떠들다 보니 머리 모양이 망가지지 않을 수 있나. 나는 거울 앞을 기웃거렸다. 고놈 잘 생겼다.
”이거 돈 쓴 값 하네요. 금괴는 어느 세상이든 통해서 참 다행이죠?“
“아들아. 졸지에 금은방 VVIP가 된 나는 뭐가 돼냐?”
“뭐긴요. 아들 잘 둔 중년이죠. 출처가 의심되지 않게 귀금속 위주로 효도하겠습니다. 반지랑 팔찌 드린 건 꼭 끼고 다니시고요.”
이 세상의 마법사들도 자기가 직접 낄 때까지는 뭔지 못 알아볼 것이다. 지구의 뒷세계에서 나만 빼고 어반 판타지 찍던 놈들이 있다니 어메이징한 사실이긴 한데.
“오냐. 안 그래도 힘이 넘쳐나더라. 너희 엄마도 아침부터 얼굴에 부리나케 포션 바르더라. 티르시 아가씨가 준 거.”
“아버지가 포션이 뭔지는 아세요?”
“느개비 리니지 세대란다. 지금은 안 하지만.”
건강과 힘을 주는 유물을 끼고 섀도복싱을 하는 50대 유부남. 이게 우리 아버지? 음, 자랑스럽군.
“이만 떠들고 가 보마. 나 없으면 너희 엄마가 회춘한 거 자랑하다가 말실수할라.”
아버지는 몇 분 더 머무르다 얼른 식장에 가서 앉으셨다.
기다리던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내면에서 어둠과 음의 마나가 몰아쳤다. 검지를 들어서 천장에 가려진 하늘을 향해서 긋자, 크게 손상됐던 차원막이 접목처럼 조금 고쳐졌다.
거울을 보자 내 눈깔은 형광색과 적색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랑이 무거운 문어구만.”
끝내 참피아이즈 옐로우 몽키가 되다니. 진화의 끝에서 퇴화한 기분.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렇다고 뭐 버릴 수도 없다. 울프헤딘의 권능이 흡수한 마나는 내 혼과 불가분이니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만, 문어는 죽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혼에 마나를 남기는가 보다.
나는 그렇게 본의 아니게 평생 잊지 못하게 된 문어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라그나로크의 엔딩을 보고 영멸에 든 오딘의 분신을 떠올렸다.
“……먼저 가서 기다려라, 짝눈아. 제사 정도는 매년 치러줄 테니까.”
내가 안 해도 조만간 로키 교가 하겠지. 그렇게 나는 대기실로 들어오는 네페르티티와 팔짱을 꼭 잡았다.
익숙해지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될 결혼식도 이걸로 마지막이다.
축사와 응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돌아보면, 내가 알지만 4년간 잊었던 사람들이 식장에 가득했다. 부모님, 친인척, 지인들, 대학 선배, 군대 동기나 친구들.
그 사이에 부루퉁한 아내님들이 앉아 있다는 게 너무 웃겨서, 깔깔대며 웃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행복한 시간이 거의 끝난 뒤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부모님들도 물러간 웨딩 홀엔 우리만 남았다. 이제 직원들이 홀을 치울 때까지 자리를 비켜줘야겠지.
바지 포함 쓰리 피스 정장을 입은 다나가 무척 신경 쓰인다는 듯 말했다.
“……시발, 왜 조금 진 기분이지? 분명 마지막 결혼이니까 굳이 순번을 따지자면 내 승리인데.”
“엔딩을 장식하는 건 마지막 타자의 특권. 브이.”
풍성한 웨딩 드레스를 입은 네페르티티가 자기 승리라는 듯 포즈를 잡자, 라리루라는 웃지 않는 얼굴로 웃었다.
“아핫♡ 하나도 엔딩 아니거든요? 저희 인생은 이제부터잖아요?”
“네페르티티야말로 각오하세요. 오늘은 이겼단 기분에 젖어계시겠지만, 이제 집에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도 결혼했다고요? 네? 언제?’ 라는 소리를 3년은 들을 테니.”
“으, 그건 불찰. 마법사가 대신 알려줘. 대자보 잔뜩 붙이면 해결.”
“명예귀족인 제가 무슨 자격으로요. 또 언제쯤 돼야 티르시라고 부르실래요?”
“뭘, 네페르티티 나름의 애칭이 아니겠느냐.”
“야, 베로니카. 너 마법 풀렸다. 뿔 튀어나왔어.”
“……으흠. 꽤나 훌륭한 음식이라 그만. 제대로 맛을 봐 둬야 다른 바이콘이나 로키님께도 맛보여 드릴 것 아니더냐.”
“변명은. ……나도 엄마 아빠한테 만들어줄까.”
대화를 나누는 그녀들의 모습이 조금 멀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답은 알았다. 새삼 나를 사랑해주는 게 신기할 만큼 아름답고, 멋지고, 매력적인 여인들이어서다. 낯익은 지구를 배경으로 잘라 붙여놓으니까 다른 차원의 사람들 같다.
그야 다른 차원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범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끼어드는 게 미안할 정도로 근사한 장면이라고 하는 게 맞나.
“안 오고 뭐 해? 노르.”
그때,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손을 잡는 다른 손.
망울망울한 눈을 동그랗게 뜬 프랑은 나를 보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에헤♡ 얼른 와. 셰이드의 꿈에서 했던 때처럼 노르의 고향을 구경시켜주기로 약속했잖아?”
그랬다. ‘심해의 군주’가 그랬던 것처럼 꿈으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세상을 이제는 현실에서 이루기로 했었지.
“흐흐, 잠깐 서서 졸았는갑다.”
나는 프랑의 손을 맞잡았다.
프랑은 언젠가 나에게 부탁했다. 내 꿈의 끝을 보여달라고.
그러면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을까?
그렇지 않다. 꿈은 한 번 깨어나도 다시 잠들면 꿀 수 있으니까.
잠들지 않는 사람은 없기에 꿈 역시 깨는 일은 없다.
남은 며칠은 이 그리운 세상을 즐기자. 이제는 내 일부와도 같은 그녀들과 같이, 밤새도록 실컷.
며칠 후에는 돌아가야겠지만, 아무렴 어떠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깼다가, 다시 잠들고. 그렇게 돌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닌가.
“아앗──!! 프랑 언니가 또 한 발 먼저 선배를 꼬시고 있어요!!”
오순도순하게 있는 우리 둘을 귀신같이 발견한 라리루라가 소리쳤다. 5쌍의 마누라-아이가 빙글 도는 게 인상 깊더라.
“그리고 앞을 가는 선배의 기술을 따라 하는 게 후배라는 생물이랍니다!”
─포옥! 냉큼 달려와서는 반대쪽 팔에 안겨드는 프리실라. 우리 가족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막내는 이렇듯 결코 미워할 수가 없는 귀염둥이였다.
“와, 그러게. 어느 틈에 잽싸게 노르한테 갔냐. 눈치도 못 챘네.”
“아, 아냐! 나, 나는 그냥 노르가 멍하니 있길래 걱정돼서……”
“문답은 무용, 독점도 금지. 얍.”
네페르티티가 프랑을 떼어내고 다나가 받았다. 혼연일체야, 아주.
“……응, 안심 돼. 역시 여기가 내가 돌아올 곳.”
슬쩍 눈치를 보고 안기는 네페르티티는 미소로 넘어가 주자.
왜냐고? 그야 귀여우니까. 높은 굽이 엄청 어색했는지 신발을 벗고 맨발로 꼼틀거리는 게 은근히 사랑스럽기도 하고.
덕분에 자기가 왜 나한테서 분리당했는지 모를 프랑만 볼을 부풀렸다.
“아으, 놔 줘어-! 내가 뭘 했다구 그래애-!”
“자각도 없다는 게 아주 대단해. 이런 점은 순수하게 존경스럽다니까.”
그런 프랑의 볼을 잡아당기는 다나. 빵빵해졌던 뺨을 푹 꺼트린 그녀는 매일 그랬듯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우리 남편놈도 또 멍때리고 앉았네. 니가 그럴 때는 십중팔구는 쓸데없거나 골치 아픈 문제던데.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누나한테도 말해기다? 너만 개고생하게 두면 좀 불쌍하니까.”
“후후. 잔잔하기만 해도 따분하잖느냐. 주인님과 있으면 지루하진 않지. 정처 없는 여정이라는 건 무척 피곤하니라.”
베로니카도 은근슬쩍 내게 가슴을 밀어붙였다. 본인도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지만 공격 일변도다. 누가 고삐를 잡는 쪽인지가 뻔히 보인다.
“피곤하면 어때요. 가끔은 생각을 비우고 걷는 것도 여행의 참맛이잖아요? 그야 일단은 아버님, 어머님께 드릴 선물부터 사고 싶긴 하지만요.”
착실하게 호감도 상승을 기획하는 티르시도 여전했다. 은근히 무서운 것은 나와 부모님, 어느 쪽의 호감도를 노리는 건지 나조차 모르겠다는 점이다.
그래도 저렇게 타산적인 속내로 날 향한 엄청난 사랑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낸다는 것도 잘 안다.
아내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내님들이 주위를 꽁꽁 싸매서 아주 발 디딜 틈도 없네.”
“신경 쓰지 말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 우리는 알아서 따라갈 테니까.”
“가고 싶은 곳? 어디?”
“어디든 좋아! 노르가 데려가 주는 곳이라면!”
다나가 킥킥대고, 프랑이 웃었다. 다른 아내들도 웃음꽃을 피우며 긍정했다.
대답을 받은 나는 눈 부신 빛을 받은 것처럼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가, 그 눈매보다 깊고 길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럼, 이 다음에는──”
그리하여 첫 번째 꿈은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멈춰 서지 않고, 또다시 꿈을 꿀 것이다.
그 꿈이야말로, 별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이끄는 나침반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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