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1 정직한 하인(1)
레니 테세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코를 가득 채운다.
그냉기에 무심코 이불을 푹 끌어당기고, 가까이 있는 온기를 끌어안는다.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뺨에 닿았다.
그러다가 레니는 소년의 머리를 잠깐 쓰다듬어 보았다.
넓은 침대에는 그녀 외에도 콜린과 한나가 누워있었다.
한동안 그 남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레니는 몸을 일으켰다.
"레니 씨…?"
"아, 미안. 깨웠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콜린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럭거린 탓에 깨워버린 것인가 싶어 레니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일찍 일어날 생각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콜린은 손을 내저었다.
카드 쟁탈전은 오늘 일출부터 일몰까지였다. 미리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그래도 딱히 시간은 상관없지 않아?"
"그건 그렇죠."
다만 기본적으로 시간이 촉박한 게임은 없었다. 대부분 한 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종목이었으니 말이다.
"인원 분배는 정확히 어떻게 하기로 했더라?"
"영주님이 '언제', 백설이 '어디서', 마치 누나가 '누가', 저희가 '어떻게'였죠."
정확히는 콜린이 유디트와 승부를 하러 가고, 레니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호위 역할을 맡기로 했다.
'무엇을'과 '왜'는 일찌감치 포기하기로 했다. 전자는 카티가, 후자는 모자 장수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건부라고는 해도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과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다.
더욱이 게임을 제안하는 것도 그들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사실상 승산이 없다.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히나 카티의 경우에는 자칫했다가 위험한 정보까지 새어나갈 수 있으므로 더욱 조심해야 했다.
"끄응… 그러면 외출 준비나 할까요?"
콜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며 그리 말했다.
"…콜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요?"
그러나 레니는 무언가 의아함이 남아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어. 모자장수가 '왜' 카드를 갖고 있는이유가 뭐지?"
어제부터 계속 생각을 해봤지만 그 의문은 풀리질 않았다.
결국 레니는 홀로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콜린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카드를 셋 뽑으라고 한다면 '누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일 것이다.
"어째서 그걸 본인이 지키지 않는 거야?"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모자 장수는 꽤나 비뚤어진 인물이었다.
의심이 많지만, 동시에 오만하다.
자신이 확신을 가진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몹시 방심하고야마는 성격이었다.
예를 들어 백설 때만 해도 어마무시한 힘을 실어줬다가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는가.
따라서 그 세 장의 카드는 그가 엄청난 신뢰를 보이고 있는 실력자들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 명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마치조차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전사, 생각을 읽는 책사, 그리고 타짜까지.
"오히려 그렇기에 '왜'를 확실히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어째서 그게 그렇게 되는데?"
하지만 여전히 레니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그건 게임 규칙에 아무런 영향도 못 주잖아."
"그래서 필요하다고 하면요?"
"무슨 소리야?"
콜린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쟁탈전이 끝나고 나면 카드를 하나씩 제시하며 룰을 정한다.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않고 차례를 넘길 수 있게 되죠."
"어… 잠깐만. 조금 헷갈리는데."
그러다가 레니는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을 연다.
"혹시 이 게임. 카드를 나중에 내는 게 엄청 유리한 건가?"
"바로 그거예요."
콜린은 싱긋 웃으며 레니와 눈을 마주쳤다.
이 게임은 카드를 나중에 내는 게 유리하다. 상대의 행동을 보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어디를'이 작은 방 하나로 결정났는데, 게임 종목으로 숨바꼭질 같은 거라도 제시한다면?"
물론 근원적 계약은 최소한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아마 어느 정도는 자동적으로 조정이 되겠지.
"그렇다고 해도 잘 생각해봐요.카드 쟁탈전과 본 게임은 계약의 측면에서 보면 한 세트라는 걸."
"음…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게 왜?"
"일반적인 기준보다 조금 더 불합리한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에요."
축구에서 어느 팀이 전반전에 1점을 앞서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팀은 후반전에 소극적으로 공을 여기저기 돌리며 시간을 끈다.
여기에 대해 치졸하다, 스포츠맨십에 어긋난다, 그런 불평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불공평한 게임이라는 평가는 내릴 수 없으리라.
그 1점은 게임 내에서 팀이 얻어낸 일종의 자원이기 때문이다.
만약 게임 외적인 모종의 수단으로 1점을 먼저 받고 시작한다면 모를까, 내부적으로 획득한 자원을 어떻게 쓰든 그건 자유로운 일이다.
비겁할지언정 공정성에어긋나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즉, 최종적으로 한쪽에 엄청 유리한 룰이 완성되더라도 어지간한 수준이면 통과가 될 거예요."
그러한 상황이기에 '왜'라는 카드는 높은 가치를 가진다.
이는 곧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차례를 넘길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측근들에게 맡겨둔 카드를 한 장 정도는 빼앗길가능성이 있어요. 하지만 '왜'를 확실히 잡고 있으면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하죠."
"…대충은 이해했어."
레니는 이제야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왜'를 확보한 모자 장수에 대응하려면 핵심 카드를 두 개는 얻어야 한다는 소리지?"
"뭐, 그렇죠."
이내 어떤 발상에 도달했는지 레니는 질문을 해왔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가장 중요한 세 장의 카드지만, 하나만 빼앗아서는 크게 효과를 낼 수가 없다.
'왜' 카드로도 커버를 하지 못하게 만들려면 적어도 두 장은 필요하다.
"그래서 마치 씨 말고도네가 핵심 카드를 가지러 가는 거구나?"
콜린의 상대는 유디트. 그녀는 '어떻게'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음…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요."
하지만 콜린은 어째선지 말을 어물거렸다.
"뭐, 딸 수 있으면 좋기야 하겠죠?"
"……?"
그의 반응은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
"오오. 오. 그래. 어서 와. 좋은 날이지?"
펑퍼짐한 옷을 차려입은 사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이 흡사 춤을 추는 것도 같았고, 때로는 그저 취객으로 보이기도 했다.
다만 사실 '사내'라는 표현보다는 '수컷'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는 도마뱀이었다. 두 다리로 걷고 두 손을 활짝 펼치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이족보행을 하는 도마뱀이었다.
도마뱀 빌. 그의 모습을바라보고 백설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모자 장수의 측근 중 한 사람으로, 전술적 안목이 뛰어난 사람… 아니, 도마뱀이라고 한다.
다만 실제로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대다가 박살이 나서 노예가 되어버린 백설 양을 위해 특별한 홍차를 준비했지!"
'이 자식 생각보다 빡치는데…….'
그리고 빌에 대한 백설의 감상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몹시도 경박하고 시끄러우며, 또 건방진 작자였던 것이다.
하다못해 미인이기라도 했으면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는데 생김새조차 도마뱀이니 그저 짜증만 날 뿐이었다.
"됐고. 얼른 게임이나 하자고."
"이거이거, 성격도 급하셔라! 그렇게나 바란다면 분부대로 하는 수밖에!"
빌은 여전히 익살스럽게 웃으며 춤을 추다가 백설을 방 안쪽으로 인도했다.
거기에는 낮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고, 테이블 중앙에는 체스판이 놓여있었다.
다만 사방에 놓인 말의 색은 넷이었고 기물도 체스와는 달랐다.
"차투라지. 해본 적은 있을까? 응? 신기하게도 이 게임은 자기가 움직일 말을 마음대로 못정하거든?"
그러면서 주사위를 꺼내어 흔드는 빌이었다. 손도 도마뱀처럼 생긴 것이 어떻게 저리 잘 다루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됐어. 룰은 알고 있으니까."
"피이, 재미없기는. 원래 이런건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게 즐거운 건데."
"그냥 계약부터 해."
백설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빌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마 표정도 목소리와 비슷하겠지만 도마뱀의 얼굴을 읽는 재주 따위, 그녀에게 없었다.
"우선 수정된 룰을 말해줄게."
그러면서 빌은 소파에 털썩 앉아선 다리를 꼬았다.
원래의 룰에 따르면 어느 한 진영이 두 개의 라자─체스의 킹에 대응된다─를 붙잡는 게 승리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1:3으로 진행이 되기에 승리 조건은 체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라자가 모두 붙잡히는 것으로 한다.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포로교환 및 반역 시스템은…….”
'더럽게 기네.'
백설은 그 설명을 한 귀로 흘렸다. 솔직히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백설은 방금 했던 말과는 다르게 이 게임의 룰을 전혀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콜린님이 그래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불필요한 지식을 굳이 머릿속에 집어넣을 이유 따위는 하등 없었다.
"흠. 그나저나 간단한 규칙을 추가해줬으면 하는데."
"응? 뭔데?"
빌의 이야기가 끝났을 즈음 백설은 입을 떼었다.
"1대 3이라면 내가 명백히 불리하지.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을 찾자면 진영 3개를 조작해야 하는 네 머리가 아프다는 정도일까."
"그래. 근데 그게 왜?"
"그 최소한의 가능성은 보장해줬으면 해."
백설은 소파에 앉은 채 몸을 살짝 암으로 기울였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지 않도록 하는 규칙을 추가해줘.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이 방을 아예 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드는 정도면 괜찮겠네."
"으음… 뭐, 좋아! 그 정도야 허락해주지!"
누군가가 들어오지도, 또 누군가가 나가지도 못하는 공간.
백설의 그 말에 빌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계약서를소환했다.
"자, 그러면 이쪽 진영부터 해서 반시계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윽고 계약의 성립을 확인한 빌이 체스판을 톡톡 두들기며 물었다.
그 순서에 따르면 백설은 두 번째 차례에 움직이게 된다. 딱히 문제가 될 부분은 없는 것 같아 그녀는 수긍했다.
"좋아. 그럼 우선 선박을 대각선으로……."
빌은 배 모양의 노란색 말을 움직였다.
또각 하는 소리가 났다. 체스판과 기물 양쪽 모두 꽤 고급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듯 했다.
"이제 그쪽 차례야."
"그래, 잠시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해보자."
"처음부터 그렇게 고민해서야 되겠어?"
빌은 히죽히죽 웃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해왔다.
"어차피 시간제한은 없잖아?"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만종이 치기 전까지 내게서 카드를 뺏을 필요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해!"
사실 그 정도면 앞으로 10시간 정도 남았을 테니 제한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 갑자기 가방은 왜 뒤적이는 거야?"
하지만 뒤이은 움직임에 빌은 의아해하며 질문했다.
생각해보면 저 커다란 가방은 들어올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뭘 찾는건 좋은데. 그럴 거면 우선 차례를 넘기고 하는 게 예의 아닐까?"
"아니, 안 넘길 건데?"
"뭐?"
그리고 백설은 가방에서 큼지막한 통을 몇 개 꺼내들었다.
"뭐, 뭐하는 거야!"
이내 그녀는 그 통을 사방 여기저기에 집어던졌다.
통은 가구들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난다.
빌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기름?"
그리고 순식간에 풍겨오는 냄새에 몸이 굳는다.
"자, 잠깐. 너 대체……."
"보면 몰라?"
어느새 백설의 손에는 성냥개비가 들려있었다.
─그것도 이미 불이 붙은 성냥이.
툭. 성냥이 바닥에 떨어지고 불이 기름을 타고 화르륵 번진다.
"게임 끝날 때까지 방에서 못 나가는 거 맞지?"
백설은 충격에 빠진 빌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계약을 맺었던 규칙 중에는 게임을 속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기권으로 처리한다는 조항도 있었던가?"
예를 들어서 죽어버린다거나. 백설은 히죽거리며 덧붙였다.
타닥. 불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가며 세련된 목재 책장에까지 옮겨붙었다.
이제 빌의 표정은 잔뜩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아,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참고로 말해줄게. 나는 불로는 죽지 않는 몸이야."
이런 상황 속에서도 백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파에 몸을 파묻을 뿐이었다.
"어때? 기권할래?"
×
마치 헤어는 숨을 들이키고서 눈앞에 서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곰을 떠올리게하는 덩치. 희지만 탁한 색의 털.
툭튀어나온 주둥이 너머로 드러난 날카로운 이빨은 백토(白兎)라는 이름을 농담처럼 여기게 했다.
실제로도, 그 이름은 장난이 가득한 농담이었다.
저 자리에 서있는 그것은 문자 그대로 맹수나 다름없는 괴물이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귀가 길고 털이 희다는 점만 빼면 토끼와 비슷한 점이 전혀 없었다.
"반역자. 참으로 당당하게도 돌아왔군."
그것이 으르렁대며 마치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여왕님을 공격한 쪽은모자 장수였는데요."
"헛소리! 그가 그런 비열한 행위를 저질렀을 리가 없다!"
'…역시 말이 안 통하네요.'
마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전에 그녀가봐왔던 백토라는 존재는 '근육뇌'의 정형적인 표본이었다.
그리고 그 성격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뭐, 좋다! 어찌 되었건 내게 너를 벌할 기회가 찾아왔으니!"
백토는 입을 쩌억 벌렸다. 그 주둥이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당당히 싸워 반역자를 찢어버리고 여왕의 복수를 이룩하리라!"
"아… 진짜 하는 거예요?"
마치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말로 어떻게든 구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아주아주 조금 정도는 품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이래서야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치는 등에 지고 있던 백색의 창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한 번 휘두르자 그것은 단창에서 기병창─랜스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건 또 뭐냐?"
"동료에게 빌린 물건이에요."
뭐, 동료라고 하기에 리온은 아직 조금 거리감이 있긴 하지만 같은 배에 탄 입장이니 비슷할 것이다.
"오냐! 무슨 무기를 쓰든 네년 따위는 단숨에 박살을 내주마!"
귀를 찢는 듯한 그 고함소리에 미간을 찌푸리고서, 마치는 자세를 낮추었다.
두 존재의 생사여탈전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공터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