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화 〉18 레니 테세오의 순례 (18/89)



〈 18화 〉18 레니 테세오의 순례

레니 테세오. 아니, 이제는 그저 레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그러길 바라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못한─ 여자는 자신이 나름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생각했다.

과거를 말하자면 결코 순탄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에 와서는 이 안락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주 직할의 경비대 대장 정도면 나름 출세했다고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레니는 자신의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부하들을 제외하고서도 당당히 벗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 그리고 그 남동생이 하나.

비록 이성관계에 있어선 사실상 경험이 없다는 게 조금 흠이었으나,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라고 볼  있으리라.

“…….”

그러나 지금 레니는 그 인간관계에 대해서 몹시 큰 고민에 빠져있었다. 으슥한 밤의 일이었다.

레니는 그저  자리에 우뚝 서있을 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굳게 닫힌 현관문이었다.

조금 전에 말한 그녀의 친구 한나가 지내고 있는 집이었다. 물론 동생인 콜린의 집이기도 했다. 많이 어둡기도 하여 그를 친절히 바래다준 것이 직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직후 한나가 콜린의 귀가와 동시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어온 것이었다. 뒤늦게 레니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녀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한나의 입맞춤은 결코 가족 간에 있을 만한 것이 아님을 그 레니조차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이야기를 시안에게 들려준다면 ‘숫처녀인 선배님도알아차릴 정도면 얼마나 노골적이었던 겁니까’라는 식으로 말해올  틀림없었다.

아무튼그것이 명백히 성적인 어프로치임은 확실했다는 소리였다.

당연하지만 레니는 절찬리에 혼란에 빠져있었다. 아니, 상황은 이해하고 있었으나 이성이 차마 인정하려 들지를 않았다.

‘한나가 콜린하고…….’

아무렴 자기 친구가 제 동생하고 그런 관계라는 걸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서 레니 스스로는 자신의 인간관계에 만족하며 지낸다고 말하였으나 이는 관점의 차이로, 사실 레니의 관계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엄밀히는 좁고 깊은 관계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서로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걸 방금  알아챈 참이었다.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친구인 한나는 물론이고, 콜린조차도 연애와 관련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던 레니였다. 사실상 자신의 동생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콜린도 누군가의 연인이  수 있는 한 사람의 남성이었던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 번 머리에 새겨진 이미지를 고쳐쓰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나?'

정말로 자신은 그를 연애대상으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일까? 뒤이어 레니는 의문을 품었다. 정말 레니라는 여자는 그저 유사 가족으로서의 친애(親愛)만을 품고 있었던 것인가.

'뭐, 그런 시선으로  적은 없었지.'

이내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번도 그의 모습에 욕정을 품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물론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이따금의 미혹이었을  한시도 그런 적은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흐으윽♥"
"……?!"

그녀가 등을 기대고 서있던 건물 안쪽에서 교성이 들린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기습적인 목소리에 레니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삐그덕. 레니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물론 눈앞에는 벽이 있었다. 허나 레니의 의식이 초점을 맞춘 곳은  너머였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 아무리 레니라 하여도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경험이 없는 것이지 지식이 없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명백한 여성의 신음소리, 그것도 성적인 계통의 것이었다.

그리고 레니가 모르는 새 이 집에 침투할 수 있는실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그런 재능을 가진 인간이 고작 가정집을 털려고 하진 않을 테고─ 실내에 있는 것이라고는 콜린과 한나 두 사람이 전부였다.

즉, 이 내지르는 듯한 교성은 아마 한나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의 친구가 이런 목소리도   있었던 건가. 레니는 혼란에빠진 가운데 그런 생각을 했다.

또한 그녀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고민할 건 없었다. 콜린.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 한나와 몸을 겹치고 있었다.

"……."

레니는 침을 삼켰다. 무심코 그녀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 소리의 진원지는 거실이었으리라.  번이고  사람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던 그녀는 구조도 정도야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었다.

그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장소는 침실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일상의 영역이어야 했을 거실에서 문란한 행위가 펼쳐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행위에 몹시 익숙해진 상태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거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레니는 어느새 창문 앞에 서있었다. 거실이 비쳐보이는 창문.

이성이 계속 소리쳤다. 이것을 봐서는 안 된다. 설령 엿본다 해도 들켜버렸다간 어쩔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쿵쿵 뛰는 심장이 계속 그녀의 발걸음을 옮겼다. 레니는 이제  장면을 봐야 한다는 일념만이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아……."

레니는 무심코 탄식했다. 바로 곁에 있어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탄식이었다.

그녀는 보았다. 보고야 만 것이었다.

한나는 소파 위에 네 발로 엎드려 있었고, 콜린은 그 뒤에 매달리는 듯한 자세였다. 그러나 단순히 놀이를 하고 있는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알몸이었던 탓이다.

그것은 마치 짐승의 교미였다. 서로의 몸을 통하여 오로지 쾌락만을 탐하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레니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뭐, 조금 충격적이긴 하지만…….'

물론 두 사람이 그런 관계였다는  몹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그것은 한나와 콜린의 일이지 레니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었다.

"……."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대체 어째서 이토록 가슴께가 먹먹한 것인가. 무언가 자기 손에 쥐고 있던 것이 사르르 빠져나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어째서였을까.

"윽……."

와중에 어느샌가 속옷이 젖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레니는 무심결에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에 끈적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레니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상황에 배덕적인 흥분을 느끼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아… 으……."

최대한 억누르려 했지만 등을 타고 짜르르 전해지는 쾌감에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나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바깥에서, 그것도 친구의 행위를 엿보며 자위하고 있다.  죄악감과 자괴감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극도의 흥분상태는 그마저도 쾌락의 연료로 삼았다.
거실에서는 더욱 행위가 격렬해졌다. 콜린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그를 따라 레니의 손가락도 다급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움직임을 멈췄다.

'아…….'

레니는 그것이 단순히 행위의 중단을 의미하는  아니라고 이해했다.

움찔거리는 한나의 몸. 그녀를 꽈악 끌어안은 콜린. 이는 명백한 사정의 전조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머릿속에서 탁 하고 전류가 흘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그것이 두 번, 세 번.

"흐으으윽?!"

마침내는 수십 차례 하복부를 연타하듯 절정이 내달렸다. 레니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그나마 소리를 억눌렀다.

풀썩.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면서도 레니는 거실 안쪽을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그녀가 엿보고 있다는 걸 들키지는 않은 듯 했다.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니는 호흡을 골랐다. 그녀의 시선 끝에서 콜린은 한나에게서 페니스를 뽑아내었다. 살짝 벌어진 한나의 음부에서 희끄무레한 액체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행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나 쪽이 그의 위로 올라타 자세를 잡았다.

저 각도라면 시야에 비칠 위험이 높았다. 본능적으로 그걸 깨닫고 레니는 잽싸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실내에서는 다시 음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그때가 되어서야 레니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하던 행동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격렬한 자기혐오가 몰려왔다.

레니는 급히 옷을 추스르고 자신의 집으로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죄책감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귀가하면서도 하복부의 욱신거림은점점 강해져만갔다.

결국 집에 돌아와서도 레니 테세오는 하루에 두 번 이상 자위한다는, 생에 처음의 기록을 세우고야 말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내일부터 한나와 콜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얼굴을 들고 마주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


"체크."

또각. 나무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 고양이는 중얼거렸다.

나무 테이블에는 나무 체스판이 올라가 있었다. 흑과 백이 아니라 진갈색과 연갈색으로 이루어진 체스였다.

마주한 자리에서 손을 뻗어 말을 옮긴다.  상대도 명백히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닌 길쭉한 귀가 달려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부른 건가요?"

마치는 여유롭게 체크에서 벗어난 뒤 그리 말했다. 눈앞에 있는 그가 자신과 고작 체스나 하자고 불렀을 리는 없다는 걸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글쎄. 맞춰볼래?"
"수수께끼 풀이는 자신 없는데요. 체스를 하면서 풀라고 하면 더더욱."

그러나 체셔 캣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능글맞은 웃음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체셔도 농담은 이쯤 하면 되었다 싶은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콜린.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저 머리는  수 있지 않을까?"

체셔가 문득 입에 담은 것은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한나의 동생'이라는 명칭이 더욱 어울릴 정도로 존재감이 없던 존재였다.

물론 체셔는 그에게 이세계의 기억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면이 더 많다고 여겼다.

이세계인의 입장에서 다른 관점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 이따금 조언을 들어볼까 하는 생각까지는 있었지만 그게전부였다.

"참모로 쓰면 꽤 유용할  같은데."

허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콜린의 몸을 쓰고 있는  자는 이세계니 뭐니를 떠나서 그냥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저 체셔가 주목한 계기가 그것이었을 뿐, 다른 세계에서  게 아니었어도 충분히 활약했을 인간상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상대의 수를 읽어낼 수 있다면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거야 체셔 씨가 길드장으로서 결정할 일 아닌가요? 그걸 왜 저에게 묻는지 모르겠네요."

마치는 그저 그의 활약을 전해들었을 뿐이지만, 당시 콜린의 곁에 있었던 체셔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명분부터가 없었다.

하지만 체셔는 그녀의 말에도 수긍하지 않고 조금 머뭇거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있은 뒤에야 입을 떼는 것이었다.

"제후의 감찰관이 온다고 연락이 왔어."
"……."

그리고 이번에는 마치가 입을 다물었다. 이 세상에는 제후만 열둘이 있지만 누구를 칭하는 건지는 뻔했다.
그들의 도시가 있는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제후. 정확하게는 몸져누운 제후의 대리인.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서 마치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온대요?"
"백설."
"하, 젠장. 아주 작정했네요."

그녀의 속이 시꺼멓다─정확하게는 탕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욕에 충실하다─는 걸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겉으로는 언제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던 마치였다. 딱히 위선자 노릇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그녀의 본성이 여유롭고 느긋한 탓이다.

허나 그런 그녀가 지금은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정도로 백설이라는 이름에 담긴 악명은 컸다.

"아직 올 때가 아닌데 이렇게 일찍 일정을 당겼다는 건……."
"콜린 씨가 계기였다는 거죠. 너무 활약을 했던 탓에 눈에 띄어버린 걸까요."
"어쩌면 아이템이 목적일 수도 있지."

또각. 체스말이 다시금 움직였다.

백설이라는 감찰관은 그야말로 '충성시험'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에 대해 설명하자면 '제후의 개' 내지는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 정도의 표현이면 충분할 것이다.

아주 오만하고 뻔뻔한 여자였으나 제후 대리는 오히려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백설이 감찰을 나온 장소에서 만행을 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감찰 대상이  수 있는 선택은 하나다. 권력을 등에 업은 그녀를 거스르거나, 순순히 구두를 핥거나.

만약 전자를 선택한 경우에는 그대로 제후와 그 군대에 맞서싸울 각오를 해야 했다. 백설이 갖고 있는 권력은 거의 그 정도의 것이었다. 당연히 대부분 얌전히 꿇는 쪽을 택하리라.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어쩌면 그녀의 만행에 참다못한 나머지 욱해서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백설은 또다시  가지 선택지를 내민다. 이대로 얌전히 군대가 움직이는 걸 기다릴지, 아니면 길드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와 승부를 할지.

대체 어떤 승부를 하는지는 계약으로 비밀이 지켜기에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길드에서 8명만이 그 게임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백설의 승률은 100%였다는 사실뿐이다.

군대도 움직이지 않은 채 벌써  개의 길드가 사라졌다는 걸 마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할  있는 데까지는 꼬리를 흔들어봐야지."

제후 대리가 백설을 파견하는 대상은 어느 정도 힘을 가진 길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도는 뻔했다.

제후의 이름으로 보낸 감찰관에게 반항하는, 즉 조금이라도 그에게 반기를  기미가 있는 녀석들은 길드 통째로 미리 박살을 내버리겠단 소리였다.

그렇기에 백설이 충성시험이라 불리는 것이고, 체셔가 그렇게말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번에 그 '힘 있는 길드'의 선을 넘어버렸던 모양이다.

"어디까지 말인가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

마치는 다시금 체셔에게 물었다. 그가 말한 '할  있는 데까지'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제대로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사실 마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체셔가 괜히 콜린에 대하여 질문을 했겠는가.

 있는 길드를 솎아내는 게 목적인 이상, 그들이 거스르지 않는 한 감찰관은 길드의 힘을 줄이는 방향으로 명령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명령이 콜린의 아이템을 내놓으라는 것이라면?

귀속된 아이템 중에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소유자의 죽음으로만 이전될 수 있다.

아예 콜린을 데려간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 백설은 콜린의 죽음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체셔는 마치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 경우에도 감찰관의 명령에 얌전히 따르는 게 맞을지. 백설에 맞설 정도로 그에게 가치가 있는지.

──즉, 만약 이번에 활약했던 정도의 재치를 콜린이 보여줬을 때, 그들이 백설과의 승부에서 이길  있을지.

"어때?"
"…모르겠네요."

마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귀가 추욱 늘어진다.

"그렇지만,  아이를 잃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싸울 열정이라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사심에 불과했다. 고작 자신이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단 이유로 길드 전체의 명운을 걸기에는 부족했다.

"그거면 됐어."

그러나 체셔는 이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셔 고양이는 길잡이야. 그리고 마치 헤어, 네 길을 안내하기로 한 약속은 아직 유효하고."
"하아, 길잡이라는 것도 참 피곤하겠네요."
"다만 어디까지나 누구 하나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의 이야기.  전까지는 최대한 구두를 핥을 생각이야. 너는 한동안 방에서  나오는 편이 좋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술이나 잔뜩 넣어줘요."

방에서 지내라는 말의 속뜻 역시 명확했다. 아직은 그저 방탕할 뿐인 머저리를 연기하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이내 마치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같은 느긋한 모습이 되어 천천히 문으로 향하는 그녀였다.

"잠깐. 하던  마저 해야지?"
"아, 말하는 깜빡했는데 그거 체크메이트거든요."
"어? 어라?"

그제야 체스판의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체셔였다. 그 고양이를 놔두고서 마치는 유유히 방을 빠져나왔다.

"……."

마치는 풀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여전히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그깟 권력에 휘말려서 또 누군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연갈색의 길쭉한 귀가 연신 쫑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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