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5 머피의 법칙
이른 아침 콜린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쩐지 바깥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콜린은 눈을 비비며 창밖을 살펴보았다. 약간이지만 거리에 인파가 몰려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리 중앙을 세련된 가마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마차가 아니라 가마였다. 분홍색 머리칼을 한 네 명의 여자가 그 끝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벌써 도착한 건가.'
그 과시하는 듯한 행진에 콜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마 위에 앉은 여자는 초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감이 잡혔다.
검은 비단 같은 머릿결. 입술에는 생기가 돌았고 뽀얀 피부는 햇빛을 받아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제후의 감찰관─백설공주가 이 도시 펠레이라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마를 멘 저 여자들은 난쟁이일 것이다. 비록 넷뿐이긴 했으나, 분명하게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땅딸막하다거나 어리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단순히 키가작기만 한 게 아니라 성인의 비율을 그대로 두고 약간 축소시킨 느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육감적인 몸매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농익은 그 신체에 옷자락까지 짧은 탓에 색기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오히려 어려보이는 쪽은 백설이었다. 앉아서 턱을 괸 자세라 키는 정확히 알 수 없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것도 비교적 어리다는 것이지 엄밀히는 갓 성인이 된 듯한 앳됨을 얼굴에 품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 거리에서부터 거만함이 느껴지는 표정이 더욱 그런 감상을 갖게 했는지도 몰랐다.
'뭐, 사실 엄청 예의바른 모습이었어도 좋은 평가는 못 해줬겠지만.'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을 알고 있는 이상 콜린은 백설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백설은 여차하면 부점 길드를 박살낼 작정으로 온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바에 따르면 현재의 제후 대리는 몹시도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본인도 쿠데타 비슷한 걸로 권력을 잡았다고 하니까 그럴 만도 한가.'
그 편집증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자신의 지위에 해를 끼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 조금이라도 반항하려는 기색을 보이면 즉시 부숴버릴 정도다.
그리고 그 '반항 안 하고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보자'라는 목적으로 파견되는 게 저 백설이라는 여자였다.
까놓고 말해서 깽판을 치는 역할이었다. 기왕이면 그 김에 어느 정도 힘이 있다 싶은 길드를 약화시켜 놓는 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아무렴 좋게 봐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콜린은 한숨을 내쉬며 곁에 누워있는 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잠에 빠져있던 한나는 그의 온기를 느끼더니 잠결에 히죽거리며 더욱 그에게로 파고들었다.
딱히 무슨 의도가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니고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는 행동이었다.
머잖아 귀찮은 일이 생길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한나가의식을 되찾고 얼마 정도 지났을 때 레니가 집에 찾아왔다.
참고로 이 시간이 되도록 그녀가 깨어나지 않고 있던 이유는 어제 질펀하게 섹스를 해댄 탓이었다.
엄밀히는 시안도 끼어있었지만 3P라고표현하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실은 각자 따로 상대한 것에 가까우니 그보다는 두 번의 섹스를 연달아서 했다는 게 올바를 테다.
당연하지만 시안은 밤이 되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시안은 멀쩡히 돌아갔는데 한나가 의식불명이던 건 물론 서로의 체력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어둑해질 즈음에 깨어난 한나와 다시 한 번 밤새 즐긴 탓이었다.
"콜린, 영주님이 부르셔."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집에 찾아온 레니는 콜린에게 그렇게 전했다.
"감찰관이 데려오라고 한 건가요?"
"그래. 그 아이템도 챙겨서."
아마 슬슬 체셔가 감찰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는데 굳이 그를 부른다면 이유는 뻔했다. 감찰관이 그를 불러오라고 한 것이었다.
콜린 본인이 목적인지 아니면 그의 아이템이 목적인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저기, 레니. 나도 같이 가도 괜찮을까?"
그러던 중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은 한나였다. 콜린을 보내는 게 영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는 조금 변태 같을 뿐─그나마도 최근 콜린이 그녀를 요구하는 것에 비하면 별 거 아닐지도 모르지만─이지 심성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여차하면 감찰관이 동생을 해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하면서보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 아마 괜찮을 거라고는 생각해."
"고마워."
레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떼자 한나는 그나마 미소를 지었다.
물론 반쯤 자기만족에 가까웠다. 권능도 없는 한나가 따라가봐야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한나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콜린과 함께 가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자, 그럼 가자."
그렇게 세 사람이 영주저택 앞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세련된 가마였다.콜린도 얼마 전 행진에서 봤던 모습이었다.
그것을 지키고 있는 듯 보이는 한 사람의 난쟁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왼손에 든 단검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목에 걸린 초커에는 검붉은 별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별 관심이 없는 듯 코웃음을 치곤 홱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은 또 뭐야?"
"감찰관이 권능으로 소환하고 조종하는 녀석들 중에 하나야."
그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한나였다. 물론 나머지 두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만 들어봐도 백설이 얼마나거만한 인물일지는 감이 잡히는데 그 부하라고 해서 어디 겸손하겠는가.
오히려 콜린의 관심이 동했던 것은 레니의 설명 쪽이었다. 그걸 레니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거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소문이 퍼졌을 수도 있고, 우리는 영주님도 있으니까.'
아마 후자일 것이라고 콜린은 생각했다. 길잡이의 권능을 가진 체셔는 직접 마주본 상대의 본질을 일부 파악해낼 수 있다.
레니가 영주의 심부름을 받아서 콜린을 데리러 왔다는 건 레니도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체셔에게 정보를 전해듣는 건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내 저택의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영주님. 콜린을 데려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레니는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서 안쪽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체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레니는 문을 열고 비스듬히 비켜섰다. 그러곤 눈짓하여 콜린더러 들어가라는 신호를 건네었다.
그것을 확인하고서 콜린은 발걸음을옮겼다. 융단이 깔린 바닥이 발소리를 흡수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래도 보랏빛 고양이였다. 저 커다란 털뭉치는 아무리 해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체셔는 정장을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반대쪽 소파에 앉은 것은 검은 머리칼의 여성이었다. 아직도 소녀의 이미지가 얼굴에 남아있는 앳된모습이었다.
다만 태도는 아주 거만하기 그지 없었다. 백설은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푹 기댄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한 손에는 레드 와인이 반쯤 차있는 잔을 들고 있었다.
'좋아. 대충 인간상은 감이 잡히는데.'
눈을 빙글 돌려 방 전체를잽싸게 훑어본 뒤 콜린은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건들거리는 저 모습만 봐도 백설의 성격이 어떠한지 확신할 수 있었다.
"백설님, 반갑습니다. 저는 콜린이라고 합니다."
콜린은 가슴께에 한손을 얹어놓고서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인사했다.
사실 그는 이 세계의 남자가 따라야 할 예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21세기 지구를 살아가던 정희원은 물론이었고, 평민의 삶을 살아가던 콜린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그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야.'
하지만 콜린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는 백설이 예법을 그다지 따지지 않는 인물이라고 짐작했다.
"그래, 네가 그 콜린이란 말이지?"
이내 콜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 백설은 히죽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예법이고 뭐고 콜린이 자신을 깍듯이 대했다는 것만으로 약간 만족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아라크네 길드와의 경기는 영상으로 봤어. 훌륭하던데?"
"칭찬 감사드립니다."
잔을 기울여 와인을 한 모금 정도 들이키고서 백설은 말했다. 콜린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저기, 혹시 앉아도 괜찮을까요?"
"응? 아, 그래. 물론이지."
그리고 콜린은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 말을 듣더니 백설은이내 씨익 웃었다. 콜린이 굳이 그런 물음을 했던 이유를 알아차린 탓이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콜린은 살포시 소파에 다가가 백설의 곁에 앉았다. 몸은 살짝 기울여 그녀에게로 향한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테이블 너머로 체셔와 마주보는 듯한 구도가 되었다. 지금 보니 어느샌가 레니와 한나는 호위 내지는 시종처럼 체셔의 소파 뒤쪽에 우뚝 서있었다.
참고로 백설의 뒤쪽에도 두 사람이 서있었는데 당연하게도 난쟁이들이었다.
저택 앞에서 보았던 그녀와는 분홍빛 머리칼부터 얼굴, 체형까지 똑같았으나 인상은조금 달랐다.
한 명은 표정을 굳히고 냉정한 시선을 하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턱. 콜린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깨에 백설의 손이 올라왔다. 콜린은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 쪽으로 더욱 몸을 기대었다.
그 태도가 꽤 만족스러웠는지 백설은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 그래. 내가 누군지는 알지?"
"제후님께서 보내신 감찰관 분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핫, 잘 알고 있네. 내가 받아온 실권이 얼마인지는 알고?"
"그건… 죄송합니다만 잘 모르겠네요."
콜린은 고민하는 듯 하다가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추론하라고 하면 대략적인 수준은 짐작해볼 수 있었지만 이때는 모르는 척 하는 게 나았다. 지금의 콜린은 조금 현명할 뿐인 마을 소년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는지 백설은 큭큭 웃었다. 감히 너 따위가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는 투였다.
"내 보고서 한 장이면 제후님의 군대가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다, 그 말이야."
"와, 정말로요?"
"그래. 그렇고 말고."
백설은 자랑스럽게 떠벌리면서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콜린의 어깨에 올려둔 손을 슬쩍 내렸다. 한쪽 팔로 그의 옆구리를 끌어안은 형태가 된다.
물론 저런 반응을 하고 있는 백설의 모습에도 콜린은 그녀를 미인계로 녹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리 단순한 여자였다면 백설의 악명이 그렇게나 퍼졌겠는가. 그런 만행들도 권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최소한 실력 만큼은 제후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렇게 콜린의 접근에 헤실헤실 웃고 있지만정말 뭔가 중요한 걸 캐물으려고 한다면 곧장 표정을 굳히며 그를 내쫓을 게 분명했다.
콜린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역할은 그저 그녀의 기분을 띄워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흠흠, 아무튼 말이지. 내가 이렇게 너를 부른 이유는 알겠어?"
"호,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콜린은 일부러 긴장한 모습으로 되물었다. 감찰관이 직접 자기를 부를 정도라면 얼마나 큰 문제일까 고민하는 소년의 모습을 연기하면서.
그의 반응을 보더니 백설은 키득키득 웃었다.
테이블 저편에서 체셔가 콜린의 연기에 아주 잠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은 아니니까 안심해. 그저 콜린 네가 가진 물건에 좀 관심이 있을 뿐이거든."
"물건이라면… 아, 이거 말씀이신가요?"
왜 굳이 이걸 들고오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콜린은 자신이 들고온 책을 바라보았다.
"그래, 실은 제후님이 그걸 꽤 유용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하시거든. 그러니 제후님께 충성하는 마음이 있다면… 알지?"
"네, 사실 그다지 쓸모가 있진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좋은 곳에 써주신다면야 오히려 기쁜 일이죠."
미소를 지으며 콜린은 책을 백설에게 건네주었다.
거리낌이 없던 것은 단지 연기는 아니었다. 괜히 저런 권력자가 깽판을 치기 전에 비싼 물건 하나 넘겨주고 피할 수 있다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하지만 저기… 아마도 동굴에서 주우면서 저한테 귀속된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응? 아, 그거야 귀속을 해제시킬 방법은 여럿 있으니까 괜찮지."
백설은 히죽거리며 그 책을 받아들었다. 귀속과 관련된 문제는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는 모양새였다.
이것만으로도 일단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만약 귀속 해제에 소유자의 죽음이 필요한 아이템이어서 콜린이 살해당하는 최악의 사태는 벗어난 것이다.
물론 정말 콜린이 죽어야 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 백설에게 그런 수단을 선택할 의사는 없어보였다. 여차하면 콜린 째로 대려간다는 방안도 있지 않은가?
콜린이 은근슬쩍 그녀의 호감을 쌓아둔 탓에 백설에게는 그것도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가 되었을 테다.
어쩌면 지금껏 함께 지내온 사람들과 헤어져야 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가 커져서 누구 하나 크게 다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길이었다. 최소한 콜린은 그리 생각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하나만물어도 괜찮을까요?"
다만 완전히 안도하기에는 약간 부족했다.
"혹시 그 물건을 어떻게 쓰실 건가요?"
만약 단순히 부점 길드에게서 아이템을 빼앗는 걸 넘어서, 강한 전사에게 소유권을 넘겨주고 써먹을 작정이라면 그땐 정말 콜린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첫인상이 좋았다 해도 백설은 자기 권력을 위해선 콜린 따위는 냉큼 죽여버릴 수 있는 여자였으니 말이다.
"으음, 글쎄. 나라면 녹여서다른 아이템과 합치겠지."
"녹여서 합쳐요?"
"생각해 봐. 만약 이 아이템에 있는 기능이 무기에 깃든다면 어떻게 될까?"
확실히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옛날 전설들만 보더라도 주인에게 돌아오는 무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던가.
콜린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아주 잠깐 정도였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윽?!"
따라서 그 순간 갑자기 백설의 손에 들린 책이 요동치기 시작한 건 콜린의 의사가 아니었다.
그 움직임에 당황하며 백설은 책을 다시 굳게 잡으려고 그것을 팔로 끌어안았다.
"크윽…?!"
하지만 그렇게 팔을 움직이는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책은 펄쩍 뛰어올라 그녀의 턱을 가격했다.
심지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래로 내려찍으며 백설의 얼굴을 후려친 뒤 포르르 날아 콜린의 손에 톡 떨어졌다.
"……."
응접실은 침묵에 잠겼다.
입을 다문 채 백설이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을 때 그녀의 코에서는 붉은 핏줄기가 하나 흐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눈동자는 콜린을 향한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 하하핫! 이 새끼들이 아주 정신이 나간 건가?"
그러다가 백설은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것이 기쁨의 웃음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아니, 난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지만 누가 봐도 이 상황은 백설에게 꼬리를 흔들며 아부하는 척 하다가 거나하게 엿을 먹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새끼'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면 콜린의 단독범행이라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백설은 감찰관에게 일개 마을 소년이홀로 반기를 들기로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즉, 처음부터 그녀를 엿먹이기 위해 짜인 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니, 그, 제가 한 게 아니라 책이 멋대로……."
"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콜린은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녀는 들어주지도 않았다.
정말로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건지, 아니면 진상을 눈치채고서도 그러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설령 실수였다고 해도 자신이 이런 수모를 당했으면 반드시 되갚을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제후의 권한을 받아온 자신에게 공격을 가했다며 부점 길드를 응징하라는 보고를 올릴 상황이 완성된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쳐놓고 사과만 하면 다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꿇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백설은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았다.
"체셔 길드장. 기대하도록 해."
"가, 감찰관 님, 부디 자비를!"
당연하지만 저 편에 앉아있는 체셔도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뒤이어 비굴하게까지 느껴지는 태도로 간원해온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백설이 마음을 바꿀 가능성은 아득히 낮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직의 장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는 현명한 사람, 아니, 고양이였다. 실리를 취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다고 방금의 그 무례가 용서될 것 같아?"
하지만 백설은 그 모습을내려다보며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그러다가 백설은 다시 콜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오늘 밤새 봉사를 한다면 너희들에게 한 번의 기회 정도는 줄 수도 있어."
역시 이렇게 되는가. 콜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전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전에 들었던 소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일부러 만행을 저질러서 그녀에게 반항하도록 만든 뒤, 그걸 빌미로 제후의 군대와 싸우고 싶지 않다면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백설이 내기에서 승리한다면 제후, 정확히는제후 대리는 군대를 움직이지도 않고 위험분자─물론 편집증에 걸린 제후 대리가 생각하기에─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빡친 것 같지만.'
다만 어떤 소문에서도 기회를 얻으려면 몸을 바쳐 봉사하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 그녀도 대놓고 얻어맞은 건 처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콜린 개인에 대한 응징 목적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뭐, 나야 상관은 없지만.'
콜린 입장에서야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레니와 체셔도 그다지 거부하려 들진 않을 것이었다.
체셔는 조직의 장으로서 최선의 수를 선택해야 했고, 레니는 본의는 아니더라도 은근히 이 상황에 흥분하고 있을 테니까.
'문제는 한나인데…….'
콜린은 그리 생각하며흘끗 시선을 돌렸다.
한나는 측은하다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콜린을 향한 게 아니었다.
'콜린이랑 밤새도록? 신종 자살 방법인가…?'
밤새 콜린에게 범해진 경험이 있던 그녀였다. 지금의 그녀에게 백설의 모습은 자기 성욕을 못 참은 탓에 굳이 가시밭길을 가려는 바보처럼 보였다.
아무튼 아주 놀랍게도 백설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것은 나름 다들 조금씩 만족하는 결과였다. …미래의 백설만 제외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