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26 폭풍전야(1)
"……."
영주 저택의 응접실. 소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어허, 또 내려간다."
다만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다면 그가 앉은 곳은 의자나 소파가 아니라 검은색 책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공중에 둥실둥실 떠있는 책이다.
감찰관으로 왔던 백설이 영주가 마련한 방으로 돌아가고 5분 째, 그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 책 위에 올라가 있었다.
조금 전에 콜린은 이 책에게 자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계기는 그가 열심히 아부해댔던 감찰관의 안면을 두 번이나 강타한 것 때문이었다.
덕분에 모처럼 꼬리를 열심히 흔들었던 게 전부 무산이 됐다.
짜증을 내지 않는 쪽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코, 콜린. 이제 그만 봐주는 게……."
"…뭐, 영주님이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체셔가 머뭇거리며 그리 말해오는 통에 콜린은 한 번 혀를 차곤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그 책은 곧바로 포르르 날아서 체셔의 품에 안겼다.
"허, 이 자식이?"
그 모습에 조금 심기가 거슬린 탓에 콜린은 손짓하여 책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주인에게 돌아오는 효과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버둥거리는 책을 한손으로 소파에 눌러두고 그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굳이 말하자면 물건에 혼백이 깃드는 도깨비나 츠쿠모가미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원래부터 자아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어느 순간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콜린. 너무 화내지는 마. 저 녀석도 자기 살려고 그런 거니까."
뒤이어 레니가 콜린을 설득하듯이 말했다.
그래. 그 말이 사실이긴했다.
비교적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을 괜히 키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저 책을 벽난로에 던져버리지 않은 건 그나마 이것 때문이었다.
저 책이 날뛰기 시작한 순간은 백설이 그것을 녹여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직후였던 것이다.
"하아, 그래요. 분풀이는 전부 끝나고 해도 상관없으니까요. 중요한 것부터 처리해야죠."
콜린은 한숨을 내쉬고는 팔짱을 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책을 누르고 있던 손도 떨어졌지만 자기 잘못을 아는 지 이번에는 얌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지나간 일에 연연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저 책을 찢어발겨서 시간이 되돌아간다면 몰라도 이제 와서 그러는 건 그저 괜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서 콜린이 오른손을 슬쩍 휘젓자 공중에 반투명한 사각형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여러 문장이 적혀있었다.
조금 전 백설이 아직 응접실에 있었을 때에 체셔와 맺은 계약이었다. 콜린 역시 당사자였으므로 그 계약서를 언제든 확인해볼 수 있었다.
계약의 요점만 정리하자면 아주 간단했다.
콜린이 오늘 하루 백설과 섹스할 것. 내일 정오에 백설이 준비해온 게임으로 내기를 진행할 것.
이쪽에서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건 여덟 명이고, 만약 그들이 패배할 경우에는게임의내용을 발설하지 말 것.
백설 쪽이 승리할 경우 길드의 모든 권한은 그녀에게로 넘어가며, 부점 길드 측이 승리할 경우 제후 대리는 더 이상 부점 길드에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간단명료하면서도, 꽤 불합리한 계약이었다.
일단 게임 종목을 저쪽에서 준비한다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클리어가 불가능한 게임을 가져온다면 어떻게 되죠?"
"그럴 일은 없어. 근원적 계약을 통해 규칙을 결정하려면 이론상으로는 클리어 가능한 게임이어야만 해."
콜린이 그것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을 물었더니 체셔가 답했다.
'이론상으로는 말이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쪽 조항을 감안하면 대놓고 불가능 게임을 가져오지는 않을 거야."
뒤이어 체셔가 짚어준 조항은이쪽의 거부권에 대한 내용이었다.
요컨대 백설이 가져온 게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제후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루트로 직행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예 대놓고 깰 수 없는 게임을 할 바에야 그래도 극악의 승리 가능성이라도있는 전쟁을 택하는 게 맞다.
따라서 이 조항은 '아예 못 깨는 건 안 가져올게'라는 백설의 선언인 셈이었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 '모자 장수'라는 사람이 제후 대리인 건가요?"
"그래."
그리고 콜린은 시선을 위쪽으로 옮겨가 계약자 목록을 바라보았다. 백설, 체셔, 콜린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본명이 아니더라도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는 건가.'
역시 근원적 계약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콜린이었다. 계약으로는 불가능 게임을 만들 수 없다는 것도 방금 처음으로 들었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 자를 제후 대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이쪽이 승리했을 경우 그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저쪽이 승리 보상인, 길드의 모든 권한을 넘겨준다는 부분은?"
"말 그대로야. 우리 길드에 소속된 모든 존재에 대한 권한을 가져가는 거지."
"길드 전체 노예 계약이라고 보면 되나요?"
"일단은 그렇게 봐도 무방할 거야."
콜린은 한숨을 쉬었다. 직접 계약을 맺지 않은 인물들도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페널티를 받는다는 소리였다.
'존 로크. 당신이 옳았습니다.'
콜린은 농담 삼아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묵시적 동의라니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아무튼 계약은 대충 이해했으니 상세한 계획으로 들어가보죠."
사실 오늘 계약 내용은 유심히 살펴볼 필요까지는 없었다. 콜린은 어차피 이기면 되는 거라 여기며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대충 넘겼다.
"우선 게임에 참가할 여덟 명 말인데요.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요?"
"아마 괜찮을 거라 생각해."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남은 인원은 경비대에서 우수한 순서대로 차곡차곡 넣으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저, 영주님!"
“응?”
어차피 반쯤 정해진일이었으니만큼 한나가 그렇게 끼어들었을 때는 다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저도참가하게 해주세요."
"누나?"
"자칫하면 콜린에게 큰일이 날지도 모르는데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훈련받은 병사들에 비하면 약하긴 하지만……."
그녀의 말에 체셔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8명이라는 인원이 지정된 건 이쪽을 상대하는 건 백설과 일곱 난쟁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한나의 직업은 병사가 아니라 사냥꾼이었다. 일반인에 비하면 우수한 신체를 가지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대인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영주님. 저도 한나 의견에 동의합니다."
더욱이 레니가 나서서 그녀의 주장을 지지해주었다.
체셔는 곤란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도 턱짓을 했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투였다.
레니가 단순히친구를 돕겠답시고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결코 공사를 헷갈릴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원을 정한 다음에야 게임 내용을 들을 수 있는 이상, 단순히 대인전에 뛰어난 사람만 데려가는 게 능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최대한 유연하게 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즉, 사냥꾼으로서의 능력이 필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네, 그렇습니다."
체셔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보라색 털이 복슬복슬한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충분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콜린 너는?"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이런 상황에서는 유연한 대처를 할 수 있게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가려뽑는 게 훨씬 나았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보면 백설이 이쪽 구성을 보고서 최대한 불리한 게임을 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라도 범용성은 중요하다. 한나 본인에게 의지가 있다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인원은 대충 그렇게 하는 걸로 가닥을 잡아두고… 감찰관의 권능은 어떤가요?"
거기까지 결정하고서 콜린은 화제를 돌렸다. 게임의 상세를 모르는 이상 다음으로 토의할 것이라고 해봐야그 정도였으니 말이다.
"너희도 봤던 난쟁이들을 소환하고 조종하는 것, 그리고 조건적인 유사 불사."
"불사라고 하면?"
"특정한 도구로 공격하지 않으면 어지간해선 죽지 않아. 소문에 따르면 배에 구멍이 뚫리고도 다섯 시간은 버텼다는데."
그 말을 듣고서 콜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탄식을 흘렸다. 뭐 그런 괴물이 다 있단 말인가.
'…음? 잠시만.'
그러나 문득 위화감이 들어서 콜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섯 시간은 버텼다니요?"
체셔의 표현은 뭔가 이상했다. 배에 구멍이 뚫리고 다섯 시간을 버텼다니.
그런 식으로 시간까지 지정하는 건 보통 그 다섯 시간 후에 대상이 목숨을 잃었을 때나 있는 일이지 않은가.
"다섯 시간 뒤에 완치됐다는 모양이야."
"…재생 능력까지 있는 겁니까?"
어쩐지 그 정도로 거만하다 싶었다. 어지간한 방법으론 죽지를 않으면 확실히 턱을치들고 다닐 만도 했다.
"그런데 설마 소환한 난쟁이마다 권능이 있고 하는 수준은 아니겠죠?"
"그 녀석들은 권능의 부산물이라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풍기는 느낌에서 추측해보면 아마도 아닐 거라고 봐."
그 느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길잡이로서의 감일 테니 여기서는 일단 믿는 게 나을 듯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둬야겠지만.'
의문의 능력자일곱 명이랑 싸워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딱히 이쪽이 유리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가마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목격한 콜린 입장에서는 그근력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콜린. 너는 괜찮아?"
그렇게 연이어 한숨을 내쉬고 있던 중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레니였다.
"그럴 리가요. 무슨 거지같은 게임을 내올지 불안해 미칠 지경이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밤시중 말이야……."
그제야 콜린은 그녀가 말하려는 의도를 깨달았다. 이 모든 상황은 콜린이 백설의 하룻밤 시중을 드는 대가로 주어진 것들이었다.
"제 몸을 내밀어서 되는 일이면 그게 제일 싼 방법이잖아요."
그러고 나서야 겨우 출발선에 설 수 있다면 이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콜린은 설령 자신이 이쪽 세계의 가치관에 걸맞은 남자라 해도 이렇게 했으리라 생각했다.
'자칫하면 군대가 여기를 털어버린다는데 솔직히 싫어도 해야지 뭐.'
목을 내놓으라거나 아예 평생 성노예가 되라는 소리는 안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패배의 대가를 생각해보면 어차피 나중 되면 그런 꼴이 나려나.'
저 백설에게 인생 저당을 잡힌다면 죽든 노리개가 되든 둘 중 하나이지 않겠는가.
백설도 그걸 알기에 지금 당장에는 하룻밤으로 만족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콜린… 미안해."
아무튼 레니 역시도 콜린이 몸을 바치는 게 그나마 나은 상황이라는 걸 알았기에 고개를 숙이고서 중얼거렸다.
힘차게 쥔 그녀의 주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레니는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자신이 약한 탓에 그가 범해져야만 하는데, 정작 이 상황에서 미묘한 흥분을 느끼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끔찍했다.
"레니 씨."
그런 그녀의 어깨 위로 콜린의 손이 올라왔다.
"저는 괜찮다니까요."
그 위로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콜린이었다.
원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몸을 바쳐야 하는 그였다.
어떻게 자신은 이런 상황에서 흥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건 단지 그러한 플레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레니는 다시금 자책했다.
"솔직히 저는 오늘 밤에 섹스하는 거 기대하고 있거든요."
"어…?"
그런 그녀였기에 콜린이 귓속말을 해왔을 때엔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코, 콜린. 갑자기 무슨……."
"분명히 전에 말했잖아요? 누나랑 계속 섹스를 하다 보니 빠져버렸다고… 그런데 솔직히 저번에 레니 씨랑 할 때는 그다지 만족을 못했거든요."
달콤하면서도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가 계속 레니의 귓가에서 울려퍼졌다.
"덕분에 엄청 욕구불만이에요. 그래서 감찰관이 그런 제안을 했을 때에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아세요?"
"……."
콜린은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를 듣고 히죽 웃었다.
물론 레니의 몸이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레니는 결코 풍만하다고 할 수 있는 몸은 아니었지만 이른바 쫙 빠진 모델 체형이었다. 그녀가 알몸으로 서있기만 해도 구경하면서 한 발 정도는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콜린이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은 오로지 그녀를 부추기기 위해서였다.
레니의 고통스러운 표정만으로도 콜린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야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NTR이취향이라고 해도 연인에게 부탁해서 그런 플레이를 하는 것과, 연인이 강간을 당한다는데 거기에 흥분하고 있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레니의 정신이 먼저 망가질지도 몰랐다.
그녀의 멘탈을 위해서라도 콜린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걸 보여서 최소한 '그런 플레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순화할 필요가 있었다.
"레니 씨, 상상해보세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여덟 명을 상대하면 정말 밤새도록 범해질 걸요."
"……."
"몇 번이고 가버려서… 이제는 가버리고 싶지 않다고 애원해도 전혀 봐주지 않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속삭이다가 콜린은 조심스레 그녀의 사타구니로 손을 뻗었다.
"저기요, 레니 씨. 상상만으로 벌써 젖어버리신 건가요?"
일부러 살짝 비웃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콜린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면서 끈적한 액체가손가락 사이에 늘어지는 모습을 은근슬쩍 레니에게 보여주었다.
"영주님.그럼 일단 돌아가볼게요. 밤에 감찰관이 있는 방으로 가면 되죠?"
"어?응, 그래……."
그리고는 빙그르 돌아 체셔에게 돌아가겠다며 인사를 남기는 콜린이었다.
콜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체셔는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답해주었다.
'…생각해보니 영주님도 이쪽 세계의 남자였지.'
고양이라서 성별에 대해 신경 쓰지를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그에게는 조금 과격한 장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콜린은 그렇게 반성하는 것이었다.
"아, 잠깐! 콜린, 같이 가!"
그리고 방을 떠나가는 그의 뒤를 멍하게 서있던 한나가 급히 따라왔다.
"──설마 레니가 그런 취향이었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한나는 한숨을 쉬고서 그렇게 말해왔다.
조금 전 응접실에서 잠시 멍하게 있었던 이유는 아마 레니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진짜 이러다 동네 사람들 죄다 알아버리는 거 아닌가 몰라.'
마치에 이어 한나까지 레니의 성벽에 대한 걸 알아채고야 말았다.
본래는 콜린의 말을 결코 소문내지 않을 시안 정도에게만 넌지시 알려주고 플레이에 협력을 받으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그러면… 걔는 실신할 때까지 하지는 않겠네."
"응?"
"걔 몸으로 만족 못했다고 하는 게 더 흥분하는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콜린이 그때 레니에게 딱 한 번 사정하고 행위를 마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으니 말이다.
"흐익?!"
"맞는 말인 거랑 별개로 그 표정은 좀 괘씸한데."
콜린이 한나의 옆에 붙어서 그녀의 허벅지를 살짝 쓸어올리자 몸을 흠칫 떨었다.
조금 전 그녀는 차라리 부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욕이 왕성하던 한나마저 지쳐서 쉬게 해달라고 할 정도로 마구 해대던 콜린이었다.
분명 기분이 좋은데 그러면서도 의식이 껌뻑이는 그 감각은 상상만 해도 섬뜩했다. 한나는 슬슬 복상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자, 잠깐만. 오늘은 진짜 안 돼. 어제 밤새 해서 얼얼하단 말이야……."
그렇게 한참을 애원하고 나서야 한나는 콜린의 마수를 떨쳐낼수 있었다.
물론 콜린이 그녀를 가엽게 생각한 탓만은 아니었다.
"뭐, 하긴 오늘은 밤에 혼내줄 녀석도 있으니 체력을 온존해둘까."
'…내일 게임 시작할 때는 백설공주와 여섯 난쟁이가 되어있는 거 아냐?"
그 말을 듣고서 한나는 정말 복상사로 한 명쯤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물론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그들은 길드를 박살내려는 적이었고, 무엇보다도 한나 자신은 덕분에 오늘 하루를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