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4 정직한 하인(4)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저녁때를 알리는 만종(晩鐘). 그 소리를 들으며 콜린은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자, 이걸로 전초전은 완전히끝이네요."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방 안쪽으로 옮겼다.
그의시야에는 일곱 존재가 비치고 있었다.
다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 여섯 사람뿐이었다.
침대에 널브러진한나는 오죽 피곤했는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콜린은 그녀를 무시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안 좋은 소식부터. 제 담당은 실패했어요."
그리 내뱉자 누군가가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어쩌면좋습니까?"
뒤이어 리온이 걱정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번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카드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의 세 장.
그 중에서 둘을 가져오기로 했던 계획이 아니었던가?
지금 상황은 대전제부터 무너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그녀의 당황에 체셔는 덤덤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콜린에게로 시선을 돌려 묻는다.
"체크메이트는 아니지?"
"굳이 말하자면 포크였어요."
이번 패배가 치명적이었냐는 그의 물음에 콜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덧붙였다. 어차피 패배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고,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내었다고.
"흐아암… 뭐, 좋아요. 콜린이 그렇다고 한다면야 당장에 문제될 건 없겠죠."
"그러면나머지 사람들은?"
"전원 성공이에요."
마치는 그럭저럭 납득했다는 듯이 하품을 했고, 이어서 시안이 질문했다.
"시안. 영주님도 있는데 술을 마시고 회의에참석하는 건 어떨까 싶다만."
그리고 레니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지적했다.
그녀의 얼굴은 살짝 붉었고 가볍게 술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에이, 선배님. 제가 뭐 마시고 싶어서 마신 줄 아십니까."
시안은 킥킥 웃다가 콧노래까지 불렀다.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취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맛이 갈 정도로는 안 마셨습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거리에서 진창 마시고 난동까지 부렸다고 들었는데?"
레니는 한숨을 쉬었다.
좀 과하게 능글맞은 부하 녀석이긴 해도 이 정도로 개념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조금이르지만 오늘은 방에 돌아가서 푹 자라."
"진짜로 그리 안 취했는데……."
"돌아가."
"예이, 분부대로 합죠……."
이내 시안은 휘청휘청 방을 떠났다. 발걸음이 비틀거릴 때마다 그녀의 은발이 흔들렸다.
"어… 리온 씨. 같이 가주시겠어요? 시안 씨와같은방이었죠?"
"하긴. 적진에서 취객을 혼자 내버려두는 것도 좋은선택은 아니겠지."
그 모습에 콜린이 부탁하자 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안을 따라갔다.
차라리 암살을 당하는 정도면 다행이다.
상대 쪽에는 조건부로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카티가 있으니 경계는 중요한 법이었다.
"후우… 죄송합니다.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두 사람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레니는 이마를 짚으며 시안 대신 사과했다.
'술버릇이라는 게 바뀌기도 하던가?'
분명 이전에 함께 마셨을 때는 그냥 얌전히 곯아떨어지던 여자였는데말이다.
"아무튼 회의를 계속……."
이내 잡생각을 떨쳐내고 입을 연 레니였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고서 다시 이야기를 멈춘다.
남아있는 건 콜린, 체셔, 마치, 백설, 레니의 다섯 명.
'어라…? 이거 회의 필요한가?'
콜린과 체셔, 마치 세 사람은 어차피 잠시 뒤 모자 장수와 담판을 지으러 가야 했다.
당연히 서로 어느 정도는 이야기가 되어 있을 터였다.
레니는 눈알을 굴려 백설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어차피 콜린이 시키는대로 할 게 뻔하지 않은가.
더욱이 레니는 스스로의 지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괜히 나서지 말고 명령만 제대로 따르면 되는 거 아냐?'
여러 경험을 통해 레니는 머리 좋은 사람 조언만 잘 따라도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 괜히 자신이 세세한 전략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하라는 것만 하면 될 텐데.
"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이마에 콜린의 딱밤이직격했다.
물론 통증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심코 침음성을 흘리고 마는 레니였다.
"그렇다고 생각을 포기해버리면 안 돼요."
그는 오히려 자기 손가락이 아픈지 손을 탈탈 털면서 레니를 바라본다.
"그래도……."
"레니 씨의 존재가치는 무력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콜린의목소리에는 가벼운 책망이 깃들어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키는 대로 수행하는 사람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기 스스로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것도 중요해요."
자기 주관을 완전히 포기하고 명령만 따르는 체스말은 백설 하나면 족하다.
아니, 하다못해 그 백설조차도 약간 정도는 자기 의견을 낼 수 있다.
콜린은 완벽하지 않다. 결코 모든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니 부족한 부분은 다른 사람이 메꿔줄필요가 있다.
이번만 해도 '마치가 백토에게 승리를 거둔다'라는 불확실한 요소를 동료에게 맡기고서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가.
"저를 믿어주는 건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저도 가끔은 틀릴 수 있으니까, 그때는 곁에서 지적해줘야 해요."
"…알았어."
그제야 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문제겠지만, 그렇다고 자기 의견을 전혀 내지 못하게 되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보죠. 시간 때문에 너무 자세히는 말하기 힘들겠지만."
×
"…할멈, 정말 이게 맞는 건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서 사내는 말했다.
고개를 훅 젖혀놓아서 모자가 흘러내릴 법도 했으나, 어째서인지 기묘할 정도로 정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는 그리 고민할 것도 없었다.
테이블 저 편에 놓여있는 세 개의 의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났지 뭐냐."
그의 뒤쪽에 선 노파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최근에 있었던 아라크네 길드와의 전투에서 잠시 나왔던녀석이야. 아마도 저쪽의 참모겠지."
콜린이라는 소년은 단순히 마치의 애첩으로서 수도까지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가 바로 '검은 책을 갖고 있던 소년'이라는 것을, 카티는 유디트의 보고를 듣고 나서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뭐, 희미하게 풍기는 색기 빼고는 어쩐지 분위기가 옅은 느낌이었으니 기억하지 못하던 것도 이상하진 않나."
카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명히 콜린은 미형이었다. 게다가 은은하게 감춰진 색기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눈에 띄는 인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그냥 본인이 그런 존재거나. 아니면 내가 열람하기 힘들 정도로 고대의 권능을 갖고 있거나.'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후자라면어째서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냈겠는가.
"흠… 뭐, 별 거 아닐 테지."
"방심은 금물이다. 하타."
"하, 최선을 다해 털어먹어줄 테니 안심하라고 할멈."
모자 장수는 허공에 대고 보이지 않는 소년을 비웃었다.
그를 상대해본 유디트에 따르면, 머리를 굴릴 줄은 알지만 참모로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모양이었다.
그런 녀석을 참모로서 기용해야 한다니 부점 길드도 아주 궁한 모양이군. 그는 킥킥 웃으며 생각했다.
부점 길드가 백설의 게임을 돌파했던 존재라는 건 이미 그의 안중에 없었다.
모자 장수의 머릿속에서 백설의 존재는 믿어선 안 되었던 무능한 여자라는 딱지가 붙은 지 오래였다.
끼익. 잠시 시간이 흐르자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은 세 사람. 체셔와 마치, 그리고 콜린.
앞서 들어온 두 사람은 의자의 개수를 보더니 흘끗 콜린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체셔와 마치 둘만을 위한 의자가 존재했던 이전에 비해 하나 늘어있는 의자.
그것은 모자 장수가 참모로서의콜린을 인식했다는 의미였다.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어서 앉지 그래?"
모자 장수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세 사람에게 친절의 말을건네었다.
그러나 결코 호의는 아니다.
어쭙잖게 참모의 존재를숨기려고 했던 그들을 간파했음을 알려주고, 또 비웃어주기 위해서였을 뿐.
탁. 가장 뒤에 있던 소년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이전에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콜린이라고 합니다."
숨어있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는 언질을 받고서콜린은 이전에도 열지 않았던 입을 그제야 열었다.
이번에는 참가자의 일원으로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의 역할은 참모고, 조언자였다.
당연히 체셔가 중앙에,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이 좌우로 보좌하듯 앉는 형태가 된다.
"자, 그러면 바로 본론에 들어갈까? 우선 카드를 꺼내도록."
"여기 있습니다."
모자 장수의 말에 체셔는 품속에서 세 장의 카드를 꺼내었다.
─When, Where, Who.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올리더니 모자 장수는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이어서 그안에 손을 넣고 잠시 휘젓는가 싶더니 세 장의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What, How, Why.
우연히도 서로 세 장씩을 나눠갖게 된 형국이었다.
"어디 시작해보지. 어떤 것부터 제안할까 생각은 해둔 건가?"
"'어디서'. 이것부터 하도록 하지요."
체셔는 잠시 숨을 들이키고서 당당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저희가 제안하는 장소는 현실의 수도와 완전히 동일하게 구성된 아공간입니다."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이전에 백설의 게임에서 사용된 아공간.
그녀는 그것을 '제후님에게서 빌려온 권능'이라고 말했다.
그게 정말로 제후 본인의 권능인지, 아니면 제후 대리의 권능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자라고 해도 백설의 게임에 적용했던 이상 제후 대리가 어느 정도 이용할 수 있는 상태라는 건 확실했다.
아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죽어도 실제로 죽지 않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누가' 카드를 부점 길드가갖고 있으니 수의 폭력을 실현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인해전술을 정말로 효율적으로 쓰려면 다수파가 목숨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설령 네 명이 죽어도 한 명만 죽이면 승리할 수 있는 상황.
부점 길드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었고, 이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선 죽어도 괜찮은 환경이 구성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도는 모자 장수 역시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다음은 나로군. 카드는 '왜'. 흠… 제후관의 진정한 주인을 가리기 위해서라고 해두지."
이어서 모자 장수가 내민 카드는 Why.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카드였다.
그 모습에 마치가 쯧 하고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차례를 넘긴다.
중요한 걸 늦게 결정할수록 유리한 조건이었기에 그것만큼 상대하기 짜증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럼… '언제'. 내일 해가 저물기 시작하여 만종이 울린 순간으로부터 한 시간."
결국 체셔는 한숨을 쉬며 또 하나의 카드를 테이블 중앙으로 들이밀었다.
모자 장수가 '무엇을'이라는카드를 갖고 있는 이상,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선택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모처럼 카드가 있는데도 제대로 쓸 수 없는 그들의 모습에모자 장수는 얼굴 가득 조소를 머금었다.
저쪽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불공정한 조건이라는 건 알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나 불공평한 게임이라고 생각하곤 있을까?
"게임 종목은… 그렇지, 술래잡기가 좋겠어."
킥킥 웃으며 모자 장수는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외통수가 나올 상황이 많다는 걸, 그들이 과연 알고는 있을까.
특히나 지금의 상황은 그들로선 몹시 곤란할 것이다.
핵심 카드를 셋 뽑으라고 한다면 물론 '누가', '무엇을', '어떻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카드는 물론 게임 종목을 정할 수 있는 '무엇을'이다.
이 카드를 빼앗지 못한 상태로 서로가 가진 카드가 동률인 상황.
부점 길드 입장에서 이만큼이나 절망적인 결과가 또 있을까?
"술래잡기… 입니까?"
"물론 술래는 이쪽이. '잡힌다'의 정의는 생명의 정지로."
그나마 다행인 건 장소가 수도 전체라는조건이 달려있다는 점이었다. 수도는 꽤 넓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을 상대로 한 시간 동안이나 추격전을?
그야말로 끔찍한 수준의 난이도일 게 틀림없었다.
당장이라도 불평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체셔는 근원적 계약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곧 세계가 이 게임을 공정하다고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말하자면, 지금 상황이 아니꼬우면애초에 카드를 빼앗는 데 성공하거나, 술래잡기에 불리한 조건을 내세우면 안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번 선언이 모자 장수에게 유리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상대의 마지막 카드인 '누가'의 내용을 사실상 그가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부점 길드가 조금이라도 더 유리함을 얻어내려면 5:1 상황이라도 만드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내 체셔 캣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주머니에서 메모를 하나 꺼내들었다.
대체 무엇이 적혀있는지 모자 장수는 한순간 의문을 품었지만, 추측을 내리기도전에 체셔는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후우… 그럼 마지막이군요. 저희 쪽에서는 여기 세 사람과 백설, 그리고 레니 테세오를. 또한 그쪽에서는 제후 대리 당신 혼자 참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누가 참가하면 좋을지 부점 길드 내부에서 회의한 결과가 적혀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찢지만 않았어도 시간을 멈추고 몰래 확인해봤을 테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저들이 자신의 권능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
모자 장수는 속으로 킥킥 웃으며 이번 일은 그냥 신경쓰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
"이제 '어떻게'인가. 이건 아주 간단하게 결정하도록 하지."
어차피 괜한 실수만 하지 않으면 그의 승리는이미 결정된 것이나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체셔 캣의 권능 및 은신 아이템의 사용을 금한다."
"…이거 높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그 말에 체셔는 쓴웃음을 지었다.
매번 게임을 할 때마다 제약이 걸리고야 마는 자신의 권능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체셔는 곁에 앉아있는소년과 별궁을 나오기 전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만약에 모자 장수와 대화를 하다가 큰일이 났다는 생각이 들면 이걸 봐주세요.'
'읽고 나서 내용을 안 들키게 갈기갈기 찢어서 다시 주머니에 넣고요.'
'이게 뭐냐고요? 음… 앞으로의 일이걱정될 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주문이라고 해둘게요.'
마음을 안정시키는 주문. 콜린은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걱정이 사라지고 마는 내용이었다.
[왜: 정의를 위하여.
무엇을: 사냥.
어떻게: 은신 금지.]
대체 어디부터가 계획이었던 거지? 체셔는 무심코 그렇게 경악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힐끔. 눈동자를 굴려 옆에 앉아있던 콜린을 바라본다.
"음… 이러면 회의 끝인가요?"
하지만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